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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월간 미르 2005년 10월호 통권 190호](서울:국립극장) 24~25쪽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차세대 판소리계 기둥 왕기석 명창
25년 공력 쌓은 수궁가 완창 발표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20세기 판소리의 마지막 황금기로 평가되는 1970년대는 1979년 국창 박록주의 타계와 함께 저물었다.
1981년 천재 안향련 명창 요절, 그리고 연이어 판소리 원로 대가들이 세상을 떠났다. 1983년 김여란과 박초월, 1986년 정권진, 1989년에는 박봉술 명창과 김명환 명고수가 작고했다.
1980년대 판소리 유파 발표회, 국립극장 완창 판소리 공연장 등에서 만날 수 있었던 초기 인간문화재들은 무대를 거의 다 떠났다. 엊그제 일 같은데 이제 김여란, 박봉술, 정권진 같은 이름도 전설처럼 회고된다.
그 엄청난 내공의 초기 인간문화재 명창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기 시작할 무렵 판소리에 매료되어 득음하겠노라고 도전장을 내민 젊은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왕기석이다. 소리판이 점차 허허벌판 같이 황량해져 가던 1980년 왕기석은 판소리에 입문하였다.
판소리는 본디 발생기부터 남자 명창 주도의 예술이었으나 일제시대를 기점으로 여자 명창은 폭증하고 남자 명창은 급감하였다. 20세기 중반부터 특히 가속화된 그러한 현상은 1970년대 이후 더욱 심화되어 남자 명창 씨가 말라 버렸고 이런 상황에서 왕기석의 출현은 그야말로 반가운 단비와 같았다.
소리 좀 해보지 않겠냐고 아무리 꼬셔도 소리해 보겠다는 젊은 남자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마당에, 그냥 남자 두 글자만 대해도 감지덕지인 판에 목 좋고 인물 좋고 재주까지 있는 청년이 자작 소리를 너무 하고 싶다며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었다. 당시 후계자가 없어 적적하던 원로 명창들이나 파릇파릇하고 혈기 왕성한 소리에 목말라 있던 귀명창들의 기쁨과 설레임은 실로 대단했다.
왕기석은 1963년 음력 12월 17일 전라북도 정읍군 옹동면 산성리에서 부친 왕옥동과 모친 김쌍례 사이의 6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왕기석의 부친은 목이 좋았고 평소 책 읽는 소리 ‘송서’에 능했고 동네 초상이 나면 도맡아 상여소리를 부를 만큼 소리에 뛰어났으며 왕기석의 형제들 역시 모두 목구성이 좋다.
특히 왕기석의 형 왕기창은 박록주와 박초월에게 판소리를 배운 명창이고 왕기석 바로 위의 형 왕기철은 김소희, 조상현, 한농선 문하에서 판소리를 익히고 박귀희한테 가야금병창을 사사했다. 왕기석의 음악 재능과 국악과의 각별한 인연은 이같은 집안 내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왕기석은 1980년 국립창극단 연수단원으로 입단했고 1983년에 정단원이 된 후 지금까지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왕기석은 바로 이 창극단에 소속되어 활동하면서 아주 값진 인연들을 갖게 되었고 당대 최고 판소리 대가들의 소리와 발림 지도를 받을 수 있었으며 창극 경험도 충분히 쌓을 수 있었다.
왕기석은 1980년부터 남해성 문하에서 단가 <백대영웅>, 박초월제 수궁가, 조상현제 심청가를 사사했고 지금도 이 학습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10여년간 국립창극단에서 마련한 특별 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왕기석은 창극단 단원들과 함께 정권진에게 심청가, 박봉술한테 적벽가, 정광수에게 수궁가, 성우향한테 춘향가와 심청가, 오정숙에게 흥보가를 배울 수 있었다.
이는 현대 판소리계의 가장 초특급 호화 강습으로 회고되고 있으며 또한 왕기석은 이러한 특별 학습 외에도 국립창극단 단체 활동시 자연스레 접한 강종철 명창에게 공연 분장실과 연습실에서 단가 <백발가>를 익혔다. 그리고 창극 공연시 김소희한테 춘향가와 창극 지도를 받았다.
왕기석이 창극단 퇴근 후 박봉술, 박후성, 강종철과 같은 대가들을 모시고 저녁식사를 하며 흡수한 판소리론, 구전심수로 터득한 예인관 역시 보배로운 경험이었다. 왕기석은 가난했지만 이처럼 동시대를 살았던 대다수 같은 또래 소리꾼들에 비해 퍽 좋은 환경 속에서 판소리를 학습할 수 있었다.
그가 제2의 조상현으로까지 일컬어지며 급부상하게 된 것은 1994년 ‘국악의 해’로 기억된다. 왕기창, 왕기철, 왕기석은 앞세대인 박봉래, 박봉채, 박봉술 명창 이후로 보기 드문 삼형제 명창 탄생이라 하여 일찍이 국악계의 큰 화제가 되었다. 1994년에는 왕기석이 수궁가를 완창하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고 왕기석은 그간 창극계의 주역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런 그가 이번달 10월 29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수궁가 완창을 한다. 마흔살 전에 판소리 다섯바탕을 완창 해보겠노라고 결심했던 왕기석은 어느날 한 대목을 하더라도 제대로 하는 게 값어치 있는 일 아닌가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마라톤 완주하듯 다섯바탕의 판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불렀다고 능사는 아니라는 자각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왕기석은 마흔살을 넘긴 지금 판소리 오바탕 완창이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한바탕을 하더라도 질적으로 만족스럽게 해보자는 생각에 근래엔 수궁가 공력 쌓기에 주력했다.
그리하여 그는 첫 시험대로 금년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대회에서 수궁가를 불러 당당히 명창부 장원을 수상하였고 이어 이번달에 그 수궁가를 완창하여 지난 25년간 공들인 수궁가 내공을 드러내 귀명창들의 검증을 받고자 한다.
왕기석의 수궁가 완창은 거의 10여년만에 발표되는 것으로서 이는 그가 남해성 문하에서 익힌 박초월제 소리이다. 문화재보호법상, 판소리학계의 학술적 줄긋기상으로는 박초월제 수궁가가 유성준-정광수-박초월로 이어진 계보로 분류되어 있다.
허나 박초월의 수제자 조통달, 남해성의 증언과 옛 녹음자료들을 비교하고 박초월이 임방울과 정광수한테 수궁가를 배운 바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박초월의 수궁가는 유성준-정광수·임방울-박초월로 이어진 소리라고 봐야 할 것이다. 즉, 박초월의 수궁가는 임방울과 정광수의 소리가 혼합되어 있다 하겠다.
왕기석은 이번달 수궁가 완창을 앞두고 부담스럽고 떨리고 소리를 하면 할수록 겁난다고 진솔하게 소감을 말하였다. 특히 이번에 발표하는 수궁가는 근세 판소리 역사상 가장 고음과 미성의 소유자라 할 수 있는 박초월-남해성의 소리제를 물려받은 것이라 남자로서 소화해 내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고 술회하였다.
하지만 왕기석은 배울 때 힘들었고 공연하면서도 어렵지만 섬세한 감성 표현, 사설의 뛰어난 전달력과 호소력에 매료되어 이 수궁가에 푹 빠져 부르게 된다고 한다.
특히 토끼 간을 구하러 나가는 자라에게 토끼 형상을 그려주는 <토끼화상>, 자라가 토끼 그림을 품에 품고 병든 용왕을 구하기 위해 비장한 마음을 먹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고고천변>, 자라의 감언이설에 속아 수궁에서 죽을 위기에 놓인 토끼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토끼 배 가르는 데>를 왕기석은 장단 붙임 등이 부르기가 상당히 어렵지만 스스로 좋아하고 자신의 장기이자 수궁가의 으뜸 눈대목으로 꼽는다.
반면에 짐승들이 서로 상좌 앉겠다고 다투는 <상좌 다툼> 대목은 단순한 것 같은데 더 어렵고 부르기에도 맛 없고 무척 힘이 든다고 왕기석은 말한다. 이러한 명창의 장기와 어려움을 미리 이해하고 완창 현장의 객석에 앉는다면 훨씬 재밌는 감상이 될 수 있으리라.
왕기석은 얼마전 명창으로서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그 어렵다는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대회 명창부 장원을 수상하여 마음적으로 일종의 압박감에서 해방되어 홀가분하다고 할까, 상당히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 대회를 위해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를 했고 수상 후에 목 상태 면에서나 공력 쌓은 뱃심의 위력 측면에서나 이번달 수궁가 완창은 최상의 왕기석을 만날 수 있는 무대가 될 것이다.
온갖 가난과 설움, 고난의 시간을 뛰어넘어 득음을 향해 땀 흘려 온 끈기와 정열의 사나이 왕기석에게 열렬한 추임새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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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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