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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송순섭 명창 고희 기념 문집 [운산 송순섭 평전](전남 광주:사단법인 남도문화예술진흥회, 2005년) 353~359쪽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송순섭 명창과 적벽가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판소리 발생기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오랫동안 주로 남자 명창들이 판소리 문화를 주도했다. 그리고 적벽가를 할 줄 알아야 왈 명창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원로들은 말한다.
소리로 그려내는 전쟁 광경, 판소리 적벽가! 수천억원, 수만명이 투입된 블록버스터 전쟁 영화의 재미와 강렬함을 능가하는 명창의 소리와 발림, 고수의 북반주와 추임새, 그리고 귀명창들의 열기와 추임새가 뿜어내는 적벽가 공연 현장의 호소력은 판소리의 진수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남자 명창이 드물다. 전성기에 비해 판소리가 많이 쇠퇴하였다. 요즘은 남녀를 불문하고 적벽가를 부르는 명창을 구경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런 점에서 송순섭 명창의 존재는 그야말로 황금 덩어리 같다고 할 수 있다. 요즘 보기 드문 남자 명창이며 그의 특기는 다름 아닌 바로 가장 난해하다는 적벽가이다.
송순섭은 타고난 목은 좀 궂었지만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과 엄청난 독공 노력, 무대에서 빛나는 당당한 체격을 갖췄다. 그리고 선후배와 동료들에게 인정 있고 의리 있고 비리 없고 언행이 깨끗한 명창이다. 성품도 화통하고 항상 미소 짓는 낙천적인 성격이다.
송순섭은 여러종의 적벽가 음반(4종) 취입, 공연 실황, 방송 녹음을 기록용으로 남겼고 사설까지 정리하여 [東便制 판소리 唱本](서울:한샘, 1991년)을 펴내기도 했다.
송순섭 명창의 적벽가는 박봉술 문하에서 전수받은 동편제 판소리이다. 이 박봉술제 적벽가의 계보는 송흥록→송광록→송우룡→송만갑→박봉술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기본 골격의 계보는 그렇지만 박봉술은 어려서 부친 박만조, 형 박봉래와 박봉채의 가르침과 영향도 많이 받았다.
송순섭은 고제 판소리를 구사하는, 요즘은 극히 보기 드문 명창이다. 아마 요즘 신식소리에 익숙한 청중이 이 명창의 소리를 듣는다면 무척 낯설어 할 것이다.
그런데 적벽가는 잔기교가 통하지 않는 소리이기 때문에 진중하면서도 담백한 고제 소리가 몸에 익어서 큰기둥만 세워 가지고 소리를 끌고 나갈 줄 아는 명창이라야 제대로 깊은 맛을 낼 수가 있다. 이런 점에서 고제 명창 송순섭 만큼 적벽가를 참으로 듣기 좋고 절로 추임새가 나오게 잘 부르는 이를 지금은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판소리에서 비상한 재주와 즉흥적인 멋이 철철 넘쳐나는 송순섭의 스승 박봉술. 그런데 그는 비유를 하자면 외다리로 축구를 했다고 해야 할까, 손을 온전히 쓸 수 없어 발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해야 할까. 그런 시련이 박봉술을 개인적으로는 암울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린 그런 기가 막힌 소리 공력을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암튼 성악가로서는 불구의 목성음을 가지고 소리를 했다고 봐야 하는 박봉술. 그리고 그 소리를 이어받은 송순섭 또한 목이 썩 좋은 편이 아닌데 이 스승과 제자, 두사람은 공히 초인적인 강력한 독공으로 소리를 단단하게 연마하였고 이런 연유로 해서 송순섭이 구사하는 박봉술제는 그야말로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송순섭만이 해낼 수 있는 매우 독특한 맛을 낸다.
송순섭의 스승 박봉술이 송만갑의 동편제를 했다고 하지만 아주 이른 나이에 불행이 닥쳐 꺾인목이라는 불우한 여건을 각고의 노력 끝에 기적적으로 극복하며 자기 나름대로의 소리를 구축했다. 때문에 물론 학습 초기에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있으나 그보다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공들여 눈물 흘려가며 홀로 터득한 박봉술제, 그건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거의 전부가 박봉술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 소리는 사실 박봉술 자신이 아니면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아마 성악으로는 천하를 가장 크게 진동시킨 송만갑도 박봉술처럼 해보라면 할 수가 없을 것이요 일부러 목을 그렇게 부러뜨리고 나서 해보라고 해도 그 맛을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주 기이한 소리제를 배운 송순섭 마저도 소리를 중하성으로 내리깔고 불굴의 의지로 그 소리제를 수 십년간 갈고 닦아 나름대로 거기에다 또다른 면을 더 가미했으니 그 곰삭은 맛이 오죽하겠는가.
우직하고 고지식하다고 해야 할까, 송순섭은 꾀를 거의 부리지 않고 잘되든 못되든 간에 일관되게 큰길, 바른길, 기품있고 장중한 쪽으로 소리를 하려고 애쓰는 면모가 아주 역력하게 나타난다. 그런 그의 개성은 특히 적벽가에서 매우 좋은 쪽으로 작용하여 정신이 번쩍 날 만큼 진정 적벽가다운 꿋꿋하고 씩씩한 기상을 효과적으로 잘 드러낸다.
송순섭(宋順燮:본명, 호:雲山)은 1936년 음력 10월 20일(호적상 1939년 2월 3일) 전남 고흥군 점암면 신안리 532번지에서 농업을 하던 아버지 송응주, 어머니 정채순 사이의 남매 중 첫째(아들)로 태어났다.
송순섭의 조상이나 후손 중에서 국악을 한 이가 전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송순섭은 세습 국악인들이 사용하는 변말(은어)을 처음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나중에 한참이 지나서야 그런 사람들과 오랜시간 많이 어울리게 되면서 그 변말을 알아듣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송순섭은 어려서 동네 선배, 친구들과 함께 고흥의 무명소리꾼 김종술한테 취미로 단가, 춘향가, 흥보가 토막소리를 배웠다.
그후 송순섭은 1957년부터 1년간 전남 광주에서 공대일에게 단가 <장부가>, <천생아재>, 춘향가 중 <이별가>, 흥보가 초입을 조금 익혔다. 송순섭은 이 가운데 <장부가>는 지금도 즐겨 부르고 있으며 그 외의 소리는 거의 대부분 잊어버렸다.
송순섭은 1958년부터 약 2년간 광주, 목포, 해남 대흥사에서 김준섭에게 심청가 초입, 수궁가 초입을 배웠고 이때 단가는 배우지 않았다. 당시 송순섭은 대흥사에서 명고수 김명환을 목격하였다.
그런데 송순섭이 공대일 문하에서 소리를 학습할 당시 광주공원에서 살던 전행화(작고)라는 이가 박봉술을 독선생으로 모시고 적벽가를 배우고 있었는데 공대일이 그 학습 현장을 늘 왕래하며 박봉술의 소리가 대단하다면서 늘 감탄하고 그 소리를 조금씩 따가지고 와서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송순섭은 박봉술이 얼마나 소리를 잘하길래 공대일이 그렇게 늘 칭찬을 할까 궁금해 하던 차에 우연히 1962년경에 박봉술 흥보가 음반(신세기레코드 제작 10인치 LP)을 듣게 되었고 과연 대명창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제서야 공대일의 감탄이 이해가 되었다 한다.
그리하여 송순섭은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1963년 부산에 박봉술 명창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곧장 거기로 달려가서 그로부터 아주 오랫동안 단가 <사창화류>(엇중모리), <진국명산>, <적벽부>,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 세바탕을 완창으로 배웠다.
송순섭 왈, 박봉술은 목이 탁한데도 각고의 노력으로 득음을 해서 목이 꺾여 불가능한 고음도 공력으로 극복한 점이 경이로우며 그 공력 만큼은 박봉술을 따를 이가 없고 사설 발음이 매우 정확하다고 한다.
송순섭이 박봉술을 존경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박봉술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설에 오자가 있다면 얼마든지 고쳐서 불러도 괜찮다고 한 점이라 한다. 그래서 송순섭은 여러 학자들을 찾아다니며 일부 잘못된 사설을 많이 수정하였다.
박봉술은 어디 좋은 소리가 있다고 하면 제자들을 그리로 보내서 소리를 배워 보라고 적극 권했다 한다. 그래서 송순섭이 박봉술에게 심청가를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정권진한테 가보라고 하면서 “거기 것도 좋으니라”고 말하였다 한다. 이런 까닭에 송순섭은 박봉술에게 심청가와 춘향가는 한대목도 배우지 못했고 이점이 지금 생각해 보면 무척 아쉽다고 한다.
예전에 안향련, 신영희가 목포로 박봉술을 소리 선생으로 모시고 가서 적벽가를 배웠는데 송순섭 왈, 신영희의 적벽가는 들어보지 못했고 언젠가 안향련의 적벽가를 들어봤는데 기가막히게 잘했다 한다.
송순섭은 1971년부터 1년간 부산에서 김연수에게 춘향가 중 <과거장>～<박석티>, 심청가 중 <심봉사가 망사대에서 자탄하는 데>～<황성 올라가는 데>를 사사했고 이때 단가는 배우지 않았다. 당시 송순섭은 춘향가 중 <허봉사가 옥중 춘향 점치는 데>를 김연수 외에 다른 명창한테는 배울 수 없었기에 이 소리를 열심히 배웠다.
송순섭은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박봉술제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이다. 송순섭은 기악이나 춤은 배운 바가 없다.
송순섭은 현재 고수 가운데 자신의 소리와 가장 잘 맞는 이로 박근영을 꼽고 있으며 현재 송순섭의 공연, 방송, 음반 취입시 거의 대부분을 박근영이 북반주를 담당하고 있다. 송순섭은 과거에 자신이 남긴 판소리 녹음은 지금 들어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송순섭 명창은 박봉술제 적벽가뿐 아니라 박봉술제 수궁가와 흥보가에도 능하며 앞으로 박봉술의 춘향가, 심청가 녹음도 듣고 공부하여 복원 발표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전통은 마치 다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21세기 지금 이 순간에도 송순섭과 같은 명창의 기가 막힌 소리가 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 또 그런 멋있는 소리를 하는 명창과 같은 땅을 밟고 함께 산소를 호흡하고 있다는 것이 기쁘고 자랑스럽다. 이것이 축복이 아니고 또 무엇이랴.
2005년 고희를 맞은 송순섭 명창이 항상 건강하고 늘 쾌청한 소리 윤기 유지하기를 두손 모아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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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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