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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 사진들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자료.
* 판소리 명창 박봉술 관련 국악인 이용배 증언 내용: 국악음반박물관 hearkoreaTV
https://youtu.be/CZiqDRvcVXQ?si=anMUJUnCbPSZRr9h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카세트테입(MC) 관리번호 MIMC-1325
2002년 6월 2일 21:00~22:00 국악방송 '노재명의 명인 명창 명음반'(방송 진행·해설:국악음반박물관장 노재명) 제53회 박봉술 특집에서 방송된 박봉술 관련 이용배 회고담(2002년 5월 30일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국악방송 스튜디오에서 전화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2026.1.12 정리/국악음반박물관 인터넷 홈페이지 명인실에 발표)
판소리 명창 박봉술 관련 국악인 이용배 증언 내용
대담·채록/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원래 그, 저 박봉술, 박봉술 선생님이요 어디서부터 살았냐면은 원래 원 고향은 저 구례군 용방면 중방리가 고향이에요. 그런데 그 후로 그 순천에 내려가서 살았습니다, 순천서 금곡동에서.
그때 내(이용배, 1935년 출생)가 그 만난 때가 스물세살 땐가 (박봉술 명창을) 만났어요. 그래 가지고 인자 그때부터 그 박 선생을 알게 되았죠.
박봉술 씨는 인자 그 소리로 명창이고 또 그 적벽가로서는 송만갑씨 제자로서 그 양반밖에는 없었고. 그 당시에는 그 소리 하면 호남에서 보성에 사신 정응민 선생님도 계셨고 또 광주에서 성원목 선생이나 정광수 씨, 그 양반도 그 광주국악원에 계셨고 그랬는데 그때 당시에는 하여튼 적벽가 소리를 들을라문 그 순천에 가서 박봉술 선생한테서 소리를 들어야 된다.
아주 그 일반 그 전부 사람들이 그런 지식을 다 갖고 전부 그 선생님한테 많이 했죠. 그 양반 그 제자가 하도 많습니다. 그란데 그 양반이 딱 그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만 소리를 공부를 가르치고 그랬죠.
그때는 그 공부를 잘 많이 안했었어요. 그때는 그 적벽가 같은 것도 우리가 먼저 다 했는데 임방울 선생님한테도 했고 그 박봉술 선생님한테도 내가 한바탕을 했고 그라고 그 양반 한 52세 넘어서 그때 저 광주에 있는 그 송순섭이 그 사람도 가르치고 또 그 여자들도 그 죽은 한농선이라든지 그 양반도 가르치고 또 광주 사는 그 나이 많은 그 여류 명창들 많이 좀 몇몇을, 이금화 씨라든지 그 성산옥이라든지 그런 사람들 많이 가르쳤어요.
스물세살 때 나는 그 박봉술 선생님하고 그 나는 단체 다니면서 같이, 공부를 했어요. 단체는 그때 국극사, 돌아가신 박록주 씨가 그때는 단장인데 그 단체에 같이 다녔어요. 그 단체 생활도 나는, 한 안새봤는데 삼사십명 됩니다. 단체 생활도 같이 한 삼십년 동안 같이 했어요.
그때도 똑같이, 근데 그 선생님이 제일 소리를 누구보다 잘하시고 그랬는데 제일 하나 그 딱한 것은 그 목이 좀 그 탁목이었어요. 목이 인저 그 항성이 좀 없고 인제 목이 좀 안좋아서 그렇지 소리로서는 대가고 왕이죠 왕. 우리나라 소리로서는 그 만큼 소리하시는 분 없습니다.
인자 선생님도 그 방법이 꼭 저 뭐 이렇게 막 갈치고 이렇게 해야 잘한다 저렇게 해야 잘한다 그건 아니고 옛날 선생님들 그 방법이에요. 소리 쭉하니 자기가 하고 소리는 그렇게 하는 거다 그라고. 인자 자기가 독공을 많이 해야죠. 선생님이 그 참 예술가로서 마음이 모질지 않고 아주 마음이 좋았습니다.
그라고 인자 그 중에서도 아마 제가 제일 가차이, 단체에서도 가차이 지냈어요. 서울에서도 쭉 같이 있었고 또 부산에 있었을 때도 그랬고 저 순천에서도 내가 그 저 선생님 댁에 가서 한 1년 동안 같이 생활도 했고 저하고 떨어진 것이 거의 없죠. 꼭 사회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둘이 꼭 부부지간 같다고. 하루나 이틀 떨어져 못보고 그러면 서로 만나고 만나고 그런 사이였어요.
우리 국악인치고는 상당한 그 옛날의 그 구한문을, 그 한문을 좀 많이 알아가지고 박식해요. 소리하신 분으로서는 그렇게 저 한문을, 그런 걸 보면 상당히 박식합니다. 그 집안에서 보면 원래 그 저 송만갑 씨 제자로서 그때는 그 자기 친형님 박봉래 씨가 있었고 또 남자로 하나는 남원에 있는, 박록주 씨가 공부한 정문 씨, 김정문 그 선생님이 인제 있었고 박봉술 씨는 아버님이 그렇게 소리를 잘하셨대요 아버님이. 왜 소리를 잘했냐 하면 그 박봉래 씨를 공부 가르치기 위해서 송만갑 씨를 인자 그 순천으로 인자 모셔다가 공부를 하니까 거기서도 그렇게 많이 소리를 저 박봉술 씨 아버님께서 듣고, 또 원래 소리 잘하시는데다 소리를 많이 듣고 해서 그 오바탕, 다섯바탕을 박 선생한테 인제, 아버님한테 좀 공부를 하셨죠. 박만조인가 그럴 겁니다. 근데 내가 그 이름은 확실히 기억이 안납니다.
근데 거기서 많이 했고 인제 그 후로 공부를 다 해갖고 깪이기는, 다시 인자 그 서울로 가서 서울 성악연구소에 인자 가가지고 저 송만갑 씨한테 다시 또 인자 그 똑같은 바디니까, 그래서 거기서 닦고 그랬죠.
그 양반이 소리를 어떻게 지르고 했던지간에 인제 기운이 역대 장사에요 장사. (씨름을 잘해서) 황소를 세번이나 탔어요 황소를. 근데 돌을 갖다 그 어깨에다 짊어지고 산에를 올라가서 소리를 해야 된다 그러니까 아 이 양반이 인자 돌을 탁 그 지고 그 산에 올라가 소리를 하다가 그러니까 열이, 열기 팍팍 올라오지요, 힘을 콱 주니까 그래서 목이 깨져서 목이 나갔어요.
그 양반이 그때 당시로서도 오바탕, 다섯바탕 소리를 다했대. 여하튼 소리로서는 거물입니다 거물. 목이 짧아서 그라지 소리로서는 그렇게 알고 소리하시고 그런 분이 없죠.
다른 게 아니고 저기 저 아쟁 하는 김일구라고 알지요? 김일구. 김일구가 그 자기 집에서 김일구도 그 공부를 좀 했거든요 박봉술 씨한테. 그란디 뭐 지 생일 때 그 서대문에서 저 박 선생을 초빙했는데 그란디 이 사람이 참, 그 선생님을 참 초빙했으면, 모셨으면 잘 차 타고 가도록 이렇게 딱 해서 뒷처리를 해줘야 될텐데 기냥 그 선생님 혼자만 가시라 그래 놓고 그냥 그 어둑어둑 가는데 그러니까 저 거시기 저 마침 고개에서 그 차가 막 독립문에서 저 위에서 거 막 굉장히 그 속도 빠르게 내려오다 보니까 차에 치어서 인자 그렇게 돌아가셨죠. 어깨가 인제 부러지고 인자 그래서 1년 가차이 못일어나고 말도 못하고 척추가, 병원에 부러져 가지고 그래서 떠나셨죠.
가정은 아들 삼형제, 딸이 하나. 그 딸이 큰딸인데 그 박춘경이라고 죽었습니다만 소리를 곧잘 했어요. 참 거 안행련(안향련)이보담, 죽은 안행련이보담 소리를 더, 공력은 더 좋았어요. 소리를 그렇게 잘했어요. 큰아들도 운전하다가 죽고 그 짝으로 다 가버렸어요. 자식들 싹 다 죽었어요. 친척은 지금 그 형님 딸, 조카딸인데 거기도 여자가 거 소리 잘하고 주연배우도 아주 잘했습니다. 지금 저 거기도 나이가 칠십이 좀 넘으니까 오락가락해요. 조카딸 하나 있고 직계로서는 지금 없지요.
예술가로서는 그 여러모로 자질도 있고 또 박식하고 무식하지 않고 박식하고 예술가로서는 그만한 예술가 없습니다. 굉장히 훌륭한 분이지요.
(박봉술과 이용배의) 나이 차이가 한 십삼세 차이가 나지요. 나는 뭐 스승겸 뭐 형아 동생 하는 그런 경우였으니깨 저하고 지낸 것은 형용 말할 수 없이 지냈어요. 박 선생 돌아가실 때까지라도 자타가 다 압니다. 제일 나하고 친하게 지냈어요. 돌아가실 무렵에도 나보고 그라고 돌아가셨어요. 참 아까운 분 돌아가셨지요.
목은 딱하지만 소리 공력도 그만한 공력이 없습니다. 또 소리를 알고 하신 분은 그만한 분이 없어요. 지금 인자 뭐 돌아가시고 없지만 지금 인제 그 8명창, 5명창 빼놓고는 그 양반(박봉술) 같은 분이 없지요. 소리 잘하셨습니다.
"형님 건강하시고 다른 거 있습니까." 근데 박 선생님이 약주를 조금 좋아하셨어요. 약주를 좋아하셨는데 "약주를 쪼끔 더 줄이시고 우리 성님 오래오래 사셔야 우리가 오래오래 보고 또 좋은 소리를 오래오래 듣고 그라지요. 그러니 건강하세요 잉?" 이런 말씀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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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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