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hearkoreaTV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국악 음반    
매체별 유성기음반(SP) | 10인치 장시간음반(LP) | 12인치 장시간음반(LP) | 컴팩트디스크(CD) | 카세트테입(MC) | 디지털오디오테입(DAT) | 릴테입(Reel Tape)
마이크로카세트테입(MCT) | VHS 비디오테입 | 8mm 비디오테입 | 6mm 비디오테입 | 레이저디스크(LD) | 시디롬(CD-Rom) | 디브이디(DVD) | 기타자료
장르별 단가 | 판소리 | 창극 | 가야금병창 | 거문고병창 | 산조독주 | 산조합주 | 산조기타자료 | 시나위독주 | 시나위합주 | 삼현육각 | 사관풍류 | 사물놀이
민요연주 | 봉장취 | 민속무용 반주음악 | 기타민속기악 | 정가 | 정악기악독주 | 정악기악합주 | 민요 | 불교음악 | 무속음악 | 민속놀이ㆍ연극 | 풍물
전통춤 | 신작국악

 
함평 판소리 명창과 단가 <함평천지>(호남가)
  hpe20181102rjm.jpg(사이즈:262.2KByte)
*이는 2018년 11월 2일 함평엑스포공원 주제영상관에서 열린 국악음반박물관장 노재명 강연 논문 "함평 판소리 명창과 단가 <함평천지>(호남가)" 수록
[제29회 남도판소리 학술세미나] 책자(주최:한국국악협회 전라남도지회, 주관:한국국악협회 함평군지부, 후원:전라남도문화관광재단,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단가 <함평천지> 고음원 현장 소개 감상 등) 3~31쪽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함평 판소리 명창과 단가 <함평천지>(호남가)
글·사진 제공/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 목 차 ----------------------------
1. 판소리 근본 정신과 가치
2. 함평 판소리 명창
(1) 정창업
(2) 정학진
(3) 강장원
(4) 임유앵  
(5) 임춘앵
(6) 김화선(김여막)
3. 단가 <함평천지>(호남가) 녹음자료
(1) 단가 <함평천지>(호남가) 곡명과 전승 양상
(2) 단가 <함평천지>(호남가) 유성기음반 목록
4. 함평 판소리 명창 관련 사진자료
5. 함평 판소리 문화의 전승과 발전을 기원하며
---------------------------------------------------------------

1. 판소리 근본 정신과 가치

  판소리는 진정 좋고 재밌기에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극기 훈련을 하기 위해 따분한데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실제 무척 재미있었던 것인데 어떤 재미가 있었을까.
  지금 판소리는 어떻게 보면 전라도 사투리로 해야 된다, 또 쉰 목소리로 해야 된다 이렇게 좀 천편일률적으로 복사판처럼 사진소리라고 하는데 사진 찍어 놓은 거 같이 똑같이 다소 단조롭게 됐다. 하지만 예전에는 굉장히 다양한 판소리가 공존했었다. 예를 들면 아니리광대라고 해서 아니리를 재밌게 하는 사람, 또 선비들이 감상했던 가곡·가사·시조풍의 판소리, 책을 읽는 듯이 말을 빨리 하는 독서풍의 판소리,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인 소리들이 많았다.
  고제, 중고제 등 옛 판소리 시기에는 음식으로 보자면 뷔페 음식 같이 육해공군이 다 출동되는 그런 선택의 폭이 매우 넓고 다양한 소리를 맛볼 수 있는, 무척이나 재밌는 시절이었다.
  그런데 판소리를 그냥 단지 재미와 흥미만을 위해서 했는가. 감미롭게 발라드로 할 수도 있는데 왜 판소리는 들어보면 소리를 빽빽 지르고 그러나 이런 의구심이 자연스레 생길 수가 있다. 판소리를 왜 그렇게 큰 통성, 목소리 높여서 불렀는가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판소리 근본 정신과 가치를 알 수 있다.
  판소리 용어로 흔히 “호령조로 소리를 한다”, “호통조 통성으로 한다” 이런 표현을 한다. 수많은 성음 중에 왜 예술을 그렇게 호통, 꾸짖어 가면서 호령을 하며 부를까 그것을 해석하다 보면 판소리 발생 시기에 판소리를 했던 이유를 알 수 있고 판소리의 매력을 느낄 수가 있고 판소리의 본질과 정신을 알 수가 있다.
  조선시대 서민들이 농사를 짓거나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세금을 내고 나면 먹을 게 없고 심지어 빚을 얻어 세금을 내고 굶어야 되는 서민들이 많았다. 그렇게 가난하고 억울한 조선시대 평민들이 많았는데 그런 억울하고 힘겨운 약자 계층을 대변하기 위해 천대받았던 광대 예인, 명창들이 나섰던 것이다. 산속에 들어가 수련을 해서 스스로 앰프, 증폭기가 돼 가지고 전국을 유랑하면서 관리, 정치인들의 귀에 들리게끔 온몸을 진동시켜 목소리를 내고 최선을 다해 자기 목숨을 바쳐서 명창들이 그렇게 세상을 향해 꾸짖은 것이다.(2018년 5월 31일 19:00 서울 덕수궁 정관헌에서 열린 '덕수궁 풍류' 꾼들의 잔치, 창극 공연시 노재명 해설·강연 내용)
  조선시대 농민들이 착취되는 세금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심했고 억울한 일을 당한 민중이 인터넷 등 호소할 방법이 별로 없었다. 그럴 때 천대받던 소리 광대들이 각고의 수련 노력으로 자신의 몸 자체를 앰프와 스피커로 변화시켜 스스로 소리 증폭기가 되어 전국을 유랑하며 목숨을 걸고 그러한 사회의 실태, 병폐를 목 놓아 외치고 다닌 것이다. 저 멀리 고위관료, 더 멀리 임금 귀에까지 닿기를 바라며 온몸을 진동시켜 30리 밖으로, 또는 문고리가 흔들리도록 소리를 있는 힘껏 멀리 강력하게 던졌다.
  그래서 판소리는 호통조, 호령조 성음이 가장 핵심을 이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감미로운 발라드 노래를 못해서가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 억울한 이들을 대변하여 세상을 향해 꾸짖고 알려야만 하는 의협심과 사명감이 막중하였기에 산중에서 혹독한 수련을 통해 폭포수 소리를 뚫을 만큼의 강력한 통성이 필요했던 것이다.(2018년 6월 4일 13:00~14:00 KBS 본관 5층 1스튜디오 녹음, 2018년 7월 7일 14:00~15:00 KBS 한민족방송 '전통으로 소리길로' 노재명 출연 "중고제 판소리 이야기" 방송 내용)
  흥보가 내용 중에 가난해서 부자들 죄진 매를 대신 맞으러 갔다가 그것 마저도 가로채임을 당해 울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 심청이가 가난해 가지고 자기 목숨을 돈 받고 팔아서 부친을 봉양하는 장면, 또 전쟁터의 권력자들간 다툼으로 인해서 희생되는 불쌍한 군인들의 안타까운 사정, 이런 약자들의 처지를 온몸을 진동시켜 가지고 사회에 강하게 호소하고 권력을 향해 처참한 현실을 비판해야 했기 때문에 호령조, 호통조 통성이라는 발성법이 나온 것이라 하겠다. 판소리의 호령조, 호통조 창법은 조선시대 서민과 명창들의 처절한 몸부림의 산물이다.
  이러한 연유로 판소리는 귀를 감미롭게 발라드로 해서 단지 흥미, 재미만을 위해서 했던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단군 시대부터 내려왔던 홍익인간 정신이 담겨있고 이 점을 가장 핵심으로 하여 소리를 해왔다. 한국은 몇 천년 동안 의인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이 판소리 명창들은 성악 의인들이라고 할 수 있고 판소리는 바로 그 의인들의 성악 작품인 것이다.
  고위 계층한테까지 들리길 바라는 간절한 심정에서 온몸으로 외친 소리가 급기야 관료의 관심을 받게 되고 나중엔 왕의 부름을 받게 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 정신과 기개를 높게 인정받아 벼슬 직함을 받고 어전 광대가 된 명창이 탄생하고 판소리가 음악적으로 굉장히 높은 예술성을 더욱 갖게 된 것이라 하겠다.
  평양 감사 이런 관리들이 풍문에 듣자 하니 “저기 유명한 명창이 그렇게 노래를 하고 다닌다는데 한번 불러 보자” 해서 들어 보니까 그 정신이 아주 고귀하고 그것이 소문이 나서 임금 귀에까지 들리게 됐다. 왕이 들어보니 본인을 비판하는 소리이기도 하면서 명창들이 목숨을 걸고서 그렇게 온몸을 진동시킨 통성을 자기 앞에서도 호령조로, 기 죽지 않고 서민들의 애환을 대변해서 임금 앞에서도 당당하게 기개를 굽히지 않고 호통조로 하는 그 정신을 높이 사서 임금들이 그런 명창들한테 벼슬을 내릴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판소리가 오랫동안 여러 국악 중에서도 유독 으뜸으로 꼽혀온 것은 음악적인 완성도도 높지만 그 표방하는 정신이 정의롭고 고귀해서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여유있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술 마시며 유흥으로 재밌게 들을 수 있는 음악으로 생산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자 했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것이 바로 판소리이고 홍익인간 이념, 이것이 판소리 정신의 본질이라고 하겠다.(노재명 집필 『정철호 신작판소리·창극 작곡집』 서적, 서울:채륜, 2018년, 112~113쪽)


2. 함평 판소리 명창

  함평은 전라남도 북서부에 있는 군으로서 동쪽은 광주광역시와 나주시, 남쪽은 무안군, 북쪽은 영광군·장성군, 서쪽은 황해 바다인 함평만에 면해 있다.
  함평은 농경지가 비옥하고 농업용수도 풍부하며 여기에서 생산되는 쌀은 예로부터 질이 우수해 진상품으로 올려졌으며 맛이 월등히 좋고 전남 소 값을 좌우할 정도였던 함평읍의 함평장은 우시장으로 유명하다.
  이렇듯 풍족한 환경과 인심 넉넉한 여유 속에서 풍류도 발달하여 판소리 명창들도 탄생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함평의 대표적인 판소리 명창으로는 철종·고종 시대 명창 정창업, 그리고 정학진, 강장원, 임유앵, 임춘앵, 김화선(김여막) 등이 있다.

(1) 정창업

  정노식 저서 『조선창극사』(서울:조선일보사, 1940년) 93~94쪽에 다음과 같이 정창업 명창에 대한 기록이 있다.(원문의 한자는 한글로 변환함)

“정창업(丁昌業) - 서편
  정창업은 철고(哲高) 양대간 인물로 전라남도 함평군 출생이다. 박만순, 김세종, 이날치의 좀 후배로써 서파에 속한 만큼 계면을 주로 하여 판을 짜는 솜씨인데 고매하기 박(박만순)에게 비견할 주 없고 웅휘하기 이(이날치)에게 및이지(미치지) 못하었으나(못하였으나) 역시 자가 특색으로 일세를 용동한 대가이었다 한다.
  당시 전주부 통인청 대사습시에 참예하여 춘향가 첫비두 이도령이 광한루 구경차로 나갈 때 ‘방자 분부 듣고 나구(나귀) 안장 짓는다. 나구(나귀) 안장 지을 적에 나구(나귀) 등에 솔질 솰솰’ 하는 대목에 이르어서(이르러서) ‘나구(나귀) 등에 솔질 솰솰’을 하는 말을 도수가 넘도록 멧(몇) 번이나 중복하고 아래말이 막혔다. 좌중은 ‘저 혹독한 솔질에 그 나구(나귀)는 필경 죽고 말 테이니 참아(차마) 불(볼) 수가 없다’ 하고 인해(이내) 퇴장시켰다.
  그리 되어서 그 후로 정(정창업)은 일시 낙명이 되어서 수년간 소리를 중지하고 근신하였다는 것이 명창으로도 혹 실수가 있다는 것을 전하는 유명한 이야기다.
  흥보가에 특장하였고 더늠으로 전하는 것은 심청가 중 몽운사 화주승이 권선시주 얻을 차로 산에서 내러(내려) 오는 대목이다. “중 하나 나려온다. 중 한 여석(녀석)이 나려온다. 충충거려 나려온다. ...(중략)... 몽운사 화주승이든가 부더라. 중의 도례가 아니라고 저 중이 염불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운운. 송만갑, 전도성, 김창환 방창.”

  이 기록에 따르면 정창업은 흥보가를 잘 불렀고 심청가 가운데 유명한 <중타령>이 바로 그의 더늠이라고 하며 김창환이 그 <중타령>을 방창했다고 되어 있는데 김창환은 정창업 고향 바로 옆인 나주 태생이다.
  김창환 역시 정창업과 마찬가지로 서편제 명창이고 김창환 또한 흥보가를 잘했고 1930년 유성기음반에 흥보가 중 <중타령> 녹음을 남긴 바 있다. 흥보가 <중타령>도 심청가 <중타령>과 음악 특징이 비슷하고 김창환이 정창업에게 소리를 배웠다는 정광수의 증언으로 봐서 김창환이 근거리 지역에 태어나고 활약한 선배 정창업의 소리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판단된다. 정창업 손자 정광수가 김창환 문하에 들어가서 흥보가 등을 사사한 것도 그러한 상관성과 분위기가 작용했다고 하겠다.
  판소리 인간문화재 정광수(1909~2003년)는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정광수 증언, 노재명 대담·정리 “나의 스승, 국창 김창환 선생님” 『‘서편제 판소리(소리:김창환·정정렬)’ CD음반 해설서』 서울:명인기획/엘지미디어 LGM-AK010, 2CD, 1996년 제작, 녹음 고증·음반 기획·해설·사설 채록·사진 제공:노재명, 5~9쪽 발췌)

  “나 정광수(丁珖秀)는 1909년 7월 28일(己酉生) 전남 나주군 공산면 복용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용훈(榕薰)이고 아호는 영암이다. 본적은 광주시 서구 사동 136번지이다.
  서편제의 대가 정창업(丁昌業) 명창은 나의 조부이다. 정창업 명창은 슬하에 3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나의 부친은 둘째 아들이다. 나의 부친은 국악을 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성함을 밝히고 싶지 않다. 나는 3형제 가운데 막내 아들이다.
  정창업 명창은 고종 때 오위장 벼슬을 하셨다. 나의 큰아버지인 정학진(丁學鎭)씨 아들이 정창업 명창의 광무(光武, 1897~1909) 때 교지 5장을 보관하고 있다. 정창업 명창은 김창환(金昌煥), 정정렬(丁貞烈)과 같은 명창들을 길러내셨다.
  나는 조부 되시는 정창업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지 못했다. 내 나이 10세 무렵에 조부께서 작고하셨기 때문이다. 조부 정창업 명창은 70대 초반에 작고하셨다.
  나는 9세부터 13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고 17세부터 22세까지 전남 나주군 삼도면 양화리 김창환 선생님 댁에서 판소리를 공부했다.
  당시 김창환 선생님은 너무 연로하셔서 선생님에게는 많이 배우지 못했고 그 분 아들인 김봉학 명창 문하에서 주로 배웠다. 사설을 먼저 외우고 나서 수업을 받았다. 선생님이 북으로 장단을 치며 가르쳐 주시면 따라 부르는 식으로 학습이 이루어졌다.
  김창환 선생님의 소리는 법도가 엄중하고 통이 큰 데가 있다. 특히 우조, 엄성에 그 분의 엄격하고 무서운 면이 있다. 김창환 선생님의 춘향가에서 <긴 사랑가>는 ‘만첩청산’으로 시작되는데 ‘어헝’ 하는 호랑이 성음이 매우 특이하고 좋다. <이별가>에서는 경드름이 약간 쓰인다. 김창환 선생님의 춘향가에는 <돈타령>이 없다. <과거장>은 자진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짜여져 있다. <박석티>는 진양조 장단에 반드시 우조로 불러야 한다. ‘흑운 박차고’ 하는 흥보 <제비 노정기>를 혹 중중모리로 부르는 사람이 있으나 김창환 선생님은 반드시 자진모리로 불렀다. <박타령>에서는 흥보 마누라가 좋아하는 발림이 재미있으면서도 멋이 있다. 예전에 그 대목에서 김창환 선생님의 발림이 무척 인상적이었다.(1991.2.12.19:00~19:20, 1993.8.6.15:30~15:40, 1995.9.14.20:00~22:30, 1995.12.13.18:20~18:40 정광수 증언)

  『조선창극사』에는 김창환의 스승이 언급되어 있지 않은데 이같은 정광수의 증언에 의해 김창환이 정창업 문하에서 소리를 배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광수의 가문에 대한 증언으로 봐서 정창업 명창 일가는 함평의 세습 국악 명가문이라 판단된다. 정광수(1909년 출생) 나이 10세 무렵에 조부 정창업 명창이 70대 초반 나이로 작고하였다고 하므로 정창업의 생몰 연대는 1847년 무렵~1918년 경이라고 하겠다.
  상기 정광수 증언 내용에 보이는 바와 같이 정창업은 근대 판소리 5대 명창 가운데 김창환과 정정렬, 이렇게 2명을 가르쳤으므로 5명창 중에 서편제 명창들은 모두 정창업이 지도했다고 하겠다. 현대 판소리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이들이 근대 5명창이기에 오늘날 연희되는 서편제에 정창업은 직간접적으로 지대한 공로와 영향을 준 셈이다.
  김창환과 정정렬의 녹음 가운데 특히 김창환이 1930년에 취입한 흥보가 중 <중타령> 유성기음반(Columbia 40234, Regal C132)과 정정렬이 1934년에 취입한 단가 <호남가> 유성기음반(Victor 49291, Victor Star KS-2002)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정창업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심청가 중 <중타령>이 정창업의 더늠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정창업 제자 김창환이 심청가 <중타령>과 음악 특징이 비슷한 흥보가 <중타령>을 음반으로 발표한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창환의 판소리에서 가장 유명한 흥보가 중 <제비 노정기>도 흥보가에 능했던 정창업 문하에서 익힌 소리일 가능성이 있다.

(2) 정학진

  판소리 명창 정학진(1863~1912년)은 전라남도 함평에서 정창업 명창의 큰아들로 태어나 정창업, 박유전 문하에서 소리를 배웠다.
  정학진은 부친 정창업(1918년 경 타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정학진 후손이 정창업 명창의 광무 때 교지 5장을 보관하고 있다.(정광수 증언 등)

(3) 강장원

  국악예술인명감편찬위원회 편저 『국악 예술인 명감』(서울:국악계사내, 1961년) 95쪽에 다음과 같이 판소리 명창 강장원 약력이 실려있다.

姜章沅 篇(唱樂)
本籍: 서울 鍾路區 苑西洞 一六二의 一
出生地: 全南
住所: 서울 鍾路區 苑西洞 一六二의 一
四二四二年 二月 十七日 生 當五三歲
結婚 關係: 旣婚
家族數: 九名
專攻: 唱樂
長技: 판소리
受業處: 朝鮮聲樂硏究會
恩師名: 李東伯
硏究 年數: 四○年
經歷: 國劇社 團員. 朝鮮唱樂 團員 生活 十三年間.
      國立國樂院 唱樂 指導.
現在: 國立國樂院 國樂士
趣味: 音樂 鑑賞

  박헌봉 저서 『창악대강』(서울:국악예술학교 출판부, 1966년) 622쪽에는 강장원 명창 약전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名唱略傳 - 姜章沅
全羅南道 咸平에서 一九○九年 出生.
特長 赤壁歌.

  김연수 저서 『창본 춘향가』(서울:국악예술학교 출판부, 1967년) 332쪽에는 강장원 명창 약력이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古今國樂名人錄
姓名: 姜章沅
年代: 一九○九~一九六二
本鄕: 全南 咸平
師事: 李東伯
後進 養成에 有功함.

  강장원은 중고제 판소리 거장 이동백 명창의 수제자이며 서편제 명창 김창환 문하에서도 소리를 배웠다는 설이 있다.
  가야금 명인 강문득은 1945년(호적:1948년) 8월 27일(음력)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에서 판소리 명창 강장원과 판소리 명창 임유앵(임춘앵 언니) 사이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강문득은 강장원이 대한국악원(지금의 국립국악원)에서 단가 <백발가>(젊어 청춘)를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걸 본 적이 있으며 강장원이 이 단가를 이동백한테 배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한다. 강문득은 강장원에게 이 <백발가>를 배우지 않았다고 하였다.
  강장원은 제자들에게 주로 이동백제 적벽가 중 <삼고초려>와 수궁가를 가르쳤다. 강장원한테 소리를 배운 제자로는 1950년대 서울 권농동 사업가 노모씨(某氏)와 대동버스 사장 조모씨(某氏)가 있고 강장원의 장남 강종득(강문득보다 3세 연상)이 어깨 너머로 부친 소리를 익혀 강장원제 판소리를 잘했다.
  권농동 노모씨와 대동버스 사장 조모씨는 강장원한테 단가 <백발가>(젊어 청춘)를 배웠다. 강문득의 형 강종득은 국악을 무척 좋아했으나 모친이 공부를 권하여 국악인이 되지는 못했다.
  강문득의 부친 강장원은 남자만 있는 4형제 중 셋째였다. 이 형제는 이름이 차례로 강일배, 강월배, 강장원, 강모씨이고 이 가운데 국악을 한 사람은 강장원뿐이다. 강장원의 부친은 한학을 가르쳤는데 강장원은 부친의 서당에서 부친에게 한문을 배웠다.
  강장원은 1909년 경에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났고 백락준에게 거문고를 배웠으며 가야금, 북 연주도 잘했다. 강장원은 이동백한테 배운 판소리 적벽가 중 <삼고초려>가 특기였다.
  강문득이 중학교 1학년 무렵 1961년 경에 강장원이 작고하였다 한다. 강문득은 어려서 관절염 관계로 다리가 아파서 학교를 3년 늦게 들어갔다.
  강문득은 1950년부터 1968년 7월 4일 김병호가 작고하기 전까지 김병호에게 가야금을 배웠다. 1950년부터 1966년까지는 줄곧, 그 이후부터 1968년까지는 간간히 김병호에게 가야금을 익혔다. 강문득이 김병호 문하에서 사사한 것은 가야금산조, 가야금병창 단가 <고고천변>, <어화청춘>, <장부가> 등이다.
  그리고 강문득은 1964년 무렵부터 6년간 원옥화한테 강태홍류 가야금산조를 배웠다. 강문득은 1998년 인터뷰 당시 제자가 200여명 된다고 말하였다.(1998.7.19.11:10~11:30, 2001.6.12.08:30-10:00 강문득 증언)
  함평과 인접한 전라남도 무안의 국악 명가문 중 판소리 명창 강용안(강용환), 그 아들인 가야금 명인 강태홍, 강태홍 사촌인 판소리 명창 강남중 같은 국악인이 판소리 명창 강장원과 혈연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강장원 생몰연대는 흔적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활동 기록으로 봐서 1909~1962년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4) 임유앵

  판소리 명창 임유앵(본명:임복녀)은 판소리 명창 강장원의 부인이며 판소리 명창 임춘앵의 첫째언니이다.
  임유앵은 1911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김창환, 이동백, 정정렬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임유앵은 동일창극단에서 춘향 역을 맡았고 여성국극동호회에도 참가하였으며 창극에서 특히 춘향모 역을 잘했다.
  1941년 창설된 조선음악협회 소속 조선악부의 조선가무단과 함께 창단된 조선음악단의 박헌봉 단장 아래 박초월, 장채선, 경부용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39~1943년 경성방송국에 출연하여 남도민요 등을 방송했다.
  광복 직후 대한국악원 창극단에서 조상선, 정남희, 박동실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48년 여성국악동호회가 출범했을 때 임유앵은 부회장을 맡았고 회장 박록주, 부회장 김연수, 총무 조유색, 단원 박귀희·김소희·김농주 등과 함께 창극 공연에 출연하였다.
  1952년 광주(光州)에서 창단된 여성국악동지사의 대표 임춘앵, 단원 김경애·한애순·김진진·김경수와 함께 임유앵은 창단 공연으로 무대에 올린 조건 작 창극 ‘공주궁의 비밀’ 공연에 출연하였다.(송방송 편저 『한겨레 음악인 대사전』 서울:보고사, 2012년, 751쪽)
  1962년 창단된 국립국극단 주최 제1회 창단 기념 창극 ‘대춘향전’ 공연 때 임유앵은 단장 김연수, 단원 김소희·박귀희·강장원 등과 함께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67년에 별세하였다.

(5) 임춘앵

  판소리 명창이자 전통춤 명무, 국극인 임춘앵(본명:임종례)은 1924년 전남 함평군 함평읍 함평리 154번지에서 부친 임성태와 모친 김화선 사이의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임춘앵은 임유앵의 여동생이고 여성국극 스타 김진진의 모친 임임신은 임춘앵의 둘째언니이다. 임유앵, 임춘앵 자매는 임방울 명창과 친척지간으로서 임방울도 임춘앵 가족이 살았던 함평군 함평읍 함평리, 함평군 나산면 지역에서 거주한 적이 있다. 김화선(김여막) 명창이 증언한 함평의 대금 명인 임봉○가 임방울과 일가친척일 가능성이 있다.
  임춘앵은 9세 때 함평읍내에서 김안식에게 정계선, 배화봉과 함께 판소리를 배웠고 12~15세 때는 광주권번에서 오수암, 정광수, 최막동, 강남중, 임방울에게 판소리를 익히고 박영구에게 <승무> 등 전통춤을 사사했다. 임춘앵은 유성준, 정정렬에게도 판소리를 배웠고 국극 소리 등 작곡에도 능했다.(노재명 집필 『국악 명인명창 100년 사진집』 서울:채륜, 2017년)
  임춘앵은 지방 순회 국악 단체 활동을 하다 1939년에 서울로 가서 조선음악협회, 조선창극단, 여성국악동호회 등에서 활약하였고 1952년 광주(光州)에서 여성국악동지사를 창단하였으며 1954년에는 임춘앵여성국악단을 조직하였다.
  임춘앵은 1967년 임춘앵무용연구소를 설립 운영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다가 1975년 작고하였다.(반재식·김은식 지음 『여성국극 왕자 임춘앵 전기』 서울:백중당, 2002년, 641~655쪽)

(6) 김화선(김여막)

  김화선(예명)은 1928년 1월 14일(음력)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에서 부친 김안식(김해 김씨, 함평 태생)과 모친 김모씨(광산 김씨, 무안 태생) 사이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김화선의 부친은 국악을 좋아했고 누나가 한명 있었다. 김화선의 조부는 김경국으로서 농부였다.
  김화선의 본명은 김여막, 옛 예명은 김해선이고 8세 때 부모를 따라 함평에서 정읍으로 이사하였으며 12세 때부터 정읍권번에서 국악을 학습하기 시작했다. 김화선의 부친이 김화선을 정읍권번에 넣었다. 김화선의 부친은 무남독녀 김화선을 무척 예뻐해서 출가 안시키고 데리고 있는다고 국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한다.
  김화선은 14~15세 무렵에 1년간 서울 다옥정 임춘앵 집에서 임춘앵한테 한국 무용 <승무>, <살풀이춤>, 단가 <천생아재>, <편시춘>, <공도난이>,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 남도민요 <육자배기>, <흥타령>, <새타령> 등을 익혔다.
  <흥타령>을 소리북으로 반주할 때는 다른 소리 반주 때처럼 북채로 북을 치는 식이 아니고 북채로 북통을 짓이겨 누르듯이 반주를 해주어야 한다고 한다. <흥타령>은 한이 있어야 제 맛을 잘 살려 부를 수 있다고 한다. 김화선이 젊었을 때 요리집 출장, 권번에 오후 저녁마다 모여 앉으면 <육자배기>, <흥타령> 등의 남도민요를 많이 불렀다.
  임춘앵은 <긴 사랑가>를 “만첩청산~”으로 부르지 않고 “사랑 사랑~”으로 불렀다. <긴 사랑가>를 “만첩청산~”으로 부르는 건 옛날식으로서 나이 많은 명창들이 그렇게 부르는 걸 김화선이 본 적이 있다고 한다.
  김화선이 임춘앵한테 국악을 학습할 당시 임춘앵은 조선권번 소속이었다. 당시 조선권번에는 판소리 사범이 없었고 요리집으로 놀음 나가는 조선권번 기생들을 태우는 인력거꾼이 조선권번에 많이 왕래하였다. 임춘앵은 광주권번 동기 때부터 이름을 떨치고 반장 노릇을 했다고 한다.
  임춘앵은 구음을 무척 잘했는데 임춘앵처럼 구음을 그렇게 잘하는 다른 사람을 김화선은 못봤다고 한다. 임춘앵은 ‘떼놈, 송장도 춤추게’ 구음을 잘했다 한다.
  김화선이 임춘앵한테 배운 <승무>의 복장은 검정 고사, 흰 고깔, 적색 띠를 사용하고 반주는 삼현육각으로 염불-타령-북 놀음-느린 굿거리 순으로 진행되며 북채 넣고 빼는 부분이 요즘과 다르다고 한다. 임춘앵은 <승무> 공연시 북 하나를 놓고 쳤는데 북가락을 기가 막히게 멋있게 잘 쳤고 김화선은 바로 이 <승무> 북가락을 배우기 위해 임춘앵을 찾아간 것이라 한다. 김화선은 임춘앵한테 <승무> 북가락만 두 달 동안 배웠다. 임춘앵 <승무> 공연시 북은 사람이 잡아줬고 북 크기는 판소리 북 크기 정도였다.
  임춘앵은 <살풀이춤> 공연시 하얀 한복을 입고 석자 내지 석자 반 정도의 긴 수건을 들고 춤을 추었고 반주는 살풀이-자진살풀이 장단이었다.
임유앵과 임춘앵은 자매간이고 임유앵, 임춘앵의 모친이 김화선의 고모(김화선 부친의 누나)이다. 임유앵 형제는 총 2남 2녀인데 차례로 임유앵(여), 임모씨(남), 임천수(남), 임춘앵(여)이며 이 가운데 임유앵과 강장원이 부부로 살았다. 임춘앵과 장월중선은 아주 다정한 친구 사이라 한다.
  김화선은 14~15세 무렵에 서울 임춘앵 집에서 김화선 친구 한명(성명 미상)과 함께 김소희한테 판소리 수궁가 초입~<고고천변> 등을 사사했다.
  김화선은 14세 무렵에 서울로 나갔다가 15세 무렵에 다시 정읍으로 갔다. 김화선이 정읍으로 간 15세 즈음에 정읍 부자 김평창 손자(당시 33세)가 머리를 얹어 주었다.
  김화선은 15세부터 3년간 정읍권번에서 강장원한테 단가 <백발가>(젊어 청춘), <초한가>, 판소리 춘향가 중 <기산영수>~<이별가>, 심청가 중 <집이라고 들어가니 방안은 텅 비어있고>, 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부모 생각), 흥보가 초입~첫째 <박타령> 등을 배웠다. 이때 익힌 흥보가 중 <흥보 제비노정기>는 빠른 중중모리, “흑운 박차고~”라 한다.
  강장원의 춘향가 중 <이별가>에서는 춘향이가 옷 찢고 소리 지르고 물건 집어 던지고 하는 부분이 안나온다. 강장원이 춘향가 중 <‘궁’자 노래>를 부르는 건 김화선이 못봤고 김화선은 강장원이 누구한테 <백발가>를 사사했는지 등의 얘기는 못들었다 한다. 강장원은 아편을 안했다 한다.
  김화선이 정읍권번 소속시 많을 때는 기생 학습하는 동기만 열댓명이 있었고 나이 많은 언니들도 많았다. 당시 일주일에 한차례 정읍권번 소속 동기가 두 명씩 정읍 내장사에 있는 요리집에 국악을 공연하러 갔다. 당시 동기는 머리를 땋고 머리를 얹히면 동기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17세 넘는 동기는 없었다.
  김화선이 정읍권번에 있을 때 정읍권번에는 판소리 사범이 강장원과 성명 미상의 모씨, 이렇게 두명이 있었고 춤 선생은 없었다. 김화선은 정읍권번에서 강장원한테 판소리를 배웠고 성명 미상의 모씨에게는 판소리를 안배웠다.
  김화선은 15세 경에 정읍권번에 정가 사범이 없어서 정읍의 한량을 찾아가서 가곡, 시조를 배웠다. 김화선은 15세 때 한달 동안 김수정(당시 50대 후반, 장성 사람, 가야금·양금·피리 명인)을 김화선 집에 스승으로 모셔다가 가야금풍류 48장과 가야금산조 한바탕, 양금 풍류를 익혔다. 김수정이 연주한 가야금산조는 다스름-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엇모리 순이다. 당시 정읍권번에는 가야금 사범이 없었다.
  김화선은 15세 무렵에 최막동에게 판소리 수궁가 중 <왕왈 연하다>~<고고천변> 등을 사사했다. 김화선은 15세 무렵에 김안식(당시 40~50세, 김화선 부친과 동명이인)한테 김안식 집에서 정계선, 임춘앵, 배화봉과 함께 남도민요 <새타령> 등을 사사했다. 김안식은 설장고 명인으로서 남도민요 <보렴>, <화초사거리>를 잘했다.
  김화선은 15세부터 17세까지 정읍권번에 소속되어 있었다. 김화선은 17세 때 정읍에서 함평으로 이사하고 18세 때 함평에서 목포로 이주하였다.
  김화선은 17세 때 함평에 자주 온 임방울에게 단가 <함평천지>(호남가)와 판소리 춘향가 중 <쑥대머리>를 사사했다. 김화선의 말에 따르면 임방울이 유명해진 것은 춘향가 중 <쑥대머리>에서 “내가 만일으~” 하는 부분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화선은 18~19세 무렵부터 2~3년간 목포권번에서 최막동(당시 50대 나이)에게 판소리 춘향가 초입~<이별가>, 심청가 거의 전판, 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 흥보가 초입~<흥보 제비노정기>(흑운 박차고), <놀보 제비노정기>(안남산), 남도민요 <육자배기>, <자진육자배기>, <삼산은 반락>, <개고리타령> 등을 배웠다. 김화선이 목포권번에서 최막동한테 판소리를 배울 때 안채봉도 같이 사사했다.
  김화선이 목포권번 소속시 최막동이 유일한 판소리 사범이었다. 최막동이 목포권번에서 판소리를 가르치기 전에는 오수암이 판소리 사범이었고 최막동 다음으로 목포권번에서 판소리 사범을 한 사람은 안기선이다.
  김화선은 오수암과 안기선한테는 판소리를 배우지 못했고 오수암과 최막동은 나이가 비슷했으며 김화선은 오수암 성음이 수리성이라 한다.
  최막동의 성음은 듣기 좋은 철성으로서 목구성이 좋았다 한다. 철성은 본래 판소리하기에 안좋은 성음인데 철성 중에도 특히 듣기 안좋은 철성이 있고 최막동의 성음과 같이 듣기 좋은 철성이 따로 있다고 김화선은 말한다.
  김화선의 의견에 따르면 최막동이 오수암보다 소리를 아질다질, 아기자기하게 맛있게 했다고 한다. 김화선은 최막동의 스승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한다.
  김화선은 성악가는 일단 성음이 좋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김화선은 수리성, 철성, 귀곡성, 애원성, 천구성이라는 말을 들어봤다고 한다. 김화선은 ‘마당목’이라는 게 있는데 이는 구성 없이 넙적해 가지고 넓게 쓰는, 멋 없이 내는 목이라고 한다.
  김화선의 판소리 스승 임춘앵, 강장원, 최막동은 한결같이 노랑목을 절대 구사하지 못하게 했다 한다. 김화선은 중고제, 동편제, 서편제라는 말은 들어봤고 경드름, 덜렁제, 잉애걸이, 완자걸이, 호걸제라는 말은 못들어봤다고 한다.
  김화선은 18세 때 두 달 동안 목포권번에서 한성기에게 가야금산조 한바탕을 배웠다. 한성기 가야금산조는 김수정이 연주한 가야금산조와 유사하다고 한다. 김수정, 한성기는 구식 산조를 연주했고 야질야질한 가락이 없고 다소 싱거웠다고 한다.
  유대봉은 가야금산조를 잘한 천재 명인인데 신식 산조라 할 수 있고 야질야질한 가락을 많이 연주했다고 한다. 유대봉은 재담도 무척 재밌게 하고 남을 잘 웃기는 재주가 있었으며 가야금을 굉장히 잘해서 ‘가야금 버러지’라는 별호로 불렸다 한다. 유대봉은 어디에서 가야금을 배우지도 않고 자득하여 연주를 잘한 것이라 한다. 유대봉은 봉사였는데 병원에서 치료받고 잘은 안보여도 눈을 떴으나 그로부터 얼마 안되어서 안타깝게 작고하였다 한다.
  김화선이 정읍권번 소속시 조합장은 박모씨, 김화선이 목포권번 초기 소속시에는 조합장이 남자, 김화선이 목포권번 후기 소속시에는 조합장이 여자였다. 김화선은 18세부터 5년간 목포권번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목포권번에서 활동하면서 딸 둘을 낳았다.
  김화선이 목포권번 소속시 한농선이 목포권번의 동기였다. 김화선이 33세 때 목포를 떠나고 나서 막 신영희, 안향련이 목포로 왔다고 한다. 박보화(박보아)는 목포권번 시절 박농선으로 불렸다 한다. 목포권번 시절 김화선은 18세인데 20세라 하여 두 살 많은 박옥진과 친구가 됐다. 당시 목포권번에는 무용 사범이 없었다.
  김화선은 20여세 때 정모씨에게 단가 <백대영웅>를 배웠는데 참으로 맛있는 소리라 한다. 김화선은 성명이 기억나지 않는 모 스승에게 판소리 해방가를 사사했는데 다 잊어버리고 부르지 못한다고 한다.
  그리고 광복 직후 김화선은 함평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김선일이라는 한량에게 판소리 안중근 열사가를 배웠다. 김선일은 전주 태생으로서 2009년 당시 80대 후반, 함평 지역의 치과 원장이며 예전에 명창 최일원한테 판소리를 익혔고 영광에서 국악 단체 생활을 한 바 있다. 김화선은 김선일과 함께 영광에서 국악 단체 생활을 했는데 이때 김화선은 영광 단체에서 판소리, 가야금, 한국 무용 <승무>, 창극 ‘춘향전’의 향단 역 등을 담당하였다.
  김화선은 후손의 장래를 위해서 일찍이 국악계를 떠났다. 그러다가 중년 이후에 서서히 국악 활동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김화선이 젊었을 때 함평 지역의 삼현육각 명인으로는 오영주(피리), 정산옥(피리), 임봉○(대금) 등이 있었고 해금 연주자는 당시 못봤다고 한다. 오영주, 정산옥, 임봉○은 1900년 이전에 출생한 명인들이고 모두 세습 전문 국악인 집안 출신이다.
  김화선은 젊었을 때 함평 지역에서 굿을 보기는 했으나 당시 당골 세습무 이름은 잘 모른다고 한다. 김화선은 한국 무용 <검무>의 경우 같이 출 짝이 없어서 배우지 못했다.
  김화선이 국악계에서 체득하고 사용했던 은어(변말, 곁말)로는 세습 전문 국악인 집안 출신:산이, 기생:째생, 소리:패기, 장고:고장, 여자:해주, 남자:떼들이, 노인:구망, 영감:감영, 아이:자동, 먹는다:챈다, 죽음:귀사, 닭:춘이, 쌀:새미, 떡:시럭, 밥:서삼, 입:서삼집, 눈:저울고, 코:흥대, 발:디딤이, 얼굴:벤대, 옷:버삼, 거짓말:석부 등이 있다. 함평의 일반인들은 남자 소리꾼을 ‘광대’, 여자 소리꾼을 ‘기생’이라고 부른다 한다.
  김화선의 말에 의하면 명창은 대부분 무식한 경우가 많았는데 동초 김연수는 유식했다고 한다. 박동진의 판소리는 유별나서 배우기가 어려운 소리라고 한다. 김화선은 이동백, 김창환, 정정렬, 김봉이가 명창이라는 말만 들었고 보지는 못했다 한다. 김화선은 이화중선, 임방울은 본 적이 있고 정정렬, 이화중선, 임방울의 유성기음반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김화선이 보유하고 실연이 가능한 전통 예능은 단가 <호남가>(임방울제), <홍문연>(강장원제:천하태평), <백발가>(강장원제:젊어 청춘), <이산 저산>(조상현 녹음 듣고 익힘), <편시춘>, <공도난이>, <천생아재>,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이별가>(최막동제), <쑥대머리>(임방울제), 심청가 중 <곽씨부인 유언>~<심봉사 눈 뜨는 데>(최막동제), 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최막동제), 수궁가 초입~<고고천변>(김소희제), 흥보가 초입~<흥보가 매품팔이 허탕치고 귀가하자 흥보처 좋아하는 데>(최막동제), 안중근 열사가(김선일제), 남도민요(최막동제) <육자배기>, <자진육자배기>, <삼산은 반락>, <개고리타령>, <흥타령>, <새타령>(김안식제), 구음(자득/자장단 가능), 한국 무용 <승무>(임춘앵 사사), <살풀이춤>, 가야금 풍류(김수정 사사) 등이다.
  김화선은 1992년 무렵부터 5~6년간 나주국악원과 김화선 자택 등에서 학생과 주부들에게 판소리와 고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노년에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내교리에서 살면서 집으로 찾아오는 학생, 주부들에게 판소리와 고법 등을 가르쳤다.
  김화선은 남편 모창하 사이에서 슬하 5남 2녀를 두었는데 둘째딸은 어려서 사망하였고 국악을 하는 자손은 없다.(1998.7.16, 1998.8.30, 2000.12.21, 2005.9.25, 2009.8.10, 2009.11.22 김화선 증언)
  김화선은 웬만한 남자들보다 더 대범하고 화통한 성품을 지닌 명인이다. 김화선은 젊어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어쩐 일인지 늙으니까 한이 다 어디로 가고 없어졌다고 한다.
  김화선 명창은 노재명이 '김화선(김여막)의 국악세계' 음반 취입 섭외차 함평 자택을 방문했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제자들이 오늘은 허지 마라 해도 우리 집에 와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이렇게 늙었어도 보기 싫지 않으니까 오는 갑소. 고맙제라.”
  2005년 김화선 명창 함평 자택에서 열린 국악음반박물관 판소리연구회 주최 김화선(김여막) 적벽가 감상회 직후, "앞으로 건강하면 한번은 더 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것이 마지막 작별일 지도 모르겄소. 잘 가시오." 하며 당시 78세 김화선 명창은 자택 대문을 나서는 손님들의 손을 꽉 잡았다.(노재명, “판소리·전통춤·가야금 명인 김화선(김여막)의 삶과 예술” 『'김화선(김여막)의 국악세계' 음반 해설서』 CKJCD-012, 1CD, 2009년, 음반 섭외·기획·해설 집필:노재명, 4~9쪽)
  '김화선(김여막)의 국악세계' 음반이 발매되어 CD 200장을 2009년 11월 22일 김여막 명창의 전라남도 함평 자택에 노재명이 직접 갖다 드렸는데 CD를 들어볼 수 있는 기계가 없다고 하셔서 시내 전자제품 판매소에 가서 오디오를 하나 장만해 드렸다. 그 후 김화선 명창을 못만났고 김화선 명창의 함평 자택 전화번호는 결번이 되었고 후손 연락처는 변경되어 연락이 두절되었으며 한국통신 등 백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김화선 명창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3. 단가 <함평천지>(호남가) 녹음자료

(1) 단가 <함평천지>(호남가) 곡명과 전승 양상

  <함평천지>, 일명 ‘호남가’는 호남 지역의 지명을 절묘하고 재치있게, 혹은 의미심장하게 관련 사설을 나열하며 판소리 단가로 엮어 부르는 소리이다.
  내두름이 “함평천지~”로 시작되기에 예전에는 <함평천지>라는 단가명으로 불리기도 하였고 임방울(1904~1961년)이 즐겨 불러 임방울제가 유행한 이후 오늘날에는 <호남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김종기는 1932년, 김유앵은 1934년, 모추월은 1938년에 이 단가를 <함평천지>라는 곡명으로 유성기음반에 취입했으며 박소춘은 1937년 6월 11일, 모추월은 1939년 1월 27일에 경성방송국 라디오에 출연하여 이 단가를 <함평천지>라는 이름으로 방송을 하였다.
  안숙선은 1978년 가야금병창 음반(유니버어살레코오드사 UL-7806, 1LP)에 <함평천지> 이름으로 녹음을 했고 김화선도 <함평천지>라는 곡명으로 음반에 녹음하였다.('김화선(김여막)의 국악세계' 음반, CKJCD-012, 1CD, 2009년) 그리고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카세트테입(MC) 관리번호 MIMC-1815 박봉술 판소리 인간문화재 유품 카세트테입(33)을 보면 박봉술이 이 단가의 곡명을 <함평천지>라고 기록해 놓았다. 오비취는 1934년에 이 단가를 가야금병창으로 특이하게 <태평천지>라는 이름으로 유성기음반에 녹음하였다.
  함평 출신 명창 중에서 정창업·정학진·강장원·임유앵·임춘앵은 단가 <함평천지>(호남가) 녹음을 한 바 없으나 부를 줄은 알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단가 <함평천지>(호남가)는 중모리 장단으로 불리며 호남 각지의 지명을 풀어 임금의 성덕을 송축하므로 송도가로 분류되기도 한다.
  <함평천지>(호남가) 가사는 조선 후기에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이서구(1754~1825년)가 지었다는 설도 있으나 현재 판소리 단가로 불려지고 있는 <함평천지>(호남가)의 사설을 살펴보면 신재효본의 <호남가> 사설만을 쓰고 있다.
  신재효본 이외의 전해지는 이본(異本)으로는 『악부』(樂府), 『가집』(歌集) 등에 보이는 <호남가>가 있으며 일본 천리대 소장 <호남가>, 대전 장택수 소장 <조선팔경가> 중의 <호남가> 등이 있다. 그리고 단가의 사설로 보이지는 않지만 <팔도가>의 전라도 부분은 일종의 <호남가>라 할 수 있어서 예전에는 오늘날 전해지는 단가 <함평천지>(호남가)의 사설과는 다른 많은 <호남가>가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다.
  판소리 명창들이 불러온 이 단가 사설의 형성은 신재효 일인의 창작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팔도가> 중 <전라도가>, 해동유요본 <호남가> 등 여러 형태의 <호남가>를 토대로 형성된 <호남가>를 신재효가 정리 수집한 것이라 할 수 있다.(이진원, “단가 <호남가> 형성과 변화 연구” 『한국음반학 제10호』 서울:한국고음반연구회, 2000년, 187·205쪽)
  판소리 단가 <함평천지>(호남가)에서 함평 지명이 제일 먼저 등장하는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함평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보랴 허고 제주 어선 잡어(빌려) 타고 해남으로 건너갈 제” 하는 초입부로 봐서 이 단가 내용의 주인공은 광주가 고향인 함평에 거주하는 노인이고 제주도에서 해남을 거쳐 광주로 이동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신재효 당대 함평 출신 명창 정창업은 “함평천지~”로 시작하는 이 단가와 지명상 관련이 있어 보인다. 철종(1831∼1863년), 고종(1852~1919년) 시대 활약한 정창업의 판소리 이론 스승 신재효(1812~1884년)가 이러한 단가 가사를 정리하였고 정창업의 제자 정정렬(1876~1938년)은 이 단가를 유성기음반에 녹음하였다. 스승 신재효와 제자 정정렬 모두 이 단가와 관계가 있으니 그 중간 인물 정창업도 계보상 이 단가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 단가의 주인공인 함평천지 늙은 몸이 어쩌면 함평 출신 명창 정창업 본인처럼 여겨져 신재효가 정리한 가사를 보고 새로 작곡, 또는 기존의 곡을 편곡하거나 기존의 곡조 그대로 즐겨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신재효가 이 단가 사설을 정리하기 이전에도 이 곡을 작곡하여 부른 명창들이 있었겠으나 신재효는 판소리 이론과 가사를 새로 정립하고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신재효 제자 정창업이 만일 이 단가를 불렀다면 스승 신재효 이념에 맞게 새롭게 이 단가를 짰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진다. 정창업이 ‘자가 특색으로’ 소리를 했다는 『조선창극사』 기록 또한 그럴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예전에는 해안가에서 풍랑 사고가 많고 먹거리가 풍성하고 교역이 활발해 무속이 성행하였고 풍류가 발달하여 무악, 판소리 등과 관련이 깊은 국악 명인 명창 가문이 해안가를 따라 집단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정창업 가문도 황해와 접한 함평에 터를 잡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단가 <함평천지>(호남가)에 나오는 제주도가 언뜻 봐서는 판소리와 무관하게 생각될지 모르나 실제는 판소리와 관련이 깊은 곳이고 제주도가 호남의 행정구역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제주 지명이 나오게 된 것이라 하겠다.
  정창업 앞세대 명창 송광록은 수많은 명승지, 독공하기에 적합한 근거리 지역 모두 마다하고 교통 면에서 거리상, 비용상 멀고 낯설고 가기 어려웠던 오지 제주도로 5년간 소리 공부를 하러 갔다.(1930년 11월 26일자 『매일신보』 김창룡 증언, 정노식 『조선창극사』 기록) 그것은 단지 독공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급 귀명창일 수 있는 일부 지식층의 유배지였던 제주도에서 송광록이 소리 공부를 했다는 점, 그가 제주도에서 5년간의 생활을 마치고 목포로 돌아오는 길에 심청가 중 <범피중류>를 작곡했다 하는데 그 가사에 한문이 많다는 점, 5년 동안 제주도에 체류하며 송광록이 소리 공부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어떤 후원자의 존재 가능성,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례를 감안한다면 송광록은 유배되어 제주도로 가게 된 어떤 부호 지식인, 평소 교류가 있던 상류층 후원자(귀명창)를 따라간 것이 아닌가 싶다.

  “어느 정도 기량을 연마(硏磨)시켜서 큰 뜻을 품고 제주도로 공연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제주도로 공연을 떠나게 된 목적은 당시 제주도에 유배(流配)되어 계시는 박영효(朴泳孝·1861~1939) 궁내부대신(宮內部大臣)께서 1907년 대신 암살 음모사건으로 유배되었을 때 그 어른을 위로하기 위하였읍니다. 한참사께서 단원들을 인솔하고 가서 농악과 민요와 창극 등을 공연하여 위로해 드렸으니 고도(孤島)에 외롭고 적적하게 지내던 박영효 대신께는 더할 수 없는 위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진도 협율단이 위로공연을 하고 돌아온 후 한참사 어른과 박영효 대신간에 자주 서신이 왕래하여 친분이 두터웁던차 박영효 대신이 유배된지 1년만에 귀양이 풀려 나오게 된다는 연락을 받고 한참사 어른께서는 단원들과 같이 소달구지에 말을 싣고 가 벽파진 부두에서 기다리다 박영효 대신을 뵙고 귀양길에 식솔들과 드신 쌀을 배에 실어 주셨읍니다. 조정에 돌아가서 진도 한참사의 고마움에 답례(答禮)하는 뜻으로 목포선대(木浦船垈) 목포시 온금동쪽 반절을 하사(下賜)받도록 해주셨다고 합니다.”(허옥인 편저, 『진도 속요와 보존』 전남 진도:진도민요보존회, 1986년, 15~16쪽)

  송흥록이 당대 지식층 유배지 함경도로 가서 말년을 보내다 생을 마감한 것 역시 앞서 밝힌 그의 아우 송광록이 유배지였던 제주도로 5년간 가서 생활한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어쩌면 제주도, 함경도와 같은 유배지가 한때 떠돌이 광대패에게는 외롭게 지내고 있던 문신(文臣)들을 상대로 한 황금시장이었을지 모른다. 만일 그러했다면 송흥록, 송광록과 같은 명창들에게 유배지의 문신들은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판소리에 심어주고 사설을 가다듬어 주었을 게다.
  송흥록, 송광록 시대나 그 후 일제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명창들은 거의 대부분 지배계층의 비호와 재력에 의존해 살아갔다. 특히 어전소리를 추구했던 큰 광대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 사례는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송흥록, 박유전 등 여러 명창들이 그러했다. 박유전이 대원군의 총애를 입어 무과 벼슬을 받은 후 민비의 난으로 대원군이 중국으로 망명하자 전남 나주로 피신을 하였고 대원군이 다시 득세하자 박유전 역시 또다시 한양으로 복귀하였다. 대원군이 세상을 떠난 후 박유전은 슬픔에 잠겨 전라도 어느 마을에서 한겨울에 굶어 죽었다 한다.
  이 경우처럼 송흥록, 송광록 형제는 평소 자신들을 진정으로 알아준 귀명창 고위관리 유배자를 따라 제주도, 함경도 마다 않고 오지라도 선뜻 나섰을 가능성이 높다.(노재명, “경기도 중고제 판소리의 특징” 『'경기 판소리' 음반 해설서』 경기도국악당 교욱부연구부/티앤씨매니저먼트 TNC-250309, 1CD, 2004년 11월 원고 집필, 2005년 1월 제작 발매)
  판소리 단가 <함평천지>(호남가)는 어쩌면 이러한 명창들의 활동 분위기처럼 제주도에서 판소리 독공을 마치고 육지로 나오면서 유람, 유랑하는 장면이나 혹은 유배를 마친 관리 지식인이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오면서 나타낸 심정이 담겨있는 것일 수도 있다.
  정창업 제자 정정렬이 녹음한 단가 <호남가> 음반은 기존 곡을 새롭게 짜서 부른 것이라는 일부 가설도 있으나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정정렬의 단가 <호남가> 음반은 정정렬이 정창업 문하에서 배운 소리에 충실한 녹음이라고 여겨진다.
  정정렬이 물론 작편곡에 엄청난 재능과 활동을 보였으나 정정렬의 단가 <호남가> 음반은 오늘날 흔히 알려져 있는 임방울제 <호남가>보다 대마디 대장단으로 끊지 않고 말하듯 자연스럽고 소탈하게 발성하는 고형의 내두름이고 붙임새, 창법이 고풍스럽기 때문이다. 정정렬의 단가 <호남가> 일부는 임방울제 <호남가>와 유사한 점도 있고 기존 <호남가>에 정정렬이 두드러지게 첨가한 점은 방울목이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단가는 판소리의 기초가 되고 스승한테 배우는 가장 표목이 되는 소리라 할 수 있기에 이 <호남가>는 정정렬이 정창업 문하에서 익힌 가장 교과서적인 스승의 서편제 소리라고 판단된다.
  정정렬은 부모가 7세부터 정창업 문하에 들여 보내서 판소리 공부를 시켰는데 정창업은 정정렬과 당시 한 마을에서 살았다. 이 마을은 정정렬 고향 익산인지 정창업 고향 함평인지 불확실하나 어린 정정렬을 부모가 정창업 문하로 보냈다는 기록 등으로 봐서 함평일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인다.(노재명, “신(新) 서편제 명창 정정렬” 『‘서편제 판소리(소리:김창환·정정렬)’ CD음반 해설서』 서울:명인기획/엘지미디어 LGM-AK010, 2CD, 1996년 제작. 녹음 고증·음반 기획·해설·사설 채록·사진 제공:노재명, 22~34쪽 발췌)
  고수·판소리·피리 명인 정원섭은 정정렬 동생이고 정원섭도 정정렬과 함께 정창업 문하에서 판소리를 학습했을 수 있다. 정정렬, 정원섭 형제는 정창업 명창과 친척지간이다.(정노식 저서 『조선창극사』 216쪽)
  <호남가> 녹음을 남긴 명창 중에서 정정렬은 연령상 가장 오래전 사람이고 따라서 정정렬의 녹음은 가장 오래전 사람의 <호남가> 자료라 할 수 있다. 또한 유성기음반으로서는 유일하게 앞면과 뒷면에 걸쳐 이어서 이 <호남가>를 정정렬이 녹음하였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그 만큼 정정렬이 이 단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정정렬의 <호남가> 음반에서 고수를 맡은 한성준이 음반 취입 섭외, 선곡에도 많은 관여를 했고 중요한 곡은 상업성을 떠나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에 적극 앞장섰으므로 이 <호남가>는 정정렬의 스승 정창업 서편제의 표준이 될 수 있다고 보아 여타 <호남가>와 달리 두 면에 걸쳐서 길게 <호남가>를 기록으로 남기도록 했을 가능성이 있다.
  임방울이 부른 <호남가>도 음악 특성상 서편제 계열의 소리를 전수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 소리는 계보상 공창식 문하에서 익혔거나 임방울의 외숙인 김창환에게 배웠을 가능성도 있다. 공창식은 김채만 제자고 김채만은 이날치한테 소리를 익혔으며 김창환은 정창업 문하에서 소리를 배웠으니 임방울 <호남가>가 만일 김창환에게 공부한 것이라면 임방울 <호남가> 또한 정창업으로부터 퍼진 소리일 가능성이 있고 아니면 이 단가만은 김채만-공창식-임방울 계보로 전수된 소리일 수도 있다.
  임방울 또한 함평에서 거주한 바 있고 임유앵, 임춘앵 같은 함평 명창들과 친척지간이며 평소 단가 <함평천지>(호남가)를 특기로 즐겨 불렀다는 점에서 임방울도 함평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명창이라고 하겠다.


(2) 단가 <함평천지>(호남가) 유성기음반 목록

  이 목록은 명창 이름 가나다순으로 하고 한 명창이 여러번 이 곡을 취입한 경우 녹음 연대순으로 음반이 나열되어 있다. 총 11명의 명창이 녹음한 12종의 유성기음반을 목록화 하였다.
  여기 정리되어 있는 음반 외에 임방울이 1933년 시에론레코드에서 취입한 단가 <호남가> 유성기음반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나머지 단가 <함평천지>(호남가) 유성기음반은 여기 모두 수집, 정리된 상태이다.(노재명 편저 『판소리 음반 사전』 서울:이즈뮤직, 2000년)
  이 가운데 정정렬 단가 <호남가>는 신재효가 가사를 다듬어 정리한 것을 정창업이 작편곡, 또는 기존의 곡조대로 전수한 것으로 보이는 소리를 배워 녹음한 것으로 짐작된다. 김종기·김병호·김옥진·김유앵·김봉란 단가 <함평천지>(호남가)는 들어보면 소리 특성상 임방울제인 것으로 보이고 오비취 단가 <태평천지>, 이중선·주난향·하농주 단가 <호남가> 음반은 어떤 계보로 전승된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 김금암(김병호) 가야금병창 단가 <호남가>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유성기음반(SP) 관리번호 MISP-3078(1936년 녹음)
Okeh 1996(K501) 南道雜歌 湖南歌 金錦岩 長鼓朴太順

○ 김봉란 가야금병창 단가 <호남가>
MISP-1254, MISP-1960(1950년대 녹음)
Oasis 5651 短歌 湖南歌 가야금倂唱金鳳蘭 鼓手閔玉香

○ 김옥진 가야금병창 단가 <호남가>
MISP-3501(1934년 녹음)
Victor 49315-A 短歌 湖南歌호남가 伽倻琴並唱金玉眞 杖鼓李素香

○ 김유앵 단가 <함평천지>
MISP-1233(1934년 녹음)
Kirin C.196-A(K392) 短歌 咸平天地 金柳鶯

○ 김종기 가야금병창 단가 <함평천지>(호남가)
MISP-1896(1932년 녹음)
Okeh K.1548-A 伽倻琴並唱 咸平天地 金宗基 長鼓朴綠珠

○ 오비취 가야금병창 단가 <태평천지>
MISP-2191(1934년 녹음)
Regal C268(1 R40) 伽倻琴並唱 泰平天地 吳翡翠 鼓韓成俊

○ 이중선 단가 <호남가>
MISP-1723(1932년 녹음)
Chieron Record 62-A 短歌 湖南歌 李中仙 長鼓金玉眞

○ 임방울 단가 <호남가>
MISP-0038, MISP-1214, MISP-1808, MISP-2850, MISP-3417(1929년 녹음)
Columbia 40085-A(20844) 短歌 湖南歌 林방울
MISP-0178(1933년 녹음)
Okeh 1620(K862) 短歌 湖南歌 林방울 長鼓金宗基
MISP-1031(1933년 녹음)
Okeh K.1620-A 短歌 湖南歌 林방울 長鼓金宗基
MISP-1207, MISP-1765(1933년 녹음)
Okeh 1620(K862) 短歌 湖南歌 林방을 長鼓金宗基
* ‘임방을’은 임방울의 오자.
MISP-2076(1933년 녹음)
Okeh Record 1620(K862) 短歌 湖南歌 林방울 長鼓金宗基

○ 정정렬 단가 <호남가>
MICD-6116(1934년 녹음)
Victor Star KS-2002(6149) 49291A 短歌 湖南歌(上) 丁貞烈 鼓韓成俊
Victor Star KS-2002(6150) 49291B 短歌 湖南歌(下) 丁貞烈 鼓韓成俊

○ 주난향(주송사) 단가 <호남가>
MISP-1832(1932년 녹음)
Taihei 8042-A 短歌 湖南歌 朱蘭香 長鼓韓成基

○ 하농주 단가 <호남가>
MISP-2107(1932년 녹음)
Okeh K.1566-A 短歌 湖南歌 河弄珠 長鼓崔素玉


4. 함평 판소리 명창 관련 사진자료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관리번호 MIPHOTO-00325
1995년 9월 14일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에서 판소리 인간문화재 정광수 모습.
정광수는 함평 출신 판소리 대가 정창업의 손자이다. 노재명 촬영.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정창업 제자 김창환 명창 모습.
정창업 명창은 김창환, 정정렬 같은 제자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쳤다.(정광수 증언)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관리번호 MIPHOTO-05715
정창업 제자 정정렬 명창 모습.
정정렬은 이동백, 송만갑, 김창환, 김창룡과 더불어 근대 판소리 5대 명창으로 꼽히는 이로서 1934년에 단가 <함평천지>(호남가) 유성기음반을 녹음했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관리번호 MIPHOTO-05583
고수·판소리·피리 명인 정원섭 모습.
정원섭은 정정렬 동생이고 정원섭도 정정렬과 함께 정창업 문하에서 판소리를 학습했을 수 있다. 정정렬, 정원섭 형제는 정창업 명창과 친척지간이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관리번호 MIPHOTO-05104
함평 출신 판소리 명창 강장원 1950년 모습.
강장원은 중고제 판소리 명창 이동백의 수제자이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함평 출신 판소리 명창 임유앵 모습.
임유앵(본명:임복녀)은 판소리 명창 강장원의 부인이며 판소리 명창 임춘앵의 친언니, 명창 김화선의 사촌언니이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문헌자료 관리번호 MIBOOK-1633
함평 출신 판소리 명창이자 명무, 국극인 임춘앵(본명:임종례) 국극 장면이 앞표지에 실린 『야담 1956년 9월호』(서울:희망사) 서적.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함평 출신의 판소리·전통춤·가야금 명인 김화선(김여막) 중년 모습.
김화선(예명)의 본명은 김여막, 옛 예명은 김해선이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김화선 명창의 부친 김안식(김해 김씨, 함평 태생, 명창 김안식과 동명이인) 모습.
김화선의 부친은 국악을 좋아했다. 국악인 임유앵, 임춘앵 자매의 모친이 김화선의 고모(김화선 부친의 누나)이다. 이러한 관계로 봐서 이 일가는 세습 국악 명가문이라고 여겨진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단가 <함평천지>(호남가)를 즐겨 불렀던 판소리 명창 임방울 모습. 임방울은 1930년대부터 1961년 작고할 때까지 가장 인기가 많았던 남성 판소리 스타로서 함평에서 거주한 바 있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1934년 경성방송국에 출연한 가야금·거문고 명인 김종기 모습.
김종기는 1932년 <함평천지>라는 곡명으로 가야금병창 유성기음반을 취입했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유성기음반(SP) 관리번호 MISP-1896
김종기 가야금병창 단가 <함평천지>(호남가) 1932년 녹음 유성기음반. 장고:박록주.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판소리 명창 김유앵 모습.
김유앵은 1934년 <함평천지>라는 곡명으로 단가 유성기음반을 취입했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유성기음반(SP) 관리번호 MISP-1233
김유앵 단가 <함평천지>(호남가) 1934년 녹음 유성기음반.


5. 함평 판소리 문화의 전승과 발전을 기원하며

  일제 강점기 때 식민 교육으로 판소리 등의 국악은 낙후됐다, 몹쓸 거다, 기생들이나 하는 거다, 이렇게 천시하는 교육을 강제로 주입시켰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 스스로 우리 것을 버리게 되는 참사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판소리는 한때 유행 지나면 그냥 버려도 되는 문화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소중한 가치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미래 22세기,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미래 음악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명창들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한 성악 예술이 바로 판소리이다. 판소리는 반드시 꼭 이렇게 불러야만 된다 하는 게 아니라 심지어는 떡목을 가진 목소리가 안좋은 사람도 명창으로 될 수 있게끔 인도를 해주고 노력하면 명창이 될 수 있었던 풍요로운 문화 환경,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고 극대화 시킨 자연적인 민주주의라고 생각되는데 이것이 홍익인간 정신의 실천이라 하겠다.
  누가 더 잘 났다가 아니라 못나게 보는 사람 없이 각자 가진 개성을 다 존중하여 강하게 표출된 것이 고제, 중고제, 호걸제, 동편제, 서편제 같은 판소리이고 그래서 이런 점들이 오늘날에도 많은 교훈과 힘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한국이 앞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가 된다고 하는데 그런 원동력이 바로 자연적인 민주주의, 홍익인간 정신에 있다고 본다.
  판소리 명창들의 대표적인 단가 <함평천지>(호남가)의 첫머리에 함평 지명이 나오고 정창업 같은 판소리 대가가 탄생한 곳이 함평이라는 점, 그리고 근현대 최고의 판소리 명창이자 국악계 스타였던 강장원·임유앵·임춘앵이 함평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함평이 판소리 분야의 중요한 성지라고 할 수 있는 흔적들이다.
  함평에서는 매년 ‘전국 호남가 국악경연대회’가 개최되고 있으며 한국국악협회 함평군지부의 판소리 명창인 박행님 지부장(함평나르다예술단 단장)이 판소리 등 국악 보급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박행님 명창은 함평국악협회 회장을 역임한 박문식 명인의 딸로 안애란 명창에게 춘향가를, 김순자 명창에게 심청가와 흥보가를 사사했다.
  그리고 김화선 명창의 제자 황금덕은 음력 1949년 11월 13일, 양력 1950년 1월 1일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기각리 신기산 778번지에서 태어나 2000년부터 김화선 문하에서 판소리와 고법을, 2003년 추정남 문하에서 고법을 사사하였다.
  김금주는 15세 무렵에 김화선(당시 30여세)한테 함평군 대동면 김화선 자택에서 판소리를 사사했고 현재 남원에서 살고 있다.
  앞으로 함평 출신 정창업·정학진·강장원·임유앵·임춘앵·김화선 명창, 정창업 스승 신재효, 정창업 일가친척인 정정렬·정광수 명창과 정원섭 명고수, 정창업 제자 김창환, 함평에서 거주한 바 있는 임방울·김선일 명창, 함평 출신일 가능성이 있고 함평에서 살았던 김안식·정계선·배화봉 명창, 함평의 피리 명인 오영주·정산옥, 대금 명인 임봉○, 강장원 아들인 가야금 명인 강문득, 그리고 김화선 제자 황금덕·김금주, 오늘날 함평 국악계를 이끌고 있는 박행님 명창을 함평의 판소리를 비롯한 국악 관계 명인 명창으로 주목했으면 한다.
  그리하여 함평 판소리 문화의 전승과 발전을 위해 이들의 소리와 업적을 연구하여 원동력으로 삼고 적극 협력하여 다시금 함평이 미래 판소리를 선도하는 고장이 되기를 기원한다.
  여기에 기록한 단가 <함평천지>(호남가) 곡명과 전승 양상에 대한 견해, 단가 <함평천지>(호남가) 유성기음반 목록과 분석 글, 함평 판소리 명창 관련 사진자료 대부분이 이 지면을 통해서 처음으로 발표 소개되는 것이다. 이 글은 2018년 10월 21일 완성되었다.

2020-08-15
 

Powered by GodoTech
Copyright (C) 2000 국악음반박물관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