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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명창 송순섭 증언 내용
  sss20110409.jpg(사이즈:54.0KByte)
* 상기 사진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2011년 4월 9일 전라남도 순천시 석현동 산55-3 판소리 인간문화재 송순섭 명창 전수관 모습.
국악방송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프로그램(방송 진행:노재명) 판소리 인간문화재 송순섭 명창 현장취재 장면.
송순섭 명창(좌측)과 방송 진행자 노재명 대담 녹음 장면.
송순섭 명창 단가 <사창화류>(고수:정향자) 장면과 친필사인 모습.
* 2011년 4월 9일 전라남도 순천시 석현동 산55-3 판소리 인간문화재 송순섭 명창 전수관에서 노재명이 송순섭 명창을 인터뷰하고 2011.4.30.19:30~21:00.국악FM방송 노재명 진행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에 방송된 내용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국악음반박물관 편 『판소리 명창 제6호 - 20세기 초반 명창 소리를 만나다』 서적, 서울:도서출판 채륜, 2016년, 17~46쪽 수록)

판소리 명창 송순섭 증언 내용
대담/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정리/노재명·유은옥(시인)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안녕하십니까. 노재명입니다. 대중가요가 보통 3분, 4분 정도 되는데요. 요즘은 경쟁이 치열하고 그러다 보니까 처음 약 한 30초 부분이 흥행의 판가름을 좌우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도 3시간, 혹은 5시간 완창을 하고 진실된 사랑과 효심 등을 노래하면서 그렇게 되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갖고 노년까지 수련을 하는 판소리 명창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시대 최고의 판소리 적벽가 분야의 인간문화재 송순섭 명창을 뵙기 위해서 전라남도 순천시 석현동의 여기 판소리 전수소에 국악방송 중계차가 와 있습니다.
노재명: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송순섭: 안녕하십니까.
노재명: 예. 이렇게 말씀만 듣다가 여기 와 보니까 참 계곡물이라던가 봄의 그 화창한 꽃이라던가 참 시설도 잘해 놓으시고 아마 전국의 그 국악 전수소 중에 가장 멋진 곳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해 봤습니다.
송순섭: 그렇습니까. 저도 많이 돌아다니면서 산 공부도 해보고 했는데, 이 장소에 와서 2005년부터 산공부를 하러 왔거든요. 다니다 보니까 이렇게 좋은 데가 있어요. 그래서 그 때에 이것이 내 것이 됐으면 하고 원했는데 아, 이것이 내 손에 들어 왔어요. 그래 보니깐 저는 이 아까도 그 노 관장님이 말씀하시기를 계곡, 양쪽에서 계곡이 흘러 내려와 가지고 우리 집 앞에서 계곡이 하나로 뭉쳐 내려 갑니다. 하동강 쌍계사가, 그 쌍계사가 두 계곡이여. 두 계곡이 합해서 하나로 뭉치는데 이것을 그 쌍계라고 했거든. 여그도 아마 그런 정도 버금가지 않느냐 싶은 생각이 들어서 내 이것, 내 것 만들어 놓고 아마도 제가 생각할 때도 전수관 중에서는 내 전수관이 제일이지 않느냐 싶은 자부심을 가져 봅니다.
노재명: 예. 이 근처에 은사님 되시는 박봉술 명창 그 묘소가 여기로 이장될 때도 제가 참석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은 이렇게 은사님도 묘소가 근처에 있으시고 또 여기 전수관을 박봉술 명창 소리제 전수관을 이렇게 아주 잘해 놓으셔 가지고 아마 은사님께서도 그 영혼이 있으시다면은 참 곁에서 흐뭇하게 우리 제자가 이렇게 내 뒤를 잘 잇고 있구나 이렇게 흐뭇해 하실 것 같습니다.
송순섭: 그래 저도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 장소가 나한테 든 게 우연히 된 것이 아니여. 내가 이 순천에 올 이유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우리 선생님의 자취를 살려 보려고 이 순천에 왔는데 우리 선생님이 태생은 구례 태생 아닙니까. 그런디 구례에서 빛을 못 봐. 그래서 제자로서 항상 아쉬운 감을 느끼고 있다가, 선생님이 순천에서 젊어서 국악원을 경영하시고 또 순흥창극단을 만들어 가지고 이 근방에 순회 공연을 하고 그러신 그 경력을 생각해서, 요 순천시하고 초청해 가지고 우리 선생님 자취를 순천에 살려주면 내가 순천에 오겠다. 이래 가지고 참 2006년도에 순천시 문화 인물로 선정을 허고 또 2006년도 그 해 현창 사업을 허고 해서 선생님 묘지를 이렇게 다 서울 그 벽제 공동묘지에 있는 묘를 요리 옮기고 다 해놨어. 그 연으로 지금 내가 순천에 사명감을 다하기 위해서 2005년도부터 요리 산공부를 왔거든. 그 때에 산공부 온 것이 바로 이 곳이라. 그래 인자 이 곳을 보고 욕심내고 했는데 나 힘으론 할 수가 없어. 그런 것이 이것이 내 것이 된 것은 우리 선생님이 내가 선생님 생각하는 게, 그 만의 하나라도 그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았어. “이것은 여그는 니가 와서 있거라.” 꼭 만들어 주신, 우리 선생님이 꼭 만들어 주신 것 같습니다.
노재명: 예. 이 아름다운 경치 속에 이렇게 송순섭 명창께서 한복을 아주 단아하게 입고 여기서 소리하시는 모습을 뵈니까 마치 그 신선이 여기서 하강을 해서 노니는 듯한 그런 아주 멋진 그림의 한 장면 같습니다. 여기가 순천이 역사적으로 보면 송만갑 명창이랄지 또 가야금병창의 또 오태석 그런 분들이 이 곳이 고향 낙안읍성 거기가 고향이시고, 예로부터 여기가 벽소 이영민 선생님 그런 귀명창 분들이 판소리를 많이 후원하고 판소리를 부흥시켰던 그런 고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송순섭 명창과 함께 송만갑 명창의 유성기음반을 복각하는 그런 시디 음반 제작도 같이 했었고 저로써도 굉장히 뜻깊은 그런 고을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실례지만 연세가 몇 세신지 좀 궁금합니다.
송순섭: 인제 팔십이 다 됐어요. 칠십 여섯이니까. 하하.
노재명: 예. 1936년 생이시구요. 호적상으로는 1939년 생이시구요. 연로하신 편인데도 외관상으로 보면 굉장히 젊어 보이시고 또 서울의 전수소, 또 광주의 전수소 이렇게 일주일을 삼등분해서 비행기를 타고 왕래를 하시는데 아마 이렇게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명창분이 지금 이 시대에 계실까 싶을 정도로 굉장히 바쁘게 생활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힘들진 않으세요?
송순섭: 그게 아직까지는 그렇게 힘들다 그건 못 느끼고 있네요. 그게 모두 나를 애끼는 분들이 인자 노력해 가지고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문서 엥? “무리하지 않느냐.” 하면서 걱정을 많이 해주십니다. 그라고 나보고 “무리하지 마라.” 해쌌는데 제 생각에는 무리한 게 아니라 내가 그러고 다니는 게 건강에 좋지 않느냐 그런 생각을 해보거든요. 여기는 인자 주말에 금토일을 여그 와 있습니다. 그라문 인제 일요일 날 오후에 늦게 서울을 올라가든지, 인제 그럼 서울 가서 월화 있어. 그라고 인제 수요일 날 아침부터 광주를 비행기 타고 내려 와. 그란디 이라고 쫓아다니는 게 기냥 노인이라고 해서 앉었기만 하면 그거, 그것이 오히려 베릴 거 같애. 그리고 금년에도 지금 국립극장에서 완창을 했지 않습니까.
노재명: 네.
송순섭: 수궁가 완창을 했는데 모두 다 날 보고 욕심 부린다 늙어 갖고 과욕을 부린다고 해쌌는데, 그것도 내가 못하겄다 이 소리가 안 나와 요청이 오면. 만일에 못한다 그래 버리면 아 인제 송순섭이 늙어서 베렸드라 이런다고 그 얘기하면. 또 그것을 함으로써 내가 스스로 좌절하지 않고 거기 가서 그래도 무시 안할라니깐 연습을 해. 그래서 연습을 하는 것이 나한테 오히려 건강에 득이 되지 않느냐. 나는 요런 생각을 해서 만일에 내년에도 또 요청이 있다 그러면 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노재명: 예. 그래서 유년 시절부터 아마 굉장히 성품이 외람된 말씀이지만 소처럼 우직하고 강직한 성품이 아니셨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는데 유년 시절은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송순섭: 예. 유년 시절에는 뭐 원래에 촌에서 살 때 우리 마을에서도 우리 집이 제일 가난한 집이야. 우리 집이 없어. 남의 집 방 하나 빌려 갖고 그걸 곁방살이 한다 그래. 그런디 우리 어머니가 그렇게 사람을 좋아해. 근데 부자집에 안가고 곁방살이 하는데도 아 그리 사람들이 모여 들어.
노재명: 네.
송순섭: 그런 걸 보면 우리 어머니가 사람 끌어 모으는 그런 게 있는 것 같으고. 또 위의 우리 형님이 서울서 공부하다가 그냥 6.25사변 전에 행방불명 돼 버리고 남매로 둘이 컸는데 농사도 제대로 없고 형제간도 없고 아버지도 안계시고 그런 과정에서 우리 어머니가 나를 서당에를 보내고 그 나이 그 때에 나를 그렇게 중학교까지 보냈어. 그래도 그 때는 공부를 괜찮게 했든 모양이여. 그랑깨 인자 어머니가 그래도 가르칠라고 애를 쓰고 그냥.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형제간 많고 농사 많이 짓고 한 사람도 중학교를 못들어갔거든. 그래 나는 중학교 다니면서 우리 어머니 고생하시고 나를 가르칠라고 애써쌌는 거, 그런 걸 보고 내가 스스로 중학교를 중퇴했어요. 어머니하고 밤새도록 싸우고 나도 인제 일하고 어머니하고 같이 살라요 그라고.
노재명: 네.
송순섭: 인자 그러면서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노래를 잘 불렀어. 학교 학예회를 하면 독창 내가 하고 합창 하면 저 뚝딱 지휘도 내가 하고 웅변도 내가 하고 또 학교 운동회를 하면 청백을 노눌 때 서로 날 데려갈라 그래. 응원단장 내가 이러고 그냥 삼삼칠 박수 요런 거 잘해. 하하하. 그랑깨 학교 다니며 모든 것이 다 내 차지였어. 어렸을 때부터 아마도 이 우리 예술쪽으로 좀 소질이 있었던 것 같애요. 그러고 학교, 중학교 다니다가 인제 중학교 끝나고 와서 일을 하다가 늦게 추수하고 뭐다 하면서 달밤에 혼자 서서 유행가 부르고 섰으면 동네 처녀들이 담 넘어서 숨어서 듣고 모두 박수치고 그런 일을 했다고. 그라니깨 그 때부터 아조 음악적으로는 소질이 좀 있었던 거 같애요.
노재명: 예. 평소에 송순섭 명창 찾아뵈면 항상 제자 분들이 줄을 서서 배우려고 기다리고 있고, 선후배 동료분들 사이에서 아주 인정있고 의리있고 성품이 또 화통하시고 항상 이렇게 웃는 인상이시기 때문에 주변에 항상 사람이 많으신 거 같아요. 그런 원천이 마을 사람들이 항상 집에 모여들었다고 하는 부모님의 그런 성품과 닮고 그런 영향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모친께서는 반대가 없으셨나요? 노래한다고 하실 때.
송순섭: 네. 어머니는 날 반대 안했어요. 근데 집안에서 모두 반대야. 어머니 혼자서 고생하고 어렵게 사니까. 자식 저거 밖으로 안내돌리고 잡어 놓고 끙끙 일 벌어 먹고 살면 당신이 편할 것인디 자식 저거 구엽게만 생각허고 고생 안시, 안시킬라고 밖으로 내돌리고 당신이 고생한다고 집안에서 형수가 잘못해. 하하하. 모두 미워한단 말이야. 그런디 그럴 때 우리 어머니는 “나는 그라 안할라요. 쟤 활동할 수 있도록 하게 놔 둘라요.” 어머니가 날 잡고 내 못간다 했으문 나도 못댕겼을 것이여. 그란디 지금 그런 걸 생각허문 우리 어머니를 잘 만난 것 같애. 어머니가 “그렇게 말해도 나는, 나는 그렇게 안할랍니다. 쟤 활동하도록 놔둘라요.”
노재명: 네.
송순섭: 이런 것을 봐서 아마도 우리 어머니 은혜가 아조 크시고 또 그 농사 짓고 길쌈하고 해가지고도 그래도 우리를 가르칠라고 우리 형도 행방불명이 됐습니다만 서울까지 학교를 보냈어. 그러다가 형님 잊어부리고 참 마음 고통 크신 거 이런 걸 볼 때에 나라도 조금 정신 차렸으면 어머니 옆에서 모시고 잘 살아서 할 것인디 인제 나는 나대로 이라고 돌아댕겨 버린단 말이여. 지금 생각을 하면은 이런 과정을 우리 어머니가 보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이런 게 아쉽습니다. 근데 내 대사습 대통령상 한 것도, 상 탄 것도 못보고 돌아가셨으니까. 내가 아마도 저승에서도 이런 거 보시면 기뻐하실 거예요.
노재명: 네. 평소에 송순섭 명창께서 적벽가 완창하는 걸 제가 공연을 보게 되면은 마치 그 삼국지의 관훈장 같은 그런 체격과 그런 성음, 사나이다운 그런 자태가 저런 거구나 하는 걸 느끼곤 했었는데 아마도 모친께서 낭군을 일찍 여의시고 외아들을 기가 죽지 않도록 사나이의 기개를 만류하거나 기를 꺾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잘 뒷받침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판소리에 입문을 본격적으로 하신 나이가 몇 살 때 입문을 하셨을까요?
송순섭: 한 스무살 때쯤. 집안의 형님이 어찌 북을 배우게 됐어. 그래 갖고 소리하는 선생얼 마을에다 데려다 놓고 북을 배와. 그 때 거그 모인 사람들이 나하고 다 십여살 이상 다 어른들이여. 거그를 우리같이 젊은 놈들은 안가. 그런디 내가 그 소리를 듣고 거길을 간단 말이여. 그라면 또 그 형님들은 저것을 한번 얼러야 할 것이다. 하하. 저것을 한번 얼러 갈 것이라고 오라 오라 그래. 난 이제 거기 가서 어깨 너머로 배운단, 본단 말이여. 그라니 얼마가 지나고 나니깐 그 선생이 북 갈쳐 놓고 북을 치게 해놓고 늘 소리를 해. 그럼 그 소리를 듣고 내가 얼마 안가서 그 소리를 해부러, 얼마 안가서 인제. 그라문 그 선생이 만약에 없을 때는 내가 가서 그 소리를 부른단 말이여.
노재명: 네.
송순섭: 그랑깨 인제 그 형님들이 날 더 좋아하지. 그래 가지고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이 여까지 소리꾼이 됐는데. 인제 한때는 내가 또 그, 그 무렵에 몸이 안좋았어요. 산에서 못자리 거름 할라고 산에 가서 풀 뜯으러 가 가지고 미끄러졌어. 옆구리를 다친 것이 늑막염이 돼 버렸어. 그 땐 늑막염 걸린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하여간. 그래 갖고 고흥읍의 제중병원이란 데를 병원에 입원해 가지고 있고 그랬는데 겨우 안죽고 살아났는데 이 병이 일을 못해.
노재명: 예.
송순섭: 될 수 있으문 걸음도 많이 안걷고 일은 무거운 일을 안하고 그라야 되는데 인자 또 이것을 헐라 그러면은 또 이건 잘 먹고 보호를 해야 해. 그러니까 돈이 있어야 잘 먹지. 그런데 나는 돈이 없고 그렁깨 일도 못하고 놀고 그라니깐 줄낚시를 만들어 가지고 담풀을 줃어 가지고 장어를 낚으러 댕겨. 그라문 장어 그 놈 한 두 마리 낚으문 그 놈 갖다가 과 먹고 이러고 세상을 사는데, 그래도 인자 일을 못해도 취직은 해야 쓰겄다 싶어서 광주로 취직을 헌다고 광주로 나왓어. 그래 광주로 나와서 광주로 취직한다고 나온 놈이 쌀만 몇 가마니값 없애 불고 취직도 못하고 광주서 공원을 배회해. 돈 없응깨 집에도 오도 못허고 돈만 없애 불고 하하, 그랑깨.
노재명: 네.
송순섭: 그때 광주에가 공대일 선생이 갈치는 호남국악원. 그니까 광주공원에가 그 때는 공대일 선생 국, 국악원만 있는 게 아니라 중간 만침 가면은 전남국악원이라고 박학주 선생님이 가르치는 전남국악원이라고 있었어. 그 너메를 가면은 전남민속예술학원이, 수궁가 문화재 정광수 선생님이 거기서 가르쳤어. 그랑깨 여기를 넘어대니면 전부 국악원 천지야. 그런디 제일 앉어서 듣기 좋은 곳이 호남국악원이라. 호남국악원에서 요렇게 내다보면은, 그 쪽에서 소리 한번 잘 들어. 그러니 날마덤 거기 가서 소리 하는 거 밖에서 듣고 있다고. 그랑깨 국악원에서 듣고 저 놈, 저 사람이 다 저기 와서 소리를 듣고 한 것이 참 좋아하는가 보다, 저보고 들어오라고 하더라고. 그래 갖고 인자 들어오라 해싸서 들어가 소리를 들어보고, 날 보고 소리를 한번 해보라 그래서 하니까 목이 좋다고 잘허겄다고. 그라고 공대일 선생님이 나한테 “한번 배워 봐라.” 응, 그래서 “선생님 나 돈도 없고 그란데 우치케 하겄어요?” 그랑깨 “돈 없어도 괜찮응깨 한번 해봐라.” 그래 갖고 공대일 선생님한테서 그 때 참 돈 없이 몇 달 동안 공부를 했어요. 응, 그랑깨 내 약력을 보면 제일 첫째 선생님이 공대일 선생님이 먼저 나오지요.
노재명: 예.
송순섭: 그 때 거기서 공부를 하고 살았는데 먹고 살아야 할 거 아니여. 하하하. 그랑깨 할 수 없으니깐 아이스케끼 장사라도 한번 해야 쓰겄다. 그래 갖고 아이스케끼 공장에 가서 해볼라 그러니깐 그것도 돈이 선금이 없으문 누가 보증인이 있어야 해. 하하하 그것도. 그래서 그 때에 나하고 같이 취직하러 갔다가 취직 못하고 논 사람이 고향의 조카 한 사람하고 두 사람이 있어. 근디 우리 광주 양동시장에가 집안 형님이 보증을 서 주어서 아이스케끼를 둘이 통에다 담고 나오는디 아이스케끼 열 개, 그 놈얼 담아 가지고 인제 팔러 돌아댕겨.
노재명: 네.
송순섭: 그란데 오전내 돌아댕겨서 판 것이 나는 네 개를 팔았고 그 사람은 여섯 개를 팔았어. 그래서 공원에서 둘이 아이스케키 통 깔고 앉아서 “응, 이것도 못허겄네 이?” 하하하. 그란디 그 옆에는 지금 약 장사판이 벌어져 가지고 쿵짝쿵짝 야단이야. 내가 이 놈을 떡 아이스케키 통을 깔고 앉어서 “못허겄네. 못허겄네. 이 녘으 종사도 못허겄네.” 이렁깨 옆의 할머니들이 듣고 있다가 “어머 저 사람이 노래를 잘한가배. 하하하. 저 사람이 노래를 잘한가배. 노래 한번 불러 보셔.” “아, 지금 아이스케키 팔러 나와 가지고 아이스케키도 못팔고 신세타령하고 있는디 어디서 노래를 불르겄소?” 그렁깨 “노래 잘하문 우리가 아이스케키 사 줄께.” 거기서 내가 인자 그 때 “일절통곡 애원성으~” 요걸 한마디 부릉깨 그냥, 아 그냥 할머니들이 그냥, 둘이 금방 동이 나버렸어. “얼른 아이스케키 더 가져 오소 으이? 더 가져 오쇼 이?”
노재명: 예.
송순섭: 그랑깨 아이스케키 자전거에다 싣고 쫓아 왔어. 그래 나는 지금 여기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디, 그 아이스케키 갖다 놓으니깨 지그들끼리 회사에서 온 사람이 팔아주고 불티가 난 거지 막. 그 바람에 약장사판이 깨져 버렸어. 하하하하. 그래 갖고 그 놈 다 팔고 둘이 정리해 갖고 나와서 약장수판을 뜩 보니까 거기서 나를 보드니 인제 아, 거기서 소리를 한 마디 해주라는 거야. 거기서 소리를 한 마디 했는디 아, 재창이 나오고 야단이 났어. 나 참 소리를 잘하는지 모르는디 재창을 하고 나오니깐 약장사 할아버지가 딱 따라오더구만. “그 차 한잔 하자고.” 그래서 아이스케키는 장사 하루 허고 걍 약장사로 빠져 버렸어. 하하하. 인자 그래 가지고 참 거기서 밥을 먹고 사는디 소리를 배운 놈얼 어떻게 열심히 허던지 아침 7시 응, 응? 그 때 나와서 공원 밥에서 밥을 사 먹고 오후 세시, 네시가 돼서 소리를 헐라문 눈에서 번갯불이 번뜩번뜩해. 그 때 그렇게 못먹고 살아놔서 목을 베려 버린 거야. 그 때 소리를 할 때는 아주 날 보고 광주에서 그냥 “아이, 임방울이가 와서, 와서 소리 한다냐?” 그라문 “내가 한다” 그랬다고. 그렇게 목이 좋든 목이, 목이 베려 가지고 내가 중년에 아조 고생을 하고 살었지. 지금 그 당시는 참 아이스케키 장사한 것도 그렇고 약장사판 다닌 것도 그렇고 참 부끄러워서 내가 말을 내놓지를 못했죠. 그래 지금 이런 얘기를 함부로 허는데 그 때에 내가 그 약장사판이 아니었으면 내가 소리 못하고 말았을 거에요.
노재명: 네.
송순섭: 그렇게라도 먹고 살면서 여까지 왔어.
노재명: 지금 박봉술 명창의 소리제로 적벽가 인간문화재가 되셨는데 처음 판소리를 선뜻 가르쳐 주겠다고 무료로 받아주신 그 공대일 은사님이 상당히 고마운 분이 아닌가.
송순섭: 그라문요.
노재명: 지금 무용가로 활동하고 계시는 공옥진씨의 부친 되시는 분인데요.
송순섭: 예. 근데 공옥진씨가 옛날 한참 춤 추고 다닐 때 서울에 가면 운당여관 박귀희 선생님 집에. 나는 부산서 있으면서 그 운당여관에 가면 날 그렇게 예뻐해요 동생같이. 왜? 젊은 사람들이 공대일 선생님한테 공부해 가지고 서울 나왔던 사람들이, 광주 사람들이 공대일을 안거친 사람이 없어. 그런디 나가서 활동하고 댕기며 공대일한테 배웠다는 사람이 없어. 그란디 송순섭이는 꼭 첫머리가 공대일이 들어가 있거던. 그러니깐 나를 저그 아버지 안잊어 버리고 꼭 챙겨 준다 해서 그렇게 예뻐하고. 한 2~3년 전에 영광 대회를 가 가지고 자리에 누워 계신다고 그래서 찾아갔어. 갔드니 나를 손 붙들고 “우리 아부지 본 것만이로 반갑네 이.” 이런 분이여. 그런데 더구나 내가 지금 공대일 선생님 그 때 그 시절을 못 잊는 것이여. 거기서 내가 박봉술이 알지를 못해. 거기서 모이는 분들이 공대일 선생님이나 성창순씨 아버님 성원목 선생님, 또 우리 고수 문화재 김명환 선생님, 또 북 잘 치는 백남희씨 이런 분들이 거기 다 모여. 그런디 거기서 들어보니까 박봉술 소리 칭찬을 허는데 난 박봉술이가 누군지도 몰라.
노재명: 네.
송순섭: 그런디 약장수판 따라 대니다가 영암을 가 가지고 시장으로 가는데 길바닥으로 스피카를 내놓고 흥보가가 나오는데 어띃게 좋든지 그 소리를 안가고 서서 듣고 그 소리 따라 들어갔제. “그 소리가 누구 소립니까?” 그라고 물어보니깐 그 음반을 딱 뒤집어 주드라고. 그러고 봉깨 박봉술 선생 소리고 북은 신쾌동 선생이 쳐 놨어. ‘딱’(송순섭 손바닥으로 무릎 치는 소리) “바로 이 분이로구나. 응? 바로 이 분이로구나. 모두 광, 광주서 그렇게 칭찬한 분이 박봉술, 바로 이 사람이로구나.” ‘딱’(송순섭 손바닥으로 무릎 치는 소리) “옳다. 내가 이 선생님한테 공부 해보자.” 그래 갖고 수소문을 해보니깐 아, 부산에 가 계셔. 그래서 그냥 보따리 싸 짊어지고 부산으로 쫓아 갔제. 그런 것이 내가 부산에서 24년을 살아 버렸어. 하하하하.
노재명: 예. 그래서 지금 방금 송순섭 명창께서 말씀해 주신, 나중에 은사님이 되는 박봉술 명창 그 때 목격했던 박봉술 명창의 흥보가 엘피 음반을 청취자 여러분들과 함께 바로 그 1960년대 초반에 녹음된 박봉술 명창의 판소리 흥보가 중의 <박타령>을 잠깐 들어보고 또 다음 얘기 이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10인치 장시간음반(LP) 관리번호 MI10LP-0037
南道唱 판소리 興甫傳 中에서 <박打令~돈打令> 唱朴奉述 북:신쾨동
新世紀레코-드株式會社 SLN-10621, LN-50079~50080(10인치 1LP), 1960년대 초반 녹음 제작, 해설·가사지 1장 내장. ‘신쾨동’은 신쾌동의 오자임. 이 음반은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신세기, 신세계, 힛트레코드에서 제작한 다른 명창들의 판소리 음반에 일부가 삽입된 바 있음.
노재명: 예. 박봉술 명창께서 1960년대 초반에 녹음한 판소리 흥보가 가운데 <박타령> 잠깐 들어 보셨습니다. 지금 인터뷰 중인 송순섭 명창의 스승이 되는 명창이시고 여기에서 북 반주는 거문고 명인 신쾌동씨가 담당을 하셨는데요. 박봉술 명창께서 생전에 약주를 좀 좋아하셔 가지고 이 음반이 첫 번째 취입하신 음반인데 약주를 좀 드시고 녹음을 들어가셨다고 그래요. 그래서 소리에 약간 취기가 있는 그런 녹음이었습니다. 박봉술 명창의 바로 이 음반을 들어보고 판소리를 공부하시다가 이 분한테 배워야 되겠다 그래 가지고 부산을 가셨는데 이렇게 찾기가 쉽지가 않으셨을 것 같아요.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전화나 이런 게 없는 시절이기 때문에.
송순섭: 그렇지요.
노재명: 어떻게 찾으셨나요 이 분을?
송순섭: 그 때 인자 부산을 가 가지고 국악협회가 있어요. 국악협회로 뭣이 해보니까 “박봉술 선생이 어디서 소리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쉽게 찾었지요. 박봉술 선생님을 처음 만나 가지고 소리를 배운 게 바로 지금 이 소리를 제일 먼저 배웠어요. 응? 내가 그 소리에 반해 가지고 쫓아가서, 선생님 이 흥보가를 어띃게 재밌게 들었든지 “내가 이 선생님 소리 흥보가를 배워 볼라고 왔습니다.” 그 때는 적벽가가 무언지도 모르고 하하. 그러니 <박타령>, 무엇보다도 <박타령>이, 선생님 소리의 이 <음식타령>, 우리 촌에서 음식 뭣이 하고 좀 피식피식하고 전 지지고 하는, 이런 뭐시기가 어찌나 그렇게 마음에 와닿고 그냥 똑 보는 것 같애. 그래서 들어가 앉자 그 선생님한테 그 소리를 배워 가지고 내가 지금도 어디 가서 적벽가가 문제가 아니라 어디 좋아하는 자리 같으문 제일 먼저 내놓은 게 바로 그 소리여. 그라고 이 요새 그 다른 선생들 소리를 들어보면 <흥보 마누래가 놀보한테 인사하러 나오는 데> 거기가 뭐 “주름은 잘게 접고 말은 널리 달아 아장거리고 나온다” 그래 버리거든. 그런디 우리 선생님 소리는 “이 주름은 잘게 접고 말은 널리 달아 여자들이 치맛자락 위로 탁 돌려 잡고는 위로 돌려서 걷어 안고 시내 경변에 큰 자래 걸음으로 아장거리고 나온다.” 이게 우리 소리밖에 없어. 그 같은 가사라도 그렇게 멋있게 짜여 있어. 그러니 지금 내가 우리 선생님 소리여서 그런가는 몰라도 내가 배왔다고 그렁 게 아니라 비단 적벽가나 수궁가나 흥보가나 내가 배운 소리를 딱 보면은 가장 내용이 조리 정연하게 짜여 있다. 오자도 다른 데보다 덜하다. 요런 것을 자부하고 싶은 소리라고.
노재명: 예. 지금이야 인제 판소리를 배우려고 하는 학생들도 좀 있고 또 판소리, 국악이 좀 그래도 국가적으로 지원도 있고 문화재 지정도 되어 있고 이래서 하는 보람이 예전보다는 더 커졌는데요. 예전에 송순섭 명창께서 젊으셨을 때 이 소리를 배울 때는 아까 말씀하신대로 돈도 잘 안벌리고 문화재라는 이런 건 생각도 못할 때고 대접도 제대로 못받을 땐데 뭐가 이렇게 이 판소리가 좋아서 광주로, 부산으로 사방으로 선생님을 쫓아 다니시면서 배우셨는지, 판소리가 뭐가 그렇게 좋으시던가요?
송순섭: 그럴 때는 참으로 어렵고 아까 말한대로 약장사판 아니면은, 특히 여자들은 술집에 들어가서 주전자라도 따랐어. 술이라도 따르고 뭐시기 했지만은 남자는 그런 것도 없어. 또 어디 가 남자들은 소리해 봤자 그 때만 해도 술 한잔 뭣이고 담배 한갑도 안 사줘. 이런 판인데 뭐가 좋다고 그랬던가 나도 모르겄어. 하하하. 그래서 이것이 아까도 우리 집안이 완고했다 했지 않습니까. 우리 고흥에 살면 고흥에가 네 양반 성이 있어. 심씨, 우리 송씨, 버들 류자 류씨, 고무래 정자 정씨. 이 네 성이 고흥의 토반이여. 그런디 이태까지 이런 얘기를 안했는데 우리 선생님 얘기 좀 할께요. 우리 선생님이 우리 고향의 당골 사위여. 그라문 우리 고향의 아조 무당 사우라 이거야. 그런디 나는 내중에 알고 봉깨 그래. 그런데 나는 거, 거기 사위도 몰랐는디, 우리 선생님 장인어른한테 내가 그 때 하소 하고 컸어. 그러니 우리 집안에서 나를 특히 반대한 것이네. 인제 낸중에 알고 보니깐. 우리 고향 당골 사우한테 내가 하소 하고 대해도 션찮을 것인디, 지가 소리를 배우니까 그를 선생으로 모시고 선생은 나 양반네한테 하소 하고 사니깨 집안에서 내가, 저 놈이 집안 망치는구나. 이건 옛날 우리 법에 있을 수 없어.
노재명: 예.
송순섭: 그런디 내는 소리가 좋아서 하하하. 그래도 그 선생님 모시고 살아 왔는데, 지금 내가 생각해 보면은 내가 이 박봉술 선생님을, 그런 선생님 말씀을 듣고 그 말을 믿고 내가 박봉술한테 소리 배운 게 어찌 그렇게도 잘했냐. 요새는 세상이 그런 거 아니잖애. 그렇게 푸대접받고 심지어 내가 전주 대사습에 가서 장원을 헐라고 2등을 네 번을 했어. 장원을 못하고 그런 시대 때에 강한영씨가 나보고 뭐라고 한 줄 아요? “송 선생은 비가비라, 비가비라서 푸대접을 받는다” 이거야. 그랑깨 나는 우리 집안에서 양반집 새끼가 소리하고 대니문서 집안 망치고 다닌다고 푸대접받고 지금 우리 국악 사회에서는 지가 양반 새끼가 뭣 하러 소리 배워? 지그 사회로 들어왔다고 거기서 푸대접받고 항깨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때 강한영씨보고 뭐라고 했느냐. “강 교수님! 당신 비개비요? 동관이요? 당신이 만일 비가비 같으문 나 비가비 덕 좀 봅시다. 동관들이 날, 나를 비가비라고 푸대접허는디 당신 날 비가비라고 도와줬소?” 그라고 따졌어. 하하. 그래 그런 상황을 겪고 살면서 그래도 문화재 들어갈 때도, 문화재 전수자 들어갈 때도 다 못들어가게 해. 또 아조 서울서 즈그 동관들 속세가 많은데 왜 비가비를 전수자를 시켜야. 그란데 나는 지금, 그 때도 그런 거 전수자 들어갈 꿈도 못 꿔.
노재명: 네.
송순섭: 그런디 우리 선생님이 부산서 소리를 하시다가 69년도에 서울로 가셔 버렸어. 서울로 가셔 불고 나 혼자 떨어져서 부산서 사는데 71년도에 동초 김연수 선생님이 아, 부산에 오셨어. 그래 가지고 나한테 전화가 왔다고. 김동준이가, 김동준 그 고수 문화재 김동준이가 부산에 사는데 동준이하고 오정숙씨하고 둘이 전수자여. 근데 오정숙씨는 열심히 하는디, “동준이 저 건 또 삼시 술만 먹고 소리를 안하고 그러니 저 걸 어쩌겄는가. 그랑깨 내가 저 걸 동준이 소리를 갈쳐야 쓰겄는디 어디서 해야 좋을까 모르겄네” 그래. 그래서 “선생님 그라문 우리 집서 합시다.” “그래? 그래도 되겄는가?” 그래서 동초 선생님한테 그 때 우리 집에서 모시고 김동준씨하고 같이 소리를 하는디 김동준씨도 술 땜에 소리가 안돼 불어. 그래 나는 그 때에 배운 것이 소리는 동초 선생님 소리를 안하지만은 오늘날 소리 가사나 발음이나 이면 그리고 응? 내용을 아는 것은 그 동초 선생님한테 잠시라도 배운 그 덕이 가장 나한테 큰 거여. 그래 가지고 거기서 소리를 배웠는디, 내중에 그것이 왜 문화재 전수자를 어떻게 들어갔느냐. 대금산조 강백천 선생이 부산에서 살았잖여. 대금산조 강백천 선생님이 부산서 사는디 인제 문화재가 돼 가지고 발표를 해. 그럴 때 내가 사회를 보고 으잉? 김동준씨가 북얼 치고 그랬어. 그 때에 누가 왔느냐. 문화재관리국에서 고상열씨하고 양주동 박사하고 그 날 공연을 한번 보고 저녁 자리에서 고상열씨가 “송 선생! 문화재 전수자 들어가고 싶소?” 이거여. 그래서 “아무나 된다요?” 그랑깨. 그 날 내가 동초 선생님한테 배운 춘향가를 했거던. 근데 “동초 선생님 전수자로 들어갈 거 같으문 내 넣어 줄께요.” “아, 동초 선생님 전수자가 오정숙씨하고 김동준씨하고 둘이 있는디 그거이 되겄소?” 그렁깨 “아, 송 선생 맘이 있으문 넣어줄 텡깨 맘 있소? 없소?” 전수자가 저런 남자들이 해야 하는데 여자들은 전수자 시켜 놓으문 가서 결혼해 가지고 어, 남자가 못하게 하문 못해 불고 이래 빠져 버린다 이거야. 그러닝깨 저런 남자들이 해야 한다 이거야. “그럼 시켜 주시요.” 갔드니 얼마 있응깨 전화가 왔어. “송 선생 틀렸소. 송 선생 틀렸소.” “왜요?” 그렁깨 “동초 선생이 간암으로 사망 선고를 받아 버렸소. 그러니 거기다 전수자 들어가면 무엇 하겄소? 그러니 조끔 기다리시요.”
노재명: 네.
송순섭: 다시 기다리는디 그 73년도 11월 달에 박봉술씨하고 박동진 선생님하고 둘이 문화재가 돼 부렀어. 그러니 고상열씨가 잊지도 않고 또 전화가 왔어. “두 분 선생이 이제 문화재가 됐는데 어느 선생님 제자로 들어갈라요?” 그래서 “박봉술 선생 제자로 만들어 주시요.” 그러니깐 고상열씨가 하는 말이 “송 선생! 왜 그래요?” “왜요?” 그렁깨 “아, 박동진씨 제자로 들어가면 박동진씨가 지금 국립창극단 단장이여. 그러면 당신 제자 한나 국립창극단에 안넣어 주겄소? 그래 밥그릇이 생겨 부리는디 왜 가장 명색이 없는 봉술이냐?” 이거여. 그래서 “고 선생! 말씀은 고맙습니다만은 내가 소리 배우러 왔제 선생 덕 보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배우고 싶은 소리가 박봉술씨 소리요. 그러니 날 박봉술씨 전수자를 맨들어 주면 내가 부지런히 공부해 가지고 오히려 그 명색 없는 박봉술이 덕 보여줄 수 있는 제자가 되고 싶소.” 그랑깨 고상열씨가 “참말로 좋은 말씀이요. 그렇게 하시요. 그러면 맹글어 볼께.” 그런디 주위에서 말이 많은깨 박 선생이 대답을 못해. 그런디 그 때에 박봉술 선생님을 문화재를 만든 것이 박록주 선생님이 들어서 아주 적극성을 띠었어. 그렁깨 이게 고상열씨가 박록주씨한테 압력을 가한 거야. 그래 갖고 박록주 선생님이 나하고 서이 우리 박봉술 선생님하고 서이 만났는디, “어이 자네 저 순섭이 전수자 어쩐가?” 헝깨 “괜찮습니다.” “괜찮으면 거 시켜 부리소.” 하하하하. 그래 가지고 박봉술씨 전수자로 인제 그냥. 박록주 선생님 덕으로 들어간 거야. 지금 나가 생각을 하문 내가 그 때 배고픈 거 생각하고 밥 벌어 먹을 거 생각했으문 박동진씨 전수자로 들어갔으면 내가 밥은 벌어 먹고 이태까지 궁핍하게 안살고 창극단 생활은 했을랑가 몰라도 오늘날 문화재는 못됐으리라고 생각해. 그 때 내가 그런 디 현혹되지 않고 돈에 그런 데 현혹되지 않고 내가 꼭 배우고 싶은 소리 고집부렸다 이것은 내가 참으로 잘했다. 아주 지금도 내가 생각하먼 어쩌다 내가 그런, 그런 정신이 있었든가 이런 생각을 해봐요.
노재명: 예. 아까 전문 용어가 좀 나와서 청취자 여러분들이 이해가 안되셨을지 모르는데요. 비가비이라는 말이 나왔고 동관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동관은 국악을 전문으로 하는 집안 출신의 그런 예인들 집단을 말하고 비가비는 그렇지 않은 집안 출신의 송순섭 명창 같은 경우, 그런 경우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비가비 집단과 동관 집단 사이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 말씀해 주셨고요. 그렇지만 훗날에 박봉술 선생님의 수제자가 되셔서 인간문화재가 되고 또 그 원류가 되는 송만갑 명창의 고향인 이 순천에 지금 와서 이렇게 동편제 전수 활동을 하고 계신데, 그 모든 것이 다 이게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굉장히 깊은 인연이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잠깐 송순섭 명창의 원류가 되는 동편제 거장 송만갑 명창의 소리를 잠깐 들어보겠습니다. 단가 <진국명산>을 들어보고 또 다음 얘기를 이어가겠습니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유성기음반(SP) 관리번호 MISP-1095
Columbia 40145-A(21005) 短歌 鎭國名山 宋萬甲 鼓韓成俊
노재명: 네. 여기 송만갑 명창의 고향 순천에서 송만갑 명창의 1930년도 녹음으로 단가 <진국명산>을 다 함께 들어봤습니다. 이 송만갑 명창을 비롯해서 이 제자 되시는 박봉술 명창, 그 소리를 오늘날 맥을 이어서 전승을 하고 계신데 그걸 평생을 전수받아서 해 보시니까 이 동편제 판소리의 특징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송순섭: 우리 동편제 소리를 얘기하면 제 소리니까 그렇게 얘기하겄지. 하하. 그럴랑가 모르겄습니다만은 동편제 소리는 시작이 진중하고 높게 하고 또 끝얼 쇠망치로 내려치듯이 야무지게 친다. 요런 생각을 하는데 지금 내가 가면 갈수록 그것이 더 마음에 와 닿아요. 그란디 처음에는 소리를 목이 안좋고 그러니까 무서와서 그렇게 못해. 꼭 송만갑 선생님은 아까 <진국명산> 그런 소리를 들어보면 우리가 조예가 덜할 때는 저거이 떼꼬쟁이 성음 같애 소리가. 하하하. 어띃게 소릴 저렇게 할 수가 있느냐. 그런디 요새는 얼마나 했으문, 어띃게 했으문 저런 게 나올 수 있는가. 인제 요런다고. 우리 박봉술 선생님은 목이 안나오니깐 카 기교로, 응? 공력으로 고렇게 했는디 송만갑 선생님은 그 좋은 목으로 그렇게 질러서 냈거든. 뭐라고 형용 표현할 수가, 표현하기가 어렵고. 첫째에 그 『조선창극사』에 보문 우리 동편제 소리를 서편제 소리하고 비교를 해놨는데 동편제 소리는 담담연채소적(淡淡然菜蔬的)이다, 서편제 소리는 진진연육미적(津津然肉味的)이다. 이렇게 표현해 놨거든. 또 동편제 소리는 천봉월출격(千峰月出格)이다, 서편제 소리는 만수화란격(萬樹花爛格)이다. 이렇게 해놨단 말이여. 그것을 지금 새김을 해보면 담담연채소적이다, 채소 음식, 귀한 손님 오셔서 대접을 헐라 그러면 채소 음식 대접하겠습니까? 그러면 서편제에다 우리 동편제 소리를 비교하면 우리 소리 아무 것도 아니여, 그렇게 비교하면. 그런디 그 내막이 이유가 있다 이거야. 아무리 소고기 맛이 좋고 닭고기 맛이 좋고 육류가 좋아도 그거 두 때, 세 때 먹으면 질려. 그런디 우리 채소는 이거, 김치 같은 거 일년을, 일년내 먹어도 안질려. 이것을 표현해 놓은 것 같애요. 그러니깐 요새 모두 산야에 뭣 있지? 카, 갖가지 꽃이 많이 피었잖습니까. 이것은 삽시간이여. 며칠 못가. 봉우리에 달이 둥실하게 뜬 것은 영원한데. 그랑깨 동편제하고 서편제하고 비교해 논 게 내가 이렇다 저렇다 말할 것 없이 아마도 우리 청취자들도 그렇게 비교해 보문 훨씬 더 맛이 있을 것이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노재명: 예. 여기 지금 이 송순섭 명창의 전수소 주변 풍경을 좀 설명을 드리면 이 전수소 양쪽에 계곡물이 흐르고 있고 단가 <사철가>에 나오는 그 가사처럼 이산 저산 지금 꽃이 피어있고 정말 말 그대로 분명코 봄이로구나 하는 실감이 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곳에서 소리를 아니 듣고는 못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설명해 주신 동편제 박봉술 명창의 소리제를 한번 감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박봉술 선생님의 대표적인 특장 그거를 하나 부탁드리겠습니다.
송순섭: 그 전에 모두 우리 선생님 소리를 들어볼라 그라면 다 <불 지르는 대목> 소리라고 그래. <적벽대전> 대목얼, 하하하. 그란디 단가 <사창화류>를 가히 부르는 사람이 별로 없제. 우리 박봉술 선생님만 불렀어 가히.
노재명: 네. 그러면 송순섭 명창의 소리, 정향자씨의 북 반주로 단가 <사창화류> 박봉술 선생님한테 배우신 대표적인 단가입니다.
2011년 4월 9일 전라남도 순천시 석현동 산55-3 판소리 인간문화재 송순섭 명창 전수관에서. 송순섭 단가 <사창화류>(박봉술 사사, 고수:정향자) 녹음.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대한민국의 중요한 무형문화재 판소리 분야의 예능보유자인 송순섭 명창과 함께 하고 있는데요. 전라남도 순천시 석현동의 송순섭 명창의 판소리 전수소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공대일 명창한테 소리를 배우기 전에 어렸을 때는 동네 선배, 친구분들과 김종술씨한테 고향에서 소리도 배우시고 그 다음에 박봉술 선생님한테 가시기 전에 해남, 광주, 목포 그 쪽에서 김준섭씨한테 심청가, 수궁가도 배우셨는데요. 판소리를 동편제도 배우시고 서편제도 배워 보시고 지방을 비롯해서 서울에서 왕성하게 활동을 하시면서 특히 부산쪽에서 남다른 활약을 하셨는데요. 특히 기억되는 것은 1974년에 부산 왕자극장에서 판소리 5호 인간문화재 대가 명창들을 초청해서 대공연을 직접 연출을 하시고 큰 호평을 받으셨고 또 1981년에 부산에서 창극 ‘동래부사 송상현’이라든가 여러 가지 도창도 하시고 주연도 하시고요. 그 다음에 원옥화씨라든가 강백천씨 같은 옛날 대가 분들을 생활 형편 어려우실 때 도움도 주시고 문화재 지정되는 데 또 굉장히 보탬이 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부산 시절에 두루 하신 거 그런 부분에 대해서, 그 쪽에 이렇게 열성을 기울이신 그 이유라든가 감회를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송순섭: 부산 얘기를 하문 나 참 얘기가 많습니다. 64년도에 부산을 갔었는데 어렵게 살면서 우리 박봉술 선생한테 공부를 하고 있다가 박봉술 선생님이 69년도에 서울로 가셔 버렸어. 나는 부산에서 내 나름대로 살아왔는디 또 내부리고 지금 서울로 가기가 참 어려웠어요. 그래서 그냥 부산서 주저, 주저앉었는데 그 때에 72년도에 내가 창극 ‘유관순전’을 만들었어요. 그란디 ‘유관순전’ 창극을 만들었는데 어치게 만들었냐. 부산서 예총에서 삼일절 행사를 허면 그냥 경기도 민요, 민요나 한마디 하고 으잉? 우리 국악에서 판소리 한마디 하고 끝나는데 내가 거기 가서 삼일절 행사 할 때에 안중근 의사 소리나 이준열 열사 창얼 한마디 하문 부산에서 반응이 그렇게 좋아요. 그래서 내가 이런 역사적인 창극을 한번 해봐야 쓰겄다 생각을 허는디, 서울 올라가서 옛날 거 박록주 선생님 동생 박만호씨가 있었어. 박만호씨를 만나 가지고 “박 선생 혹시 유관순 창극 대본 있소?” 허니깨 “있지.” “그거 나 좀 빌려주시요.” 긍깨 “그러자고.” 그래 가지고 그 빌려 줘서 부산에 알맞게 각색을 해서 삼일절 행사럴 하면서 유관순 창극을 해봤어요. 근디 거그 또 왕자극장에서 했는데 아조 대성황을 이루었어.
노재명: 네.
송순섭: 그럼 그 때 어려움이 뭐이냐. 유관순 창극을 헐라 그랑깨 공연 신고를 했드니 허가를 안해여. 이를테면 “안된다 이거여.” “왜요?” 그러니까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로는 지금 일본놈 사람들 보고 일본놈하문 안되고 왜놈들 하면 안된다.” 이거여. “이걸 바꾸라.” 이거야. “한일국교 정상화가 됐다고 응? 유관순씨가 지금 지하에서 일본 양반들 헐까? 느그 허가할라문 하고 말라문 나는 강행할랑깨.” 그래 가지고 이거 강행을 했는디 어떻게 성황을 이루어 버렸든지 기냥 막 난리가 나버렸어. 하하. 그라고 그 때에 동양티브이가 있었잖아요. 동양티브이에서 와서 보고 “우리 방송국에서 와서 이거 직접 생뱅, 생방송 합시다.” 그래 갖고 인제 생방송 다하고 그랬는디 그 다음에 74년도 거 문화재덜 판소리보존회를 초청을 합니다. 박록주 선생님한테 그것을 한당깨 박록주 선생님도 “하면 망한다.” 김소희씨도 “허면 망한다.” 박동진씨도 “허지 마라.” 그런 것얼 내가 초청헐 때에 “그람 나를 안망하게 도와주시요.” 부산은 망한다는 허지 마라는 국악을 안해야 했을 거 아니요? 그란디 “부산에다가 국악을 심어 볼라면 나를 안망하게 도와주시요.” “그람 어치케 할거나?” 그 때 인제 우리 판소리보존회가 문화재관리국 등록이여. 그랑깨 “관리국에서 사업 지원금을 얻으시요. 그람 보존회 쓰고 오고 가는 경비를 내가 댈께.” “그래볼거나?” 그것이 멕혀 들어갔어.
노재명: 예.
송순섭: 그래 갖고 오고 가는 경비는 내가 내고 해 가지고 그 때에 뭐 방위 성금 기금 조성 그 걸 타이틀로 해 가지고 이 공연을 했는데 극장이 막 난리가 나버린 거야. 그 때 벌어 가지고 국악 회관도, 국악협회 사, 사무실도 한나 얻고 그래 갖고 78년에는 ‘흑의 장군’, 또 79년에는 아까 ‘유관순전’ 했든 그것이 삼일절 60주년에다가 맞춰 가지고 ‘유관순전’을 허고 국악 행사하면서 한번도 실패해 본 적이 없어. 지, 지금 요런 서울 같은 데서 국립창극단이 해도 하루 두번썩 하기 힘들어.
노재명: 네. 그렇게 공연에 실패한 적이 없다 말씀하신 것처럼, 그 원동력은 아마 평소에 인정있게 그 주변의 선후배 동료들한테 어려운 점이 있으면 참 힘껏 도우시고 또 끈기있게 문화재가 될 때까지 끈기있게 노력하신 점, 또 어려운 점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인생을 살아 오시고 판소리에 대한 끈을 놓지 않으시고요. 불모지인 그 부산에 가셔서도 국악을 대단히 활성화 하셔서 아마 그게 지금 지방 문화, 국악을 이렇게 보급시키거나 앞으로 활성화 시키는 데 가장 전형적인 좋은 표본이 되지 않을까 송순섭 선생님께서 일해 오신 부분들이요. 그런 생각을 해봤고요. 또 박봉술 명창께서는 “당대 최고 소리왕이다”, “오바탕을 그렇게 정말 기가 막히게 잘하는 사람은 그 분밖에 없다”라고 선배들도 인정을 할 정도로 대명창이셨는데요. 소리는 옥쪽이셨지만 워낙 많이 여러 군데 다니시면서 활동하시다 보니까 소리를 직접 배우기가 굉장히 어려운 분으로 소문이 나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끈기로 그걸 다 극복하고 끝내 소리를 배우셨는데 배우실 때 그 어려운 점이라던가, 에피소드라던가 전수받으실 때 기억을 좀 회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송순섭: 우리 선생님한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배와 봤자 거으가 적벽가밖에 못 배왔잖아요. 그런디 나만이 흥보가, 수궁가를 더해 가지고 세 바탕을 배웠어. 나도 인제 오바탕을 다 배웠으면 좋겄는디 그 세 바탕밖에 못 배운 것이 또 그것도 있지만은 내 자신이 또 많이 배울라고 안했어요. 왜? 날 보고는 세상 사람들이 다 “소리가 안된다. 저거 멋이 없어.” 또 비가비라 멋이 없다는 거요. 그런디 많이썩 배워 가지고 더구나 소화 못시키면 되겄는가. 그래서 선생님이 더 가르쳐 줄라 해도 내가 “선생님 나는 여가 안됭깨 오늘 이놈 여기까지 다시 복습할랍니다.” 이러고 해가지고 선생님한테 많이 못 배왔는데 이 세 바탕을 배우고 나서 “선생님! 인제 춘향가를 좀 배우고 싶습니다.” 그랑깨 “그래. 오냐. 춘향가는 우리 것도 좋지만은 그 저 보성 정권진 선생 것이 좋으니 아, 그 놈얼 배워 보소.” 그래 놓고 거기로 소리 배우러 안가고 말았어요. 안가고 말고 선생님이 나를 안가르쳐 줄라 그렁가. 그 때 선생님 상황이 안좋고 그래서 그냥 더 공부를 못하고 말었는데 이따금은 선생님이 깨어 나시먼 나보고, “술 잡숫지 말라”고 하먼 “야, 이 새끼야. 니가 술 받어 줬어? 자식아.” 하하하하.
노재명: 네.
송순섭: 심지어 그래 버리고, 또 공부하러 가도 술 취해 버렸으니까 공부 못하고 온 적이 말잉깨 그렇지, 부산서 서울까지 공부하러 가 가지고 공부 못허고 기냥 되돌아올 때 그. 내가 재산이라도 뭐 여유있고 쓰고 남고 했으문 모르지만은 그렇지를 못허고 여비 빌려 가지고 녹음기 빌려다 안고 서울까지 올라가서 공부 못하고 돌아오고 그럴 때 그 심중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가 없지요. 그러지만은 그래도 오늘날 생각해 보면 내가 다른 선생 안찾아가고 박봉술 선생님 만나 가지고 그래도 이 세 바탕이라도 배운 거 그래도 송순섭이 하나가 가지고 있다. 요것만은 자부심으로 생각하지요. 하하. 그래 인제 우리 선생님 (소리를) 그 다 못 배운 거 그것이 아직도 아쉬움이 제일 큽니다.
노재명: 예. 가장 큰 은사님이, 송순섭 명창의 스승이 박봉술 명창이시고 그 선생님께서 전국으로 다니시고 약주를 좋아하시다 보니까, 또 잘 가르쳐 주시는 타입도 아니시고 또 배우기가 어려우셨다고 그러는데 그래도 이겨내고 끄끝내 소리를 많이 배우셨고요. 유독 춘미 박록주 선생님께서 박봉술 명창의 선배 되시는 분인데, 그 분이 곁에서 보시면서 “송순섭씨가 그 은사한테 참 잘하는구나.” 이렇게 칭찬도 하시고 많이 도와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송순섭: 박록주 선생님이, 지금 그 제자 박송희 선생이 잘 압니다. 그랑깨 박송희 선생이 나를 좋아한 것이, 지금 박 선생이 날 이뻐하고 좋아하는 것이 바로 그 과정입니다. 그 선생님한테 듣고 “내가 순, 순, 순섭이가 이만저만 하드라” 이 소리를 듣고 그래서 박송희 선생이 날 참 좋아해요. 그 때에 우리 박봉술 선생님이 인자 이 건강이 안좋은 편이고 그러면서도 약주를 많이 잡숫고 그래 가지고 조금 실수를 많이 했어요. 그럴 때 나한테 전보를 했어. 그래 내가 올라가서 그 어려운 걸 수습을 다 했지요. 그래 가지고 국립정신병원에다가 딱 입원을 시켜 놓고 나니까 박록주 선생님이 저보고 하는 얘기가 “우리 봉술이가 인간 되겄다. 누가 뭐라 캐도 우리 봉술이같이 제자 잘 둔 사람이 없다 마. 욕 봤다. 잘했다.” 그런데 그 때에 “선생님(박록주)! 우리 선생님(박봉술) 집안을 들여다 보니깐 너무 어렵게 보여요. 그러니 내가 시방 돈 가진 거이 없고 우리 선생님 집에 쌀 한 가마니 넣어 주시요. 그리고 연탄 백 장만 넣어 주시요. 내가 벌어서 꼭 갚어 드릴께요.” 그렁깨 “그래라. 그래라 마. 내가 니 말이라 카머 퐅으로 매주를 쓴다 해도 믿을란다 이. 그러고 말고 내가 해주께 마.” 이렇게 날 인정을 해주신 분이에요. 그랑깨 그 박록주 선생님이 날 문화재 전수자로 넣어준 것도 박록주 선생, 또 그 후로 날 문화재 이수 만들어서 아까 공연 같은 거 다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신 것도 박록주 선생. 그라문 지금 내가 우리 선생님 이름 한다 그러면 먼저 박록주 선생님 이름이 먼저 생각납니다.
노재명: 예. 그 박록주 선생한테는 직접 배우지는 않으셨어도 참 어머니같이 은사님같이 따숩게 잘해 주신 것으로 그렇게 이해가 됩니다.
송순섭: 그런디 박록주 선생님이 돌아가실 무렵에 내가 서울 올라가니깐 조상현씨가 송순섭이 왔응깨, 내가 어무이 퇴원한다 그래서 간깨 나랑 같이 갑시다 그래. “그래 같이 가.” 그래 갖고 병원에를 갔어. “선생님 저 왔습니다.” 그랑깨 “응. 자네가 왔는가? 나 자네를 못보고 죽을 줄 알았드니 자네가 왔는가? 인제 들어봐라. 옛날 감찰(송만갑) 선생님이 일흔 다섯을 사셨어. 이통정(이동백) 선생님이 일흔 여섯(실제는 84세 작고)을 사셨어. 내가 일흔 다섯잉깨 나도 수 다 안했는가. 내 인제 마지막 이 가는 마당에 한마디 허고 갈라네.” 그러면서 조상현이, 상현이 등에 업히고 나는 뒤에서 부축허는디 “가네. 가네. 나는 가네.”(창조) 그라고 가셔서 회복 못하고 돌아가셨어. 인제 참 그런 우리 과정이 있었습니다.
노재명: 예. 그렇게 참 고생하시면서 부산에서 서울 왕래하시면서 박봉술 선생님한테 그렇게 어렵게 공부도 하시고 또 그 고생하던 시절 생각하셔 가지고, 지금 제자가 전국에 수 백명 전국에 아마 제일 왕성하게 판소리를 전수하고 계신데요. 제자 분들한테 못 먹고 참 헐벗으면서 배우던 생각하셔 갖고 소뼈도 막 다려 주시고 제자들 참 따숩게 잘해 주시는데요. 제자 분들 가르치면은 참 커가는 모습 보면 기쁘기도 하시고 좀 더 잘해 줬으면 하는 바램도 있으실 것 같은데 제자들한테 가장 강조하시는 점, 바램 같은 거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송순섭: 나는 소리를 인제 문화재가 적벽가가 돼 놓으니까 그 다 적벽가만 배우러 온다 생각헌다 말입니다. 지금 나한테 적벽가 배운 제자들 특히 남자들이 남자 소리꾼이 귀허니깐 요놈들은 다 나한테 배운 놈들은 전부 다 직장이 있어. 그러니 지금 보면은 남원 국립국악원도 그렇고 남원시립 국악단에도 그렇고 안놀고 밥벌이 헌 건 좋은데, 내가 볼 때 나는 아무 것도 없이 그렇게 허리끈 졸라 매고 살면서도 여기까지 왔는데 저 사람들은 거기서 밥벌이를 허면서 공부를 안해. 밥벌이 허는 것이 오히려 잘못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참으로 날맨이로 배고픈 늠이 돼 봤으문 공부를 더하지 않겠느냐. 이런, 이런 생각을 해보는데 그래도 이런 사람들이 밥벌이라도 허고 안놀고 헝깨 좋은데 그러지만은 그것으로 만족허지 말고 더 공부를 열심히 해 가지고 송순섭 선생님 제자들 다 잘하드라. 이런 소리를 들었으문 한이 없겠어요. 즈그 일 즈그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열심히 허겠지요만은 그래도 지금 마음이 아쉬워요. 조금 더 열심히 해서 우리 판소리계가 자랑헐 만한 창자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돼 주었으문 하는 바램입니다.
노재명: 네. 여기서 잠깐 송순섭 명창에 대해서 여러 말씀을 이제 전해 주시기 위해서 제자 분들이 여기 같이 나와 주셨어요. 그래서 제자 분들의 말씀을 통해서 송순섭 명창의 다른 면모를 조명해 보는 그런 시간을 잠깐 마련을 했습니다. 차례대로 소개를 해드리면 전남대학교 현재 4학년에 재학 중인 박다희씨, 전남대학교 대학원 1학년에 재학 중이신 한나리씨, 그리고 부산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김재은씨 이렇게 세 분의 말씀으로 스승 송순섭 명창에 대해서 인터뷰 내용 들어보시겠습니다.
박다희: 안녕하세요. 저는 박다희인데요 저희 선생님은 평소 저희한테 하시는 행동은 그냥 할아버지 같으세요. 저를 손녀처럼 맛있는 거 있으면 우선 저희부터 주시구 그러시는데 대회를 한번 같이 갔었는데 선생님이 제가 소리를 하는 동안 저를 못 쳐다 보시더라구요 떨려 가지구. 그 정도로 저희한테 잘해 주시는데 소리 가르치실 때는 무섭죠. 저희 선생님은 우선 가사를 제일 중요시 여기시구 그 다음에 성음낼 때. 기교는 나중에 다 되는 거고 성음하고 가사가 먼저 제일 중요하다고 하셔서 그거를 제일 집중적으로 배웠죠. 그래서 목을 성음을 낼 때 모아서 내는 소리를 좋아하시구요. 그리구 하청 낼 때는 아래로 내리는 소리가 아니라 들어서 소리하기를 원하세요. 그래서 동편제라서 막 씩씩하게 불러야 한다, 여자는 여자처럼 부르면 안된다 이런 말씀은 안하, 안하시구 편하게 모아서 곧게 소리하는 방법을 많이 가르쳐 주시죠. 선생님 오래 사셔야죠. 제가 성공하는 모습도 보셔야 하구 그러니까 선생님 오래 오래 사시기만 하면, 같이 작품 전시도 하고 그런 활동을 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한나리: 안녕하세요. 저는 전남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인 한나리라고 합니다. 국악원에 선생님이 적벽가 완창을 하러 오셨어요. 적벽가의 멋진 매력에 빠지게 돼 가지구 선생님께 가게 됐는데 적벽가는 싸우고 이러는 장면들이 많고 또 통으로 질러야 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이제 통성쪽 부분에서 많이 역량이 좋아진 것 같고요. 선생님께서 또 강조하시는 부분이 상청 지를 때 개가 짖는 모습을 보시구 아, 저거다 하셔서 개가 어떻게 짖나 보시구 그걸로 상청을 연구를 하셨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상청 부분에서 선생님께 많이 배우게 되었어요. 제가 실은 선생님께 왔을 때 판소리 하면서 힘든 시기였어요. 슬럼프일 때가 제가 왔었거든요. 근데 다른 선생님들한테 그런 거 말씀드리면 아, 그러면 소리 때려치라구. 마음 아프게 더 절망적이게 그런 말씀하시는데 선생님은 정말 할아버지처럼 그럴 때일수록 더 너가 소리에 매진해서 열심히 해야 한다.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꾸준히 잘해 보거라. 이렇게 좋은 말씀을 항상 저한테 용기를 잃지 않게 좋은 말씀을 해주셨거든요. 그래서 저는 항상 용기를 잃지 않고 이렇게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선생님 제가 많이 처음에 힘들 때 와서 선생님께 안좋은 모습도 많이 보여드리고 그런 것 같은데 열심히 해서 선생님께 꼭 보답하는 제자 되겠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많이 운동하시는데 산 다니실 때 조심히 다니시고 건강히 저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 사랑해요.
김재은: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대학교 재학 중인 2학년 김재은이라고 합니다. 우리 선생님 아니리만의 맛이 있어요. 아니리 음 하나 하나에 다 의미가 있어요. 처음 들을 때는 “아, 너무 어려울 것 같다. 저건 정말 멋있다. 웅장하다.” 이렇게 느꼈는데 아니리 마저도 초입에 “한나라 말엽 위한오 삼국 시절에~” 이렇게 뭐라지, 아니리를 멋드러지게 하시거든요. 그래서 그런 하나 하나가 다 제 말투에도 영향이 갔던 것 같고. 예전에 풍으로 쓰러지시고 무대에 스시면서도 “나는 무대에서 뭐 마감할지언정 무대에 스겠다.” 이런 식으루 말씀을 하셨대요. 그 땐 제가 곁에 없었지만 항상 듣는 얘기거든요. 건강히 오래 오래 사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희 선생님, 인간문화재 송순섭 선생님 많이 사랑해 주세요.
노재명: 방금 송순섭 명창의 제자 분들의 말씀을 들어봤습니다. 박다희 학생, 한나리 학생, 또 김재은 학생입니다. 선생님께서 학생들처럼 판소리를 공부하면서 참 어렵게 안되는 부분도 있었을 거고 또 잘 됐던 순간도 있었을 텐데요. 말씀 듣기에 득음하시는 과정에서 우연히 개가 짖는 소리를 듣고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런 말씀해 주셨는데 그 회고 말씀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송순섭: 내가 아까도 얘기했지만은 전주 대사습을 가면 거 2등을 3번을 허고 4번을 허고 그라고 다니고, 내가 전주 대사습을 도착하면은 모두 관중들이 “어머 저거 또 왔네 저. 하하하. 되도 않는데 뭣 하러 또 왔을까 잉.” 이렇게 조소를 당했어요. 그럴 때, 또 인제 부산서 이사를 와 가지고 광주서 쫓아댕기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대회 장원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소리를 헐라 그라면 내 소리에 연마가 돼야겄어. 그란디 그런 디를 안갈라고 생각을 하문 내 공부가 잘 안돼. 그것이 항상 내 공부하는 과정으로 생각을 하는디, 인제 하루는 자다가 아침에 새벽에 화장실을 나가는디 아, 개가 담에다가 발을, 다리를 턱 걸치구 ‘으으~ 으어어~ 으억억~’ 내 목이 쉬어서 안나오는데 이런 소리를 하는데 방광에서 그런 소리가 탁 튀어 나오는 거 같애. ‘탁’(송순섭 손뼉 치는 소리) “옳다. 저것이다.” 송흥록 선생님이 들판을 뜩 가서 보니까 황소가 ‘음매~’ 하고 울드라거든. ‘탁’(손뼉 치는 소리) “좋다. 얼씨구!” 했다 이거요. 황소 울음 소리 듣고. “저것이야 나도.” 그래서 나도 개 울음 소리를 듣고 “저것을 배워야 해.”
노재명: 예.
송순섭: 그래 가지고 가서 연습을 쭈욱 해봤는데 요즘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참으로 내가 인제 이 소리를 한 10분, 20분 쭉 해보면 목이 나옵니다. 그런 것을 깨달아 보고 단전에서 소리를 뽑아 내는데 참 그것을 뽑아 나오도록 “어으~ 어어으으으으~ 으흐으으어으흐으으~” 옛날에는 이런 거 꿈도 못 꾼 목이여. 그라고 아까 송만갑 선생님 춘향가 <십장가> 그 성음얼 들어보면 아까 <진국명산> 같이 송만갑 선생님은 중고제를 많이 썼어요 중고제. “제기를 붙고 발기를 갈 녀석~” 요런단 말이여. “내 돌아간다. 내가 돌아간다. 떨떨거리고 돌아서더니 가노라 간다. 내가 간다.”(중모리 창) 이런 성음얼, 송만갑 선생님 숭을 내볼라고 애를 많이 써요. 그란디 인제 조끔 흉내가 지금 된 것 같애. 흐하하하. 옛날보다. 그란디 나는 지금도 늘 그 연구를 합니다, 틈만 나면.
노재명: 예. 그러면 여기서 잠깐 지금 설명해 주신 그 동편제 송순섭 명창의 소리를 들어보고 또 다음 말씀 이어가겠습니다. 송순섭 명창의 적벽가 음반 가운데 <새타령>입니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컴팩트디스크(CD) 관리번호 MICD-3646~3648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운산 송순섭 동편제 적벽가 창본(창:송순섭, 고수:박근영)
송순섭/예술기획탑/화음레코드 TOPCD-098(3CD 박스물), 2002년 3월 17일 서울 한국음반스튜디오 녹음, 2005년 12월 제작.
[CD 2] 11.새타령(11:08)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판소리 인간문화재 송순섭 명창과 여기 전라남도 순천에 있는 판소리 전수소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방금 송순섭 명창의 판소리 적벽가 가운데 <새타령>을 감상해 보셨습니다. 그 동안 엘피 음반 내신 것도 있고 또 그 뒤에 시디 적벽가, 수궁가 여러 가지 음반, 공연, 또 창본 이렇게 출판도 하셨는데 앞으로도 또 제자 양성이라든지 계획이 많이 있으실 것 같아요. 계획을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송순섭: 지금 꿈이 내가 소리 이때까지 헌 것을 생각을 해보면은 지금 소리가 제일 낫지 않냐 싶은 생각이 들어요. 내가 인자 이거 나이를 더 먹어 버리면 인제 어렵지 않겠는가. 이래서 아래 내가 양정환씨하고 그런 얘기를 한번 했어. 요새는 시디 맨들어 봤자 누가 돈 주고 사는 사람도 없고 별로. 그런 거 해봤자 돈이 안돼. 그러니 돈을 생각하고 하는 것보담은 그래도 어치케 허든지 내 가지고 있는 이 세 바탕 녹음은 해두자 그래 내가 인제 요새 목이 이렇게 쉰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4월 말, 5월 초 요때에 문화재청에서 이런 문화재덜 아조 영구 보존용으로 녹화를 한답니다. 그래서 나도 인제 영구 보존용 녹화를 한다고 그러니까 그래도 아, 송순섭이 소리 괜찮게 했다, 했드라. 그 소릴 들을라문 많이 해야 안겄어요? 그래서 해볼라고 조금 연습해 보니라고 조금 목이 쉬, 쉬어 있는 거 같애. 그랑깨 이것도 조금 노력해서 그래도 좋은 소리 담아봐야 안하겄습니까. 또 이런 때 이런 말 듣고 송순섭이 이렇게 어려운디, 왜 더 어려우냐. 이 순천에 아까 말한 전수관, 내가 좋아하는 이 소리터, 이걸 마련하니라구 빚을 졌어. 하하하. 이제 송순섭이도 이런 때 좋은 소리도 듣고 거, 송순섭이 녹음할 수 있는 그런 지원하실 분들 좀 생기고 그랬으면 고맙겄습니다만은.
노재명: 예.
송순섭: 생각해 보십시요. 외국 음악 하는 데는 다 지원이 됩니다. 오페라, 뮤지컬 이런 디는 가면은 이십만원씩, 삼십만원씩 해도 관중 많애. 우리 건 돈 안된다고 안해. 우리 거 돈 안돼도 우리 것언 우리 것대로 지킬 수 있는 정신들이 좀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래서 우리 거 내 소리 못하는 소리지만은 그래도 영구히 보존할 수 있도록 녹음이라도 해둬야 쓰겄는데 이거 지금 못하고 갈까 싶어 아쉽습니다.
노재명: 예. 지금 아침서부터 지금까지 거의 한 5시간 정도를 지금 장시간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요. 끝으로 그 인생을 바쳐서 이룩하신 판소리, 그 판소리를 평생을 이렇게 하시면서 느끼신 인생, 결국에는 판소리란 무엇일까, 또 인생이란 무엇일까.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송순섭: 판소리! 어느 음악에 소리라고 붙었습니까. 우리 판소리만이 소리라고 붙었습니다. 소리는 무엇이냐. 나는 자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천둥소리, 이렇게 다 소리가 붙어있어. 근디 우리 판소리만이 소리가 붙었단 말이야. 그런 것과 같이 판소리는 자연이다 이거야. 그러면 자연을 노래할라 그러면 어느 음악을 비해 봐도 어느 음악보다도 판소리는 가사가 있습니다. 판소리 가사에 심취하는 것이 부족하고 전부 목에만 집중을 하는 것 같애. 그러니 나는 목이 아무리 좋고 좋은 목을 써도 가사가 아니고 발음이 아니면 그건 뜻이 없다. 그러니 우리 소리꾼들이 가사를 먼저 알고 그 다음으로 발음을 옳게 하고 거기다가 소리를 잘 부쳐서 소리가 정연하게 이면이 정확하게 소리를 하여야만 왈 소리라고 할 것이요. 이런 귀중한 소리럴 자라나는 우리 후진들이 잘 본받고 열심히 해 가지고 좋은 소리해 줬으면 합니다.
노재명: 예.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어느덧 마칠 시간이 거의 다 됐습니다. 오늘은 판소리 인간문화재 송순섭 명창과 함께했습니다. 긴 시간,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구요 선생님. 다음 기회에 또 좋은 소리 오래도록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송순섭: 내가 배움이 많앴으면 이런 기회에 좋은 말을 해서 모도 이 청취자들도 공감을 할 수 있도록 좋은 뭐시기를 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소양이 그뿐이라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 점 널리 양해해 주시고 앞으로 우리 특히 판소리 발전을 위해서 다 같이 기대해 주시면 고맙겄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재명: 예. 감사합니다. 모친 생각을 하시면서 눈물도 흘리셨고 또 문화재 인정받으셨을 때 참 감격의 기쁨을 표현을 해주셨습니다. 오래도록 건강하시고 만수무강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송순섭: 감사합니다.
노재명: 전통사회 사람간에 돕고 인정 나누고 했던 훈훈한 한국의 아름다움, 좋아하는 예술과 목표를 꼭 이루어야겠다는 신념에 최선을 다하는 끈기와 그 열정의 인생, 그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지금까지 진행에 노재명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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