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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경기 판소리' 음반 해설서(경기도국악당 교욱부연구부/티앤씨매니저먼트 TNC-250309, 1CD, 2004년 11월 원고 집필, 2005년 1월 제작 발매)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경기도 중고제 판소리의 특징<2>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2.판소리의 주요 기능과 초기 경기도 판소리의 특징
판소리의 구실은 무엇인가? 이러한 문화가 발생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단지 보고 들어서 웃고 즐기라는 유희의 차원만은 아니라고 본다.
판소리 명창들의 곡예하는 듯한 목놀음에 감탄하고 귀와 눈만 보기 좋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더욱 깊은 의미와 참된 기능이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역시 신라시대 화랑의 정신과도 통한다고 본다. 마음을 닦고 무예, 가무악, 학업을 연마하고 신에 대한 투철한 신앙심을 지녔던 그 옛날 화랑 집단의 전통이 바로 판소리에 나타난다.
단지 오락이 아니라 이 판소리로서 명창이나 청중이나 진정한 사랑, 충효, 가족 화목, 의리, 세상사 희노애락, 처신술, 건강, 마음 수양을 쌓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이동백이 판소리를 하게 된 동기 역시 심청가를 접한 후 소리하는 것이 퍽 의미있고 값진 일이라 여기고 자신도 이 길로 들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효심이 생기게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에 어떠한 힘과 신비로운 그 무엇이 그렇듯 많은 사람들을 판소리에 매료케 하고 명창은 어떻게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우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닌 것이 육안으론 볼 수 없지만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가. 그럼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고 옛 선조들은 바로 이러한 소리로서 병도 고치고 세상도 화평하게 만들 수 있고 적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마치 나비효과와도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파장이 멀리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진작 알았는지 모른다.
환자굿에서 무당의 노래와 악기 소리, 국민들의 정서를 안정시켰다는 여민락 음악, 호남 무녀가 씻김굿 등을 할 때 정주를 사슴뿔로 쳐서 소리를 내야 멀리 하늘에까지 지상 사람들의 염원과 뜻이 잘 전달될 수 있다고 여긴 것, 적을 물리쳤다는 만파식적 이야기가 바로 소리 파장이 발산하는 기능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이밖에도 수제천, 풍물굿과 같은 음악으로 농약 없이 질 좋은 농산물을 생산했다는 사례들, 판소리계에서는 가왕 송흥록의 귀곡성과 명창 이날치의 <새타령>에 얽힌 이야기, 명창들이 소리로서 거만한 고위 관리를 의자에서 떨어뜨렸다든지, 소리로서 기고만장하던 양반의 몸을 벌벌 떨게 하였다든지, 건방진 후배 명창을 소리로 기세를 꺾고 사람 되게 하였다든지 하는 일화들이 많다.
또 판소리는 종교적인 측면도 품고 있다고 보여진다. 우선 방진관과 같은 예전 판소리 광대들 몇몇이 행한 구실 가운데 홍패 고사가 주목된다. 홍패 고사는 전통사회에서 광대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집에 불려 가서 그 집안의 부귀를 하례하는 덕담을 외우는 것인데 그러고 보면 단가의 기능 또한 계몽적인 내용과 덕담이라 할 것이다. 듣는 이들이 매사 잘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과 여러 사람을 상대로 이를 노래한다는 것 자체가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와 관련된 점을 더 꼽자면 대다수 판소리 광대들의 출신이 종교 집단인 무속 가문이며 변강쇠타령과 적벽가의 중요 대목에 장승이 나오고 춘향가에 독경 봉사 등장, 수궁가에서는 도사가 출현한다. 그리고 단가를 예전에는 영산이라 하였고 심청가, 흥보가의 반전 부분에 <중타령> 등 불교 관련 내용들이 있다.
그리고 박송암, 문구암 스님은 필자와의 대담시 범패가 판소리 음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하였다. 실제 비교해 보아도 범패의 창법, 저음 단전 성음 등은 이동백, 김창룡의 중고제 판소리 유성기음반 녹음과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가왕 송흥록은 12세 때 백운산 월광선사에게, 이동백은 진주 리곡사 옥천암에서 옥천대사에게 염불 공부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동백, 송만갑, 정정렬과 같은 명창들은 만년까지 소리를 탐구하였고 지나가다 문득 동해안 별신굿의 특이한 장단만 들려도, 소 울음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정도였다. 오래전부터 판소리 명창들이 득음을 위해 잡가, 굿노래, 정가 등 가림없이 섭렵해 가면서 깊은 역사와 차원 높은 창법을 지닌 불교 성악에도 자연히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문헌 기록에 보이는 바와 같이 그 옛날 정춘풍, 김정근, 박기홍 같은 우리네 음률에 두루 달통한 명창들이 출현할 수 있었다 하겠다.
그런 면에서 염계달, 방만춘, 한송학, 송만갑, 유공렬, 정정렬을 비롯한 옛 명창들이 유독 절에서 다년간 독공을 많이 한 것 역시 판소리와 불교 성악과의 관련성에 있어 예사롭지 않은 점이라 하겠다.
범패가 중요하게 쓰이는 불교의식 영산재에 동원되는 절밖의 삼현육각 악사들 역시 판소리 명창들과 같은 광대 집단이라는 점, 박송암 스님이 필자와 대담시 영산재에 참여하는 민속악 집단을 광대패라 말한 점, 전통사회 절에 거사와 사당패가 머문 점도 주목된다.
정노식이 언급한 이날치의 <새타령> 일화가 익산 부근 심곡사에서 목격된 것이라든지 수많은 명창들이 늘 절과 가깝게 지낸 점, 절의 예술 문화가 판소리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준 데는 그럴 만한 사회 분위기가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고 보면 경기도 안성의 바우덕이를 비롯한 청룡사 사당패와 남사당패, 안성에 터를 잡은 명창 김석창의 후손들, 그 인근으로 화성 재인청 출신 이동안을 비롯한 수원 도당굿 무속인들, 여주 명창 염계달, 안산 명창 이석순, 말년에 평택에서 활동한 명창 이동백, 그리고 안성, 장호원 일대에서 활약한 판소리 명고수이자 줄타기와 춤의 명인이었던 강경수의 일가, 장호원 명창 백점봉의 상호 활동 영향 관계 또한 비범해 보인다.
판소리 명창들이 전통 민간 종교 가문 출신이라는 것, 소리가 심신에 영향을 주고 치료 혹은 역으로는 사람을 다치게 하는 전시 음파 무기도 될 수가 있고 농작물도 소리로서 양질의 재배를 할 수 있다는 전통 믿음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보면 명창은 고대사회의 무속인들이 행한 음파 심신 치료사의 연장선상에 있다 할 것이고 판소리의 가장 중요한 구실은 바로 음파 치료 약재였다 할 것이다.
고수와 청중의 추임새는 짧은 외마디이나 단전에서 힘차게 뽑아내어 마치 택견이나 태권도에서의 기압 소리와 같이 명창의 기운을 북돋아 줄 뿐아니라 추임새를 넣는 본인들에게도 운동할 때의 기압과 같은 효과로 작용하여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리라 본다.
명창과 고수는 양과 음을 이루고 명창의 계면조와 우조, 북의 식물성 나무통과 동물성 가죽 소리, 그리고 저음과 고음의 추임새 소리도 각각 음과 양을 적절히 이루어 결국 우리네 전통적인 가치관에 따라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소리로서 노래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에게나 심신의 음과 양 기운 또한 균형 조절을 해주었다 할 것이다.
옛부터 명창들이 천신만고 끝에 득음하여 추구하고자 했던 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범죄 없는 평화로운 세상으로, 심청가를 통해서는 효심을 갖게 하고 흥보가로 형제간 화목하게, 춘향가로 진실한 사랑을 나누게, 이 세상 사악한 마음을 씻어내려 한 것이라 하겠다.
명창들의 득음한 소리가 아직 과학으로 밝혀내진 못한 심신 치료에 적합한 신비로움인지, 아니면 단지 전통적인 가치관과 믿음에 따라 그리 행한 것이고 아무런 과학적 치료 효과가 없는 것인지 명확히는 알 수 없으나 조상들이 눈에 안보이는 소리 음파를 상대방에게 전하여 심신을 올바른 쪽으로 움직여 건전하고 좋은 세상 이룩하고자 했던 마음과 의도는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가.
이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아기에게 곤히 잠들기를 바라면서 자장가를 정성껏 들려주는 어머니의 따스한 마음과 맥을 같이 한다 할 것이고 이런 훈훈한 정서를 품은 문화들이 존재한 사회가 정말 살 맛 나는 세상 아니겠는가 싶다. 이러한 문화 맥락은 중국 소수민족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전통적인 사랑 고백 노래에서도 그와 유사한 기능과 가치관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렇듯 화평하고 아름다운 세상 만들어 보고자 옛 명창들이 추구한 중고제에 해당되는 초기 경기도 판소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사실 박기홍-박록주로 이어진 동편제 소리를 예로 보자면 그 계보에 속한 오늘날의 젊은 명창들에게 박록주가 박기홍한테 어려서 배우고 녹음한 유성기음반을 들려주면 선뜻 이해를 하지 못한다. 이처럼 전승 계보가 뚜렷한 경우도 몇 단계를 거쳐 전승이 되고 세월이 흐르다 보면 세상의 미적 유행에 맞춰 명창마다 제각각 소리를 조금씩 바꿔 부르게 되니 그러하다.
하물며 오늘날 경기도에서 이 지역 나름의 중고제 자취 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에서 초기 경기도 판소리가 어떠했을까를 되새겨 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라 하겠다.
다만 옛 유성기음반 가운데 고형의 경기 판소리 흔적을 알 수 있는 녹음들과 고문헌에 이 지역 판소리의 면모가 일부 표현되어 있기에 이로서 얼추 파악해 볼 수밖에 없다.
우선 고문헌에 중고제가 경기, 충청권에서 전승되었다는 기록과 충청도 출신 명창들이 경기도 지역과 거리상, 혈연상, 거주 이동 면에서나 깊은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일부 그 해답을 얻을 수 있겠다.
충청도 공주 광대 김석창의 후손이 경기도 안성 일대로 이주하여 예술 활동을 했고 충청도 서천 사람 이동백은 만년에 경기도 평택에서 살다 작고했고 이동백 초기 활동시 그의 수행고수였던 강경수가 경기도 안성에서 살았다는 점, 고제에 정통한 충청도 서천 출신 김창룡이 일제 때 수많은 명창들을 대표하여 염계달, 모흥갑, 이석순과 같은 옛 경기 명창들의 더늠을 유성기음반에 녹음했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그리고 경기도와 충청도가 무속 등 여러 전통예술 분야에서 같은 문화권이고 또한 중고제 전승에 있어 과거 같은 권역으로 분류되었다는 점, 경기 충청권 명창과 고수가 어우러져 판소리를 했던 점들을 고려해 보면 초기 경기도 판소리는 녹음으로 남아있는 충청도 출신 김창룡, 이동백, 심정순, 방진관의 중고제와 매우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녹음을 비교해 보아도 경기도 장호원 사람 백점봉의 초기 단가 <별조유람가>는 충청도 명창 이동백의 단가 <죽장망혜>나 <천리강산>과 닮았고 경기도 과천 출신인 임명옥, 임명월 자매의 춘향가 중 <군로 사령 술주정> 녹음은 충청도 명창 심정순의 동일한 대목 유성기음반과 매우 유사한 소리 진행 방식을 보인다.
그리고 김창룡이 유성기음반에 남긴 염계달, 모흥갑, 이석순제 경기 판소리는 녹음이 남아있는 여타 명창(특히 전라도 명창)들의 소리와는 확연히 다르고 이 소리들이 바로 현존하는 녹음 가운데 초기 경기 판소리에 가장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김창룡이 대선배 염계달, 모흥갑, 이석순과 같은 옛 경기 명창들의 판소리를 방창한 이 녹음을 들어보면 흡사 경기 잡가와도 같은 이 지역 특유의 어법이 스며있다.
또 일제시대 경상도에 거주하며 고형의 동편제(중고제에 가까운 소리)를 구사한 이선유의 유성기음반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의 춘향가 중 <이별가>, 수궁가 중 <새타령> 등 여러 녹음에서 모흥갑제를 비롯한 경기 충청권의 중고제 흔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마이크나 스피커 같은 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소리를 멀리까지 힘차게 내질러야 했기 때문에 잔기교는 부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옛날 호걸제나 덜렁제와 같이 힘차게 질러대는 소리가 나왔을 것이고, 그런 소리제가 야외 소리판에서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따라서 옛 명창들은 붙임새나 장단 공부보다는 소리를 우렁차게 내지를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하는 데 가장 주력했을 것이다. “권오성의 원담소리, 방덕희의 우레목통, 조관국의 한거성”이라고 한 『게우사』의 기록과 “모흥갑의 덜미소리는 십리 밖까지 들렸다”는 『조선창극사』의 기록이 그런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근대 명창들까지 구사, 존재했던 통성이라는 것이 결국 그러한 점과 맥을 같이 한다. 김명환이 증언한 이날치 소리가 어디까지 들렸다, 송만갑이 소리하고 나면 천장에서 먼지가 다 떨어졌다, 장판개가 소리를 하면 방안의 문고리가 흔들렸다는 것도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김명환의 말 중에서 통성으로 하는데 어떻게 체조를 헐 것이요라고 한 것처럼 멀리까지 힘차게 지르기도 바쁜데 어떻게 많은 기교를 부릴 수 있겠는가. 단순한 기교와 담백한 곡조, 그리고 멀리까지 크게 지르는 것이 판소리 초창기엔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초기 경기 호걸제와 중고제 역시 그러했으리라 본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멀리, 크게만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좋은 소리는 아니었으리라 보는데 가까이에서 들어보거나 멀리서 듣거나 시끄러워서 못듣겠으면 아니될 일이니 말이다.
즉, 오랫동안 수련을 통해 공력을 들여 단전에서 밀어내는 진정으로 우렁찬 통성은 울려 나오는 울림통 자체가 중후하고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소리에 깊이가 있다 할 것이다. 그러한 소리는 아무리 큰 통성일지라도 명창 코앞에서 들어도 결코 시끄러운 소음이 아니라 감동적일 수 있고 10리밖에서 들어도 성음이 선명하고 듣기 좋은 것이다.
정노식은 『조선창극사』에서 고제 명창 권삼득의 소리를 일러, “곡조가 단순하고 그 제작이 그리 출중한 것이 없으나 세마치 장단으로 일호차착이 없이 소리 한 바탕을 마치는 것이 타인의 미치지 못할 점”이라고 했다.
김명환은 전도성과 이선유의 옛 동편제 소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도성 씨 소리는 우리는 재미없어요. 이선유 목에서는 무엇이 나올 중 알았지마는 한달 이상 별 조가 없어. 모흥갑 더늠이라구 허는디 별 것이 아니드란 말이여.”(김명환 구술, 『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
정노식과 김명환의 말을 종합해 보면 옛 명창들은 우렁찬 소리를 내기 위해 발성 연습에 주로 공력을 들인 만큼 잔기교는 거의 부리지 않고 담백하게 소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정노식은 박기홍의 소리에 대해 『조선창극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처음에는 담담히 아무 흥미가 없는 태도로 하여 소리가 싱겁기 짝이 없다. 청중은 염증이 나서 하품과 졸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리하여 중판쯤 이르더니 소리는 점점 흥미있게 되어 간다. 난데없는 다른 청이 튀어나오기 시작하고 하픔하며 졸던 간관들은 귀를 번쩍 들고 지수는 소리 좌우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리 하다가 소리는 다시 점점 담박무미하게 된다. 이러한 제작으로 조종하면서 달야토록 계속하였다 한다. 담담연 냉수적으로 탄탄연 대로적으로 하다가 어느 지경에 이르러서 그 어떤 특조를 발휘하는 식이다.”
또 『조선창극사』에 박기홍보다 이름이 앞서 기록되어 있는 신학조는 “단가와 판소리를 진진한 좌담 비슷하게 하되 꼭 장단에 맞춰서 음률적으로 하다가 어느 지경에 이르러서 특조를 발하여 사람을 경탄케 한다”고 하였다.
이런 정노식의 말은 고제 소리의 특징에 대한 설명으로도 볼 수 있다. 근대 명창들은 한 대목 안에서도 여러 잔기교를 부리는 데 비해, 고제 명창들은 판소리 한 바탕을 염두에 두고 큰 기교를 위주로 소리를 전개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옛 경기 충청권의 중고제가 그러했다 할 것이다.
김창룡의 경우도 박기홍처럼 처음엔 담박무미하나 갈수록 목이 살고 한바탕 완창 막바지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대단한 공력을 발휘했다고 한다.(박록주, 이혜구, 이보형 증언) 이런 점이 옛날 큰 판소리 명창들의 방식이라 하겠다.
그래서인지 6분짜리 김창룡 독창 독집 유성기음반과 달리 비교적 길게 소리를 이어서 하는 창극 전집물에서 김창룡은 목이 점점 잘 나오고 독창 독집에서보다 좀 더 소리 기량이 우수하게 나타난다.
이런 점은 1934년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에서 취입된 김창룡 도창 창극 춘향전 전집 가운데 김창룡의 <기생점고> 도창 부분 등을 들어보라. 물론 그의 독창 독집 중에서도 옛 명창제 더늠을 방창한 소리들은 김창룡이 이름값 자존심 걸고 혼신을 다해 녹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의 뛰어난 공력이 잘 담겨있다.
송만갑이 전통적인 동편제 소리를 변질시키고 통속화된 소리를 부르자, 박기홍은 송만갑에게 “장타령 아니면 염불”이라 했고 “패려자손”이라는 말까지 서슴치 않았다. 또, 그 후대에 임방울이 단가를 계면조로 부르자 귀명창들은 “이제 판소리는 끝났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런 통속화된 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김창룡의 부친 김정근은 시조와 음률에 한숙했다고 한다. “판소리 하는 사람이 웬 시조며 가곡”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시조를 비롯한 정가가 판소리 하는 데 발성의 기초가 된다고 하는 명창들이 있다.
심화영의 말에 따르면 판소리를 배우기 전에 시조를 먼저 배워서 성악의 기초를 닦고 난 후 판소리 학습에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라 한다.(1995.5.19. 심화영 증언) 명창 김여란, 김소희, 박송희 등도 심화영의 말처럼 학습을 했다고 그런 증언을 한 바 있다. 김정근이 시조에 능했다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김창룡의 조부 김성옥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김용운도 정가에 능했던 것으로 보이며 김용운도 정가를 판소리에 수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김용운은 창조가 가사와 유사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정가 풍의 창법이 고제 판소리의 특징 중에 하나라 할 수 있겠고 경기 충청권의 중고제 역시 이런 특성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성우향은 “김창룡과 방진관의 소리는 평조로 평탄하게 나가는 대목이 많다”고 한다. “중고제는 평평하게 시작한다”고 한 박헌봉의 말과 통하는 면이 있다.
또 이동백, 김창룡, 심정순, 임명옥, 임명월과 같은 옛 충청, 경기권 명창들의 판소리를 들어보면 책 읽듯 독서풍으로 하거나 소리인 듯, 아니리인 듯하거나 아니리였는데 느닷없이 소리가 되고 소리였다가 어느새 아니리가 되어 있고 중모리였다가 문득 중중모리가 되고 소리의 매듭이 분명치 않은 경우가 많다. 장단의 마디를 딱딱 끊어서 소리를 진행하지 않고 붙임새 역시 모지락스러운 강약이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한 음으로 장단 몇 마디를 차지하며 부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판소리를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사설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들고 음악을 짜나가는 그 고도의 기예를 이해하기가 난해하다. 판소리 초심자가 들으면 추임새를 대체 어디다가 넣어야 할지도 난처해진다. 이는 판소리에 지극히 익숙한 귀명창들을 위해 재밌고 멋지게 소리를 짜다 보니 그리된 것이지 결코 가사 전달력이 부족하거나 기량이 모자라서가 아니고 경기 충청권 중고제 판소리의 특징적인 흔적들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고형의 방식은 질 좋은 소리를 평소 자주 즐길 수 있는 소수 특정 고위층의 귀명창들에게 선호되는 소리였는데 그러다가 구한말 이후 왕 존재 상실과 신분사회 붕괴, 여러 가지 신기한 신문물의 유입으로 판소리의 존립이 위태로워지면서 전라도 지역 동편제에서 송만갑이, 서편제에선 정정렬이 기존의 판소리 진행 방식을 시대에 맞게 고쳤다.
이 두 명창은 판소리를 평소 들을 기회가 많지 않았던 서민층이나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대마디 대장단으로 딱딱 끊어서 하거나 가사 발음도 좀더 정확히, 붙임새의 강약도 명확히 하여 신식 소리를 내놓았다. 그 결과 이들의 소리는 선풍적인 인기와 혹독한 비판을 동시에 얻었고 경기 충청권의 고박한 중고제는 차츰 쇠락하였다. 이혜구는 고형의 중고제 명창 이동백이 오래하면서 신명을 내는 데 비해 송만갑은 아리아같이 짧은 소리를 잘했다고 평가하였다.
일제 때의 유성기음반을 들어보면 옛 소리는 지금보다 아니리가 짧고 장단이 대체로 빠르다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유성기음반이 지닌 시간 제약 때문에 빠르게 불렀다고 볼 수도 있다. 심화영의 말에 따르면 “옛날에는 지금보다 소리를 빠르게 했다”고 한다. 즉, 유성기음반이 지닌 시간 제약 때문에 빨리 부른 것이 아니다.
중고제 명창 김창룡, 이동백, 심정순의 소리를 들어보면 장단을 달아놓고 창조 도섭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노래라기 보다 마치 글 빨리 읽기 대회라도 참가한 듯 급히 몰아간다. 오늘날 중고제 맛을 거의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심화영(심정순 딸)은 춘향가 초입을 아니리로 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짜고짜 휘모리 장단으로 급하게 내두른다.
옛 소리는 아니리보다 소리 위주로, 그리고 이야기를 빨리 전개해 나가는 데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경기 충청권 중고제의 특징 중에 하나라 하겠다.(노재명, “김창룡과 중고제 판소리” 『판소리 명창 김창룡·그 손녀 김차돈-음반 해설서』 서울:엘지미디어 LGM-AK002, 1995년)
정광수는 자신이 익힌 판소리 다섯바탕을 저서 『전통문화 오가사 전집』(서울:정광수 발행, 1986년)에 정리해 놓았다. 그런데 이 책에는 다른 창본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각 대목의 창법을 장단과 함께 명시해 놓았으며 그 가운데 중고제, 경제로 불리는 대목이라고 표시해 놓은 것이 눈에 띈다. 정광수는 또한 경제, 중고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 증언하였다.
“창악(唱樂)에 우조(羽調)에는 대명사(代名詞)라 할 명칭(名稱)이 각가지로 나누어 있어 청우조(淸羽調) 엄우조(嚴羽調) 중고우조(中古羽調) 이리하여 우조(羽調)라 하면 대개(大槪) 웅심청원(雄深淸遠)하다는 말은 공감적(共感的) 같음이 있다.
중고제우조(中古制羽調)는 옛날에 있었는 권마성(勸馬聲) 음색 흡사(音色 恰似)한데 고관급(高官及) 수령방백(守令方伯)이 쌍교(雙橋)를 타고 행차(行次)할 때 그 위세(威勢)를 더하기 위하여 사복하인(司僕下人)이나 혹 역졸(驛拙)들이 옹위하여 길게 부르는 것이 권마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중고제는 경제라고 하는 대목도 있고 추천목 능청거리고 중상성이 다분(多分)한 음곡이 많다. 그밖에 권제라 하는 대목도 있는데 이는 권삼득 선생(權三得 先生) 제비 몰러 나가는 곡조를 일컫는 말이므로 창악의 우조 내용이 간단(簡單)할 수 없는 것을 여실(如實)히 우견(愚見)으로 기록하는 바다.
흉복단전(胸腹丹田) 성이 티이지 못하며는 우렁차게 엄우조라던가 중고조가 제대로 불확실한 것은 두 말할 것 없는 일이다.”(정광수 저서 『전통문화 오가사 전집』 5~7쪽)
“중고제는 동·서편제가 섞여있다. 한바탕 모두 중고제로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중고제는 설렁제하고는 다르다. 중고제의 특징을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들으면 알 수 있다. 엇중모리로 불리는 판소리 다섯바탕의 끝대목에 중고제가 약간 들어있다.”(1999.11.24.10:20~10:40 정광수 증언, 노재명 대담·녹음,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녹음테입 MIMICRO-0038)
이와 같은 정광수의 창본 기록을 통계내 보고 증언을 종합해 보면 정광수의 판소리 다섯바탕 엇중모리 대목에는 거의 대부분 중고제가 있고 엇모리 대목에도 중고제가 많이 들어있다는 것이 된다.(예외:정광수는 『전통문화 오가사 전집』 90쪽에 “예 내 사정 들어보오 회동성참판 영감께서”하는 엇중모리 대목은 ‘애련성’이라고만 명시해 놓았음)
이는 필자가 “김창룡과 중고제 판소리” 글(1995년) 등을 통해 제시한 바 있는 ‘김정근이 창시했다는 상궁접은 엇중모리 장단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는 언급, 그리고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보이는 ‘고수관(딴쳔일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중고제 명창 김정근이 만든 상궁접이 엇중모리일 가능성이 있고 이를 뒷받침하듯 정광수가 언급한 것처럼 여러 엇중모리, 엇모리 대목에 중고제가 들어있으므로 엇중모리, 엇모리와 같은 엇박자 계통의 소리가 중고제의 한 특징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런 측면에서 염계달의 창법을 많이 모방한 고제 명창 고수관이 ‘딴 목청’에 능했다는 기록도 주목되는 것인데 이 엇청 또한 엇박자 장단의 소리와 마찬가지로 고제에 가까운 특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엇청, 엇중모리, 엇모리와 같이 기존의 소리에서 벗어나는 일탈의 기교, 창법들은 각기 고수관, 김정근 이후 성행했다고 보여지며 그 이전 명창 권삼득이 ‘세마치 장단으로 일호차착이 없이 소리 한바탕을 마치는 것’ 등과는 사뭇 다른 당대 신기능에 해당되었으리라 판단된다.
이는 권삼득을 비롯한 초창기 광대들 이후 출현한 후배들에 의해 판소리 기교에 있어 다양성이 부여되고 판소리의 변이 현상, 소리가 다각도로 발전해 간 과정을 나타내 주는 일면이라고 하겠다.
한승호는 반드름 소리가 중고제라 하였고 김명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김명환 구술, 『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
“설렁제, 덜렁제라고 하는 것 그것은 당체 말이 안되는 소리고, 우선 호걸제고, 소리가 호걸스럽게 나가는 것얼 호걸제라고 허요. 그 성음, 음정이 권마성 성음으로 나갑니다.”(55쪽)
“추천목과 경드름은 소리제가 틀리지요. 대개 소리서도 진경드름보다는 반경드름얼 많이 칩다. 진경드름이란 것은 너무 얇아서 그건 서울 사람들이 잘해요. 서울제로 허니까.”(58쪽)
여기에서 ‘호걸스럽게 나가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이는 양반 취향이라기 보다는 굉장히 서민적인 판소리 발생 초기의 모습을 짐작케 하는 것이고 ‘서울제’라는 표현이 매우 주목된다.
신재효의 부친이 서울 사람이라는 것과 『조선창극사』에 기록된 남에는 고창 신재효, 북에는 충청도 양반광대 정춘풍이라는 말도 경기 충청권 중고제를 되새기며 의미깊게 여겨진다.
명창들은 판소리에서 쓰이는 조를 말이나 글, 악보로는 나타내기 어렵고 들으면 안다고만 말들 한다. 그래서 아직까지 우조, 평조, 계면조에 대해 학문적으로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으며 학자에 따라 각각 주장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다. 사실 수 십년간 독공, 득음을 위해 피나는 노력으로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명창들의 음악을 녹음으로도 완벽하게 담아내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판소리는 성음놀음이라는 말이 있듯이 실기인들에게는 소리길도 중요하지만 음색, 성량 등 성음 자체로 우조나 계면조를 판단,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판소리를 악보로 채보하여 분석하는 분석 작업과 명창들이 실제 느끼는 감각은 다소 차이가 있다.
하여 명창들의 소리에 가장 가까운 악보라 할 수 있는 녹음 가운데 옛 경기 판소리 관련 주요 유성기음반들을 추려 본 음반에 복각하는 바이다.
여기 소리가 담겨있는 명창 중에서 백점봉, 임명옥, 임명월은 경기도 태생이지만 그밖에 경기도 출신 명창들이 직접 녹음을 한 판소리 유성기음반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남도 명창들 가운데 경기제를 반영하여 소리한 녹음도 함께 복각하였다.
상기 본문에 언급한 경기 충청권 중고제 녹음과 본 음반에 복각된 녹음들 외에도 정남희가 가야금병창으로 녹음한 단가 <경기가>, 김연수의 수궁가 중 <토끼 욕하는 데>, 이동백 도창 창극 춘향전 일축판 전집, 김정문 일행의 창극 춘향전 시에론 전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조학진 일행의 창극 심청전/적벽가 폴리도르 전집, 정정렬 도창 창극 춘향전 빅타판/오케판 전집 유성기음반과 임방울 수궁가 완창 공연 실황 릴테입 녹음 등에서도 옛 경기 판소리 관련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보형 등 한국고음반연구회, 국악음반박물관 등에 경기 충청권 중고제의 옛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는 유성기음반들이 많고 10여년 전에 필자와 판소리 학자 김용근에 의해 명창 김창룡과 송만갑의 후손들이 발견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고형의 경기 충청권 중고제의 부활과 발전을 위해 시도해 볼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실효성이 있고 의미있는 작업은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라 본다.
중고제 거장 김창룡의 후손 김차돈 등과 동편제 거장 송만갑의 후손 송기화 등에게 문화재보호법 수준을 초월한 대대적인 국가 지원 프로그램을 짜서 다시 두 가문 사람들이 대를 이어 판소리를 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
두 가문의 재능있는 후손들이 이에 응해 준다면 앞서 언급했듯이 이 두 가문은 판소리 예술을 거의 다 이루다시피한 집안이며 이 판소리 두 왕가간에 혼사가 이루어진 바 있고(유전적으로 성악을 잘할 수 있는 가풍), 또한 수백년 동안 판소리 성악을 가장 잘하는 집안으로 많은 사람들의 검증과 평가를 받았고 두 가문 공히 판소리를 5대 이상 대를 이어한 유서깊은 집안이고 이 가문의 소리를 담은 녹음이 공통적으로 풍족하게 남아있으므로 이 후손들에 대한 지원 명분과 그에 따른 결실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이라 하겠다.
오늘날 한국에서 어떤 전통문화 분야든 이처럼 한 예술에 대해 큰 족적을 남기며 대대로 전승한 가문의 뚜렷한 핏줄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며 이렇듯 커다란 유전적 문화 유산은 바로 국력과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더 늦기 전에 옛 판소리의 진수를 가슴에 품고 있는 인간문화재들이 존재할 때 그와 같은 판소리 명가문의 후손들에 대한 지원과 육성이 적극 추진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오래전에 판소리를 하고 사라진 모흥갑, 염계달과 같은 경기 명창들의 후손이 만일 나타난다면, 그리고 불과 몇 십년 전까지 생존했던 백점봉과 같은 경기 명창의 후손도 만날 수만 있다면 이들의 존재도 현재 거의 꺼져 버린 토종 경기 판소리를 살릴 수 있는 소중한 불씨가 되리라 본다.
또 이미 확인된 심화영을 비롯한 충청도 중고제 명창 심정순 후손들의 존재, 경기 명창 임명옥 임명월 자매의 후손 또한 경기 충청권 중고제 판소리의 부활과 미래 설계, 발전에 있어 값지고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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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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