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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무악 원로 전황 명인 증언 내용
  rjmjunhwang20111128.jpg(사이즈:296.6KByte)
* 상기 사진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2011년 11월 28일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길 260-16 국악방송 건물 11층 스튜디오.
국악방송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프로그램(방송 진행:노재명) 한국 가무악 원로 전황 명인 방송 장면.
전황 명인(좌측)과 방송 진행자 노재명 장면.
전황 명인 판소리 고법, 가야금, 아쟁, 설장고, 꽹과리 연주 모습.
* 2011년 11월 28일 서울 상암동 국악방송 스튜디오에서 노재명이 전황 명인을 인터뷰하고 2011.12.11.18:00~19:30.국악FM방송 노재명 진행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에 방송된 내용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2017.4.19 정리/국악음반박물관 인터넷 홈페이지 명인실에 발표)
* 전황 명인: 2015년 6월 16일(양력) 오전 지병으로 별세. 슬하 2남 2녀, 빈소는 서울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015년 6월 18일 오전 7시, 장지는 서울추모공원.

한국 가무악 원로 전황 명인 증언 내용
대담/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채록·정리/김용석(판소리 귀명창)·노재명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안녕하십니까. 노재명입니다. 올해는 한국 춤 명무 최승희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최승희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춤으로써 전세계를 누비면서 활약했는데요 최초의 한류문화 스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격동기에 활동한 비운의 천재 예술가 최승희 그의 예술은 몇몇 제자들에 의해 전승이 됐고 시대를 초월해서 사랑받고 있는데요 남자로서 그의 마지막 제자가 바로 전 국립창극단 단장을 지낸 전황 선생님입니다. 전황 선생님도 스승인 최승희 명무의 영향을 받아서 한국 무용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셨고 한발 더 나아가서 국악계까지 두루 지평을 넓히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겸임교수이자 전 국악협회 이사장, 국립창극단 단장을 지내신 전황 선생님을 국악방송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전황: 예, 안녕하세요.
노재명: 네, 건강은 어떠신지요?
전황: 글쎄 염려 덕에 그냥 잘 지내고 있습니다.
노재명: 예, 최승희 명무 탄생 100주년을 맞아서 특집으로 선생님을 모셨구요. 선생님께서 한국춤 분야, 그리고 국악계에서 두루 활약을 하셨기 때문에 선생님 여쭐 말씀이 굉장히 많은데요.
전황: 예.
노재명: 여기 국악방송에 인제 상암동 옮긴 후로는 아마
전황: 처음이예요.
노재명: 처음 방문하신 거구요. 말씀듣기로 인제 남한에 생존해 계시는 최승희 명무에 유일한 그 남자 제자분
전황: 예, 예.
노재명: 맞으시구요. 탄생 100주년이 되셔서 스승 그 최승희 명무 생각하시면 감회가 새로우실 거 같습니다.
전황: 예. 저도 그렇게 100주년이다 뭐다 이렇게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않고 있었는데
노재명: 네.
전황: 그 만큼 예술계에 종사하는 분들이 일본에서까지도
노재명: 네.
전황: 그 최승희 100주년을 다 기억해 가지고 연락이 오고 선생님 돌아가신지 벌써 100주년이 되고 한국에서 아주 의의가 저로서는 참 의의가 많습니다.
노재명: 예. 그러면 인제 전황 선생님에 대해서 또 자세히 여쭙겠는데요. 음력으로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시나요?
전황: 3월 8일인가 그런 거 같애.
노재명: 예. 그러면 1927년 생이 맞으시구요.
전황: 맞아요.
노재명: 예. 그러면 올해 85세
전황: 예, 예.
노재명: 시구요. 본명은 그 전황 선생님이 아니시고 따로 계시지요. 전 성함이요.
전황: 전두황입니다.
노재명: 예, 고향은 주소지가 어떻게 되시나요?
전황: 함경남도 함흥이예요
노재명: 예, 예. 말씀듣기로는 집안에 어르신들께서 예술하시는 분들이 많으셨는데요. 어떤 분들이 계셨는지 소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황: 우리 형이 나운규 씨하고 다 친배가 있고, 돌아가신 조태권 선생하고는 한 고향에 또 한 친구였었고 에 전두억이라고 나운규 씨하고 아주 동뱁니다. 예, 영화감독 하시던 나운규라고 있지요.
노재명: 예.
전황: 우리 한국의 역사에 있는 분인데 그 분하고의 친분이 있어 가지고 우리 누님이 영화계에 입문했지요.
노재명: 예.
전황: 그러고 우리 형은 스포스맨이예요. 그 당시에 그 젊었을 때 십팔기라 그러죠. 그, 그거를 배우러 중국까지 가서 십팔기를 배워 가지고 나왔고 권투선수였었습니다. 동양에 꽤 날렸었죠 그때 당시에.
노재명: 예. 전옥 선생님은 20세기 전반기에 눈물의 여왕이라고 했던 무대의 아주 큰 스타셨구요.
전황: 예.
노재명: 그러면 그 형제간이 총 몇남 몇녀셨나요?
전황: 우리가 칠남매. 남자로서 막내.
노재명: 그러구 셋째 형님 되시는 전두철 씨가 그 외국 악기를 연주하셨던 분이시죠?
전황: 예, 바이올린.
노재명: 예, 그래서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
전황: 예, 훠스트로 있었어요.
노재명: 예. 제1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을 하셨습니다.
전황: 사촌형이 있는데 전운봉이라고. 한국에 이제 와서 보니까 그때 당시에 국립극장장 저 박상익 씨라든가 뭐 여러분들이 잘 알대요 우리 형을. 소위 이북에서는 인민배우 대접 받고 있었죠.
노재명: 예, 또 그 강효실 씨라든지 탤런트 최민수 씨.
전황: 그 저기 우리 누님의 본 남편 강홍식이지.
노재명: 예.
전황: 에, 강홍식이 북조선 영화촬영소 소장을 했지.
노재명: 네, 강홍식 씨가 그 일제시대 때 유성기음반 취입했던 가수가 맞으시죠?
전황: “봄이 왔네 봄이 와”를 제일 처음에 부른 사람이에요.
노재명: 예, 그래서 일제시대 때 그 음반을 많이 내셨던 경력이 있습니다.
전황: 그리고 그 분이 저 최승희 선생하고 같이 저 조택원 선생하고 같이 저저저 저 석정막(石井 漠, 1887~1962년,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 제자였었어요. 이시이 테루오(石井輝男)라고 그 강홍식 씨가 우리 매부가 그 이시이 바쿠 제자였었어.
노재명: 예, 그렇게 해서 전옥 씨하고 매형 되시는 강홍식 씨가 낳으신 따님이 영화배우 강효실씨구요.
전황: 강효실이.
노재명: 예, 그리구 강효실 씨의 아드님이 영화배우 최민수 씨구요.
전황: 민수, 예.
노재명: 그러시구 전황 선생님이 슬하에 2남 2녀를 두셨는데 그 중에서 예술 하시는 분들이 계시죠?
전황: 예, 바로 큰딸 전미례라고 무용학 박산데 그 저기 한국에 재즈 무용을 제일 처음으로 보급시킨, 지금 인제 재즈 무용의 여왕이라고 하고 있죠.
노재명: 예, 그래서 말씀을 쭉 듣다 보니까 친척분들이나 그 형제분들 예술 하시는 분들이 많다 보니까 전황 선생님께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무용이라든지 국악 그런 예술 활동을 하셨다고 생각이 들구요.
전황: 예.
노재명: 아마 집안 그 형제분들이나 친척분들이 전통문화를 익히기도 하셨고 또 새로운 문물, 스포츠라든지 영화라든지, 가요, 또 연극 다양한 그런 문물에서도 적응력이 그렇게 강하셨던 것 같애요.
전황: 그 용케 나는 어떻게 그 때 당시에 그냥 남자가 무슨 춤을 출랴고 해가지고 내가 참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계셔서 내가 나왔지. 계셨으면 내가 못나왔을 거에요.
노재명: 예.
전황: 예, 그리고 근데 그 자식들은 추려서 그 자식들, 내 손자들은 전부 다 클라식이에요. 첼로에다가 지휘에다가 꼭 한국 무용 계통에 있다고 하는 건 나밲에 없고. 그 민수도 결국 영화 아니에요.
노재명: 예.
전황: 에, 그래서 나는 그냥 자연적인 현상으로 받았지. 으, 내가 눈썰미가 빨렀고 그래서 나두 권투하지 않았어요. 해서 나도 참 그 걸로도 성공할 수 있었던 그런 체질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눈치가 빠르고 하니까 결국은 장난삼아 한번 끼어서 한 게 최승희 선생 눈에 들어간, 들어간 거에요. 몸이 빨르고 맵시 있고 빠르고 그러니까 그 춤을 출라면은 빨라야 되거든.
노재명: 예, 그래서 그 늘 어렸을 때 보아오던 그 형제분들이나 친척분들이 예술적인 그 감각이 뛰어나시니까.
전황: 그렇죠.
노재명: 예, 그 1941년에 함흥 제일고등학교 졸업하셨구요.
전황: 예.
노재명: 1944년에는 함흥의 상업학교를 또 졸업하셨습니다.
전황: 예.
노재명: 그래서 맏형 되시는 전두옥 형님 영향을 받으셔서 10대 때 권투선수 생활을 하시다가 최승희 무용단에 입단을 하셨는데 최승희 무용단에 입단하게 된 그 계기는 어떻게 사연이 있었나요?
전황: 그게 함흥의 1946년 봄이에요. 최승희 선생이 함흥에 공연을 왔어요. 그래 가지고 단원을 모집을 했는데 인산인해였었죠.
노재명: 예.
전황: 거기서 딱 그 때 그 저 젊은 혈기에 “야! 이 춤 어떤가 가보자” 어린 그런 마음에서 응모를 해봤, 했지요, 집에 아무도 모르게. 그 장난기가 어린 그냥 그런 마음으로 그래서 했는데 그게 최승희 선생 눈에 들어간 거지요. 권투를 했으니까 몸이 얼마나 빨랐겠어요. 그래 가지고 합격 통지를 받고 평양에 올라간 거지요.
노재명: 예.
전황: 그 많은 응모자 중에서 남자 하나, 여자 하나 딱 뽑혔어요. 그 남자 하나에 내가 뽑혔는데 올라가야 될 텐데 여비도 없고 옷도 없고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던 공기총이 있어요. 하고 아코디언을 팔았지요.
노재명: 예.
전황: 아코디언을 팔아 가지고 여비 해가지고 일단은 엄마한테만 얘기해 가지고 아버지가 안계시니까 돌아가시고 그니까 그렇게 한 거야. 처음에는 우리 돈 가지고 하다가 나중엔 극비까지 받았지요. 그 극비 가지고도 생활하기가 곤란하대요. 집에서 돈도 이제 안오고.
노재명: 예.
전황: 그래서 되면 되고 말면 말으라고 내가 최승희 선생, 그 안막 선생하고 두분 있는데 내가 면회를 청해 가지고 들어가서 극비를 좀 올려 주시든가 그렇게 해달라고 해줬으면 좋겠다고 집에서 돈도 안오고 그러니 이걸 어차피 할라면은 돈 400원 받았는데 그거 가지고 뭐, 뭐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최 선생님이 뒤로 아무도 모르게 200원인가 더 줬어요, 나.
노재명: 예.
전황: 으, 그렇게 배려를 많이 해주었지요 저한테.
노재명: 예, 그러면 그 최승희 무용단에 입단하시기 전에는 무용을 전혀 배우신 적은 없으시구요.
전황: 전혀 없죠. 권투만 했죠.
노재명: 그러면 그 어떻게 오디션을 시험 보실 때.
전황: 그 앞에서 하는 거를 따라 하라 그러더라구요. 그 리드미꺼라고 그러지 리더미꺼. ‘딴딴 딴따딴 딴딴 딴따딴’ 최승희 선생이 북을 치면은 요대로 발을 맞춰, 발 맞춰 가는 거야. 발 맞춰. 그리구 앞에서 한 사람이 이렇게 하면 고대로 따라하는 거에요. 아, 그게 그거 소위 하던 놈이 아, 그대로 따라한 거예요. 그게 다른 사람보다 빨랐단 얘기에요.
노재명: 예, 그러니까 무용 경력도 없이 그렇게 1등 하신 것도 그렇고 그 재능을 발견하신 또 최승희 선생님도 대단하신 거 같습니다.
전황: 아, 그렇죠.
노재명: 예, 그러면 그때 최승희 무용단에 입단하실 때가 연세가 몇 살 때신가요?
전황: 제가 그 때가 그러니깐 여기 나올 적에 내가 스물 세 살에 나왔거든요. 에, 그러니까 열 아홉이네.
노재명: 예, 열 아홉살 때 무용 활동을 시작하셨고요.
전황: 예, 예.
노재명: 들어가서는 최승희 선생님이 지도를 많이 해주셨나요?
전황: 예, 예. 조선 춤이라고 그랬죠. 예, 조선춤의 기본, 발레의 기본. 또 남방 무용이라고 해서 예, 저 남방 무용, 나중엔 쏘련 춤도 배우고.
노재명: 예, 그러면 조선춤 기본을 가르쳐 주실 때 발디딤이라든지, 손동작 같은 것을.
전황: 예, 예.
노재명: 어떻게 해야 된다고 강조하신 점이 어떤 점이었을까요?
전황: 그 때 지끔 추는 한국 춤하고 똑같애요.
노재명: 예.
전황: 에, 중국이 저기 우리 한국 전쟁에 개입해 들어왔잖아요. 그래 가지고 우리 그 이북의 춤이 많이 변질됐지마는 그 전에는 똑같앴어요 춤이. 최승희 선생 춤은요 지끔 생각하면 현대화 시킬려고 했던 우리 춤 그렇게 생각하면 될 거예요 아마. 춤가락은 똑같은데 창작적인 춤이 많았고 으.
노재명: 그렇게 최승희 무용단에 그러면 한 4년 정도 같이 활동을 하신 거죠?
전황: 예.
노재명: 그러면 그 무용단에 악사라든지 같이 춤 배우시던 분은 어떤 분들이 계셨나요?
전황: 아, 그 때 그 악사장으로 계셨던 분이요 최옥삼 씨라고 있는데. 그러니까 이북에서 내가 있었을 적에 안기옥 씨라고 있습니다. 여기, 저기 가야금의 명인이죠. 그 때 당시에 최승희 선생님 반주 저기 악사로 있다가 예술극장으로 나갔어요. 나가서 있고 그러고 난 다음에 고전음악 동맹 위원장을 했지요. 그 분이 국악협회 여기서 이사장하고 같은 거지요. 으, 그래서 안기옥 선생은 그렇게 해서 가야금의 명수로서 있었고 그 후에 최옥삼 씨라고 여기 지금 장흥 출신이에요.
노재명: 예.
전황: 그 분이 일제 때부터 이북 만주로 돌아댕기면서 저기 공연을 하고 권번에 그 선생으로 있으면서 나중에 최승희 선생 반주를 했죠.
노재명: 예, 그러면 지금 언급해 주신 최승희, 최옥삼, 안기옥 씨 이런 분들이 다 인제 월북을 하셨던.
전황: 월북이 아니고 그 분들은 그 전에 벌써 가있었어요. 일제 때부터 거기 살았으니까. 이북 만주를 돌아댕기면서.
노재명: 예, 그래서 한국에서는 월북 국악인으로 명단에 들어있지만.
전황: 예, 예, 예.
노재명: 거기서 본래부터 활동을 하신 것으로 그렇게 말씀을, 회고를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궁금한 것이 최옥삼 명인께서 가야금의 명인이시지만 관악기도 잘 부셨죠?
전황: 하이유 뭐 단소, 대금 명인이에요 명인.
노재명: 예.
전황: 그리고 저 소아쟁이라고 그 때 이렇게 절금 있지요.
노재명: 예.
전황: 그 가야금 반 저기 접어서 하는 그걸 가지고 소아쟁을 하더라구요. 예, 그 생긴 모습은 우락부락하게 생겼어요. 꼭 저기 참 산 머슴 같은.
노재명: 예.
전황: 그런 얼굴을 했는데 손도 이래 이래요 기냥. 그런데 그런 음악이 어디서 나오는가 나는 상상만 하더래도 참 소름이 끼치는 그런 음악을 나오는데. 제가 국악협회 이사장 때 대한민국 국악제를 제가 KBS에서 가져 왔어요.
노재명: 예.
전황: 우리가 돌아다녀 가지구 그래서 내가 기획을 한 것이 연변에서 안기옥 씨의 가야금을 할 사람이 있고
노재명: 아, 김진 씨 말씀하시는 건가요?
전황: 예, 예, 예, 예. 그 분이 안기옥 씨의 가락을 한다 그래서 내가 불렀어요.
노재명: 예.
전황: 그러고 대금 하는 사람을 한 사람 불렀지요.
노재명: 예.
전황: 그런데 한 사람이 대금을 나와서 하는데 그 객석에 지금 내가 앉어서 듣고 있는데 그 대금의 선율이 몇 초 딱 들었는데 그냥 최옥삼 선생 생각이 확 나더라고요.
노재명: 예.
전황: 최옥삼 선생 가락을 불드라 그 말이에요.
노재명: 예.
전황: 그럼 최옥삼 선생의 가락을 내가 왜 아느냐? <반야월성곡>이라고 하는 무용 그걸 했어요, 최승희 선생님이.
노재명: 예.
전황: 그 때 거기에 그 서곡이 나온, 그 서곡을 연주자가 하드라 그 말이에요. 근데 그 서곡의 창은 그 때 당시엔 내가 그 창을 몰랐어요. 할 줄도 모르고 들을 줄도 별로 몰랐는데 지끔은 중몰이요, 중모리라고요.
노재명: 예.
전황: 그 때 요렇게 나왔어요 그 춤이. “(중모리 시범 창) 신라 말엽 직화산으 진을 친 의군두령” 이게 그 음악이 딱 소리가 끝나고 나면은 서곡이 나오는 그 서곡이 구음으로 지끔 한다면은 이런 음열이예요.
노재명: 예.
전황: 한국의 <수제천> 같은 휠링이 나왔어요.
노재명: 예.
전황: “(<반야월성곡> 서곡 대금 가락 구음) 디리— 리리— 디리-리 띠리리리 띠리-띠 띠리리리 띠리리리 리띠리요 띠리리리 리리리-” 이게 최옥삼 씨 가락이었었어요.
노재명: 예.
전황: 내가 그걸 듣고 깜짝 놀랜 거죠. 이게 이게 이게 어떻게 돼서 저 사람이 저런 가락을 부냐 그래 가지고 내가 끝나고 난 다음에요 얼른 무대에 들어가서 “잠깐, 잠깐 나 좀 보자”고.
노재명: 예.
전황: 딱 음악하고 한하고 가락 따문에 족보를 내가 안 거지요. 예, 그렇게 해서 내가 최옥삼 선생이 그 위에 활동이 심했구나, 많이 했구나 하는 거를 알았고 최옥삼 선생님은 저하고 생사를 같이 했었었어. 공연을 같이 댕겼어요.
노재명: 예.
전황: 중국도 같이 갔고 뭐 동구라파도 같이 댕기고 다 그랬어요.
노재명: 예.
전황: 그러고 최승희 선생이 춤 취다가 탁탁 맥히는 거 있으면은 “요런 거 해보면은 어떨까요 선생님! 저런 거 해봐요.” 멋도 그렇게 있고.
노재명: 예, 또 다른 악사분들 또.
전황: 있었어요.
노재명: 어떤 분들이 계셨나요?
전황: 예, 피리 잘 부는 한기만이라고 있어요. 그리고 대아쟁을 손수 맨들어서 무용 반주 악기로 맨든 사람이 있어요, 이인관. 그래서 인관금이라고 했죠 그거를. 그 분이 그 손수 맨들어 가지고 그걸로 <반야월성곡>의 반주를 했어요.
노재명: 예, 그러면 지금 그 아쟁산조를 민속아쟁을 여러분들이 만드셨다고 이렇게 각각 의견이 다른데요. 이인관 씨가 굉장히 연대가 빨리 아쟁을 만드신 것 같은데요.
전황: 근데 그것은 제가 아쟁을 박성옥 선생한테 내가. 박성옥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예, 그 분이 저기 원 바이올린 하던 분인데 최승희 선생 반주도 했어요. 에, 근데 그 분이 아쟁을 하대요.
노재명: 네.
전황: 6.25 때 내려와서 뭐 뭐 무용 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그 분이 나 불러다가 그 저 아쟁을 하라고 같이. 그래서 그, 그거 하면은 그냥 돈이 생기니깐.
노재명: 예.
전황: 그래서 그냥 음을 따라서 한 것이 어떻게 아쟁을 배우게 됐어요. 근데 그 분 아쟁 보고 인관 씨 아쟁을 봤는데 비슷하더라구요. 근데 인관 씨란 분이 아쟁 맨든 것이 더 과학적인 것 같고 네, 소리가 웅장하고. 그 여기서는 박성옥 선생 한 거 봤고 거기서는 이인관 선생 봤고 그 후에 한일섭이라고 있습니다.
노재명: 예.
전황: 한일섭 씨가 했던 그 저기 한일섭 씨 나하고 같이 저기 창극단 같이 오래 일 보고 그랬었는데 근데 그 가락은 전혀 다르고 박성옥 씨 가락하고도 다르고 박성옥 씨는 좀 현대적인 감각이 있는 그런 그 음을 내고 이 한일섭이는 순 계면이고.
노재명: 예, 그리고 정철호 씨, 박대성 씨, 그런 분들도 또.
전황: 그 다 저기 같은 가락들이죠.
노재명: 예, 그래서 전황 선생님 평소에 무용은 저희가 많이 접해 봤는데 혹시 가능하시면 그 지금 언급해 주신 아쟁을 조금만 연주 부탁드려도 가능하실까요?
전황: 아, 그 허허허허.
노재명: 하하하. 워낙 궁금해 하실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서.
전황: 한번 가져와 봐요. 몇 년만에 하니까 잘 안되던데 이게 안하다가 하면은 발발 성음이라고, 발발 성음이 나온다고.
2011.11.28.13:00~14:30.서울시 마포구 상암동길 260-16 국악방송 건물 11층 스튜디오에서. 전황 명인 아쟁산조 진양조(무반주) 시범 독주.
노재명: 예, 아이구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 아쟁을 그러면 그 얼마만에 만져 보시는 건가요?
전황: 뭐 수 십년이죠. 마음은 있는데 이게 연습 안하면 아무 것도 안돼.
노재명: 선생님 본인 악기도 아니시고 처음 만지는 악기시다 보니까.
전황: 거기다가 또 이 소리 안하다가 하면은 이렇게 발발 성음이 나오지요. 발발발발해 이게 잘 안돼 잘.
노재명: 예, 최승희 선생님께서 그 기록에 보면은 20세기 전반기에 인기가 많았다.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 당시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회고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황: 그건 제가 본 일은 없고 이북에서 공연할 적에만 봤지 남에서 한 건 못봤죠. 이북에선 군 소재지까지 다 댕겼어.
노재명: 예, 그럴 때 최승희 명무께서 춤을 추시게 되면은 어떤 부분이 그렇게 관중들한테 환호를 받고 좋았을까요?
전황: 워낙 미인이셨고 어, 석굴암에 보살 같은 거 하면은 그 보살춤 자체도 화려했지만은 의상 자체도 화려했지만은 몸매가 여자로서는 그런 몸매가 참 드물지요.
노재명: 예.
전황: 예, 그래서 그 최 선생이 무대에서 딱 나오면은 그 눈동자 표정에 다 가버렸어요. 예, 무용도 잘하셨지만은 눈이 만냥짜리 눈이죠 눈이.
노재명: 예, 그렇게 해서 최승희 명인하고 해외 공연도 많이 하시고 그렇게 활약을 하시다가 6.25전쟁 직전에 그 단체 생활을 중단하시게 된 건데요. 그 중단하시게 된 특별한 이유는 6.25전쟁 때문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나요?
전황: 참 그건 핵심을 물어보는 거예요. 6.25를 우리가 동구라파에서 만났어요. 6.25를 공연 도중에 외국에서 그러니까 모스코바에서 얘기를 들었지요 우리가. 예, 최승희 선생하고 우리가 전부 다 모스코바에 있었어요.
노재명: 예.
전황: 근데 한국 전쟁이 난 거지요. 일단 돌아와서 서울을 점령해 가지고 있었을 적에 돌아왔죠 우리가. 와가지고 서울까지 왔었어요 제가. 와서 공연을 하고 부민관에서. 그리고 인민군 아이들이 점령해 들. 목포, 광주, 군산 요 세 군데를 우리가 2소대인가 해가지고 위문 공연을 하게 됐어요.
노재명: 예.
전황: 예, 그 때 김백봉 선생네는 뭐 1조, 뭐 2조는 뭐, 3조는 뭐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하는데 그 안에 한 10명 정도 이렇게 해가지고 갔는데 그게 가다가 결국은 폭격 따문에 군산을 못가고 목포 갔다가 걸어서 광주까지 와가지고 광주에서 또 걸어서 이리까지 오고 이리에서 걸어서 조치원까지 왔어요.
노재명: 예.
전황: 그 조치원까지 왔는데 그 때 천안을 거쳐서 가야 되는데 인천 상륙했지요. 예, 그래서 서울루 못들어가고 집결하는 날짜에 못들어가고 결국은 거기서부텀 패잔병 노릇을 핸 거죠.
노재명: 예.
전황: 그래서 최옥삼 선생이랑 같이 그 패잔병 속에 끼어서 그래 가지고 평양까지 갔어요. 예, 평양까지 가 가지고 가는 도중에 석암이라고 하는 데가 있어요. 석암 그니까 평양에서 60리 떨어졌어요.
노재명: 예.
전황: 그 평양이란 데에 최승희 선생님이 거기에 피난가 있었는 줄 몰랐죠. 거기에 안기옥 선생 아들이 목포에서 좀 거기 데려다 달라구 그래 가지구 자기 아버지 안기옥 선생 만난다고 해서 우리하고 같이 합친 거에요.
노재명: 예.
전황: 그 사람이 밥을 해 먹자고 들어간 것이 그 최승희 선생이 피난갔던 데 그 거기를 들어간 거에요.
노재명: 예.
전황: 그래서 거기서 최승희 선생이 저 중국으로 끌려갔단 얘기를 거기서 들은 거죠. 악사들이 거기 숨어 있더라구요. 그기서 제가 머리가 돈 거죠. 그래서 도망간 거죠.
노재명: 예.
전황: 그래서 이 대한민국으로 온 거예요.
노재명: 예, 그러니까 그 최승희 선생님하고 더 같이 할 수 있었지만 6.25 때문에 그렇게 어쩔 수 없이 헤어지시게 된 거네요.
전황: 그렇죠. 인제 중국으로 가버리고.
노재명: 예, 그래서 한국에 오신 후로는 누님 되시는 전옥 선생님께서.
전황: 제 보호자가 된 거죠.
노재명: 예, 단장으로 활동하시던 백조가극단에서는 부단장으로 활동하신 거구요.
전황: 그렇지요.
노재명: 그리고 여성국악동호회에서 또 활동하셨잖아요.
전황: 예, 거기에는 박성옥 씨로 하여금, 그 땐 뭐 직업이 없으니깐. 무용가 직업 가지고 어데 가서 밥도 못먹으니까. 예, 그러고 무용협회라는 것도 없었고 아무 것도 없었어요.
노재명: 예.
전황: 그 때 정인방이라고 있었습니다. 무용가 정인방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매방이 있었고.
노재명: 예.
전황: 터전이 없어서 못한 거지요.
노재명: 예, 그 혼인은 그러면 몇 살 때 하셨나요? 혼인.
전황: 스물 세 살 때.
노재명: 아, 스물 세 살 때요. 어떻게 해서 알게 되셨나요?
전황: 아이고 뭐 저를 좋아해서 그냥 결혼을 안하면 죽는다고까지 하고 그런 그 또 좀 에피소드가 있어요. 그렇게 해서 결혼을 했지요.
노재명: 그러면 그 사모님께서 무슨 공연 같은 걸 보고 반하셨나 봐요.
전황: 내가 그렇게 못난 얼굴은 아니었었고 허, 그 때 당시. 그리고 안무하고 뭐하고 하면은 자연히 이렇게 이목이 끌지 않아요. 예, 그런 데서 인제 동래여고 댕기다가 나한테 시집 왔죠.
노재명: 예, 그 여성국악동호회에서 안무 하실 때 국극 ‘햇님 달님’도.
전황: 했어요, 옛날에.
노재명: 그 때 그 박귀희 씨가 진양조로 초두 하는 부분.
전황: 예.
노재명: 언젠가 저한테 들려주신 그 기억이 있는데 박귀희 씨가 이렇게 진양조 초두를 냈던 그 노래.
전황: 예.
노재명: 예, 그거 좀 기억나시면.
전황: 예, 예, 예.
노재명: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황: 그게 ‘햇님 달님’의 자기 고향을 등지고 외국에 나갔다가 자기 고향에 다시 와서 햇님으로 딱 와서 딱 봤을 적에 아 내가 내 고국에 왔구나. 그래 가지고 첫머리 부르는 노래가 자기의 그 설움을 슬퍼 부르는 노래예요.
2011.11.28.13:00~14:30.서울시 마포구 상암동길 260-16 국악방송 건물 11층 스튜디오에서. 전황 명인 여성국극 ‘햇님 달님’ 진양조 초두(무반주) 시범 창.
전황: 요렇게 해서.
노재명: 아이구 감사합니다.
전황: 하하하. 누가 들으면 웃어요 웃어. 예.
노재명: 예전에 그 여성국악동호회 거기서 아주 인기를 끌었던 국극인데요 ‘햇님 달님’ 가운데 진양조 초두.
전황: 예, 첫 대가리 햇님 왕자가 불렀던 노래.
노재명: 그 박귀희 명인께서 그 당시에 남성 역할로, 왕자 역할로 하셨던 그런 노래였습니다. 박귀희 명인하고는 이렇게 의형제 같이.
전황: 예, 예.
노재명: 아주 사이 좋게 많이 활동하셨죠?
전황: 저를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이 만큼 이름을 얻게 한 밑거름이 된 분이죠.
노재명: 예.
전황: 또 일본이라는 나라를 제일 처음으로 발을 디디게 해줬던 것도 그 누님이었었고 몹시 저를 사랑했어요.
노재명: 예, 그래서 또 생각나는 곡이 김소희 명창과 박귀희 명인께서 <가야금의 노래>라는 곡을 또 작곡하시고 부르셨던 것을 전황 선생님께서 유일하게 기억을 하고 계십니다.
전황: 예, 나도 그거 참 거기까지 내가 기억했다는 걸 나도 놀랍게 생각하고 있는데.
노재명: 예.
전황: 강정숙 저기 문화재가 있죠. 예, 그 저 가야금병창의.
노재명: 예.
전황: 그 강정숙 씨가 가야금 공연을 하게 돼서 지금 선전이 나가고 있었을 적에 내가 늘 생각한 거 있었어요. ‘가야금’이라고 하는 유치진 선생 원작이죠. ‘가야금’ 그거를 내가 창극단 단장 때 ‘가야금’을 한번 해볼라고 했더니 그 아들 되는 분이 작품을 쓰지 않드라구요.
노재명: 예.
전황: 예, 그래서 그냥 사장되고 말았는데 그걸 부산극장에서 6.25 때 했지요 ‘가야금’을.
노재명: 예.
전황: 그 때에 <가야금의 노래>를 김소희 선생님이 박귀희 선생님하고 같이 작곡을 해가지고 그 공연을 하기, 하기 전에 전원이 가시왕부터 우륵부터 분장을 한 사람들이 전부 무대 바깥에 쫙 나와 서서 그 노래를 끝나고 난 다음에 ‘뎅’ 쳐서 막이 다시 올라가서 ‘가야금’을 시작했어요.
노재명: 예.
전황: 참 의의가 있게 했는데 근데 그게 1절, 2절, 3절까지 했는데 그 때는 무심히 그냥 했는데 나중에 제가 이제 국악을 심취해서 있다 보니까 그거 참 좋은 아이디어드라구요.
노재명: 예.
전황: 그래서 내 강정숙이 보고 이거 한번 해봐라. 이거 아무도 없이 그냥 사장된 곡인데 이걸 내가 그래도 어떻게 기억해서 이렇게 알고 있으니까 하라 그래서 그 때 열심히 무대에서 했어요.
노재명: 예.
전황: 지도해 가지고 했는데 좋더라구요 그 때도.
노재명: 그거를 3절까지 있는데 혹시 기억나시는 만큼만이라도.
전황: 기억은 3절까지 나, 나요.
노재명: 예.
전황: 안하면은 잊어 버리는데 또 하면 또또 나, 나더라구요.
노재명: 예, 그래서 청취자 여러분들께 들려주시면 굉장히 소중한 기록이 될 거 같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전황: 나 저 소리는 잘 안되지만은 그래도 가사래도 지금 외우고 있으니깐 그래도 한다는 게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럼 해볼께요 한번.
노재명: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2011.11.28.13:00~14:30.서울시 마포구 상암동길 260-16 국악방송 건물 11층 스튜디오에서. 전황 명인 창극 ‘가야금’(유치진 원작) 중 <가야금의 노래>(김소희·박귀희 작곡 중중모리) 무반주 시범 창.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한국 무용계 원로 전황 선생님과 함께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국악방송 스튜디오에서 방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963년에는 국가 홍보를 위해서 문공부에서 조직한 한국민속무용단에서 또 무용가 활동을 하셨죠?
전황: 예.
노재명: 그 때 어떤 나라에 가셔서 어떤 활약을 하셨는지 회고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황: 그 때 하도 많은 나라를 돌아댕겨서 몇 개인지 24개국도 가고 한번 나가면 뭐 몇 개국씩 그렇게 돌아댕겼어요.
노재명: 예, 그 때 어떤 작품이 가장 외국인들한테 반응이 좋으셨나요?
전황: 하, <부채춤>, <장고춤>, <농악>이죠.
노재명: 예.
전황: <농악>이 대, 대히트 쳤어요. 전성시대였었어요.
노재명: 그러면 여기서 잠깐 그 전황류 <농악>이라고 하는 그 춤 공연 실황을 저희가 입수를 했는데요. 그 국립무용단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됐던 실황입니다.
전황: 예.
노재명: 그 때 실황 녹음을 통해서 <농악>이라고 하는 그 무용이 어떻게 관중들 반응이 있고 어떤 예술인지를 한번 접해보시기 바랍니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자료.
1993년 4월 서울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국립무용단 ‘우리 춤 우리의 맥’ 공연 중 전황류 <농악> 실황 녹음.
노재명: 예, 전황류 <농악> 국립무용단 ‘우리 춤 우리의 맥’이라는 공연 실황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전황: 근데 그게 지금 김백봉 씨 한 것도 있고 내 것도 한 것이 있는 중에서 <농악>이 내 걸로 또 나가는 게 있다고.
노재명: 예.
전황: 예.
노재명: 그래서 이 전황류 <농악> 지금 국내외에서 한국 무용계에 아주 큰 획을 그었던 작품인데요.
전황: 예.
노재명: 이 <농악>은 어떻게 안무 하시고 음악을 구상하셨는지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황: 예, 고기도 씹어 본 놈이 맛을 안다고 이 <농악>을 안무를 할라면은 그 하나 하는데 몇 가지를 알아야 되요.
노재명: 예.
전황: 장고, 북, 꽹과리, 소고, 상모 그 춤 전체를 알아야 그걸 안무 할 거 아니에요, 맨들 거 아니에요. 이거를 첫째 마스터 해야 되요. 아는 사람이래야지 이걸 하지 그 전에는 한 발짝도 못해, 한 장단도. 근데 이거를 갖다가 내가 15분 안에 다 끝났다는 얘기지요.
노재명: 예.
전황: 그러면은 처음엔 한 이십 몇 분 됐는데 한 10분 가깝게 줄이는데 한 10년 걸렸어요.
노재명: 예.
전황: 완전히 작품 맨들은 거지요. 이 안에는 그니까 내가 맨든 가락이 다 들어간 거지요.
노재명: 예, 그러면 한국의 그 풍물굿, 농악의 여러 설장고, 소고, 꽹과리 이렇게 그 풍물굿의 가락들은 어느 분 가락을 주로 참고를 많이 하셨을까요?
전황: 여기 저기죠.
노재명: 예.
전황: 여기 저기 거, 저기 우도, 좌도 좋은 덴 다 뽑았어요.
노재명: 그러면 전사섭 씨라든지, 그런 명인들 많이 접촉을 하셨겠네요.
전황: 아, 그럼요. 그러니까 가락은 전사섭 씨 가락을 또 내가 배웠죠.
노재명: 예.
전황: 예, 전사종 씨 가락도 있고 예, 그러고 또 오채 가락 뭐 가락 좋은 건 다 뽑았어요. 배웠죠 다 좋은 거는. 배워 가지구 그걸 갖다가 내가 다시 아렌지 해가지구 내 걸 맨들어서 그걸 맨든 게 이 <농악>이 나오게 된 거죠.
노재명: 그러면 혹시 가능하시면 그 전사섭 씨 설장고 가락이라든지 그런 걸 여기서 시범을 잠깐 가락을 들려주실 수가 있을까요?
전황: 그거 할, 할 수 있죠.
노재명: 예.
2011.11.28.13:00~14:30.서울시 마포구 상암동길 260-16 국악방송 건물 11층 스튜디오에서. 전황 명인 설장고 굿거리-자진모리 연주.
노재명: 예, 대단히 감사합니다.
전황: 예.
노재명: 여기서 그냥 즉석에서 연주를 들려주셨는데요. 오랜만에 이렇게 잡으신 거죠?
전황: 예, 아주 손이 떨리구 힘이 딸리네요.
노재명: 예, 그 전사섭 씨 설장고 가락이시죠?
전황: 예.
노재명: 예, 이 가락을 언제 배우셨나요?
전황: 원은 배우지도 않고 이북에서 장구 잘 친다고 그렇게 해가지고 넘어 왔더니 대한민국에 나오니까 설장고라는 게 있드구만요. 여기 오니까.
노재명: 예.
전황: 그래서 그 참 신기하고 조리있게 딱 맨들어졌더라구요. 그래서 어차피 내가 저거 배워야 되겠다 싶어 가지구 그 때 배웠어요.
노재명: 예, 그리고 꽹과리는 어느 분한테 배우셨나요?
전황: 꽹과리는 전사종 아저씨한테 배웠죠.
노재명: 예, 그러면 어떻게 그것도 좀 시범이 가능하실까요?
전황: 시범이 거거, 그거 저 쉬운 가락들이 있어요. 그걸 내가 내 <농악>의 안무에다 도입해다 쓴 거죠.
노재명: 예.
2011.11.28.13:00~14:30.서울시 마포구 상암동길 260-16 국악방송 건물 11층 스튜디오에서. 전황 명인 풍물굿 꽹과리 독주.
노재명: 아이구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치셨을 텐데 손이 전혀 녹슬지가 않으신 거 같으세요.
전황: 아이, 이게 저, 저.
노재명: 이렇게 즉석에서 들려주셨는데 대단히 감사합니다.
전황: 허허허.
노재명: 그 예그린악단이라는 곳에서 또 무용부장을 하셨는데요. 그 때가 1960년대가 맞나요?
전황: 60년대 이후죠 쪼끔 이후.
노재명: 예, 60년대 그 당시에 전황 민속무용 발표회도 하셨었고요.
전황: 예, 그니까 63, 63년도네, 64년돈가.
노재명: 예, 그리고 일본 도쿄 올림픽 때 경축 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을 맡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마 그런 세계적인 예술과 그런 음악, 무용 두루 예술 전반을 다 관심있게 공부하시고 하셨기 때문에 그런 안무 연출이 다 가능하셨으리라 생각이 되구요. 박귀희 명인께서 일본 진출하시는 그 문을 열어주셨다. 이렇게 아까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 때 일본에 공연을 가게 되면은 조총련이라든지 북한쪽 그 분들 조직하고 이념 문제 때문에 정보부에서 많이 감시가 있었구요.
전황: 예, 그 때는요 외국 갈라면은 외국 단체에 꼭 정보부 사람이 하나씩 끼어 갔어요. 그렇게 그렇게 공포와, 아주 조성했죠. 공포를 조성시켰어요.
노재명: 예, 그래서 그 때는 이념 문제가 아주 첨예할 때기 때문에.
전황: 아, 저도 여기 나와서 고생 무지하게 했어요 처음에는. 최승희란 사람하고 따라서 같이 구라파니 어디고 누비고 댕겼는데 왜 여기 왔냐 그 말이야.
노재명: 예, 혹시 그 무슨 이념적인 거 아니냐.
전황: 그렇죠. 어, 어.
노재명: 예.
전황: 그래서 한때는 그 이북 얘기는 숨도 못쉬구 있었어요. 지금은, 지금은 자유죠.
노재명: 예, 그리구 또 한가지 1950년대, 60년대에는 예술 작품을 이렇게 국가에서 검열하는 그런 시기가 있었는데요. 그 때 혹시 창작 안무하실 때 혹시 검열에.
전황: 예.
노재명: 어려움 같은 거 좀 말씀 부탁드립니다.
전황: 제가 그 때 시절에는요 검열관이 있었어요.
노재명: 예.
전황: 검열관이 저 객석 뒤에 말이지 까맣게 그렇게 자리해 놓고 거기 앉아서 보고 있었어요. 그래서 영공색이 짙은지 아닌지 대사에 무슨 뭐 좀 이상한 게 없는지 하다 못해 저 같은 경우는 춤을 추다 보면은 의상이 빨간 의상이, 또 노란 게 확 들어가고 할 수도 있잖아요.
노재명: 예, 그럼요. 네.
전황: 그 걸 용케 저, 누가 춤을 짰냐고 안무를. 보자고 그래서 내가 갔드니 왜 저 빨간색이 가운데로 저렇게 몰리느냐 그거야. 그런 거까지도 제가 다 그렇게 얘기를 듣고 그랬어요.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노재명: 예, 어떻게 보면은 선생님께서 그 격동기, 20세기 아주 그 일제시대, 6.25 그 다음에 이념 문제가 첨예했던 군사정권 시절, 그렇게 또 이념 때문에, 또 검열문제 때문에, 6.25 뭐 이런 목숨이 또 위태로운 그런 것도 경험하시고. 그리고 그 예전 국악인들하고 교류를 많이 하시면서 여러 국악을 두루 학습을 하셨는데 판소리 고법을 또 아주 좋아하셔서 배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법 학습하신 그 계기하고 어떻게 배우셨는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황: 예, 제가 창극단에 오래 있다 보니깐 장단 귀가 뚫어져요.
노재명: 예.
전황: 그래 가지고 한일섭이가 참 장단을 잘 쳤습니다.
노재명: 예.
전황: 북 가지고, 그러면 그 사람의 흉내라도 좀 내서 쳤으면, 쳤으면 그래 가지고 그, 그거 해서 내가 그 사람이 한 열번 치면은 한 두번은 내가 꼭 치고 그랬어요.
노재명: 예.
전황: 나 좀 치게 해달라고 말이야 술도 사 멕이고 뭣도 해가지고 그래 가지고 장단 나한테 주면 내가 가지구서 휘날레 한번 치구 그랬는데 그걸 틀리지 않고 치면 잘한 거지.
노재명: 예.
전황: 예, 작곡을 창극 작곡을 누가 제일 잘하느냐 하면은 한일섭이하고 정철호 씨가 잘했어요, 이 이 창극단 작곡을. 그러고 그 사람이 북을 치는 걸 잘 보문 북 치는 요 가락 고게 그 정철호 씨 가락이 다 얼추 다르죠. 그래 가지고 나보고 나보고 친구로 지내지요 우리가 둘이. 둘이서 말 놔 해요.
노재명: 예.
전황: 철호, 전황이 이렇게 해서 친구로 지끔까지. 광주에서 이수생 이걸 주는 날이 있었어요. 이수증 주는 날인데 뭐 친구한테 줄 것도 없고 “이수증이나 하나 받아가” 그러더라고 나보고 허허허. 예술을 알기 따문에.
노재명: 예.
전황: 북이라는 게 얼마나 그게 힘들고 저 이수증 하나 받으면은 정말 영광이다 내가. 그, 그거 “줄래?” 그러니까 “아, 그 자네가 할라면은 내 주지.” 그래서 이수증을 딱 해서 나 주더라고.
노재명: 예.
전황: 그, 그래서 이수증 받았어요. 그래서 지끔도 무슨 얘기하문 꼼짝을 못하지요 내가.
노재명: 하하하하. 예, 그래서 저희가 선생님 그런 말씀을 미리 좀 소문으로 듣고, 선생님의 북가락을 좀 들어보고자 합니다.
전황: 예, 흐흐흐.
노재명: 혹시 가능하시면 판소리 적벽가 가운데 <당양 싸움> 거기를 청해 보고자 하는데 전황 선생님께서 북을 쳐주시고요. 판소리 인간문화재 박봉술 명창의 손자 되는 박명언 씨가 여기서 소리를 해주시겠습니다.
전황: 예.
노재명: 예, 즉석에서 한번 부탁드려 봅니다.
전황: 예, 그래 북은 내가 치고 싶었어. 여하튼 북바람이 난 사람이였었으니까 고맙게 치겠습니다.
노재명: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2011.11.28.13:00~14:30.서울시 마포구 상암동길 260-16 국악방송 건물 11층 스튜디오에서. 전황 명인(북) 박명언(창) 판소리 적벽가 중 <당양 싸움> 시범 녹음.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한국 무용계의 원로 전황 선생님 모시고 방송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방금 들으신 음악은 국악방송 스튜디오에서 즉석에서 연주해 주신 전황 선생님의 북가락, 그리고 판소리 인간문화재 박봉술 명창의 손자가 되는 박명언 씨의 소리로 판소리 적벽가 가운데 불러 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전황: 예.
노재명: 적벽가를 저희가 특별히 청해서 이렇게 부탁을 드린 이유는 선생님께서 적벽가 이 북 반주를 한번 하고 싶어셔 가지고 멀리 순천까지 송순섭 씨한테.
전황: 예, 예, 예.
노재명: 왕래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이 적벽가를 부탁을 드린 겁니다. 그 때 회고 말씀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황: 제가 창극단 단장을 해놔서 남자가 얼마나 그 소리 하면은 소리로 성공 못하면은 기악, 아니면 북으루 다 돌아댕기면서 김동준 씨두 그렇고 김득수 씨두 그렇구 다 한때는 명창 소리 듣던 양반들이 한일섭이도 마찬가지에요. 다 명창 소리 듣던 사람들이 결국은 목을 못쓰, 못쓰니깐 북으로 돌았고 가야금으로 돌았고 전부 돈단 말이에요. 정철호 씨도 마찬가지지만. 그래 그런 사람들이 하나래도 그렇게 명창이 나오면은 그렇게 반가워요 제가.
노재명: 예.
전황: 그러고 그 분들 참 좋아하고 그래서 그 송순섭 씨 그 사람도 대사습 때 저는 다른 분야 심사에 갔어 가지고 그 때 그 남자가 그 정도 소리 할라면 어려운 거거든. 그래서 내가 좋아해요. 만나면 내가 참 마음으루 내가 좋아하구 그랬던 것인데 이 사람이 꼭 적벽가를 불러요. 그 아까 박봉술 선생 제자니깐 김일구 씨하구 다 같이 그 제잔데 근데 그 적벽가 <불 지르는 대목>이 있어요. 흐흐흐.
노재명: 예.
전황: 거기의 장단이 기가 맥히게 좋거던요. 그게 그렇게 치구, 치구 싶어서. 그 할라면 우조는 그렇게 할라면 여자들도 그런 소리를 못내거덩.
노재명: 예.
전황: 근데 송순섭이가 순천에서 있다 그래서, 그래서 제가 국악협회 이사장 때도 내 차를 몰고 순천까지 내가 갔어요, 그 북 칠랴구.
노재명: 예.
전황: 예, 그래 가지고 그 꼭 전라도 전주에 가면은 거기에 명창들이 많아요.
노재명: 예.
전황: 이일주, 이일주 씨 거를 많이 쳤죠 내가. 이일주 씨 걸 제일 많이 쳤고.
노재명: 예.
전황: 그러구 여수에 가면은 꼭 순천을 내가 꼭 들렸어요. 두 번이나 들려서. 그 어떤 대목이야 그러면 흐흐, 적벽가 <불 지르는 데>를 한번 불러달라구 그거 치려다 간 거에요. 그렇게 그 마음이 그냥 그거 하면 흥분해요 마음이.
노재명: 예, 그래서 그 판소리 우조, 계면조 맛을 알고 북가락을 맛을 알면은 참 그 북바람 만큼 무서운 게 없다.
전황: 아, 그럼요.
노재명: 그런 말이 있는데요. 그렇게 아주 신바람이 나셔 가지고.
전황: 예, 그 제 그 말을 이해하니깐 더 좋네요 나는.
노재명: 그러면 북 반주를 이렇게 해보신 판소리 명창 되시는 분들이, 동초 김연수 명창도 북을 쳐 보셨구요?
전황: 허허허. 제가요 감히 말을 못하지요 김연수 선생한테. 내가 저 마작을 좋아하고 그래 가지고 김연수 선생한테 참 많이 해서 졌어요.
노재명: 예.
전황: 예, 안무비 미리 다 잃구 다음에 하지도 않는 안무비를 미리 다 땡겨서 그 분한테다 다 갖다 바치고 그랬어요 내가. 근데 그 저 종로3가에 그 우리국악단 할 적에, 그 종로3가에 집이 있는데 늘 북하고 장고 치는 게 있거든 그 집에.
노재명: 예.
전황: 그래서 내가 좀 한가한 시간이 있길래 “선생님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실래요?” 하니까 그 기분이 좋을 때니까 “뭔가? 무슨 뭔데 해봐. 해봐.” “나 선생님 미안하지만 북 한번만 치게 해달라”고. 그 감히 말을 못하죠, 보통사람 같앴으면은.
노재명: 예.
전황: 그 국악인이고 후배나 같았으면 그런 얘기를 못하지. 그 대선생한테 그 어떻게 그 해요.
노재명: 예.
전황: 우리가 저기 지방에 가서도 저기 북 좀 치자고 하면 그냥은 안해요. 꼭 고기래두 사먹으라구 내가 다 돈 주고 다 그러거덩.
노재명: 예.
전황: 그 김연수 선생이 하하하하 웃으면서 그래 니가 치면 얼마나 치겠냐 그거지. “그래 한번 쳐봐.” 기분이 그렇게 좋아서 내가 북을 한번 쳤어요.
노재명: 네.
전황: 그게 그렇게 영광스럽게 잊혀지지 않더라구요 그 대명창의 소, 소리.
노재명: 예, 당대 국창이시죠.
전황: 네. 그러고, 그러고 난 다음에는 뭐 얼추 다 쳤죠 요새는. 뭐 오정숙 선, 선생 거는 으 노상 그 가면은 한두번씩 꼭 쳤으니까 내가.
노재명: 예, 그 만정 김소희 명창께서 그 북 반주 들어보시고 굉장히 좀 감명깊게 들으셨다고 그러는데.
전황: 예, 내가 싱크 패션이라는 게 많지 않아요 우리가. 근데 그 보통 북을 칠라면은 먹고 ‘딱’ 치고 하는 게 많지 않아요 이게 창극에는, 이게 이 판소리에는. 그러면 무엇이 어쩌고 어쩐 ‘딱’ 데 이렇게 중 가운데에서 들어간다 얘기에요 각이.
노재명: 예.
전황: 보통 북을 그렇게 안치지요.
노재명: 예.
전황: 근데 김소희 선생님은 “동생! 북은 그렇게 치는 거네.” 나보고 그러더라고 칭찬하더라구요. 왜냐면 그 첫 대가리 그거 맞추기가 그게 힘든 거지. 근데 그게 그 북의 묘미거든.
노재명: 예, 그래서 그 만정 김소희 명창께서 고형의 그런 국악 장단이라든지 그런 게 아마 서로 통하신 부분이 있으신 거 같습니다. 예, 그리고 궁금한 게 선생님께서는 함경남도 함흥 태생이시기 때문에 혹시 10대 때까지 거기에 사셨기 때문에 혹시 그 함경도 민요를 혹시 고향의 소리, 평소 즐겨 기억하고 계시는 소리가 혹시 있으신가요?
전황: 별로 없어요.
노재명: 예, 그러면 그 <어랑타령>(신고산타령)이나 <육자배기>나 저희가 선생님 민요 한곡을 청해서 들어볼 수가 있을까요?
전황: 있다는 건 알고 많이 듣기는 했는데 내가 해보기는 한번도 해본 일이 없어요.
2011.11.28.13:00~14:30.서울시 마포구 상암동길 260-16 국악방송 건물 11층 스튜디오에서. 전황 명인 함경도 민요 <어랑타령>(신고산타령, 무반주) 시범 창.
전황: 이 정도예요.
노재명: 예, 아이구 감사합니다. 함경도 민요 고향의 소린데 선생님의 고향 땅 함흥 지역의 민요 <신고산타령>을 1절 간략히 불러 주셨습니다. 선생님 춤 원래 전문가신데 춤은 이게 라디오 방송에서 보여드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선생님 국악 배우신 내용을 조금씩 이렇게 부탁드려 봤습니다. 그리고 현재 선생님께서는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직을 지내시다가 현재 고문으로 활동하고 계시구요. 또 국립무용단 지도위원, 또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의 겸임교수 재직을 하셨고 또 무용 전문가시지만 국악쪽에 조예가 깊으셔서 국립창극단의 또 단장을 지내셨는데요. 거기 그 단장을 맡게 되신 그 계기 그 때 회고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황: 근데요 그 단장은 장관 임명인데 복수로 올라가 가지고 그 안에서 한사람 딱 뽑는 건데 그건 내가 운이라고 봐요. 예, 그러고 내가 또 그렇게 국악을 좋아하고 아사장까지 지내고 한 것은 다 그래도 어떻게 영향을 알아서 그렇게 날 뽑아준 것을 내가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요.
노재명: 예,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그런 국악단체 기관장 역할도 하시면서 계속 지금까지 국악 전반에 관심을 가지시고 끊임없이 학습을 나름대로 해오셨는데 또 주목되는 게 가야금도 배우셨는데요. 가야금은 어느 분한테 익히셨나요?
전황: 아, 제가 외국을 나가면 보통 한 4개월, 6개월 그렇게 돌아댕기잖아요. 구라파를 나가드래도 그렇고 그러면은 꼭 가게 되면은 그 악사들이 꼭 따라붙거든요. 김윤덕 선생이 유독이 나하고 같이 언제나 한방을 같이 썼어요. 그럼 4개월 가서 하면 4개월 동안 같이 쓴다는 얘기죠. 그 기회를 내가 놓치지 않고 아이유 내 이번에 내가 김윤덕 형님하고 내 형님, 형님 그랬어요. 한 10분짜리래도 산조를 배와, 배와야 되겠다. 그래서 배운 게 10분짜리 배운 거예요.
노재명: 예, 말씀 듣다 보면 정말 굉장하신 거 같애요.
전황: 흐흐흐.
노재명: 선생님의 그 끊임없는 학습 의욕, 그게 흥미를 계속 가질 수 있다는 게 뭐 무슨 그걸로 문화재 되겠다, 무슨 교수 되겠다 이런 야망보다는 그게 자체적으로 너무 좋은신 거죠. 그 음악 자체가, 예. 그래서 그 혹시 가능하시면 가야금산조 가락을 다스름이나 진양조 그 일부만이라도 여기서 좀 부탁을 드려 봅니다.
전황: 그건 가능해요. 근데 나는 내 마음으로써는 거문고를 배워 가지고 한 10분짜릴 해볼라고 그게 내 꿈이에요.
노재명: 아, 예.
전황: 거문고와.
노재명: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한국의 가무악 참 두루 섭렵을 하시다시피 하셨는데 현재 85세신데 거문고산조 연주해 보시는 거 이렇게 꿈을 가지고 계십니다.
전황: 그렇게 가는 길을 알, 알거든 내가.
노재명: 예.
전황: 거문고의 가는 길은 아는데.
노재명: 그러면 혹시 그 가야금산조를 들려주시기 전에 그 꿈을 가지고 계시는 거문고산조 가락을 이게 손으로는 지금 직접 안되시지만 그 거문고산조 가락을 혹시 구음으로 잠깐 가능하실까요?
전황: 예.
2011.11.28.13:00~14:30.서울시 마포구 상암동길 260-16 국악방송 건물 11층 스튜디오에서. 전황 명인 거문고산조 자진모리 구음(무반주) 시범 녹음.
전황: 이 정도죠.
노재명: 예, 아이구 굉장히 구음만으로도.
전황: 흐흐흐.
노재명: 얼마나 거문고산조를 많이 좋아하시고.
전황: 많이 들었어요 많이.
노재명: 예.
전황: 이게 엉터리 엮은 거죠. 근데도 장단은 맞잖아요.
노재명: 거문고산조 가운데 자진모리 부분 이렇게 구음으로 들려 주셨습니다. 그 꿈을 잊지 않으시고 앞으로 그 직접 이렇게 금방 타실 거 같애요. 조금만 배우시면.
전황: 아, 글쎄 그래서 이거 내가 한 한달만 배워도 말이지 그래두 진양 한 두서너 가락은 배울 거 같더란 얘기야.
노재명: 예, 감사합니다. 그러면 아까 방금 부탁드렸던 김윤덕류 가야금산조 진양조 부분, 내두름 부분 부탁드려 봅니다.
전황: 으, 그건 내가 진양 부분이 아니고 중모리 부분부텀 배웠어 중모리. ‘당찡당’ 입으로 합시다 그냥.
노재명: 예, 알겠습니다.
2011.11.28.13:00~14:30.서울시 마포구 상암동길 260-16 국악방송 건물 11층 스튜디오에서. 전황 명인 김윤덕류 가야금산조 중모리 구음(무반주) 시범 녹음.
전황: 그렇게 나오는 거지 경드름.
노재명: 예, 김윤덕류 가야금산조 가운데 중모리 부분.
전황: 예, 중모리 부분.
노재명: 잠깐 구음으로 들려 주셨습니다.
전황: 예.
노재명: 직접 연주해 주신 거보다 훨씬 몸에서 나오는 소리기 때문에 더 이렇게 감동적인 것 같습니다.
전황: 그래요? 흐허허허허허. 그래도 그 정도래도 흉내낸다는 게 어디에요.
노재명: 예, 아이구 너무 좋습니다 선생님. 예, 그리구 선생님께서는 또 창작 민요극도 굉장히 그 범위가 넓은, ‘진도에 또 하나의 고려 있었네’, 창무극 ‘해상왕 장보고’ 같이.
전황: 예.
노재명: 그런 대작들을 안무를 많이 하셨는데요. 그런 대작들에 대해서 만드실 때 그 감회 그 때 느낌을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황: 근데요 그거를 국악을 들을 줄 알았기 때문에 그런 안무를 했단 얘기에요. 그걸 몰랐으면 제가 못했어요.
노재명: 맞습니다.
전황: 예, 제가 장단귀가 뚫어지고 소삼, 대삼을 알고 하다 보니깐 결국은 <농악>두 짰단 얘기죠.
노재명: 예.
전황: 그리고 그니깐 그 ‘진도에도 또 하나의 고려 있었네’ 그 안에도 맨 창이거던 창을 들을 줄 아니깐 안무가 되더란 얘기지.
노재명: 그렇지요. 예.
전황: 발림이라고 해서 헛으로 못해요.
노재명: 예, 그래서 지금은 모든 예술 학문 모든 분야가 서구식으로 장르가 다 나뉘어져서 학습을 하지만은 사실은 예전에는 가무악을 한 묶음으로 이렇게 두루 학습을 했구요.
전황: 으, 그럼.
노재명: 그런 면모가 아마 전황 선생님한테 한국 문화가 잘 전승이 됐다고 생각이 듭니다.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한국 무용계 원로 전황 선생님과 방송 함께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국악방송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그 제자분들을 많이 양성을 하셨는데요. 대표적인 제자분들 성함 소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황: 춤을 많이 취고 어쩌고 그러지 않고 안무를 주로 했기 때문에 그렇게 뭐 제자가 이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노재명: 예.
전황: 그렇지만 현재 어려서부터 나한테서 하다가 지금 가운데 이대 가서 나오고 한 게 윤성주라고 있습니다. 윤성주, 그리구 내 딸 전미례를 내가 가르킬라고 전미례가 우선이죠. 첫 제자라 그러고 그리구 황의자.
노재명: 예.
전황: 또 김지원이, 백선희, 현재 지금 모두 춤 취고 있는 사람들이 내 그냥 제자지. 그렇게 끼고 앉아서 그냥 뭐 활보하는 제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저는. 안무가 주로, 주로 했기 때문에.
노재명: 그 제자들 가르치실 때 예술가 정신이라든지 지도하실 때 강조하시는 점 어떤 부분인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전황: 무용을 할라면은 더욱이 한국춤을 출라면은 한국의 음악을 알아야 된다. 국악을 모르고는 안된다 하는 것을 제가 항시 역설을 합니다. 또 그게 그렇게 되야 춤을 잘도 취고 맨들 수두 있으니깐 제 자신을 비추어 봤을 적에 국악을 내가 장단귀가 뚫어지고 국악의 산조를 들을 줄 알고 하니깐 멋이 깃들여져 가지고 춤이 잘 맨들어지드라 그 말이예요.
노재명: 예.
전황: 예, 그거예요.
노재명: 예, 그러면은 여기서 잠깐 전황 선생님에 대해서 관계자 여러분들의 인터뷰 말씀을 듣고 또 다음 말씀을 이어갈까 합니다. 무용 평론가 성기숙 교수님, 그리고 따님 되시는 전미례 씨, 또 평소 가깝게 지내시는 판소리 인간문화재 송순섭 명창, 전황 선생님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겠습니다.
성기숙: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로 있구요, 춤 자료관 연낙재 관장입니다. 전황 선생님은 우리 그 한국 춤에 있어서 대표적인 원로 무용가이시고 우리 근대 무용의 여명을 여신 최승희 선생님의 유일한 남성 제자로 유명하시죠. 그래서 평소에도 전황 선생님의 그 활동이라든가 인품이나 모습들을 보면서 존경해 왔던 무용계의 어른이시기도 합니다. 최승희 선생님의 안무 기법이라든가 춤의 메소드, 그 다음에 최승희 선생님의 춤 정신 이런 것들을 이어오셨다는 점에서 전황 선생님이 상당히 의미가 있는 그런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구요. 그 다음에는 인제 마당춤에 속한 농악을 무대 무용으로 양식화해서 후대로 이어질 수 있게끔 한 업적을 꼽을 수 있겠구요. 그 다음에 해방 이후에 우리 한국 무용이 말하자면 개척기, 건설기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그 시기에 활발한 활동을 통해서 우리 무용사가 굳건해질 수 있도록 활동하신 점인데 특히 무용가로서는 광장히 드물죠. 이례적으로 우리 인접 분야인 국악계로 진출하셔서 무용에서 보자면 영역 확장 내지는 활동의 지평을 넓혔다. 굉장히 통이 크시고 어떤 성품도 참 대륙적이고 남성답고 그런 이유들이 통합돼서 춤도 남성춤의 정체성을 아주 뚜렷이 보여주고 있는 분으로서 평소에서 나타나는 인품도 여러 후배 무용가들을 감싸면서 통합적으로 리더쉽을 발휘하는 모습 이런 것들이 굉장히 인상 깊구요. 집안 내력에서 오는 진취적이고 앞서가는 그런 면모를 또 딴 이에게까지 내력으로 이어진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전미례: 예, 안녕하세요. 저는 재즈 무용가 전미례입니다. 현재 재즈 무용단을 운영하고 있구요. 말레이지아 국립대학에서 무용과의 외래교수로 있고 그리구 전황 선생님의 큰딸 됩니다. 네, 아버지는 참으로 그 활달하시구요. 열정이 참 많으신 분이세요. 아버지는 어렸을 때도 작품 안무를 하시고 나면 리허설 때는 저와 엄마를 반드시 불러다가 객석에 앉혀 놓고 어땠냐고 꼭 물어보시고 저의 말을 작은 말까지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셔서 제가 중학교, 고등학교, 뭐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늘 함께 그렇게 했던 기억이 나고 또 분장실에서 거의 살다시피했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네, 저희 아버지는 음, 저를 제2의 최승희루 만들려구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6살 때부터 무용을 시작했죠. 그런데 인제 당신의 그 춤사위보다는 친구인 이매방 선생님, 이매방 선생님한테 저를 맽겼어요. 그래서 6살 때부터 쭉 그 선생님 밑에서 큰아버지, 큰아버지 하면서 무용 하면서 그렇게 자랐는데 한국 무용으루 대학을 들어갔지만 현대 무용에 매료돼서 제가 현대 무용으로 바꾸고 졸업 후에 제가 인제 재즈 무용으루 전향을 했죠. 그런데 평상시에 그 아버지는 춤에 대한 것을 당신이 가지고 계신 그 모든 기법과 성격이라든지 제가 좀 남성적인 그런 면이 있대요. 아부지 닮아서 그런지 그런 부분을 고대로 물려 주실려고 했는데 저는 당시에 남성이 그렇게 무용 한다는 것들이 그렇게 한국에서 고운 눈으루 보지는 않았어요. 그런 것들이 참으루 그 사춘기 때 많이 자극을 시켰든 거 같애요. 그리구 나서 또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현대 무용을 바꾸면서 마음껏 발휘할 수 있고 제가 독창적인 춤을 출 수 있는 어떤 그런 기반을 아버지가 또 만들어 주셨어요. 정 그렇다면 니 마음이 그렇다면 그러면 다른 무용으로 해두 된다라고 해서 직접 유학을 같이 손 잡구 아버지가 데리구 가주셨는데 평상시에 그 아버지는 인생에 있어서 뭐 춤이 다 뭐 이런 식은 아니예요. 저하고의 관계는 그저 친구같이, 남들이 정말 부러워하는 어떤 사람들은 연인같이, 또 어떤 사람들은 오빠 동생같이, 뭐 아주 너무나 그런 밀접하게 가깝게 이렇게 보셔서 지금두 제가 늘 하루에 한번은 얼굴을 뵙죠. 전화는 5통 이상 하지만 그렇게 예술가로써 무용가로써 서로 그 나눔을 갖고 있습니다.
송순섭: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 송순섭입니다. 전황 선생은 내가 옛날에 부산서 오래 살았어. 그 때 우리 저 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내셨고 그래서 인자 이사장님하고 난 부산 지부장하고 이렇게 해서 국악 행사 때마다 만나 뵈었고 인자 당시에 이사장 그만두시고 나도 부산서 떠나서 순천 해룡면이라는 델 갔어. 거그 가서 제자들하고 시간을 보내고 쉬고 있는 때여. 그런디 거기를 오셨어. 그래서 날 찾아서 오신 거야. 그래 가지고 내 북을 치고 좋아하고 아마도 그 때가 정이 제일 깊었을 거야. 그라고 인자 우리 선생님하고 나보다 더 먼저 아셨지. 우리 선생님 소리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인자 또 날 좋아했고. 근데 전황 선생님 춤을 좋아했지 내가 또 응. 선생님 또 춤 멋있어요. 흐하하하하하. 춤도 멋있고 그래서 그러다 보니까 인간적으로 좋아해, 전황 선생이나 내나. 우리가 다 늙어서 지금 얼마 안남았어. 그러니 마지막 얼마 안남은 인생 더 멋지게 사시고 건강하게 사시고 으, 멋지고 건강하게 살다가 가는 것이 제일 우리 보람이여. 건강하시고 멋진 인생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전황 선생님 무용계 원로신데요. 국악방송 스튜디오에서 방송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방금 들으신 내용은 전황 선생님에 대한 무용 평론가 성기숙 교수님, 그리고 전미례 선생님, 그리고 판소리 인간문화재 송순섭 명창께서 인터뷰를 들려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 여태까지 가무악 여러가지 활동 국내에서, 또 해외에서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요. 선생님께는 아마 가장 중요한 존재가 스승 최승희 명무가 아니실까 이렇게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최승희 선생님께서 말씀은 없었지만 내게 어떠한 예술가로서 영향을 주었다, 제일 그 가슴에 와닿는 영향을 많이 준 부분에 대해서 기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황: 우리 선생님이 엄하면서도 정이 많으신 선생이었었어요. 그러니 제가 마음을 놓고 선생님한테 가서 선생님 이걸로 가지고는 제가 조금 생활하기가 못하니깐 조금 더 보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내가 기탄없이 얘기했드니 그걸 들어주었다는 얘기죠.
노재명: 예.
전황: 중국 일대 공연 갈 적에도 옷도 없고 그렇다고 그 안막 선생님, 남편 되는 그 양복하고 와이, 와이샤쓰 다 거, 그 주면서 또 줄여서 그거 입고 그러구 갔어요. 예, 정이 있고 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주는 거지. 그렇게 하겠어요?
노재명: 예.
전황: 그래서 제가 잊지 않고 늘 생각하고 있어요.
노재명: 예, 그래서 아마 평소에 제가 선생님을 뵀을 때 이렇게 젊은 사람들한테 참 격려를 많이 해주세요.
전황: 흐허허허.
노재명: 젊은 소리꾼한테도 잊지 않고 아 자네 성음이 참 좋아졌네. 아 자네 그 논문 감명
깊게 봤네.
전황: 으, 어, 어.
노재명: 예, 이렇게 참 국악인들, 무용인들한테 참 후덕하게 인정을 많이 베푸시고 아마 그 영향이 그 스승 되시는 최승희 선생님의 그 따사로움 거기에 그런 배움이 있지 않으셨을까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전황: 내가 우리 최 선생님이 안무할 적에, 안무를 본 사람 없어요. 보여주지두 않고 그걸 제가 두 달인가 내가 몰래 댕기면서 몰래 보다가 선생님한테 들켜놨어요. 그 야단 안치고 말이지요. “너 언제부터 여기 와서 봤니?” 그러드라구요.
노재명: 예.
전황: 그래서 이렇게 된다고 그러니까 “숨어 보지 말고 이리 나와서 앉아서 보라”고.
노재명: 예.
전황: 그렇게 승낙이 떨어져서 내가 안무하는 데 딱 와서 지켜서 보고 있는 제자는 나밲에 없었어요. 아무 제자에게도 안무하는 거 안보여주고 그랬어요. 보여줄 거예요 누가? 그 우리 사랑하는 방법이 그런 거야.
노재명: 예, 이 방송을 이제 마칠 시간이 거의 다 돼서 혹시 앞으로 계획 말씀 좀 해주시거나 청취자 여러분들한테 남기고 싶은 그런 말씀.
전황: 허허. 한가지만 잘해야지. 여러가지 잘하는 사람이 별로 그렇게 안좋은 거에요. 내가 이것도 찝쩍 저것도 찝쩍해서 그냥 하여튼 국악에는 피리만 부는 거만 못하지. 다 만진다 그 말이예요.
노재명: 예.
전황: 줄만 있으면은 그래서 이,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지끔 내가 한가지 냄겨 놓고 싶은 말은 한가지래두 직심있게 잘해라 그 말이에요. 내가 거문고산조 내가 못하는 게 한이 돼 버렸단 얘기에요.
노재명: 예.
전황: 예, 그래서 그렇게 그 음악이 좋아요. 예, 술대 한번 ‘드르릉’ 긁는 그 소리가 그렇게 내 마음을 후비는 거 같애.
노재명: 예.
전황: 그걸 내가 죽기 전에래도 딱 몇 장단이라도 해야 되겠다. 그래서 내가 김무길이, 무길이, 김영재 봐요. 참 재주 있잖아요.
노재명: 네.
전황: 그렇게 하고 싶어 나는 지금.
노재명: 그래서 선생님이 특기로 한국 문화예술사에 길이 남아있는 그런 안무 작품들이 아마 앞으로도 굉장한 영향력을 이렇게 주실 거 같구요. 또 그런 영향이 아마 최승희 선생님서부터 어렸을 때 영향을 받으셔서 이렇게 길이 길이 전수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봤습니다.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어느덧 마칠 시간이 다 됐습니다. 최승희 명무도 그렇고 제자 되시는 전황 선생님도 그렇고 어떤 분야에서건 앞서가는 선구자는 당대에는 어려움을 겪고 주위 사람들의 시샘을 받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는 인정을 받게 되고 그 분야를 발전시키게 되는 거 같습니다. 이 시대에도 최승희, 전황 선생님 같은 예술에 대한 열정과 끊임 없는 시도가 많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전황 선생님 오늘 귀중한 말씀과 음악 대단히 감사합니다.
전황: 예.
노재명: 앞으로도 무대, 방송 등에서 자주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건강하시구요.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전황: 예, 수고 많았습니다 오늘.
노재명: 예, 오늘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겸임교수이자 전 국악협회 이사장, 국립창극단 단장을 지내신 전황 선생님과 이 시간 함께 했습니다. 한국 근대 가무악의 산증인이신 전황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한국 근대무용사와 국악사를 깊이 있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귀중한 방송 기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지금까지 진행에 노재명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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