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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박첨지놀이 인간문화재 김동익 명인 증언 내용
  rjm20110903kdis.jpg(사이즈:294.7KByte)
* 상기 사진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2011.9.3.14:00~19:30.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개심사,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탑곡리 고양골, 서산 박첨지놀이 마을 박물관.
국악방송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프로그램(방송 진행:노재명) 서산 박첨지놀이 인간문화재 김동익 명인 방송 장면.
김동익 명인(좌측)과 방송 진행자 노재명(박물관에서) 장면.
김동익·이남식·이태수·김경창·이석구·허창순·송명옥·이종분·이옥하·최선용 일행 서산 박첨지놀이 연희(개심사 공연) 장면.
김동익 평시조 <청산리 벽계수야>(서산시 양대리 사람 이문교 내포제 사사, 무반주, 박물관에서) 모습.
김동익 서산 고양골 풍물굿 꽹과리 연주 길군악-2채-3채-7채-6채(박물관에서) 장면.
김동익 서산 고양골 창조 꽃반 <고사 덕담>(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동암리 상쇠 오병환 ‘덕담’ 사설본, 무반주, 박물관에서) 모습.
* 2011년 9월 3일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탑곡리 고양골, 서산 박첨지놀이 마을 박물관에서 노재명이 김동익 명인을 인터뷰하고 2011.10.23.18:00~19:30.국악FM방송 노재명 진행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에 방송된 내용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2017.7.4 정리/국악음반박물관 인터넷 홈페이지 명인실에 발표)

서산 박첨지놀이 인간문화재 김동익 명인 증언 내용
대담/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채록·정리/정혜원(판소리 귀명창)·노재명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 명창 100’ 안녕하십니까. 노재명입니다. 각 지역의 민속놀이에는 그 지역 고유의 생활과 풍속이 잘 나타나 있고 조상들의 재치와 슬기가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그 각 지방의 향토놀이는 이제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는데요, 그 중에서도 특히 마을에서 행해지던 집단 민속놀이는 명맥이 많이 끊기다시피 해서 매우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그런 와중에 충청남도 서산의 박첨지놀이가 마을놀이 중에서 드물게 잘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6호 서산 박첨지놀이 예능보유자이자 서산 박첨지놀이 보존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신 김동익 명인 방송 편을 마련했습니다. 김동익 명인을 만나기 위해서 충청남도 서산에 있는 서산 박첨지놀이 마을 박물관에 와 있습니다. 김동익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김동익: 안녕하십니까.
노재명: 예 어떻게, 건강은 어떠신지요?
김동익: 네, 건강은 마, 덕택에 괜찮습니다.
노재명: 예, 실례지만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김동익: 경오생. 여든 두 살이지요.
노재명: 예, 1930년생이 맞으세요?
김동익: 예, 그러나 공부상으로는 1934년생으로 되어 있지요.
노재명: 예, 호적에는 1934년생으로 기록이 되어 있구요. 그리고 고향은 여기 서산이 맞으시구요?
김동익: 예, 고향은 제가 우리 마을, 이 탑곡리 마을이 제가 여기가 생장지지요.
노재명: 여기서 태어나셨구요?
김동익: 예, 그렇습니다.
노재명: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탑곡리 고양동, 여기가 고향이시구요. 그러면은 전국적으로 봤을 때 전문 연예인이라고 그럴까 그런 광대 집단이 했던 꼭두각시놀이라든지 발탈이라든지 그런 인형극하고 다르게,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여기는 마을 주민들이, 연예인이 아닌 주민 여러분들께서 직접 연희하는 인형극이 여기에 전승이 되고 있는 박첨지놀이인데요. 이 박첨지놀이를 언제서부터 이걸 배우기 시작하셨나요?
김동익: 에, 이 박첨지놀이가 제가 그 유래상으로 볼 적에 고려 때부터 이게 생겼다고 그러대요. 옛 어른들 말씀이, 이제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말씀이지요. 에, 고려 때부텀 시작해 가지구 조선시대에는 더욱더 그 지방에, 각 지방에 아주 흥했던 모냥이요. 그러니깨 각 지역마다 방방곡곡에 다 많이 놀리구 이랬든 모냥입니다. 아, 그러다 일본시대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막 뺏었단 말이여. 침범을 했어, 우리나라를 뺏어 가지고. 그런디 다행이두 우리 마을에는 고 주연산 선생님께서 그걸 좋아했던 모양이여. 그래서 그 냥반이 몰래 숨어서, 낮에는 않구 저녁에, 사랑방에서 이렇게덜 노시다가 “야 우리 그전에 옛날에 허던 것 좀 해보자”고 이렇게 쑤근쑤근 그 냥반들이 상의를 허다가, 사랑방에서 이렇게 바가지 쪽 뭐 이런 거 갖다가 맨들구, 옷 입히는 건 저 뭐 자기 부인덜 헌옷 뭐 이런 거 갖다가 서로 갖다가 옷을 입히구 이렇게 해 가주구서 이렇게 일 년에 한두 번씩 이렇게 계속해 내려왔던 모냥이여.
노재명: 예.
김동익: 그래 우덜은 이제 조그마했었으니까 그걸 구경했죠. 쬐끄마해서부터 구경한 거요. 그러니깨 우리 동네는 저녁이문 숨어서 그렇게 한두 번씩, 일 년에 한두 번씩 하니까 거기 우덜이 참여두 허구, 가 심바람도 해주구 으른덜 허시는 거 뭐 좀 가져 오라구 하면 갖다도 드리구 뭐 이렇게 허면 저녁에 인제 횃불 이렇게 쓰구서 그 부잣집 사랑 마, 마루에다가 포장을 치구 이렇게 허는 걸 우리가 많이 봤어요. 그러면 천연적으로 우리가 배워진 거여. 우리 마을은 다 대부분 다 헙니다. 뭐 노소 막론하고 다 알아요. 그란디 이제 그래두는 뭐 관심이 있는 분은 그냥 머릿속에 담아뒀지만 그냥 구경만 허구 마는 분, 관심이 별루 없는 분들은 그냥 그 때 일별 그저 보고 말구 뭐 이렇게 해서 이제 그치는 거죠. 그러나 저는 관심이 좀 있어서 그 으른들 그 대사 해가면서 허는 걸 참 보구 그냥 머릿속에 그냥 더러 좀 넣어두구 마, 이렇게 해서 내려왔던 거지요. 그러니께 명맥이 다들 이어졌지유, 우리 마을만.
노재명: 예.
김동익: 그래 딴 디는 인제 소멸이 됐는지 어쨌는지 우리 저희들로선 몰르지유. 모르지만 마, 8.15 해방이 되고 난 후루, 연 후루 각 지역 그 기관단체나 행정기관에서 이 민속을 발굴을 인제 허, 허면요 서산 음암의 탑곡리의 그 박첨지놀이라는 게 옛날부텀 말이, 소문이 퍼져서 다 알고 있으니까 행정기관에서두 우리 마을에 이렇게 찾어오구. “근데 그 옛날에 박첨지놀이두 허구 농악놀이두 여기 잘했다는디 그게 지금 살어있느냐”고 이렇게 인제 동에서 문의두 허구, 마 이러는디 지가 답변을, 아는 대루 답변을 해 드렸지유. 그 옛날의 어른들이 이렇게 했느니라고. 그런디 우리들은 그런 걸 보구 듣구 이렇게 심바람두 해주구 대충 그저 안다구 마 이렇게 했드니, “그걸 좀 발굴을 해서 이걸 좀 연구를 좀 허구 새로 공연 좀 허, 허는 식으루 이렇게 좀 허자”구 부탁을 허구 인제 이러대요. 아, 이게 인제 동네 으른들이 그 때 그 무렵에는 인제 주연산 저 옹께서는 생존해 계실 때야. 그러니깨 제가 그 냥반한테 가서 각 기관에서 각 단체에서 이렇게 박첨지놀이를 다시 연구해서 발굴해서 이렇게 해보자고 하니 이걸 좀, 좀 일러 주시구 같이 좀 허시자고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아, 그 냥반도 좋아하시드라구유. 그래서 그 냥반허구 같이 또 8.15 해방 후로 또 했어요. 아, 그러다 또 6.25가 또 당했네유. 6.25 또 사변이 일어나서 한 5년 동안 또 명맥이 끊어졌지요. 그러다가 6.25가 지난 연후로 또 기관에서 이것을 좀 발굴해서 연구를 허자고 이렇게 해서 인제 또 그 냥반도 그 말씀 드리니깨 아이구 좋다고 그래서 인제 그 냥반덜 또래 하면 우리 아버님덜 또래유, 그 냥반들이. 그쯤 그 냥반들, 우리 아버님들 또래 그 냥반들이 같이 했지유. 난 심바람 댕기구 같이 그 냥반들허구 같이 허구. 지가 인제 나이두 들고 이래서 그냥 말고는 안될 것 같어서 이 놀이를 문화재로 지정을 받어야지, 이거 이렇게 끝나면 이거 쪼끔 있다 소멸돼 버리면 어쩔 것이여. 그러니까 이걸 문화재로 지정을 받자구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다 좋다고 허지요, 뭐 물론 누구나. 그래서 문화재 지정을 받을려고 각 인제 교수님들, 문화재 위원님들 이렇게 찾아다니고 이랬는데 그렇게 해내려오자 2000년 1월달, 1월 11일자로 결국은 지정을 받았어유. 지정을 받고, 지정을 받고 해서 인제 그 후로는 우리가 활기차지요 인제. 아, 참 보람이 있지요. 그 선후를 허고 이러니까 참 신이 나고 참 마음이 후듯하고 이래서 오늘날까지 이렇게 내려왔는데 우리 후계가 다 있어요. 인제 후계자 인제 있고 허니까 이게 명맥은 안끊어지고 앞으로 아마 활성화가 될 겁니다. 그려서 그렇게 보람 있이 아직까지 제가 이렇기 하고 있습니다.
노재명: 예, 그렇게 김동익 명인께서 아마 유년 시절서부터 동네 어르신들께서 하시는 박첨지놀이를 직접 보시고 도와드리면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신 거 같습니다. 말씀 듣기로는 그 주연산 동네 어르신께서 부친의 친구 분이기도 하시고, 그리고 그 분께서 한 100여년 전쯤에 남사당 출신 놀이꾼한테 이 박첨지놀이 인형극을 배우셨다 그러는데, 그 남사당패 출신 그 분 성함을 저희가 좀 알 수 있을까요?
김동익: 예, 글쎄 인제 그 주연산 그 냥반이 말씀하시기를 유영춘 씨라구 그래유. 유영춘 씨. 그 냥반헌티 배웠다는 거에유. 근디 그 냥반이 아마 그 남사당에서 놀든 양반 같다고. 옛날에는 많이 가난해서 없이 살었으니까 아, 윗대 쪽에서 이쪽으루 이렇게 그냥 그냥 머슴살이 하면서 내려왔든 모양이유, 그 냥반이. 그래서 인제 요기 여 신창린가 요기서 그 냥반이 남의 집 살다가 우리 이, 저 주연산 옹 그 냥반허구 같이 아마 어울렸든 모양이여, 아마. 그래서 그 냥반헌티 이 주연산 옹께서 전수를 받었대요, 그 냥반한티.
노재명: 그 유영춘, 그러니까 남사당패 출신 놀이꾼으로 추정되는 그 분한테 주연산 어르신께서 배우셨는데, 주연산 어르신은 1903년에 태어나셔서 1993년까지 이 마을의 박첨지놀이를 이끄셨던 그런 분이시구요. 이 박첨지놀이는 첫째마당이 박첨지가 큰 마누라와 작은 마누라 사이에서 두 사람에게 살림을 나누어 주는 그런 장면이 나오고, 둘째마당에서는 평안감사가 민생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매사냥에만 신경을 쓰고 백성들을 못살게 굴다가 별세하는, 그래서 상여가 나가는 그런 장면이 나오고, 셋째마당에서는 절을 짓게 되지요. 절을 짓는 장면이, 제가 박첨지놀이를 몇 차례 목격한 바로는, 마지막 절 짓는 셋째마당이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시주를 걷어서 공중사라는 절을 짓고 눈먼 소경을 비롯해서 불우한 백성들 평안을 기원하는 그런 마당으로 구성이 돼 있는데, 그 작은 인형으로 망치처럼 절을 지을 때 박치기처럼 막 못을 박고 짓는 그런 장면이, 굉장히 그때 관중들이 아주 다 폭소를 터뜨리고 야 이렇게 재밌는 놀이가 있었나 감탄을 하는 그런 마지막 마당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이제 세 가지 마당으로 구성이 돼 있는데 여기서 잠깐 선생님께 이 세 가지 마당을, 주요 대목을 저희가 방금 공연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공연 실황을 좀 저희가 녹음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한테 박첨지놀이 가운데 박첨지가 큰 마누라와 작은 마누라에게 살림을 나누어 주는 대목, 그리고 이어서 “에루떼루야 떼루야” 하는 그 장면이 전환될 때 민요와 풍악이 울리면서 장면이 전환되는 소리하구요, 또 이어서 박첨지놀이 가운데 상여소리, 상여가 나가는 장면 이렇게 공연 실황으로 저희가 준비를 했습니다. 한번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2011.9.3.14:00~19:30.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개심사에서. 김동익·이남식·이태수·김경창·이석구·허창순·송명옥·이종분·이옥하·최선용 일행 서산 박첨지놀이 가운데 박첨지가 큰 마누라와 작은 마누라에게 살림을 나누어 주는 대목, “에루떼루야 떼루야” 하는 그 장면이 전환될 때 민요와 풍악이 울리면서 장면이 전환되는 소리, 상여소리 공연 실황 녹음.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 명창 100’ 오늘은 서산 박첨지놀이 인간문화재 김동익 명인과 함께 하고 있는데요, 서산시 음암면 탑곡리에 있는 서산 박첨지놀이 마을 박물관에서 방송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방금 들으신 음악은 서산 박첨지놀이 공연 실황인데요, 박첨지가 큰 마누라와 작은 마누라에게 살림을 나누어 주는 장면, 그 다음에 장면이 전환되는 음악, 그리고 박첨지놀이 가운데 상여가 나가는 장면, 그 공연 실황을 보내드렸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선생님. 여기서 열 분께서 박첨지놀이 공연을 해주셨는데요, 여기 나와 주신 김동익 명인, 이남식 씨, 이태수 씨, 김경창 씨, 이석구 씨, 허창순 씨, 송명옥 씨, 이종분 씨, 이옥하 씨, 최선용 씨께서 박첨지놀이를 보여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렇게 아주 해학적이고 재미난 박첨지놀이 가운데 주요한 장면을 저희가 공연 실황으로 보내드렸는데요, 공연 장면을 보게 되면은 김동익 명인께서 검은 천막이 둘러 싸인 그 뒤쪽에서 인형을 가지고 이렇게 연기도 하시고 소리도 하시고 요령을 직접 치면서 상여소리도 하시구요, 박첨지 주인공 역할도 하시구요 그런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박첨지놀이의 어떤 인형극으로써의 재미, 어렸을 때 이걸 마을 주민들이 하면 얼마나 재밌게 보셨는지 그 당시 회고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김동익: 그 박첨지놀이가 사실은 알고 보면은 옛날 조선시대 양반시대의 그 양반들을 좀 비판한 거나 마찬가지지요. 그 양반들로 하여금 못난 서민들은 밤낮 발밑에서, 발밑에서 그 분들의 심바람만 해줘야 했고 서민 측들은 양반들이 그냥 일하라 그러면 일해야 허고 양반들이 대변 보면은 그 똥 치워라 그라면 똥 치워야 하고 그랬시유. 허허, 그렇게 살었시유. 그러니까 그 서민층에서 아마 풍자한 거 같으네요. 이, 그 양반시대를 풍자해 가지고 거기다가 해학적으로 극화시켜 가지구서 극으루 허는 거 같으요. 극화를 안 시키구서 그냥 대구 양반들 앞에서 욕은 못허니까, 극으루 이렇게 극화시켜서 놀이를 헌 거 같습니다. 그러니깨 서민 측에서들은 아주 그걸 또 좋아하구 인제 자꾸 관람을 자꾸 하고 싶구 이랬지유. 그래서 관객들두 인제 많이 오구 그랬지요.
노재명: 그러면 서산 박첨지놀이를 주로 하던 시기는 주로 언제쯤에 놀았었나요, 마을에서?
김동익: 마을에서 놀기는 이게 주로 음력 8월 달에 주로 했습니다. 8월 달에도 아무 때나 한 게 아니고 이것두 놀이허구 뭐 허자면 중간에 술 먹어야 허고 밥 먹어야 허니까. 이게 무슨 뭐 그 때들은 모두 집집마다 가난해 가지구 돈도 별로 없지 뭐 이래서, 거 부잣집들, 옛날에 마을에 부잣집이 한두 집이지 뭐 부잣집두 별반 없었어유. 거 부잣집들 사랑방 마루, 마루가 있어요, 사랑방 마루. 거기다가 포장을 이렇게 치구서 박첨지놀이 이런 걸 허구 농악도 치구. 이렇게 허면은 8월 보름 명절 보내구 난 그 제사 지내고 남은 술두 있구 떡두 있구 그레니깨 이런 거를 주는 거요. 그러면은 그런 거를 술두 읃어 먹구 떡두 읃어 먹구 그렇거구 공연허구. 그 땐 뭐 공연이라구 했나 그 박첨지놀이라구 그랬죠 마을놀이, 이게 마을놀이지요 뭐 마을놀이. 놀이를 이렇게 허면은 아, 술 먹구 하하, 떡 읃어 먹구 아, 그러구 이게 재미두 있구. 그러니까 아 동네 분들이 이렇게 모여서 놀구, 이렇게 재미가 있이 그렇게 옛날엔 했시유.
노재명: 그럼 다른 마을 인근에 있는 주민 여러분들도 와서 구경을 하시구요?
김동익: 인제 이렇게 헌다 하는 소문이 동네 사람들이 이렇게, 허면은 소문을 내는 거여, 주변 마을 사람들께다가. 우리 동네는 아무나 인제 박첨지놀이 헌댜 하면은 놀러 오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러면은 이제 거기서 자꾸 입으루 구전으루 자꾸 전해 가지구서 저녁이문 오는 거여. 오면은 그 박첨지놀이 허면 이제 끝나고 나면은 다 헤어지면은 그냥 음력 8월 달이면 거 고구마들 많이 심었시유. 그 땐 배가 고프니깨 가다가 막 고구, 고구마 밭에 가서 고구마 캐서두 막 날루두 막 먹구, 그게 대단하구. 그러니깨 그런 거 허면은 인제 고구마 같은 거 다, 다 캐 가구 그런다구 인제 그런 것두 있었구 그랬시유.
노재명: 예전에는 텔레비전이나 공연 같은 게 볼거리가 없으니까.
김동익: 없지유.
노재명: 그런 거 한번 열리면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이구.
김동익: 다 오지유.
노재명: 먹을 것도 나눠 먹으면서.
김동익: 예.
노재명: 그렇게 재밌게 구경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남사당패가 오늘날 하고 있는 꼭두각시놀음 거기두 인형극이 있는데, 비슷한데 거기 인형놀이보다 가지 수는 여기가 좀 적은 것 같애요.
김동익: 좀 적구 소박허지유. 그냥 촌에서 촌분들이 이렇게 맨들기두 허구 이랬으니까 소박헐 수밖에 없지유. 그러구 남사당 꼭두각시 인제 그런 디서들은 그, 그 전에 가지 수두 많구 공연 수두 많구 뭐 인형두 많구 이랬는디 그것이 점차 내려오면서 자꾸 소멸되구 잊어뻐리구 빠지구 막 이렇게 돼서 아, 인제 이 박첨지놀이는 거기에 비허면은 유사하긴 허나, 가지 수두 즉구 좀 소박하고 이렇지유. 그러나 각 지역에 다 소멸해 가고 단지 꼭두각시 이외로는 우리 탑곡리 마을 밖에는 이것이 없단 말이유. 우리 남한에서두 전라도, 경상도 이런 데 다 다녀 봐도 이것이 읎어유. 박첨지놀이가 읎어유. 우리 남한에서는 읎는 거 같애요. 꼭두각시놀음 이외로는 읎는 것 같애유.
노재명: 저희가 공연을 보게 되면은 선생님께서 주인공인 박첨지 역할을 이렇게 탈을 들구서 대사도 하시고 연기도 하시는데 이렇게 선생님 얼굴 뵙고 그 탈을 보면은 선생님 얼굴하고 박첨지 얼굴이 이렇게 탈하고 닮으신 것 같애요. 그래서 혹시 그 탈을 직접 만들기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동익: 흐하하하하, 지가 다 이거 직접 다 만들었어요.
노재명: 아, 직접 다 만드셨어요?
김동익: 예, 그러구 나무루 이렇게 깎는 거, 목수 일 하는 것은 또 우리 조교, 이남식 조교가 목수요. 목수기 때미 절이니 상여, 이 나무루 만든 건 그 분이 다 만들구유. 저는 이제 인형, 저런 것은 내가 만들고 그렇게 해서 다 우리 손으로 다 만들었지요.
노재명: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이 직접 얼굴두 그리셔서 그런지, 그 박첨지 탈이 선생님하고 이렇게 직접 닮으신 것 같고.
김동익: 흐하하, 그런가요?
노재명: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전 분들의 어떤 예술적인 특징이라고 그럴까 그런 게 저희가 느껴지는 거는 장승을 만들드래도 나무 형태를 바꾸지 않고 자연 그대로, 그래서 아주 자유분방하고 같은 장승이 없고 다 다르듯이 이 박첨지놀이에 쓰이는 탈도 예전 탈하고 지금 탈하고 만드실 때마다 조금씩 그 모양도 다르고 자유분방한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동익: 글쎄요. 그 옛날 으른덜 주연산 옹 그 냥반덜 허실 적에는 탈을 저렇게 지금처럼 이렇게 크게 안맨들었어요. 조그맣게 맨들어 가지고 탈 칠하는 것두 그 전에는 그냥 물감, 물감 사다가 집이서 이렇게 물감 물루 타 가지구 이렇게 허구, 또 옷 입히는 것두 거 자기 옷, 흔옷 떨어진 거나 아니믄 그 안으른들 입던 것 떨어져서 이렇게 걸레 허구 내버릴라 허는 거, (공연을 마치고 나면) 금방 소각시켜 뻐렸시유, 소각. 거 왜 그러냐면은 그 때들은 미신을 많이 지키기 때문에 아 이런 거 두면 사 되여, 으른들이 그렇게 말씀덜얼 했어요. 이, 이런 거 두면 사 되어 못써, 태워 없애여. 인제 그래서 일 년 허구서는 며칠 거 한두 번 허구서는 그냥 소각시켜서 읎애구 읎애구 인제 이랬지유. 그래서 인제 지가 이렇게 각 지역에서 초청을 허구 또 문화재 행사 이렇게 크게 허는 디서 자꾸 초청을 허구 허니까, 옛날 허던 식으루 그 조그만 거 가지구서는 헐 수가 읎, 읎시유. 보이, 보이덜 않으니까, 적으니까. 그래서 이러한 문화재 행사 때에 타 지역으루 이렇게 초청해서 간다던지 지끔 이 동네에서 문화재 행사를 헌다던지 이럴 적에는 인형이 좀 커야 되겄다, 먼 디서도 좀 보일 수 있도록. 그래서 지끔 인형을 다 키웠시유. 근디 지끔 저걸 태워 없앨라고 해도 저 재료가, 재료가 저게 허자면 1년 걸려야 이 재료 맨들어요. 왜냐믄 저 바가지, 바가지로 인형을 맨드는 거 있구, 또 저런 조그만 인형들, 나무 인형들 저런 것은 오동나무유. 저게 뭐 소나무나 아무 나무가 아니여. 오동나무래야 터지덜 않어여. 그런 것두 몇 년 전에 해다 놨다가 오래 묵은 거 가지구서 허지 지끔은 베다가 허면은 또 안돼. 죄 터지구 안돼여. 그래서 옛날 거. 또 바가지두 봄에 심었다가 가을에 따는 거여, 바가지가. 옛날에 그랬단 말이여. 그래 1년 걸리는 거여, 저 게. 1년 걸려야 허구, 또 저 수염, 박첨지 수염두 그 산에 가면은 칡이 있지유. 막 거 뻗어나가는 칡. 이것이 1년 봄에 싹 나 가지구서 7월에야 저 청월치(칡넝쿨에서 뽑아낸 질긴 끈) 자리 맬 적에 노끈 꼬는 거 있어요 노끈. 7월에 이래 잘라다가 겉껍데기 벳겨내고 속껍데기 이렇게 딱 빼 가지구서 이렇게 노끈 꽈서 자리 매서 허고 했는디, 저것두 수염이 그거에유 청월치. 그러자매 지끔은 그 산에 가믄은 있겄군. 이건 소각시킬 수가 없지요.
노재명: 예, 예전에는 다 그거를 놀이하고 난 다음에 다 불태웠기 때문에 남아있는 게 예전 건 없고. 여기 지금 박첨지놀이 박물관에 여러 종류로 이렇게 보관이 되어 있는데 박첨지 탈, 박첨지 동생 탈, 큰 마누라, 작은 마누라, 홍동지, 영노, 평안감사, 구렁이, 여러 가지 그런 탈들, 공중사라는 절 건축물도 이렇게 소형으로 만들어져 있구요. 특징이 몇 년 전에 만든 탈하고 똑같은 탈인데도 최근에 만든 거 얼굴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김동익: 예, 다를 수 있지요.
노재명: 예, 그래서 서민적인 즉흥적인 자유분방함이 느껴지는 그런 예술성을 저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박첨지놀이 1년에 그렇게 한철 노시는데 평상시에는 여기 다 주로 주민 여러분들께서 농업을 하셨지요?
김동익: 예, 농업이지. 농업이지유.
노재명: 그래서 농업 하실 때 모 심는 소리, 여러 가지 그 농요가 불려지게 되는데요, 지금은 그런 농요를 부르실 줄 아는 분이 주민들이 많지가 않으실 거 같애요.
김동익: 지금은 없어요. 다 기계루 모 심구 다 기계화 돼서 지끔은 없어요. 많이 연령적으루 칠십이나 육십 이상, 칠십, 팔십, 구십 이러한 분들이나 그 농요를 가사두 더러 그거를 알지 그 이하 연령들은 어디, 농요가 뭐인지도 모르지유.
노재명: 예, 그래서 저희가 서산 지역에 전승된 모심는 소리가 궁금해집니다. 그래서 선생님한테 특별히 좀 부탁을 드립니다. 서산의 모 심는 소리, <방애타령>이라고도 하는데 그 소리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동익: 하하하, 글쎄요. 이게 지가 한창 적에 다 허던 일인디 지끔은 허두 않구 어 나이두 들어서 뭐 정신두 없구 이렇게 다 이빨이구 그려서 잘 될라는지 모르겄네유. 허면서두 지끔덜은 그런 걸 농요를 해야, 해야 한단 말이지, 안하니까. 전혀 안허니까 다 이빨이구 그려서 그것이 지끔 참 잘 될라나 모르겄네유. 그 전이는 많이 헌 지가 오래 돼서. 즉어도 아마 한 삼십 년 이상, 근 사십 년 돼 갈 거유 아마.
2011.9.3.14:00~19:30.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개심사에서. 김동익 서산 고양골 민요 <모 심는 소리>(방애타령, 무반주) 녹음.
노재명: 예, 선생님께서 서산 지역에 전승된 모 심는 소리, <방애타령>이라고도 하는데 김동익 명인께서 직접 이 현장에서, 야외에서 실감이 나게 한번 밖에 나가서 들려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김동익: 예, 고맙습니다.
노재명: 예, 이렇게 들어보니까 선생님의 충청도 느긋한 그런 말씨처럼 차분하고 느린 장단으로 되어 있구요. 아주 정성껏 풍년이 들게 기원이 담겨있는 듯한, 그런 느린 장단으로 모심는 소리를 정성껏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농요도 부르시지만 정월 대보름이라든지 동제가 있을 경우에는 농악도 주민 여러분들께서 치셨죠?
김동익: 예, 그랬습니다. 우리 마을에 제가 아는 것만 주연산 옹 그 냥반이 우리 마을의 상고문이었어요, 상쇠. 상고문이어서, 그 냥반한티 또 상쇠두 지가 다 물려받았시유. 그래서 한동안 제가 마을 상쇠루 해서 우리 마을을 다 이끌구 나갔지유. 나가서 대회두 나가 보구. 서산시의 군 대항두 나가 보구 면 대항두 나가 보구. 아, 각 학교에서 또 농악 선생들이 있어 가지구 그 농악이 전부 변질이 됐으유. 그냥 막 그냥 저 자진가락 으, 이렇게 치는 거, 옛날 옛날 가락하곤 엉뚱팔경이지유, 엉뚱팔경. 그래서 지끔은 옛날 가락은 치는 디가 별라 없구, 전부 학교에서 통일로. 지끔 저 뭐 사물놀이니 뭐 이런 거 다 통일된 거여. 그래서 옛날 가락은 별라 들어볼래야 들어볼 수가 없구. 그란디 그랗게 칠 줄 아는 사람이 어디가 있나요? 별라 읎지. 그러다 소멸되는 거지요, 뭐 앞으로.
노재명: 그러면 이제 마을의 동제는 이미 사라진지가 오래됐지요?
김동익: 그렇지요.
노재명: 정월 대보름에는 그러면 지금 농악을 전혀 안치시나요?
김동익: 예, 안치구 2월 초하룻날허구 음력으루, 2월 초하룻날하구 7월 칠석날허구 농악 쳐가며 동 전체가 하루 놀이요 술을 먹구. 술, 술 받어다 먹구 하루 노는디, 2월 초하룻날은 그나마두 한 몇 년 전부터 않기루 했시유. 그 원인은 우리 마을에 특작으로 달래를 많이 해요, 달래. 달래 특작을 허는디, 그 달래가 봄이문은 많이 굴취해 나가, 나가야 한단 말이요. 그러니깨 바쁜 거여. 여러 집들이 그 달래를 심어 가지구서 농협을 통해서 가락동 시장으루 내가는디 뭐 조끔 허는 게 아니라 많이씩 헌단 말이유. 그러니깨 그걸루 수입이 좀 있구 허니까 바쁜디 그냥 노느니 이거 해야 허니까, 2월 초하룻날 노는 걸랑 그냥 빼자구 해가지구 읎애 버렸시유. 그러구 다음엔 칠석 때는 7월에는 인제 그걸 안허니까, 달래를 안허니까 겨울부터 봄까지만 허지. 그러니깨 칠석날 하루 인제 우리 마을이 놀지요. 그라고 인제 동계라고 해서 동계에는 겨울에 하는 거니까 12월 말경에 인제 하루 놀고 이렇게 마을에 한 이틀 놀지요. 그나마두 인원이 자꾸 줄어서 노화돼 가지구 인제 사람들이 죽구 젊은 분들은 자꾸 도시루 나가구 늙은 육·칠십, 팔십 뭐 이런 분들만 동네에 주재하고 있으니까 동네가 다 빈 거 같구 쓸쓸하구 그러네요.
노재명: 예, 원래는 정월 대보름에도 크게 농악도 치고 했었던 거지요?
김동익: 아, 그랬지요. 정월 대보름날, 2월 초하룻날, 7월 칠석날, 아 이건 아주 대대적으루 그냥 뭐 아주 동민들이 다 아주 하는 걸루 알구 그렇게 했구. 그 외루는 인제 마을에서 무슨, 무슨 뭐 결혼식이 있다던지, 뭐 이러헌 좋은 행사가 있으문 농악을 치구 그 집에 가서 술 먹어 가며 하루 종일 놀구. 그 전에는 회갑이 되게 귀했었지요. 육십 넘으면, 육십 회갑이 귀했었는데 회갑 때 같은 때 가면 아 동생들이 다 축하해 주구 농악 치구 이렇게 잘 놀았는디. 아 지끔은 뭐 육십일랑은 놔두고 팔십, 구십까지 사니깨 하하 농악이라는 게 그렇게 젊은 사람들이 읎어 가지구서 그 전처럼은 못허지유.
노재명: 예, 예전에는 결혼식이라든지 회갑, 그런 큰 잔치가 있으면 같이 기뻐해 주고.
김동익: 그렇지유, 그렇지유.
노재명: 또 뭐 누가 별세하시면 상여 같이 매고서 같이 울어 주시고 그렇게 더불어서 사는 마을 풍경이었는데 젊은 분들이 객지로 많이 나가면서, 또 장례식 같은 것도 많이 간소화되면서 상여도 지금은 나가는 일이 별로 없구요?
김동익: 예, 그렇지요. 별라 없지요.
노재명: 예, 그러면 지금 상여를 보관하는 상여집이라든지 상여는, 마을 상여가 남아있나요?
김동익: 예, 남아있어요. 상여는 상여집두 있구 상여두 있구 남아있시유. 그런디 그건 어쩌다 더러 쓰는 수가 있는디 그것 땜이 인제 없애두 못허구 그냥 보관만 허구 있는 셈이지유 뭐.
노재명: 예, 그리구 농악, 그 풍물꾼 말씀을 해 주셨는데 상쇠 역할을 맡으셨지만 장고, 북, 징두 다 치실 줄은 아시지요?
김동익: 그렇지유.
노재명: 예, 그래서 이제 저희가 여기서 잠깐 좀 청해서 들어보고 싶습니다. 서산 여기 고양골, 이 지역의 농악이 어땠었는지 그 가락을 설명과 함께 시범을 부탁드려도 괜찮으실까요?
김동익: 예, 뭐 제가 아는 대로는 뭐.
노재명: 그러면 이곳 고양골 마을의 농악 그 상쇠 가락을 좀 시범 부탁드리겠습니다.
2011.9.3.14:00~19:30.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탑곡리 고양골, 서산 박첨지놀이 마을 박물관에서. 김동익 서산 고양골 풍물굿 꽹과리 연주 길군악-2채-3채-7채-6채 시범 녹음.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 명창 100’ 오늘은 서산 박첨지놀이 인간문화재 김동익 명인과 방송 함께 하고 있는데요, 서산시 음암면 탑곡리에 있는 서산 박첨지놀이 마을 박물관에서 방송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박첨지놀이 외에도 현대에 오면서 근현대 시절에 유행했던 신파 연극, 마을에서 그런 취미 생활도 좀 있으셨죠?
김동익: 그렇지요. 신파 ‘봉이’ 제목 가지구 한번 해봤어요.
노재명: 그러면 그 각본을 어느 분이 연극으로 연출하시고, 주도하신 분은 어떤 분이신가요?
김동익: 그 냥반은 작고하셨는데 권 학자님이 하셨어.
노재명: 성함이 권?
김동익: 권 ‘혁’자, ‘건’자. 그 냥반이 한학자이신데 우리가 인제 그 냥반 보구 대본을 좀 하나 연구해 달라니깨 그걸 그 냥반이 일러 주시드라구. 그래서 그 사랑방에서 여러 날 연습허구 해서 한번 우리 동네서 한번 했는디 아주 그때두 인기였어, 이. 우리 또래들이 했는디 아주 인기였어. 잘 놀았어, 1년 잘했시유.
노재명: 저희가 전라남도 진도에서도 마을 주민 여러분들이 그런 연극을 하고 여가 생활을 하셨던 것을 들을 수가 있었는데, 바로 여기 서산의 박첨지놀이 고장에서도 전통적인 박첨지놀이 외에도 새로운 신파 연극까지 활동을 하셨던 그런 증언을 해 주셨습니다. 아마 그런 놀이를 하실 수 있었던 마음의 여유, 그것이 바로 그 풍류이자 마을 주민들끼리 더불어 살았던 화합의 의미, 그런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궁금한 게 아까 그 동제, 마을 그 대보름 농악 이런 거 할 때 그 고사소리가 있지 않습니까?
김동익: 예, 그렇지요. 고사는 고사를 허던 분이 여기 있다 이사 가구 작고허구 그래서 내가 그걸 좀 배워 볼랴구두 했었는디 그, 그게 또 암기하는 게 또 잘 안돼서 배우들 못했시유. 배우들 못허구 그냥 대본은 있어. 대본은 있는디 암기를 못허여. 허자믄 아주 소싯적에 한, 한 이십 때, 그 때 그걸 암기했어야 허는디 나이 들어서 암기해 볼라니깨 그게 잘 안되드라구요.
노재명: 그러면 혹시 가능하시면 그 대본이 있으시다고 하니까 잠깐만이라도 들려주시면 그 소리가 기록이 안되고 소멸되고 있기 때문에 기록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1.9.3.14:00~19:30.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탑곡리 고양골, 서산 박첨지놀이 마을 박물관에서. 김동익 서산 고양골 창조 꽃반 <고사 덕담>(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동암리 상쇠 오병환 ‘덕담’ 사설본, 무반주) 시범 녹음.
노재명: 대단히 감사합니다. 충청남도 서산 박첨지놀이 인간문화재이신 김동익 명인께서 서산 고양골에서 어렸을 때 목격하신 고사소린데 가사는 해미면 동암리의 상쇠였던 오병환 씨의 가사구요, 그 곡조는 고양골 어렸을 때 목격하신 고사소리 곡조로 불러 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 소리가 아마 오늘 굉장한 큰 기록이 된 것 같습니다. 소멸되고 있는, 이 고장의 아주 귀중한 마을 축제가 있거나 정월 대보름에 농악을 치게 되면은 이러한 축원 덕담, 여기 그 가사집에는 덕담이라고 써 있는데, 가사 내용은 액을 막아주고 축원 덕담해주는 그런 고사소리였습니다. 오늘 여러 가지 이렇게 음악, 악기 연주서부터 박첨지놀이, 그 다음에 고사소리, 두루 다양하게 부탁을 드려서 대단히 감사하고 죄송스럽습니다.
김동익: 하하, 고맙습니다. 괜찮습니다. 하하.
노재명: 이러한 전통예술을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시구 배우시구 보존해 오시는 거에 대해서 가족 분들의 반응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김동익: 글쎄 뭐 가족이 마, 싫어한다든가 그걸 불편허게 생각을 헌다고 보면 이걸 못허, 못허지요. 가족들두 다 이해를 허구 불평 불만이 없으니까 이게 허는 거지. 이게 참 가족들이 불평 불만을 허구 헌다 그러면 이게 또 헐 수가 없죠.
노재명: 예, 그럼 여기서 잠깐 김동익 명인의 사모님 되시는 지희연 여사님의 말씀을 듣고 가정에서 생각하시는 김동익 명인에 대한 여러 가지 면모를 인터뷰 내용을 듣고 또 다음 순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희연: 안녕하세요. 김동익 씨 부인 지희연입니다. 오시느라구 수고 많으셨습니다. 결혼은 제가 지끔 50년이 됐거든요. 뭐 중매결혼이지요, 옛날에는 다. 우리 고모가 한 분이 이 동네에서 살으셨는데, 그 고모가 이웃집서 보는데 김동익 선생님이 이렇게 사람이 참 착실허고 성실허다고 조카딸을 갖다가 중매를 했어요. 그래 우리 아버지가 보시구서 마음에 든다구 그렇게 중매를 해서 결혼을 헌 거죠. 해 갖구 우리네가 김동익 선생님이 5남매 맏이, 맏메누리였는데 동생덜이 넷이구 시어머니, 시아버지 모시구 살면서 그렇게 6남매를 낳구서 지금까지 살구 있지유. 그 박첨지 인형극을 나 시집올 당시에 그 때부터 그 양반이 그걸 하시드라구요. 그 때는 이런 무대가 없었으니깨 옛날 큰 부잣집 사랑방에 다니문서 시작을 했어요, 처음에 시작할 땐. 그렇게 해서 허다가 지금까지 그 인형을 허구 있어요.
아, 그 전에 시집 오니깨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동생, 시누들 잔뜩 있는디 그 놀이 때문에 항상 나가서 돌아다니시니께 나는 서운한 점도 있죠. 그 부모랑 동기간 잔뜩 내게다 맽기구 자기는 돌어다니니깨 나는 항상 힘들잖어요. 힘들으니깨 그 때 시절엔 어려웠죠. 많이 어려웠는데 이제 그렇게 한해 두해 살어나가다 보니까 지금에는 좋은 점이 또 많이 있어유. 그 만큼 내가 인내하고 참었기 때문에 문화재가 됐다는 걸 생각헝깨 너무 기쁘죠, 기쁘고 좋죠. 그 때 그렇게 어렵고 힘들 적에 내가 뭐라구 허구 그거 불응을 했으문 됐을지 모르잖아요. 그걸 많이 인내허구 참었기 때문에 인제 이렇게 좋은 때두 돌어왔구나, 하하 그렇게 생각을 하니깨 너무 기분이 좋죠 뭐 하하하하.
우리 근안이 아부지, 우리 큰아들이 근안이유. 근안이 아부지는 건강해서 오래오래 이 인형극두 저기를 허셔야 되지먼 많은 분덜도 같이 협조를 해서 이끌어 나가야 되기 때미 오래오래 건강허야 되니까 건강 좀 많이 챙기시구 많이 좋아졌으면 좋겠어요. 그럼 더이상 뭐 얘기헐 게 뭐 있대. 하하하하하. 건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하하하하.
노재명: 서산 박첨지놀이 인간문화재 김동익 명인의 부인 되시는 지희연 여사님의 인터뷰 내용이었습니다. 사모님의 내조 덕분에 김동익 명인께서 이렇게 서산 박첨지놀이의 맥을 마음껏 이어갈 수 있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럼 혹시 자녀분들 중에서도 이 맥을 잇는 분은 혹시 안계신가요?
김동익: 예, 내 내 손들두 아직은 없시유. 아직은 없구. 지끔 내 손자 녀석 하나가 음암중학교 다니는데 음암중학교 그것들이 인제 헌다는데 손자 녀석 그 녀석이 뭐 상쇠를 친다나 상쇠, 그래 허드라구. 그런데 공연 한번 했어 그 아이덜이, 그 음암중학교 아이덜이 했디야. 나는 보덜 안혔는디, 거 잘 허드라는겨. 그래서 손자 녀석 그 녀석 하나가 인자 이 꽹과리로 이 상쇠를 쳤다구 그러더라구요. 그란디 그, 그렇게 들은 적은 있시유. 들은 적은 있는디 나는 허는 것은 보들 못했구.
노재명: 손자님이 뒤를 이으니까 그래도 좀 흐뭇하시겠습니다.
김동익: 글쎄유, 그게 그 녀석이 인제 헐라는지 말라는지 그건 몰러.
노재명: 예, 아직 어리니까.
김동익: 아직 어리니까 거 뭐 딴 길루 인제 갈, 갈라는지 인제 거 아직 알 수가 없지유.
노재명: 김동익 명인께서는 혹시 지금까지 들려주신 박첨지놀이, 고사소리, 농요 그 모심는 소리라든지, 상여소리 이런 소리 외에 또 춤이라든지, 다른 또 학습은 혹시 없으신가요? 시조라든지?
김동익: 글쎄요. 뭐 조끔씩, 조끔씩은 다 흉, 흉내는 뭐 흉내는 다 내요. 그러니깨 뭐 사람이라는 게 뭐든지 해보야지 허는 거지 안, 안해보구 할 줄 모른다구 안허면은 그냥 다 못허는 거여. 그러니깨 그래서 그 욕심에 무에구 남 허는 건 다 하구 싶구 이제 그 무에구 다 자꾸 참가가 되지유.
노재명: 그럼 이 충청도에 내포제 시조가 유명한데 혹시 시조창은 어느 분한테 배우셨나요?
김동익: 에, 내포제 시조가 아, 거 무형문화재루 지정된 분이 그냥 작고했지? 김, 김, 누구냐. 내 배우두 않구 그 분한티 배우두 않구 인제 우리 문화재들 이렇게 모일 적에 그 내포제 시조를 그 분이 허더만. 허는디 그 맛이 읎드만요 이, 그 내포제 시조는. 그냥 딱딱해여. 에, 그냥 물결치는 이런 것두 별라 없구 그냥 딱딱허게 나가드라구. 근디 들어는 봤으나 그 분헌티 배우든 안했으요.
노재명: 그래서 여기서 잠깐 그 선생님이 어렸을 때 어깨 너머로 보고 들으신 내포제 시조라고 할 수가 있는데 한 곡 청해서 듣고 싶습니다. 혹시 가능하시면 평시조 한 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
2011.9.3.14:00~19:30.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탑곡리 고양골, 서산 박첨지놀이 마을 박물관에서. 김동익 평시조 <청산리 벽계수야>(서산시 양대리 사람 이문교 내포제 사사, 무반주) 녹음.
김동익: (<청산리 벽계수야> 마지막 부분 창하다 멈추고) 여기가 워티기 내가 잊어버렸는디 여기가 종장인디 여기가 종장인디, 으으음. (종장을 다시 부름) 이렇게 나갔는데.
노재명: 예, 감사합니다. 서산 박첨지놀이 인간문화재 김동익 명인께서 이곳 인터뷰 현장에서 직접 들려주신 평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들려 주셨습니다. 박첨지놀이를 어렸을 때부터 어르신들, 동네 이웃집 아저씨들하고 또 일가친척 분들하고 구경도 하시고 자연스럽게 배우시게 되셨는데, 사실상 주연산 어르신과 김동익 명인의 노력으로 무형문화재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신 다음에 소감이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김동익: 소감이야 뭐 참 말할 수 읎이 반갑구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한 기분이지유. 이게 마, 사실 그 박첨지놀이가 민속놀이, 뭐 마을놀이지만서두 이러헌 것이 문화재루 지정이 될 이런 생각은 꿈에두 생각을 못했던 거지유. 그런디 나는 어느 정도 이것은 그냥 버릴 수는 읎다는 생각으루 그냥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디 그 주변 이런 디서 다 협조를 다 해줬기 때문에 그 덕택으루 다 된 거지유, 그게. 됐는디 그거 이상 더 바랄 수는 없지유. 성공이 된 거지유. 문화재루 지정이 됐다는 건 성공을 헌 거라구 이제 저는 인제 그렇게 생각을 허는 거지유.
노재명: 예, 그래서 선생님 평소에 뵐 때 굉장히 순박하시고 마을 주민 여러분들도 연기라든지 대사하실 때 박첨지놀이 보면은 외람된 말씀이지만 너무 천연덕스럽게, 능청스럽게 연기다 생각하지 않고 평소에 대화하시듯이 하시다 보니까 관객들이 굉장히 재밌어 하시고 한국의 전통 연극 중에 아마 가장 호응도가 좋고 박수가 제일 많이 나오는 그런 공연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인근의 중학생들, 또 초등학생, 멀리 대학생들까지 많이 와서 공부도 하시고 학자님들도 선생님이 다른 일상 생활을 못하실 정도로 연구를 많이 하러 오실 때도 있는데 그 동안 길러내신 제자 분들, 보존회 활동 회원님들 숫자라든지 전승 상태가 궁금합니다, 선생님.
김동익: 글쎄요, 뭐 전승은 아직 전승을 많이 못했어요. 왜 그러냐 허면은 박첨지놀이가 무형문화재루 지정을 받었응깨 그래두 존경을 받는 거지, 그 전에는 그 존경두 못받었으유. 그저 뭐 상놈들이 허구, 거 못쓰는 짓이라구 이렇게 생각덜이 됐단 말이유, 거 사람들이. 그래서 그런 것을 헐라구를 안했, 안했어. 그러니깨 헐라구 않는 사람 가르칠 수는 없는 거지. 나만이 인제 에, 그저 그런 대루 이게 버릴 거 아니라는 생각만 가졌기 때문에 인제 내가 굳게 참 끝까지 참 버리지를 않혔지. 앞으로는 인제 공간두 인제 생길 테니까, 전수관이나 이런 게 생길 테니까 앞으로는 호응도가 좋아요. 우선 와서 외지서두 더러 올 끼고 한 2,3년 전에는 타 지역에서 이걸 좀 배우겄다구 이렇게 허는 분들이, 젊은 사람덜이 왔더라구. 몇 사람이 왔는디 내가 거절을 했시유. 왜냐허면은 어 지끔 현재 이게 이게 마을회관이지유 이, 마을회관, 여기서 교육을 시킬 수가 읎어 도저히. 긍깨 앞으루 전수관이 장만이 되거들랑은 그 때 내가 가르쳐 주마. 그 때에는 후계자를 많이 만들어야겠지유. 그러한 계획이 있습니다.
노재명: 예, 그렇게 서산 박첨지놀이에 많은 애정을 평생 쏟으셨는데 아직도 무형문화재 지정이 됐지만 전수에 어려움을 겪고 계시고, 충청도가 국악이 가장 일찍 소멸되기 시작을 했고 전국에서요. 그래서 귀중한 이런 서산 박첨지놀이라든가 중고제 판소리라든가 그런 승무 같은 춤, 이런 훌륭한 가무악이 있었음에도 오늘날 충청도 지역에 국립국악원이 아직 설립이 못되고 있고 또 국악방송도 이 충청도 지역에 아직 방송이 못되고 있고요, 그 서산 박첨지놀이도 사실상 중요한 가치에 비해서 뒤늦게 인간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았나.
김동익: 그렇지유.
노재명: 예,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럼 여기서 잠깐 서산 박첨지놀이 인간문화재 김동익 명인의 제자 되시는 분의 인터뷰 내용을 듣고 다음 순서 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서산 박첨지놀이 보존회 전수조교로 활동하고 계신 이남식 씨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이남식: 저는 저, 조교를 맡고 있는 이남식입니다. 그 현재 저는 기능보조자로 역할을 하고요, 만드는 거, 또 공연에서두 또 제가 한 여덟 가지 역할을 허지유. 거기에 옛날 우리덜이 구경만 했었는데, 그거를 좀 활성화 좀 허먼은 괜찮겄다 그래서 최초에 그 냥반 밑이서 이거를 했어유, 옛날에는 귀경만 했는데. 그래서 으른들한테 저런 거 만드는 것두 기초두 따구.
그 분이 아주 꼼꼼허지유, 김동익 씨가 꼼꼼허지유, 아주. 그래서 그 냥반이 뭐 큰 소리두 안혀유, 지구력이 굉장히 그거를 내심허구 뭐 한가지 헐라면 그걸 연구허구 그러시는 냥반이에요. 굉장히 대단한 양반이에요. 지구력이 강허구, 지금두 연세가 팔십이 넘었는디두 정신력이 우덜 못지 않어유, 정신력이 좋으셔. 그려서 주위에서두 높이 평가허지유, 예. 우리 또 박첨지 그 동네서두 그걸 기냥 이렇게 살려 가지구 이 방방곡곡 대니먼서 이거 공연을 이렇게 해서 즐겁게 보여주구 안다닌 디 없어요.
에, 그 냥반덜 이제 공연허먼서 잡담허지 말구 말하자문 공연에만 열중. 예, 요거 요 말두 못허구 이 눈으로만 이렇게 허는 거유. 그렇게 허라 허지유. 그래서 우리덜이 다 그렇게 공연을 해버릇 해서 공연헐 때는 잡담은 않구 이 공연에만 집중해유. 그래서 고런 점이 굉장히 그 저 우리 박첨지 회원덜 똘똘 뭉치게 이렇게 만들어서.
회장님이 노상 이렇게 물심양면이루 회원덜도 다스리구 또 발전을 많이 시켜주셔서 대단히 고맙구유, 앞으로두 건강허셔서 이거를 널리 더 펼쳐야 되겄습니다. 예, 선생님 건강허십시요. 하하.
노재명: 서산 박첨지놀이 보존회 전수조교로 활동하고 계시는 이남식 씨의 인터뷰 내용이었습니다. 김동익 선생에 대한 여러 가지 일화, 그 소감, 여러 가지 추억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렇게 젊은 후계자 분들이 또 선생님의 맥을 잇고 계시는데 평소에 그 제자 분들, 이 지역의 주민 여러분들한테 원로로서 이 서산 박첨지놀이를 어떻게 발전시키자 어떻게 전수가 됐으면 좋겠다, 특별히 강조하시는 점이 있으면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동익: 이것이 명맥이 끊겨서는 안되지요. 이것이 계속 이어져 나가야 되지요, 계속. 아, 후계자가 앞으루 마을에서 젊은 사람 없, 없으니까 인제 학생들이라두 교육을 시켜 가지고 이 명맥을 끊기지 않고 계속 연결해 나가야 될 것으루 생각을 허구 그렇게 안되면은 그것두 실패지유. 그런데 우리 터는 다 닦아놨으니까. 전수관두 있고 전수조교두 있구 다 여기 마련이 돼 있으니까 제 생각으로서는 이것이 명맥이 끊기든 않을 끼다, 앞으루 활성화는 될 것이다 이렇게 제가 생각을 하구 있시유.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 명창 100’ 오늘은 서산 박첨지놀이 인간문화재 김동익 명인과 함께 하고 있는데요,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탑곡리에 있는 서산 박첨지놀이 마을 박물관에서 방송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서산 박첨지놀이 활동도 하시고 여기 농사도 지어보셨고 가족 분들하고 화목하게 이렇게 일평생 서산에서 즐겁게 일평생 보내셨는데 돌이켜서 보시면 가장 기뻤었다 하는 순간을 한 가지 회고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동익: 에, 뭐 우리 공연하러 가면은 다 기뻐요, 다 기뻐. 뭐 여러분덜 만나서 웃음두 주구 대화두 허구. 다 기쁜데 그 중에서도 무형문화재 지정받을 때가 최고 기뻤구. 또 외지루 인제 해외두 이렇게 갈 적에두 기쁘구. 일본두 인제 다녀왔고 또 서울 한옥마을 있시유 이, 거기서두 초청이 왔는디 아 참 다 그런디 상, 상상 외루 참 꿈같은 얘기지유 사실상. 그렇지 세상에 뭐 참 기쁜 일이지유. 뭐 촌사람이, 촌놈이 참 어데 그런 디 나가서 그렇게 말이라두 할 줄은 모르지만 그저 한 마디라두 헌다는 것이 기뻤으유. 뭐 공연 이렇게 갈 적마다 다 기쁘구. 또 국악방송 우리 이 여러분들두 서로 이런, 이런 일이 아니문은 만날 수가 없는 기유. 어떻게 만나냐 이거여. 이렇게, 이렇게 만나서 대화두 허구 이게 참 다 기뻐요. 어떤 거보담 말할 거 없이 다 기쁜 거에요.
노재명: 예, 그리고 특히 말이 안 통해도 이거는 인형극, 박첨지놀이는 인형극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외국 분들이나 어린 학생들이 봐도 굉장히 말은 몰라도 흥미롭게 볼 수가 있구요. 그래서 아마 더 공연 다니시는 재미가 있으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서산 박첨지놀이가 비슷한 유형의 공연, 마을 행사들이 전국에 많이 있었지만 유독 주민 여러분들의 이런 인형극인 박첨지놀이가 이 서산에 전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저희가 생각했을 때는 아무래도 이곳 음암면 탑곡리 마을 주민 여러분들이 아마 이런 풍류를 좋아하시고 평소에 화목한 그런 더불어 사는 인정 있는 고장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이런 민속이 살아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인생, 82세 지금 연세이신데 그 동안 살아 오시면서 인생의 지혜라 그럴까, 살아보니까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면은 인생을 아름답게 살 수 있다 그런 조언의 한 말씀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동익: 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는 디 있어선 사람마다 누구나 욕심이 없는 사람이 없어요. 또 욕심이 아주 읎어서두 또 안되지유. 사람 살아가는 디는 그 욕심을 가지구서 사는 건디 욕심을 너무나도 부리면은 옆에 친구가 없어져. 그러니까 사람이 사는 디 있어선 적당히 살자메 너머 욕심을 좀 버리고 그저 의리적으루 좀 살아야 사람 사는 보람이 있지. 의리, 도덕 이것을 생각지 않고 그저 자기 욕심 고것만 생각한다고 허면은 옆에 사람, 친구 이런 분덜이 욕허기 시작하먼은 이게 사람이 살 맛이 없지유. 그러니깨 사람이 사는 디는 어디까지나 욕심은 좀 버리고 아주 없어서는 안되구 욕심을 부릴 것만 부리고 아, 요롷게 살면은 그냥 그래두 이웃에 넘한테 욕은 안먹지 않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지금 사람이란 게 누구든지 그 고위층덜 가만히 텔레비 뉴스 들어보면은 거, 지위가 참 고위층덜, 지위가 높은 분덜이 그냥 몇 억씩 그냥 그저 착취허구 비리 저지르구 이렇게 허구 뭐 재판을 받구 이런 거 보면은 야 이게 권한도 좋지만 너머 욕심 부려서 그렇구나 마, 이런 생각이 드네유. 그렇기 때문에 그저 배운 건 없지만서두 그냥 이웃 분허구 그냥 그저 화목허게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나 이렇게 생각이 돼요. 그니깨 여러분덜은 그렇게 좀 살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노재명: 예, 선생님 말씀해 주신 대로 일평생 큰 욕심 안내시고 마을의 화목, 즐거운 풍류생활 그렇게 하셔서 그런지 선생님 인상이 굉장히 푸근하시고 미소가 아주 소년 같으세요. 82세신데도 아주 해맑은 그런 인상을 늘 보여주고 계십니다.
김동익: 참 말씀이 고맙습니다.
노재명: 예, 그러면 여기서 잠깐 선생님의 풍류와 더불어 사셨던 여러 가지 오늘 들려주셨는데 이번에는 이 지역의 민요와 평소에 즐겨 부르시는 민요를 여러 가지 좀 부탁드려볼까 합니다. 민요 <천안 삼거리>, <아리랑>을 이어서 이 현장에서 즉석에서 불러주시겠습니다.
2011.9.3.14:00~19:30.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개심사에서. 김동익 민요 <천안 삼거리>, <아리랑>(무반주) 녹음.
노재명: 서산 박첨지놀이 인간문화재 김동익 명인께서 이곳 현장에서 직접 민요 <천안 삼거리>, <아리랑> 이렇게 이어서 불러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선생님.
김동익: 예, 고맙습니다.
노재명: 이렇게 장단도 없이 저희가 인터뷰하다가 밖에 잠깐 나가서 오솔길에서 불러주셨는데 특히 이 <천안 삼거리>는 여러 분들이 많이 부르셨지만 이곳 충청도 현장에 계신 원로 선생님의 소리로 들어보니까 굉장히 소박하고 아주 자연미가 있고 포근하고 아주 좋았습니다 선생님. 이제 아쉽지만 마칠 시간이 거의 됐는데요 끝으로 선생님께서 평소에 하고 싶으신 어떤 계획, 남기고 싶으신 말씀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동익: 글씨유, 계획이야 뭐 참 인제 나이 팔십에 무슨, 무슨 계획을 세울 여가가 있겄어요. 뭐 인제 쩝, 우선 내 몸이 건강 좀 했으문 좋겠구 우리 가정에 내게 딸린 식구들 다 건강허구 그저 있는 건 없어두 화목허게 이렇게 살았으문 좋겄구 다 이웃 여러분들두 동네 다 여러분들두 다 같이 화목허구 그저 건강허게 살다가 이렇게 자기 명대루 살다가 이렇게 가는 것이 그저 원하는 거지유.
노재명: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소리의 힘, 명인 명창 100’ 아쉽게도 마칠 시간이 다 됐습니다. 오늘은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26호 서산 박첨지놀이 예능보유자이신 서산 박첨지놀이 보존회 회장님 김동익 선생님과 함께 했습니다. 긴 시간 귀한 말씀과 음악 대단히 감사합니다.
김동익: 네, 고맙습니다.
노재명: 예, 선생님 항상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김동익: 예, 예, 덕택에 건강하겄습니다.
노재명: 예, 끝으로 청취자 여러분들한테 축원 덕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동익: 에, 여러분덜 모두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아, 사람은 건강이 제일입니다. 뭐 돈이 암만 있어두 소용 없습니다. 그저 건강이 제일입니다. 뭐 여러분들 모두 다 건강을 원합니다. 네, 이상입니다.
노재명: 예, 오늘 선생님과 모처럼 논길도 같이 걸어보고 건강하신 선생님 발걸음에 굉장히 안도감을 느꼈구요. 또 이 방송 현장에서 들려주신 박첨지놀이, 농요, 농악, 시조, 민요, 고사소리 다양한 음악들 굉장히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충청도 민속음악의 아주 좋은 기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소리의 힘, 명인 명창 100’ 지금까지 진행에 노재명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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