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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8월 7일부터 틈틈이 여기 국악음반박물관 홈페이지
‘국악 명인실’ 게시판에 공상과학 국악 소설을 연재합니다.
소설 ‘음파 세계대전’ 제1부 <만남>
글,그림/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장)
“호오~ 쟤여? 누가 카레라이스여?”
1979년 서울 세종문화회관 관람석에 판소리 명창 정권진과 그의 제자 안향련이 앉아
오페라 공연 안내 인쇄물을 살펴보고 있다.
“예, 선생님! 이 사람이 스페인의 테너로 유명한 호세 카레라스(Jose Carreras)입니다.
“음......”
두 사람 주변의 시선이 사과처럼 싱싱하고 어여쁜 안향련에게 쏠린다.
안향련은 조상현 명창과 더불어 창극계의 명콤비로, 국악계 스타로 이미 명성이 널리 높았다.
잠시후 열광적인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제 공연이 시작되겠네요.”
“여기선 추임새 느면 안되지?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어야 되제?”
“예, 선생님!”
“허이 나참 깝깝해서 원.”
영국 로열오페라단의 '토스카'(Tosca) 오페라 공연이 막 시작되었다.
정권진은 며칠전 신문과 텔레비젼에서 호세 카레라스라는 외국의 이름난 가수가 한국에서는
처음 노래를 하게 된다는 보도를 대하고 장르는 다르지만 본인도 성악가로서 언론에서
그렇게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그 스페인 테너의 실력이 무척 궁금했다.
마치 최배달이 깊은 산중에서 무공을 무수히 연마하고 하산하여 세계 도처의 무술가들을
찾아다니며 ‘도장 깨기’를 했던 것처럼 정권진 역시 지난 수십년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쌓은
자신의 소리 내공을 외국의 유명 성악가 노래에 견주어 가늠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푸치니(Puccini, Giacomo)의 오페라 '토스카' 제1막 성안드레아 델라
봬레 성당의 내부가 드러나고 아타반티 후작 부인의 오빠인 공화파의 안젤로티가 탈옥해서
예배당 안에 숨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떤 내용인지 명창 정권진으로선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눈치 빠른 젊은 소리꾼 안향련은 그래도 대략 감은 잡히는 듯 점차 오페라의 상황에 몰입되어 간다.
얼마후 정권진이 기다리던 호세 카레라스가 무대에 등장하고 우렁찬 노래를 뿜어낸다.
정권진이 그의 성음에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을 하고 안향련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다 본다.
이따금 정권진의 안색을 살피는 안향련. 그리고 진지하게, 허나 별반 표정의 변화는 없는 정권진.
또 한국에 처음 와줬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개무량, 이 공연장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 조차
실감이 나지 않고 무아지경에 빠져버린 오페라 광팬들.
어느덧 공연이 끝나고 장내의 관객들 군기 확 들어간 군인들 마냥 일제히 질서정연하게
기립하여 감사의 인사를 하러 나온 무대 중심의 호세 카레라스를 향해 군대 사단장 대하듯
존경심과 충성심을 박수에 실어 열렬히 환호한다.
호세 카레라스는 자신을 보기 위해 찾아준 한국 관중들을 향해 교주가 광신도들 대하듯 화답한다.
그 곳에서 한국의 중요한 무형문화재 판소리 명창 정권진을 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박수 산더미 속을 헤치고 안향련 명창이 스승 정권진을 보필하여 공연장을 쓸쓸히 빠져 나온다.
“젊은 녀석이 소리 제법 내는데? 그래도 아직 구성이 없어, 좀더 곰삭아야 되겄어.”
“그런가요 선생님!”
“자네는 어땠는가?”
“재밌던데요.”
“빤짝이 옷 입고 왔다 갔다 허니깨 홀려버렸구만. 난 추임새는커녕 옴짝달싹 못허고 동태
되가지고 뻣뻣허니 앉아서 듣고 있으려니 좀이 쑤셔 가지고 혼났어 그려. 한번 더 들었다간
몸 아조 상하겄어. 오페라가 아니라 몸 패라여, 몸 패라...... 좌석 분위기가 고렇게 딱딱허니
불편허면 안보이는 망치로 몸을 패는 거여. 오페란지 몸 패란지. 저녁 때 됐네. 서삼집이나 채우러 가세.”
“예, 선생님! 진지 잡수러 가시죠. 간장게장 드시겠어요?”
“아무거나 먹지 뭐. 설렁탕이나 한그릇 하지?”
“근처에 맛있는 집 있는데 제가 간장게장 대접해 드릴께요.”
“그럴까? 매번 자네에게 신세 져서 어쩌나 이거.”
“신세는요. 선생님 잘 드시는 거 보면 제 마음이 흐뭇하고 좋습니다.”
“근데 아까 카레라이스가 초두 노래에 낸 성음은 말이야 그거보다는 으으~아~하아~ 요런
목이 더 듣기 좋잖은가?”
“예, 선생님이 지금 내신 저음 단전성이 빽빽 높게만 지르는 카레라스 소리보다 훨씬 좋습니다.”
“빠다 먹는 저그 나라 사람들한텐 그 카레라이스 성음이 더 쓸 만하겄지 뭐.”
“그래도 외국 다녀보면 스페인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하구 많이 비슷한 거 같에요. 성격이나 음식이나......”
자상하고 애교있게 스승의 팔짱을 끼고 부축하여 길을 사뿐히 걷는 안향련. 쓸쓸해 보이는 정권진.
“갑자기 봉술이 형님이 보구 싶네.”
“박 선생님 댁으로 모실까요?”
“집에 있을라나? 어디 또 막걸리 푸러 간 거 아냐?”
“그럼 간장게장은 나중에 잡수시고 지금 박봉술 선생님 댁으로 같이 가보시죠.”
택시를 잡아 뒷자리에 나란히 타고 명창 박봉술의 집으로 향하는 두 사람 말없이 자기 옆의 창밖을 각각 바라본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달한 두 사람 통닭 세 마리를 사가지고 박봉술 명창의 집으로 들어간다.
반갑게 맞이하는 박봉술, 특유의 환한 웃음으로 양 눈가에 부채 무늬 활짝 새기고 양손으로
정권진과 안향련의 손을 하나씩 꼭 붙든다.
박봉술! 인간문화재제도 시대 국창으로 꼽히는 대명창. 당대에 판소리 다섯바탕을 제대로
다 할 줄 아는 거의 유일한 명창이고 초인적으로 쌓아올린 공력과 옛날식 판소리인 ‘고제’
창법 보유 재산은 웬만한 앞세대 명창들을 능가할 정도의 대가이다.
그리고 박봉술과 정권진은 각별한 선후배 사이이고 안향련은 어려서 박봉술에게 적벽가를
배운 적이 있다.
전화가 별로 없고 휴대폰, 인터넷 메일 등이 없던 시절엔 이처럼 뜻밖의 만남, 문득 방문,
깜짝 상봉이 참으로 특별한 반가움이자 인생에 있어 아주 멋진 선물이었다.
기계가 발달되고 통신기계에 익숙해지면서 기계 없는 불편함을 서서히 갖게 됐지만
그러한 기계를 모르던, 그런 기기가 없던 시절엔 통신상의 불편함을 거의 느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통신기기가 별로 없음으로 해서 오히려 여유와 인내심을 가질 수 있었다.
또 충분히 기다린 만큼 이상의 기쁨과 반가움을 몇 배로 느낄 수 있었다.
전화가 아닌 까치가 지저귀는 소리로 손님 방문을 예측했던 시절 나름의 은은한 정감이 있었다.
약속 장소에서 보고픈 상대를 기다리는 가슴 설레이는 즐거움, 며칠간 우편물을 기다리는
여유와 흥분감은 통신 수단이 덜 발달한 시절의 훈훈한 보너스 선물이었다.
약속 장소가 엇갈려 한참 동안 못만나고 서로 연락할 길이 없어도 짜증보다는 이 역시
훗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교통 수단이 덜 발달한 시절 한없이 걷다가 우연히 만나는
지인과의 인연도 인생의 축복 가운데 하나였다.
없으면 그냥 나오지 뭐, 가족들한테라도 모처럼 통닭 좀 전하고 나오면 되지 하는
여유있는 마음을 지니고 박봉술 명창의 집을 찾은 정권진과 안향련.
마침 집에서 막걸리 생각으로 갈증과 번뇌에 시달리고 있던 박봉술의 반가움은 그야말로
사막에서 오아시스 발견한 듯했으리라.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행복감, 깜짝 방문의 흐뭇함이 어우러져
명창 박봉술의 집은 이내 무릉도원이 되고 한잔 두잔 술이 오가고 박봉술 명창은 문득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판소리 적벽가 가운데 <바람은 우루루루루루루루> 대목을 내놓는다.
곁에 있던 안향련이 “좋아요!” 감탄의 추임새를 하고 정권진이 방 한켠의 북으로 다가가
반주를 넣는다.
내공만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나 이는 국악인들, 일급 귀명창들만 으뜸으로 알아줄 뿐이고
젊어서 목 관리를 잘못하여 목이 심하게 상해 고음이 거의 나오지 않는 꺾인 목을 가지고
소리를 하는 박봉술 명창은 대다수 대중에게는 듣기 거북한 대상이었다.
해서 평생 한이 맺혀 설움을 술로 삭히고 어느새 노년을 향해 가는 자신의 신세를 적벽가의
조조와 같이 느꼈다.
판소리, 득음, 세상과의 한판 승부에서 좌절한 자신의 처지가 마치 적벽대전에서 대패하여
도망을 다니는 조조의 입장 같은 동질감을 느끼고 박봉술은 그 조조가 도망 다니는 처량한
신세 대목을 중년 이후 즐겨 불렀다.
“이번엔 자네 아직 안잊어 버렸으면 한번 히보게. 나가 자네 쬐만헐 때 적벽가 안일러 줬든가.
근디 자네 원제 요렇게 쑥쑥 커버렸등가. 쪼만헐 땐 눈알밲에는 안뵈덩만. 이젠 여러가지 것 보이네 그려.”
안향련이 스승의 분부를 듣고 적벽가 가운데 적벽대전에서 죽은 조조 군사들이 새가 되어
나타나 조조를 원망하는 <새타령>을 부른다.
동치미처럼 시원한 성음으로 새소리를 예쁘게 묘사해내고 꼿꼿하고 드세게 밀고 나가야
하는 부분의 성음들을 아주 야무지게 부른다. 그의 스승 박봉술이 흐뭇해 한다. 정권진의
북가락과 추임새가 신명이 넘친다.
그리 즐겁게 노는데 박봉술과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인 인간문화재 한승호 명창이 찾아와
합세한다.
역시 적벽가로 안부와 화답을 전하는 한승호 명창. 판소리의 상황을 설명하는 아니리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아니리만 하더라도 그 굵고 힘있는 말 붙임의 곡선들이 장거리 대포 몇방 쏜
것처럼 장중하다. 공명이 동남풍 비는 대목을 불러 방안에 바람을 확 일으키는 한승호.
정권진이 그 뒤를 이어 적벽대전을 불러 좌중에 불을 활활 일으킨다. 특유의 저음 단전 통성으로
방바닥을 울리는 정권진.
안향련은 마치 피자 먹고 김치로 입가심 하듯 아까 호세 카레라스의 노래를 들은 귀를
정권진의 소리로 다시 조율하는 듯 역시 이 맛이야 하는 표정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소리가 잘 안되는데 술을 먹으면 먹을수록 소리를 더 잘하는 안향련.
그의 두 스승, 그리고 한승호 명창과 밤새워 술 마시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목청껏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소리를 이어 부른다.
글쎄 이 정도 명창들이 모인 이 상황은 뭐랄까 천원, 오천원, 만원짜리 지폐에 새겨진
주인공들과 더불어 황진이까지 한자리에 모두 운집한 격쯤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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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8-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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