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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 사진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2012년 1월 9일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328-3 정순임 명창 판소리 연구소 '취송당 정순임 판소리 연수소' 모습.
국악방송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프로그램(방송 진행:노재명) 판소리 인간문화재 정순임 명창 현장취재 장면.
정순임 명창(좌측)과 방송 진행자 노재명 대담 녹음 장면.
정순임 명창 판소리 유관순 열사가 중 <대한 독립 만세> 장면.
정순임 명창의 가야금산조(즉흥 연주) 진양조 연주 모습.
정순임 명창의 <승무>(장월중선류) 북가락 모습.
* 2012.1.9.10:30~17:00.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328-3 정순임 명창 판소리 연구소 ‘취송당 정순임 판소리 연구소’에서 노재명이 정순임 명창을 인터뷰하고 2012.1.15.18:00~19:30.국악FM방송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진행:노재명)에 방송된 내용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2015년 4월 3일 정리/국악음반박물관 인터넷 홈페이지 http://hearkorea.com 명인실에 발표)
판소리 명창 정순임 증언 내용
대담ㆍ채록/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안녕하십니까. 노재명입니다. 국악을 흔히 구전심수의 음악예술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판소리는 대를 이어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소리를 듣고 자란 세습 가문 출신이 판소리를 선도해 왔습니다. 장판개, 장도순, 장수향, 장영찬, 장월중선 명창. 이 집안은 대대로 동편제 판소리를 했던 명가문인데요. 이 가문의 후손 정순임 명창이 현재 판소리 인간문화재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 정순임 명창 방송 편을 마련했습니다. 정순임 명창을 만나기 위해서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정순임 명창의 판소리 연구소에 와있습니다. 정순임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정순임: 안녕하십니까.
노재명: 예, 요즘 건강은 어떠신가요?
정순임: 네, 건강은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노재명: 예, 다행입니다. 저희가 평소에 그 장판개 선생님이라든지 장월중선 명창의 소리를 음반으로 많이 접하고 그랬는데 이렇게 방송을 통해서 또 정순임 선생님하고 뵈니까 아, 대단히 반갑습니다.
정순임: 감사합니다.
노재명: 그 전설적인 국악의 명가문 출신이신데 평소에 그 장판개 선생님이라든지 장영찬 선생님에 대해서 흠모하는 귀명창분들이 많으세요.
정순임: 네.
노재명: 그 분들에 대해서 집안에서 성장하시면서 들으신 말씀이 많으시죠?
정순임: 예, 많습니다. 근데 인제 장판개 할아버님의 말씀을 어머니께서도 굉장히 그 아끼셨어요, 저희들한테는. 그런데 그 서울서 활동을 하면서 돌아가신 그 박후성 단장님, 국립극장에 그 때 단장님이실 적에 제가 근무를 해서. 그 분이 “순임아! 너는 판소리계에 뼈대가 있는 가문의, 집안의 딸이다. 그러니 더욱 더 판소리에 정진해야 된다.” 이렇게 말씀허시더라고. 그래서 난 “예,” 우리 어머님이 유명하신 분잉깨 “네” 이랬거든. 하하. “느그 할아버지 웃대, 저 할아버지 때부터 훌륭하신 분이다 야!” 그러시더라고. “엄마! 우리 할아버지 위에 우리 장판개 할아버님 계신다는데 그 분이 어떤 분이에요?” 내가 이랬어. 그랬더니 “누가 그러더냐?” 그래. “아이, 서울서.” 왜 그런 말씀 안해 주셨냐니까 ”그런 말 해서는 뭣 한다냐?“ 그리고 그 때 말씀하시드라고.
노재명: 네.
정순임: “장판개 할아버님이 서울에 어전 명창으로 계실 땍에 참봉 벼슬을 받으신 분이 느그 할아버님밖에 안계신다. 근데 인제 할아버님이 방랑 생활을 좋아하셔서 여러 군데 다니시고 이랬어.” 옛날에는 집안의 자식들한테 이 예술을 안갈킬라고 했어요. 그러는데 고런 말을 인자 드디어 하니까 엄마가 얘기를 해주시더라고.
노재명: 지금 말씀해 주신 그 장판개 명창은 참봉 벼슬, 언급해 주신대로 그 벼슬 직함을 받으셨고 그 분 음반을 들어보면 아주 우렁찬 동편제 소리를 들려주고 계시고 그 분이 일찍 별세하시는 바람에 안타깝게 소리가 오래도록 저희가 들을 수 없었던 그런 안타까운 역사가 있습니다. 장판개 명창의 할아버지 때부터 국악 아주 명인이셨으니까 정순임 선생님까지가 5대째 국악 명가문이시구요.
정순임: 그렇지요. 예, 예.
노재명: 조카님들까지 하면 6대째 국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순임: 6대째 나가는 거지요. 네.
노재명: 그러면 일가친척 분들 중에 국악 하셨던 분들이 누구 누구 계셨는지 소개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순임: 예, 우리 저, 제가 알기로는 장수향 고모할머님은 나는 뵙지도 못했고.
노재명: 네, 장판개 명창의 여동생 되시는 분이죠.
정순임: 예, 예, 예, 예, 예, 예.
노재명: 그 분이 판소리, 가야금, 무용을 하셨고.
정순임: 예, 예, 명인이시라 하드라고. 인제 김수악 선생님.
노재명: 예, 장월중선 선생님의 고종사촌 되시죠?
정순임: 예, 예, 예, 예, 고종사촌. 김수악 선생님이 진주에서 활동하시다가 얼마전에 또 작고하시고. 또 어머님의 오빠 장태화 씨, 이 분은 그 양악을 하셨어요. 오페라, 가곡, 양악 쪽으로 유명하셨어요. 그래서 미8군단의 뺀드마스타로 활동하시고 옛날에 영화의 황해라고, 허장강, 이런 분들하고 같이 극단얼 다니시면서 연극도 하시고 긍까 한마디로 재주꾼의 집안이었든가 봐요, 우리 어머님의 집안이.
노재명: 그리고 정순임 선생님의 동생분들이 또 국악을 하고 계시지요?
정순임: 예, 우리 정경옥. 정경옥이는 현재 서울 국립국악원에 활동한지 오래됐고 또 우리 또 남동생 정경호, 아쟁으로서 어머니 가락, 김일구 씨 가락, 윤윤석 씨 가락, 박종선 씨, 그리고 하여튼지 네 바탕얼 다하고 있어요.
노재명: 그리고 그 정순임 선생님의 요절한 동생 정경임 씨가 또 국악 천재였다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정순임: 예, 예, 예, 경임이가 있었는데 걔가 아직 살아있다면은 어머니 재주럴 가장 많이 닮은 천재가 하나 있었어요. 근데 안타깝게도 얼굴도 우리 형제들 중에서 제일 이쁘고, 근데 저승에서도 필요하다고 데려가 버렸어.
노재명: 아이고.
정순임: 안타까워. 그래서 그 동생이 국립국악원에도 있었고 이랬는데 참 안타깝게도 스무살 된 그 시기에 아 요절을 해버렸지. 그래서 그게 너무 우리 집안으로서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고 아주 보물이 하나 없어져 버렸지요, 우리 집안의 가문에서.
노재명: 예, 이렇게 워낙 명인 명창들이 많이 배출된 가문이시다 보니까 이렇게 족보를 저희가 어떤 분들이 배출됐나, 이렇게 더듬는데도 한참 걸렸습니다 시간이.
정순임: 아, 그러셨구나. 아이구 고생하셨네.
노재명: 정순임 선생님께서는 음력으로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시나요?
정순임: 음력으로 2월 5일 생입니다.
노재명: 1942년 말띠가 맞으시구요?
정순임: 예, 예.
노재명: 네, 그러면 올해 연세가 71세 되셨구요.
정순임: 예, 예. 벌써 어느새 71세 되아 버렸네. 나도 모르는 순간에.
노재명: 근데 제가 가까이에서 이렇게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도 그 71세라는 연세가 전혀 믿기지가 않고 한 40~50대 돼 보이세요.
정순임: 아이고 오늘 밥 내가 살께요. 하하. 오늘 밥 내가 삽니다. 감사합니다.
노재명: 굉장히 정정하시고 아주 미인이십니다.
정순임: 아이고 엄매 또 꼭대기로 밥을 사야 되겠네.
노재명: 그리고 본명이 정, ‘순’자, ‘임’자가 본명이 맞으신가요?
정순임: 예, 예. 저는 아호는 취송이고요. 그래서 이 집이 취송당이라고 그랬어요.
노재명: 예, 근데 제가 여기 판소리 연구소에 걸려있는 사진을 뵈니까 장월중선 선생님하고 부친이 같이, 부모님 사진이 걸려있는데 아버님도 많이 닮으신 거 같습니다.
정순임: 예, 예. 우리는 좀 아버님도 많이 닮았어요, 우리 형제간들이. 그 부친께서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정우선 씬데 그냥 정또선 씨로 세상에 이름이 나계셨어. 근데 아버님은 왜 그런 이름이 나셨냐. 김두한 선생님하고 우리 아버님하고 형님, 동생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 주먹 하나 가지고 일본 사람들 30명 때려 눕혔다는 전설이 있어요. 그러고 옛날에는 거인이 우리집 이 방만하게 거짓말 좀 보태면은, 옛날에 거인이 있으셨어요. 그 거인하고 우리 아버님하고 싸움이 붙었는데 광주 무슨 운동장에서 정광수 선생님하고 한승호 선생님하고 싸움 구경을 하셨대. 근데 그 분들이 나한테 얘기를 해주시는데 돌아가시고 안계셔 버렸으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한다 생각하지 마시고 실지적으로 내가 그 분들한테 얘기를 들었는데 아버님하고 그 거인하고 싸움이, 공설운동장에서 싸움이 붙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몸이 체구가 작아. 그런데 이 몸이 비호여, 비호. 눈 깜짝하고 나면은 어디로 가셔 버리고 깜짝하면 나타나시고 이러시는 양반이야. 이러니 얼마나 재밌는 싸움 구경거리가 되겠어요. 그러니까 파리 맨치로 파악 날라가 가지고 급소만 몇 대, 한 서너대 때리니깨 그 거인이 딱 쓸어져 버리드라 이거에요. 딱 쓸어지더니 그 때 시절에는 자기가 도중에 싸움을 했다가 지면 무조건 형님이야.
노재명: 하하하하.
정순임: 흐하하하. 아, 과연 목포 정또선이답다. 나는 오늘부로 당신 형님으로 모시겠다.
노재명: 네, 지금은 경상도에 사시지만 본래 고향은 광주 쪽이시구요?
정순임: 본래 고향이 내가 목포지.
노재명: 아, 목포에서 태어나셨나요?
정순임: 예, 내가 광준데 어머님이 친정이 광주에서 있었고 그러니까 아기를 놀라고 거 친정에 가 가지고 나하고 우리 정경호 남동생하고 둘이를 광주에서 낳았어. 낳아 가지고 인제 애기를 데리고 목포로 가신 거지 뭐. 그러니까 나는 고향이 두 개여.
노재명: 예, 그래서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나셔 가지고 부친의 고향 목포로. 그러면 목포에는 몇 살까지 계셨나요?
정순임: 목포에서는 제가 스무살까지 있었던 거 같애요.
노재명: 예, 그러면 선생님이 전라도의 동편제 유명한 명가문 출신이시고 그런데 어떻게 이 경주에 오래전부터 오셔서 활동하게 되셨나요?
정순임: 그거는 우리 어머님이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4남매를 데리고 참 젊은 나이에 참 고생하셨어요. 그러면서 목포국악원을 어머님이 창설하시고 또 유달국악원을 또 창설을 하셨다고. 두, 두 개 국악원을 인자 허시다가 그래서 국악원에서 뭐 그 때는 돈이 나온 게 아니고 그렇지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거는 예술이니까. 예술을 해야 쓰겄는데 국악원을 어떻게 장사를 했냐면은 목포 유달국악원, 노인정을 찾아가서 방 하나 빌려 주시오. 여기서 저 판소리 수업을 해야 되겠소, 애들을. 이러니까 아, 참 전라도는 판소리 하면 다 좋아하지. 그렇게 하라고. 그래 갖고 방 하나를 빌려 주신 것이 그게 국악원이 돼 버린 거요. 노인들이 다른 데로 가고 그 집을 전체, 전체를 목포국악원이라고 해 가지고 국악 동호인들이 운영을 해서 하다 보니까. 그렇게 잘하시다가 또 잘 이게 운영이 되니까 원장님이라고 계셔, 시조 하신 분들. 그 분이 또 그 남자 선생님을 또 모시고 왔어. 조상용이라고 허시는 분, 국악을 허신 남자분인데 그 분을 모시고 와 가지고 우리 어머님이 재주가 많으싱깨 선생님은 가야금, 무용, 연극, 뭐 작곡, 뭐 모든 거를 다하시니까 너무 힘드니까 판소리만은 남자 선생님 한번 모시고 오자 해가지고 그 분을 모시고 오니깨내. 어머니하고 마, 마음, 뜻이 뭔가 안맞으셨든가 자기가 만들어 논 국악원에서 나오신 거여.
노재명: 예.
정순임: 나오시고 다시 목포 유달 노인정엘 찾아가서 방 하나 주시오. 그래 갖고 목포 유달국악원을 또 만드신 거야. 아무래도 젊은 양반이라 애로점이 고생을 너무 많이 하니까 외삼촌이 그 때 대구에 살고 계시면서 미8군단 거기에 운영을 하고 계셨다고. 그래 가지고 인자 동생이 너무 고생을 하시니까 “니가 내한테로 오너라.” 사람 몇 데리고 대구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 그 때 내가 스무살, 스물 한 살인가. 나이가 그 정도로 됐을 거요. 그래서 경상도로 오게 된 것이 일단은 대구를 먼저 왔어요. 대구에서 인제 유종구 선생님이라고 시조 하신 분, 유명한 선생님은 우리가 이사 갔는 그 집에 학원을 하고 계시드라고. 그래 어머님이 오셨다고 하니깨내 그러지 마시고 경주에 가시면은 경주에 국악요원이라고 있어. 그니까 권번이 없어지고 요원이라 카는 게 무엇을 이야기 하냐 하면 경주에 그 관광객을 위주로 해 가지고 술집의 그 아가씨들, 그 아가씨들은 소리 한마디를 해야 관광객들을 유치하는데 그 때는 그랬어요. 이렇게 가리켜야 된다. 근데 가리킬 선생이 없어. 그래서 요원이라 카는 거를 만들어 놓고 선생이 없는데 마침 우리 어머님이 대구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초청을 해서 어머님이 경주로 오게 된 거지. 그러다 보니까 뭐 자식들이야 부모님이 가는 데 다 따라대니잖아요. 그러다 보니 경주에 정착하게 된 거에요. 그래서 경상도 사람이 됐버린 거지 제가.
노재명: 예, 그렇게 가족들과 함께 스물 한 살 때쯤에 경주로 오셨고.
정순임: 우리 동생들은 아직 어렸고.
노재명: 예, 그리고 그 뒤에 정순임 선생님께서는 서울 활동을 하시다가 장월중선 선생님 작고하신 뒤로 다시 경주로 오셨구요.
정순임: 예, 예, 예.
노재명: 그 국악, 판소리를 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시게 된 어떤 계기가 혹시 있으셨나요?
정순임: 아, 있었지요. 목포서 그 때 당시 여성국극단 활성화를 그 때 할 때. 임춘앵 씨 단체, 뭐 김경애 단체, 으, 여자들로 구성을 해서 여성창극단이라는 국극단이 그 때 굉장히 할성화를 했어요. 그랬을 때 우리가 거기 구경을 가면 내가 왕자가 되고 싶고 내가 공주가 되고 싶어, 그 어린 나이에. 그래서 소리를 잘해야 되겠다. 그러면서 그 때 총기가 좋았든가 봐. 국극단 한번 보면 쫙 꿰어 버려. 대사에서부터 주역이 부른 소리에서부터 합창에서부터 이 대본이 머리 속에 싹 다 한번 보면 다 들어와 버려, 그 때만 해도. 그래서 그 연극 소리를 하다 보니까 자연히 소리를 해야 되겠다 하는 게, 소리를 해야 나도 연극을 할 수 있구나. 고게 계기가 됐죠.
노재명: 그 때가 몇 살 때쯤이신가요?
정순임: 그 때가 뭐 한 여덟살 땐가. 어, 그 정도로 됐을 거에요. 그래 갖고 지금 박계향 씨가 어머님의 제자에요. 박계향 씨, 오비연 씨, 안혜란 씨, 신영희 씨, 죽은 안행년(안향련)이 모도 다 우리 어머니 어릴 때 그리 제자들인데. 그런데 그 박계향 씨하고 저하고 한 집에 3년을 살았어요, 우리 집에서. 그래, 그래서 인자, 박계향 씨도 인자 그 연극에 미쳐 가지고 나하고 같이 임춘앵 씨 단체럴 가고 싶어했사니까 엄마가 공부를 시켜 갖고 “임춘앵 씨 단체에 가, 가서 고생 한번 해봐라. 느그가 보는 거하고 다르니까 몸으로 체험해라.” 그러고 어린 나이에 그냥 임춘앵 씨 단체에 보냈더니만은 과연 따라대녀보니 고생이드라고. 그 고생은 말을 다 할 수가 없어. 우리 월급을 준 것도 아니고 그 때 당시는 단체에 그냥 따라다녔어, 맹목적으로. 그래 돈도 필요하고 옷도 필요하고 뭐 근 1년 동안을 따라댕기는데 죽을 맛이드라고. 그래 갖고 ‘견우와 직녀’ 그 작품을, 한 서너 작품을 내가 허고 아이구 고생 말도 못해 내가. 그래 가지고는 도저히 못참어 갖고 대구로 도망을 가버렸어.
노재명: 하하하하.
정순임: 하하하하. 박계향 씨는, 그냥 너 있던지 말던지 도망을 가버리고 나서 나를 찾고 난리가 났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연기도 배우고 고생하는 것도 배우고 그 때는 도망가 버리니까 전화도 없고 편지로 왕래해야 되는데, 날 찾을려고 임춘앵 씨가 고생을 많이 했는데 결국은 못찾고는 어머니한테 편지로 미안하다 느그 딸을 잊어 버렸다. 이렇게 우리 외삼촌이 엄마한테 편지를 보냈거던. 대구에 외삼촌이 계셔서 그 삼촌한테 한 두달 있다가, 목포로 가서 다시 공부를 시작항깨 엄마가 “정응민 선생님한테 너 가거라. 내 자식은 내가 못, 못가리키니까 보성의 정응민 선생님이 그 유명한 선생님이 계시니까 거 가서 공부를 한번 해봐라.” 그래 그 쪽에 보내주시드라고.
노재명: 예,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사실상은 선생님이 판소리를 입문하신 거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이 되고 특히 여덟살 무렵부터 판소리를 본격 입문하셔 가지고 일평생 지금까지 평생을 판소리 안질리고 하시는 거 같습니다.
정순임: 예.
노재명: 정순임 선생님께서 흥보가로서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으셨으니까요. 그 특기인 판소리 흥보가 가운데 <흥보처가 음식을 차리는 대목>서부터 <흥보처가 놀보에게 억울하다고 항의하는 대목>까지 청해서 들어보고 싶습니다. 예, 그럼 여기에서 즉석에서 부탁을 좀 드리겠습니다.
정순임: 예, 예.
2012.1.9.10:30~17:00.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328-3 정순임 명창 판소리 연구소 ‘취송당 정순임 판소리 연구소’에서. 정순임 판소리 흥보가 중 <흥보처가 음식을 차리는 데>~<흥보처가 놀보에게 억울함 항의>(박송희 사사, 고수:정성룡) 녹음.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판소리 인간문화재 정순임 명창 방송 편을 듣고 계십니다. 방금 들으신 음악은 정순임 명창의 소리와 조카 되시는 정성룡 씨의 북반주로 판소리 흥보가 가운데 <흥보처가 음식을 차리는 대목>서부터 <흥보처가 놀보에게 억울하다고 항의하는 대목>까지 이어서 감상을 해보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정순임: 감사합니다.
노재명: 이 흥보가는 장월중선 선생님한테도 배우셨고 인간문화재 박송희 선생님한테도 배우셨는데요. 지금 들려주신 소리는 박송희 선생님한테 배우신 소리로 들려주셨지요?
정순임: 예, 예, 예, 예.
노재명: 그 장월중선 선생님한테 배우신 소리는 어떻게 기억이 잘 안나시나요?
정순임: 예, 기억이 정말 안납니다. 아무 인제 그 어머님한테도 참 좋은 소린데 <가난타령>이 계면조로 진양으로 나가거든, 우리 어머니한테 배운 거 <가난타령>은. 근데 인제 박송희 선생님 <가난타령>은 중모리로 나가요, 간단하게. 근데 참 가난하니까 자식들 앞에 놓고 진양으로, 진계면으로 불러야 그게 인제 그 애틋한 가난의 그 찌들림, 그 무엇이 보이는 것 같은데 그거는 인자 우리 어머님한테 그 소리를 배웠어요. 그런데 너무 좋은데 완판을 하다 보니까 어머니한테는 토막으로 배웠거든요. 인제 <가난타령>에서부터 <박타령> 고 토막토막 소리를 배웠기 때문에 어디 가서 고 대목만 써 먹을 수가 없더라고. 하다 보니까 우리 어머니 좋은 제를 잊어 버렸제. 하하하하.
노재명: 예, 그 장월중선 선생님의 <가난타령>이 내두름이 어떤 식으로 시작되는지 좀 이렇게 기억이 전혀 안나시나요?
정순임: 으, 처음에 내두름이.
2012.1.9.10:30~17:00.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328-3 정순임 명창 판소리 연구소 ‘취송당 정순임 판소리 연구소’에서. 정순임 판소리 흥보가 중 <가난타령>(장월중선 사사, 무반주) 내두름 녹음.
정순임: 요런 식으로 내두름이.
노재명: 아, 상당히 멋있네요 소리가요.
정순임: 네, 아주 멋있어요. 그런데 인제 고 뒤에 그 다 배왔는데 그 선생님, 우리 어머니한테 공부한 테이푸 내가 넣어논 것이 있었는데 나중에 기회 되면 그거 들려 드릴께요.
노재명: 예, 그러면 그 어머니 장월중선 선생님한테는 대략 일곱~여덟, 일곱 살, 여덟 살 무렵에 배우기 시작하셨는데.
정순임: 예, 예.
노재명: 그 때 <가난타령>부터 <박타령>까지 흥보가 배우셨고.
정순임: 예.
노재명: 박동실 선생님이 작곡하신 <열사가> 유관순전이라든지, 이준 열사가, 윤봉길전, 안중근전도 배우셨구요.
정순임: 예, 예.
노재명: 그래서 이 장월중선 선생님한테 배우신 소리 가운데 그 <열사가>하고 심청가 완창, 수궁가 완창을 시디 음반으로.
정순임: 예, 세가지를 제가 이제 보유하고 있죠.
노재명: 예, 음반으로까지 발표도 하셨구요.
정순임: 예, 예.
노재명: 그리고 악기는 장월중선 선생님한테 어떤 악기를 배우셨나요?
정순임: 뭐 어머니한테 배운 거는 없고 그냥 들어서, 악기는 정식으로 나는 안배웠어요.
노재명: 아, 하시는 거 보고 이렇게 자득을 하신.
정순임: 하는, 하는 거를 보고 그냥 내 나름대로 저 했고. 근데 조금 젊었을 땐 나도 악기, 가야금산조 한바탕 다 띠고 그냥 들으문 우리는 하니까.
노재명: 아.
정순임: 뭐 배워서 하는 게 아니고, 흐하하하하하.
노재명: 예, 예.
정순임: (모친 장월중선이 제자들에게 악기를) 하도 많이 가리키니깐 그냥 들어서 근데 소리, 판소리 해놓고는 악기 손 대기가 싫어.
노재명: 예, 판소리가 더 좋으시니까.
정순임: 예, 예. 판소리에 더 매력이 많은가 봐.
노재명: 예, 그래서 저희가 평상시 정순임 선생님의 판소리를 주로 음반이나 방송에서, 공연 무대에서 봤는데 가야금산조를 이 현장에서 부탁을 드려 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좀 가능하실까요?
정순임: 아이고 이거 가야금 논지가 근 한 20년도 더 됐는데 손꾸락이 이렇게 딱 뻣뻣해 가지고 가야금이라 하는 거는 매일 해도 이 손꾸락이 부드럽지 않으면 잘 안되는데 근데 내 자작으로 한번 조금 그냥 조금만 해볼께요.
노재명: 예, 그러면 자작이라고 하셨으니까 어떤 유파에 얽매이지 않고.
정순임: 얽매이지 않고 그냥.
노재명: 내 선생님의 조로 한번.
정순임: 예, 예. 흐하하하하하.
노재명: 가야금산조 짧은 한바탕을.
정순임: 예, 예.
노재명: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 이렇게 부탁을 좀 드려 보겠습니다.
2012.1.9.10:30~17:00.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328-3 정순임 명창 판소리 연구소 ‘취송당 정순임 판소리 연구소’에서. 정순임 가야금산조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자작 즉흥 연주, 무반주)와 정순임 판소리 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부모 생각, 장판개-장월중선-정순임 전승 소리, 고수:정성룡) 녹음.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판소리 인간문화재 정순임 명창 방송 편을 듣고 계십니다. 모친이자 스승 되시는 장월중선 선생님께서 가무악을 두루 가르쳐 주시면서 어떤 예술가 정신이라든지 특별히 강조하신 점은 무엇일까요?
정순임: 항상 겸손하고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예술에다만 부려라. 항상 그렇게 말씀하시고 또 본인이, 우리 어머님이 그렇게 살아오셨어요. 그래서 아무런 욕심이 없으시고 오로지 참 예술만 하시다가 작고하셨는데, 저는 안타까운 게 이 경상북도 이 불모지, 경주, 또 유별나게도 경주는 우리 국악을 못알아 주시는 것이 좀 섭섭해요. 그렇지만은 지금에서는 아, 국악 하면은 어, 이럴 정도로 인제 많이 보급이 됐지만은 그 때는 어머님이 여기서 활동하실 때는 참말로 그야말로 사막과 같은 그런 데서 계셔서. 어머님이 좋은 그 예술을 많은 제자를 못남기고 또 어머님의 그 좋은 예술을 많은 사람들한테 못보여주고 그런 것이 너무 제가 원통하고 참 안타깝고 그게 가슴이 제일 아픈 부분이 그 대문이고. 어머니는 티 없이 사시다가 깨끗하게 가신 분이에요.
노재명: 예.
정순임: 근데 그 밑에서 우리가 보, 우리 어머님이 하시는 거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그 어떤 사회에 나가니까 나를 약간 모자르다고 사람들이 뒤에서 나를 손가락질 한 사람이 더러 많았었어요. 너무 세상하고 안맞는 내가 생활을 쓰고 있으니까. 그런데 예술 쪽으로 뭐만 시키면 아, 즈그보다 낫거든. 긍까 나한테 질투하는 사람도 참 많앴고 과거에 지나간 이야기지만은 에피소드가 많앴지.
노재명: 저희가 생각해도 안타까운 것이, 저도 96년도에 장월중선 선생님을 이 곳 경주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기록이 별로 많이 안남았어요.
정순임: 예.
노재명: 그래서 청취자 여러분들이 장월중선 선생님을 생전에 못뵌 분도 계시고 잘 모르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는데 따님으로서, 제자로서 어떤 분이었는지 그 특징적인 예술성을 좀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순임: 예, 우리 어머님은 예술로 똘똘똘똘 뭉친 양반이라. 예술 외에는 다른 거는 뜻이 없으신 분이고 또한 인간의 한 여자로서 갖출 거 다 갖추셨어요. 음식이문 음식, 또 자기 의복, 옛날에는 한복을 손으로 만들어요. 만들어 입으시고 틀을 갖다 놓고 제자들을 가르켜 가지고 1년에 1번쓱 발표회를 시킬 때 의상이 없잖아요. 밤새도록 천을 떠 가지고 와서 이 분이 의상을 만들어요. 밤새도록 손수 잠 안자고 만들어 가지고 그 연극에 맞는 의상을 만들어내고. 애들을 인자 화장을 시켜야 되는데 그 때 당시는 돈 줘도 분장사가 없잖아요. 애들 하나 하나를 전부 분장을 우리 어머니가 손수 다. 그니까 오로지 아주 자태 고운 여자에요. 가정의 살림 잘하시고 그러신 분이고 우리 자식들한텐 상당히 또 엄중했어요. 또 공부 같은 것도 가르켜 주면 제자들은 10번을 못하잖어? 그럼 다, 성 1번 안내시고 다 가리키시는데 제가 만약에 2번, 3번 못따라 하면 그 때 북채 날라와. 무서웠어요. 그러고 인제 견본으로, 제자들 견본으로 날 뚜드려 패는 거야.
노재명: 예, 그래서 아마 제가 뵜을 때도 장월중선 선생님은 아주 얌전하시구 수줍음 많이 타시구 겸손하시고.
정순임: 예, 자상하고. 다른 분한테는 엄청 자상해.
노재명: 예, 근데 외유내강이라는 말처럼 그러면서도 내면에는 굉장히 강한 불 같은 그런.
정순임: 예, 예. 아주 강했죠.
노재명: 그런 면을 가지고 계신 거 같습니다. 그래서 말씀 듣기로는 지금으로는 뭐 미국 유학 같은, 정응민 선생님한테 정말 형편이 이렇게 넉넉하지 않으신데도 유학을 보내셨다고 하는데요. 그 말씀 좀 아까 잠깐 해주셨는데 상세히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정순임: 예, 예. 그래서 인제 어머님이 공부를 가리키다가 욱 하문 나를 두드려 패구 욱 하문 나를 또. 자가 못했는데 자가 못한 걸 갖다 자는 못두드리고 나를 뚜드리고. 이렁깨내 그래두 내가 죽어라 할라 하니깨내 엄마가 “자식은 내가 못가리키겄으니까 음, 니가 전라도 땅끝 마을에 보성의 정응민 선생님, 아주 유명하신 선생님이 계시니까 그 쪽으로 니가 백일공부만 하고 오너라.”
노재명: 예.
정순임: 그래 가지고 인자 그 때 돈으로 쌀 열가마니에요. 그러문은 어마어마한 돈이에요. 그래서 인제 선생님 댁에 먹고 자고 석달 열흘을 거기서 참 공부를 시켰는데 그게 인자 우리 어머님이 대학원 박사학위까지 다 시켜준 거지요. 어?
노재명: 예.
정순임: 그래서 선생님한테, 선생님이 연세가 많애. 그러고 원래 정응민 선생이 고음이 안올라가. 목소리가 낮아요. 전부 인제 고음이 안되고 밑의 청으로 하는데 우리는 목이 땍땍해 갖고 고음만 하는데 할아버지가 소리를 가리켜 주면은 “신연 맞어 내려온다. 별련 맵씨 거동 보소. 모란 작약의 완자창~”(자진모리 시범창 저음으로) 요렇게 가리켜 주면은 우리는 “신연 맞어 내려온다~”(자진모리 시범창 고음으로)
노재명: 하하하하.
정순임: 요렇게 하거덩. 하면은 그래 놓고 선생님이 아래로 또 소리가 “저기 가는 심소제야! 슬픈 말을 듣고 가거라~”(중모리 시범창) 예를 들어서 그렇게 한다면은 목이 안올라가셔. “아아아~” 안올라가시니까. 인제 그 양반은 절대 북채를 안쳐. 네모 되는 도장밥, 도장밥을 손가락으로 딱 위에 그 큰 네모 같은 도장 위에 손꾸락으로 딱 고거로 북채를 쳐, 정응민 선생님이. 그라고 북채를 딱딱딱딱 치고 탁 치면은 잘하면 고대로 쳐 주시는데 못하면 고놈으로 탁탁탁탁탁탁 때리고 이러시는데. 그 도장밥으로 목이 안올라가는 거를 “저기 가는 심소제야아아아아~” 아, 나도 지금 목이 나, 나도 안올라가요. 너무 쎄 가지고. 이러면 “이렇게 공중으로 뺑뺑뺑뺑뺑뺑 돌려쳐!” 저기 올라가면 우린 그 도장 보고 “아아아아~”
노재명: 하하하하하.
정순임: 하하하하하. 그래 갖고 딱 때리면은 잘했다고 “잘했다.” 그렇게 하기는 해도 잊아 뿌리지. 그 때는 녹음기도 없고 뭣도 없고 뭐 그런 것도 없는 시절이라 선생님이 오로지 선생님이 가르켜 준 소리 듣고 배우는데 허문 딱 돌아서면 놀다 보면 다 잊어 버려. 다 잊어 벌면 저녁에 동네 아저씨들이 다 와, 보성에.
노재명: 소리를 이제 들으러 오는 거죠.
정순임: 소리 들으러, 자기들 북 치고. 그럴라고 오면은 아저씨들한테 소리 배와.
노재명: 예, 하하하하하하하.
정순임: 선생이 갑자기 배껴. 아이고 아저씨들이 다 알아. 으떻게 많이 들어 버렸든지. 요 대목 다 잊어 버렸는데 그러면은 아저씨들이 갈켜 줘.
노재명: 아.
정순임: 그래 가지고 반은 선생님한테 배우고 반은 아저씨, 동네 아저씨들한테 배우고. 그렇게 소리를 배웠소. 한 날은 요놈 외울라고 날도 안샜는데 뒷밭에 보성 가면 우리 선생님 집 뒤에 대나무밭이 굉장히 울창하게 있어요. 근데 거기에 보면은 여기는 임방울 선생님이 공부했던 자리, 바우가 있어요. 여기는 김연수 선생님이 공부했던 자리. “이 자리는 장영찬이 느그 삼촌이 공부했던 자리니까 여기서는 니가 해라. 느 삼촌 자리니깨.”
노재명: 아.
정순임: 응. 그렇게 장소를, 공부할 장소를 다 정해 주신다고, 우리 선생님께서. 그러문 인제 영찬이 삼촌, 뒤의 산에 그럼 고 자리 가서 모두 고함 질러 북채 하나 들고. 근데 그 때 그 동네가 늑대가 나오고 노루가 나오고 여, 여우 같은 것이 그 때 있었다고 그 때 당시에. 그니까 늑대가 나와서 닭도 물어 가고 개도 물어 가고. 이러는데 한 날은 새벽인지도 모르고 산에 올라가 갖고 한참 소리를 하고 있는데 저 밑에서 불이 번쩍 번쩍 번쩍 번쩍하고 올라와. 어렴풋이 “순임아! 이 호랭이가 깨물어 갈 년! 급살을 맞을 년아!” 막 그러고 올라와. 그래 가지고 처음에는 한참 소리 하다 보니까 그 소릴 못들어. 못듣다 불이 번쩍 번쩍 번쩍하니깨내 가만히 들어 보니깨내 바람이 휙 불면 우리 선생님 소리여.
노재명: 네.
정순임: “예!” 그러니깐 오더니만은 멱살을 쥐고는 나를 막 끌고 막 내려가더니 그냥 호되게 나무라시더라고. “네 이년! 만약 늑대한테 물려 죽었으면 느그 엄마를 무슨 낯으로 보겄느냐? 으?” “공부시켰더니 늑대한테 물려 죽어 버렸다.” 하하하하하. 그래 가지고 혼나고 나서 산에 안올라가. 그렇게 겁도 없었어. 그래서 오로지 소리만 허면은 된다고 생각허고.
노재명: 그 때 모친께서 월사금도 쌀로 보내주시고 참 큰 투자를 하신 거죠.
정순임: 그렇지요. 평생에 우리 어머니가 아마 큰 투자는 그 때 처음 했어요, 돈으로. 지금 어머니가 소리를 이 만큼 가리켜 줬으니깨내 더 큰 재산을 나한테 물려 주셨지.
노재명: 예, 그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그 때 그 보성이라는 곳은 마을 전체가 귀명창이라고 할 만큼 판소리를 좋아하시고 많이 들으셔 가지고 그 어린 제자분들이 정응민 선생님한테 배운 소리를 감상도 하시고 좀 미흡한 점은 지적도 해주시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정순임: 예, 예.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판소리 인간문화재 정순임 명창과 함께 하고 있는데요.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정순임 명창의 판소리 연구소에서 방송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판소리에 일평생을 바치셨는데요 이 판소리 평생 하신 거에 대해서 후회는 없으신가요?
정순임: 없지요.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노재명: 예, 판소리 하시는 시간 이외에 평상시에 어떻게 지내시나요?
정순임: 음, 약간의 운동도 조금 하고 뭐, 일상 생활은 목욕탕이 제일 좋제. 흐하하하하하하하.
노재명: 하하하하.
정순임: 목욕탕 가고 시장 보고 또 여기 세월처럼 맛있는 거 어디 맛있다 그러면 제가 음식을 많이 안먹는 대신에 음식을 굉장히 가려 먹어요. 입이 꼬드러워 가지고. 어디가 오늘은 맛있는 거 먹어야 되겠다 하고 고걸 많이 염두에 둬요, 많이 안먹는 대신에. 맛있는 걸 찾아 먹는 그런 못된 버릇이, 버릇이 있어. 허허.
노재명: 그리고 형제분들하고 이 집에서 자주 어울리시구요.
정순임: 예, 형제는 우리하고 같이 인제 한 집에 산지 10, 10여년도 넘었어요.
노재명: 아, 한 집에 사세요?
정순임: 예, 나는 혼자다 보니까 혼자 살 수가 없어요. 저는 불안 증세, 그것이 뭐라드라. 공항 증세라든가. 그런 병이 나한테 있어서 혼자 있으면 깔딱 넘어가 버려요.
노재명: 그러면 혼인은 그.
정순임: 결혼은 제가 열여덟살에 해 가지고 스물 한 살에 아들을 놓고 인제 우리 아들은 이 계통에 전혀 무관한 대구 매일신문의 국장으로 계세요. 그리고 회계학 박사시고 우리 아들은 전혀 이쪽으로는 완전히 캄캄한 사람이라. 그러닝깨내 아들하고 대화가 잘 안돼. 그래 아들은 아들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살고 내 가족의 형제간들하고 같이. 그래 예술가들끼리 산깨 좋드만.
노재명: 그러면 슬하에 자제분은 그 아드님 한분이신가요?
정순임: 예, 예.
노재명: 그리고 낭군님께서도 이 국악 관계되신 분은 아니시구요?
정순임: 전혀 국악 관계는 아니구요.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국악을 좋아하셨지. 그러다가 일찍 돌아가셨어.
노재명: 예, 언제 돌아가셨어요?
정순임: 우리 아이 세 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일평생 나는 혼자 살아요.
노재명: 예, 살아 나오시면서 특별히 어려움이나 경제적인 부분이나 좀 고통스러우셨던 부분은 혹시 없으셨나요?
정순임: 아, 왜 없어요. 엄청 많앴지요. 아들을 키울 때, 남편 없이 혼자서 아들을 키울 때 그 때는 국악을 뭐, 뭐 알아주는 시기가 아니라서 정말 힘들게 참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뭐 많은 걸 해봤는데 그 때는 나만 고생한 게 아니고 다 이 세상의 나이 좀 묵은 사람들은 그 때 시절에 다 고생을 했고 우리 국악인들도 그 때 고생하신 분들이 너무나 많으니까. 고생을 안하고 어떻게 자식을 키우겄소.
노재명: 네, 그러한 그 어려움 속에서도 판소리 예술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신 것은 그 판소리에 대한 강한 사랑, 깊은 애정이 없었다면은 아마도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순임 명창이 애정을 가지고 연마한 특장이라고 할 수 있는 소리 한 곡을 또 청해 보고 싶습니다. 평소 접하기가 어려웠었던 박동실제 판소리 열사가 가운데 유관순전, 청취자 여러분들한테 선물로 이 현장에서 직접 부탁을 드려 볼까 합니다. 좀 부탁드겠습니다.
정순임: 예, 근데 제가 목이 합숙 공부를 하는 중간이라서 목이 많이 상해 가지고 이 고음이 많은데 그 소리가 높이 내 가지고 대한독립 만세를 시원하게 불러야 되는데 될지 안될지 모르겠지만 한번 불러 볼께요.
2012.1.9.10:30~17:00.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328-3 정순임 명창 판소리 연구소 ‘취송당 정순임 판소리 연구소’에서. 정순임 판소리 유관순 열사가 중 <대한 독립 만세>(박동실-장월중선-정순임 전승 소리, 북:정순임·정성룡) 녹음.
노재명: 예, 정순임 명창의 판소리 유관순 열사가 <대한 독립 만세> 대목을 중심으로 이 현장에서 직접 불러 주셨습니다. 이 곡을 예전의 분들은 많이 배우셨는데 요즘은 이 박동실 명창의 열사가를 아는 분들이 많지가 않습니다. 이 소리를 기억을 그래도 잘하고 계시는데 장월중선 선생님께서도 아주 특별히 강조해서 이거는 가르쳐 주신 거 같습니다.
정순임: 예, 예,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다 꼬맹이들 어리잖아요. 이거를 가리켜 줄 때는 나라 소중함을 느그도 이 소리로 인해서 배워라 하는 뜻에서 참 열심히 가리켜 주신 거 같애요. 그 때 이 소리를 다 배운 사람 있어요. 서울서 활동하신 분들 중에서 신영희 씨, 또 박계향 씨, 또 오비연 씨, 이런, 어릴 때, 아마 이 소리를 생각이 날 겁니다. 이 유관순가를 부르면 자연으로 애국이 그 피가 끓어요. 그리고 슬픈 곡은 과연 유관순, 그 열사님이 애통하고 감옥에서 비통할 때는 소리할 때도 눈물이 나와요. 듣는 이는 물론 참 눈물을 흘리시겠지만 소리하는 사람이 눈물이 나오니깐 어떻게 그 소리를 하겄어요. 목이 메어 가지고 그런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죠.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정순임 명창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조카이자 제자인 정성룡 씨가 방금 고모인 정순임 명창께서 소리 하실 때 북반주를 맡아 주셨는데요. 잠깐 인터뷰 말씀 들어보겠습니다.
정성룡: 안녕하세요. 정순임 명창의 조카이자 고수를 겸하고 있는 정성룡이라고 합니다. 평소의 모습은 70대 할머니처럼 아이들도 좋아하시고 소탈하신데 무대에 스시면은 키도 적고 체구도 적으신 분이 어떻게 그렇게 크게 보이시는지 모르겠드라구요. 카리스마가 넘쳐나고 청중을 압도하는 모습을 봤을 때 과연 명창이다. 너무 유명하시니까 주위에 배우는 사람들이 너무 어려운 자리가 많습니다. 장점은 판소리는 직접 무대에서 경험을 같이 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고수를 하다 보니까 간접적으로 선생님의 발림이라든가 소리 하시는 스타일 이런 것을 바로 볼 수가 있죠. 그런 점이 아주 장점으로 좋은 점인 거 같습니다. 초청 공연을 받았을 땝니다. 제가 소리를 겸해서 고수를 많이 하니까 <토끼 화상>을 부를 때가 있었는데요, 한참 부르시다가 가사를 잊어 버렸어요. 다음에 “봉래방장”이 나와야 되는데 그 부분을 우물우물하시는 거에요. 그러면서 저를 보시길래 제가 “얼씨구 방”, “얼씨구 방” 하면서 고개를 끄떡하시더니마는 “봉래방장” 하는 걸 생각나셔 가지고 그렇게 부르신 적이 한번 있습니다. 하하하. 선생님! 저희 많이 부족합니다. 저희들이 명창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합니다.
노재명: 네, 말씀 감사합니다. 일평생 고모님과 조카가 함께 국악, 판소리에 흠뻑 취하셔서 국악에 헌신하고 계신 삶, 국악계에서는 아주 보기 드문 경운데요. 정순임 명창, 고조부, 증조부, 조부, 모친, 그리고 동생들과 조카까지 이렇게 아주 수대에 걸쳐서 국악의 명가문 맥을 잇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순임 명창의 여동생 되시는 가야금병창 명인 정경옥 씨와 잠깐 인사 나누고 인터뷰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국립국악원의 악사로 활동하고 있는 정경옥 씨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정경옥: 안녕하십니까. 정순임 명창의 동생인 정경옥입니다. 욕심이 없는 것으로서 가장 꼽을 수 있는 그런 예술가. 천성적으로 우리가 그런 성품을, 어머니 성품을 받아 가지고 나와 가지고 인제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그런 예술가다. 인제 제자들한테도 그런 식으로 공부를 가리키고 일상 생활도 하면서 하다 보니까 그게 인자 저 역시도 한 제가 10년 전만 해도 언니하고 많이 싸웠어요. 제가 인제 성격이 좀 찬 성격이었어요. 그래 갖고 언니는 늘상 그게 저한테 불만이고 인제 언니가 저한테 “아이고 저 인정, 인정머리 없는 거.” 늘 그랬어요. 그것도 인제 자연히 저거 되고 저도 인제 나이가 인제 이 만큼 먹다 보니까 인제 항상 늘상 언니가 저한테 항상 손해 보고 인제 엄마 같죠. 나이로 보나 뭐로 보나 인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저희 집안의 가장이고. 여기까지 언니가 희생 정신으로 잘 참아 주고 해서 제가 지금 오늘날 이렇게 언니 사랑을 듬북 받고. 어머니의 재능을 우리가 하나씩 다 해요. 오빠는 또 음악을 하시고 편곡 하시고 저는 또 가야금, 거기다 또 인자 판소리, 조카들은 또 이 소리북 있죠, 소리북을 또 하고. 또 제 아들도 이 길을 지금 장단을 치고 있고요. 그러다 보니까 그냥 하나의 팀웍이 되는 거에요. 그랬을 때는 참 그 행복하고 그 순간이. 단점도 없을 수는 없어요. 조상님들이 다 명성을 날렸던 명인 명창들이시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행동거지에 대해서 좀 조금 제가 힘들 때가 있어요. 뭐 장월중선 자식이라는데 저렇게 행동을 한다. 그런 게 이렇게 인제 행동거지 좀 조심이라든가 고런 게 좀 불편하다 할까. 예, 좋은 점이 더 많죠 단점보다는. 저희 어머니 살아 계실 때 어머니하구 언니하고 저하구 인제 ‘선화공주’라는 작품을 했었어요. 그 어머니가 만드신 거죠. 근데 언니가 이틀 공연을 날을 잡아 놓고 하는데 첫날 언니가 선화, 서동이하구 제가 인제 선화공주 했었어요. 갑자기 언니가 하루 하고 언니가 복병이 와 가지고 막 병원에 실려 갔어요. 근데 주연이잖아요. 그러니까 천상 할 사람이 어머니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연세가 있으셔 가지고 분장을 하셨는데 너무 웃음이 나 가지고 내가 연극 하다가 내가 웃음이 터진 거야, 저기 어머니 모습을 보고. 그런데 어머니 역시 제가 웃으니까 니가 왜 웃는구나 하는 거를 어머님이 느낌으로 아신 거에요. 그래서 어머니도 이제 웃음이 터지신 거에요. 그래 갖고 그 때 참 거 재밌게 그래도 무사히 연극을 잘 마쳤든 게 기억이 나요. 이제 제가 저희 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면서 제가 언니한테 가야금병창 중에서 단가 <백발가>를 언니한테 올리겠습니다. 장단은 제 아들 이규용이가 맡겠습니다.
2012.1.9.10:30~17:00.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328-3 정순임 명창 판소리 연구소 ‘취송당 정순임 판소리 연구소’에서. 정순임 여동생 정경옥(국립국악원 연주자) 가야금병창 단가 <백발가>(장월중선 사사, 장고:이규용) 녹음.
노재명: 예, 말씀 감사합니다. 정순임 명창의 여동생으로서 국악 명가문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가야금병창 활동을 하는 여동생 정경옥 씨의 인터뷰였습니다. 판소리 활동을 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잊혀지지 않는 기뻤던 순간 회고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순임: 으음, 무대 위에서 목소리 잘 나왔을 적에. 내 마음껏 목청얼 내서 소리를 하면 그 청중의 반응이 나한테 다 주시고 할 때가 가장 행복했지요. 그리고 또 제자들을 가리켜서 그 놈들이 소리를 내 귀에 좀 간지러 주면 아, 참 행복하다. 으, 그런 거. 또 저그들이 또 나한테 공부를 해 가지고 어느 대회라도 나가서 상이라도 타 가지고 오면 뛸 듯이 기쁘고 참 감회가 깊어요.
노재명: 네, 정순임 명창께서 인간문화재로 인정을 받으셨구요. 또 그 판소리 예술을 부흥시키기 위해서 학교를 비롯해서 각지에 강의를 많이 다니셨습니다. 여기 현장에서도 판소리 산공부를 이 곳 인왕동, 경주의 이 연구소에서 여러 제자들과 함께 하고 계시는데요. 그래서 목소리가 약간 쉬신 그런 상태세요. 지금 정순임 선생님의 맥을 잇고 있는 제자분들, 어떤 분들이 대표적인 제자분들인지 소개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순임: 아하, 지금 현재 커 나가고 있는 제자들 중에서 전태원이라고 중앙대학교 3학년 올라가는가. 또 조혜진이라고.
노재명: 예, 그리고 언급해 주신 제자분들 외에도 조카 되시는 정성룡 씨, 또 권하경 씨, 정소라 씨, 오영지 씨, 조아라 씨, 윤아람 씨, 김미진 씨, 또 곽미정 씨, 조애란 씨.
정순임: 예, 잘 크드라구요. 그런 것 보면 굉장히 제가 행복해요.
노재명: 예, 굉장히 뿌듯하시겠습니다.
정순임: 뿌듯하구요.
노재명: 예, 그러면 여기서 잠깐 정순임 명창의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제자 되시는 조혜진 양의 인터뷰를 통해서 정순임 명창이 어떤 분인지 이야기를 듣고 또 다음 순서 이어가겠습니다.
조혜진: 안녕하세요. 정순임 선생님 제자 조혜진입니다. 저희 선생님은 그냥 소리꾼으로서 음만 따라서 꾀꼬리처럼 소리를 하는 거는 싫어하시구요. 사설의 이면을 생각하면서 소리를 하는 거를 좋아하세요. 사설의 깊은 뜻을 생각하면서 소리꾼으로서 관객과 소통을 해야 되기 때문에 그 뜻을 생각을 하면서 깊이 있는 소리 하는 거를 항상 강조를 하세요. 카리스마 있는 거 좋아하시구. 정말 연기를 잘하시구 발림도 무대에서 하시는 거 보면은 사설에 맞게 관객이 잘 빠져들 수 있게끔 발림두 하시구 정말 카리스마가 넘치세요. 그래서 저는 연기가 아직 잘 안되구 카리스마가 없거든요, 소리를 할 때. 그래서 저는 저희 선생님이 소리를 하실 때 보면은 정말 대단하다구 느껴요. 어, 선생님 저 대학교 가구 나서 안그래도 성격도 무뚝뚝한데 연락두 자주 못드리구 그래서 너무 죄송하구요. 어, 이제 건강두 잘 못챙기신다고 들었는데 오래 오래 건강하시구 저랑 같이 공연두 많이 하구 그렇게 지내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노재명: 예, 판소리 인간문화재 정순임 명창의 제자인 조혜진 양의 인터뷰였습니다. 정순임 명창께서는 동국대학교, 경북대학교, 부산대학교에서 판소리 강의 활동을 하셨구요. 1986년부터 2010년까지 총 12회에 걸쳐서 박동실제 심청가 완창, 1996년부터 2010년까지 총 8회에 걸쳐서 박록주제 흥보가 완창, 1996년부터 2004년까지 총 15회에 걸쳐서 박동실제 유관순열사가 발표회,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총 6회에 걸쳐서 장판개제 수궁가 완창 공연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1985년에 제3회 전국남도예술제 판소리 대통령상 수상, 2007년에는 정부로부터 '판소리 명가'로 지정되기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음반 취입, 또 방송, 공연 활동을 두루 하셨는데요. 혹시 다소 아쉬운 점, 좀 후회되시는 점은 혹시 없으셨나요?
정순임: 지금에 생각하니까 뭐 후회된 것보다 서울에 있을 적에 좀 더 열심히 했드라면 그런 것들이 조금 아쉬워요. 예, 허지만 어머님 돌아가시고 그 뒤를 잇겄다꼬 경주에 내려와서 처음에는 굉장히 후회했어요. 증말로 너무 안맞어 가지고 서울 생활하고 이쪽하고 안맞어 가지고 그리구 국악 예술하는 사람을 아무도 대우라든가 우대를 안해 줘서 참 섭섭한 것도 많앴고 그랬는데 인제는 뭐 이제 내가 묻혀야 할 곳이 이 곳이니까 열심히 해야지요, 여기서.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정순임 명창 판소리 연구소에서 인간문화재 정순임 명창과 함께 인터뷰 방송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평소 접할 수 없었던 정순임 명창의 <구음>을 부탁 드려볼까 합니다. 정순임 명창의 소리와 자장단, 그리고 아쟁에 정경호 씨, 가야금에 정경옥 씨, 이렇게 삼남매 형제분들이 들려 주시겠습니다.
2012.1.9.10:30~17:00.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328-3 정순임 명창 판소리 연구소 ‘취송당 정순임 판소리 연구소’에서. 정순임(소리·장고) 정경호(아쟁) 정경옥(가야금) <구음> 녹음.
노재명: 예, 인간문화재 정순임 명창과 함께 인터뷰 방송을 하고 있는데요. 방금 들으신 곡은 정순임 명창께서 장고를 직접 치시면서 아주 흥겨운 <구음>을 불러 주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렇게 형제분들이 같이 모이셔서 시나위라든지 판소리, 가무악이 어우러지시면 굉장히 흥겹고 재밌으실 거 같습니다.
정순임: 예, 그런데 그렇게 다 또 동생은 서울에 있고 그래도 한번쓱 모이면 인자 이런 무대에서 한번 해보자 그러고 의논도 하고 그렇습니다.
노재명: 예, 현재 71세이시고 일평생 남 잘 되라고 올바로 살자는 의미의 그 열사가 부르시고 나라가 잘 됐으면, 이런 생각도 하시면서 평생 소리를 해오셨는데요. 다른 사람보다 인생과 사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국악계 원로로서 인생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참 좋겠다. 한 말씀 조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순임: 예. 아, 참 거 어려운 문제네요. 어, 인생이라는 것은 참 세상에 나서 어차피 나온 대로 또 다시 돌아가야 되잖습니까. 누구나 부모님 뱃속에서 나와서 자라서 내가 하는 일에 각자 업을 열심히 해가지고 하다 보면은 다시 나왔던 대로 다시 돌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인생이라는 것이 젊었을 때가 가장 모든 것을 성취할 나이거든요. 나이가 더 들기 전에 공부, 젊은 사람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가지고 내 모든 것을 젊었을 때 다 성취를 해야 된다는 거에요. “내일 할께요. 내일 할께요.” 한 것이 내일, 내일, 내일 하다 보면은 어느새 나이가 들어가 버린다 그 말이에요. 그런 것이 안타까우니까 젊었을 적에 아무리 바쁘더라도 내가 할 일은 꼭 해야 된다는 거, 그거 말씀 하고 싶네요.
노재명: 예, 아쉽게도 마칠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요. 앞으로의 소원, 포부, 계획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순임: 저가 인제 경상북도에 앞으로도 더 내 힘이 있는 한 우리 국악의 발전을 위해서 또 우리 국악을 좋아서 배우러 온 사람들한테 열심히 가리키고 하는 차원인데 내 소원 하나는 전수관이 꼭 필요해요. 경주에다가 전수관이 하나 있었으면 그게 내 소원이에요.
노재명: 예, 선생님의 말씀대로 귀중한 소리가 앞으로 잘 전승될 수 있도록 그 소원 이루시길 바라구요. 또 관심 있는 여러 기관, 또 판소리 애호가 여러분이 많이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순임: 또 그리고요 올해는 더 좋은 일이 하나 생겼어요. 장월중선 씨 추모 공연 및 대회를 엽니다. 그래서 그 대회에 장월중선 씨 이름을 대서 대회를 개최하는데 이게 되게 좋게 활성화를 크게 해서 우리 어머님의 그 존함을 좀 세계 만방에 알리는 그런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노재명: 네, 아주 좋은 일입니다. 오늘 선생님과의 방송 신청곡 끝곡으로 좀 부탁 드려봅니다. 남도민요 <육자배기>, <자진육자배기>, <삼산은 반락>, <개고리타령> 이렇게 이어서 청해 볼까 합니다. 정순임 명창과 여동생 되시는 정경옥 씨, 또 정순임 명창의 제자 되시는 윤아람 씨, 정소라 씨, 오영지 씨, 조아라 씨가 함께 불러 주시구요. 가야금에 정경옥 씨, 장고에 정경옥 씨의 아드님 되시는 이규용 씨가 맡아서 이 현장에서 직접 불러 주시겠습니다.
2012.1.9.10:30~17:00.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328-3 정순임 명창 판소리 연구소 ‘취송당 정순임 판소리 연구소’에서. 정순임·정경옥·윤아람·정소라·오영지·조아라 남도민요 <육자배기>, <자진육자배기>, <삼산은 반락>, <개고리타령>(가야금:정경옥, 장고:이규용) 녹음.
노재명: 예, 정순임 명창과 제자분들이 함께 들려주신 남도민요 <육자배기>, <자진육자배기>, <삼산은 반락>, <개고리타령>이었습니다. 여기서 가야금은 정경옥 씨, 장고는 이규용 씨였습니다.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어느덧 마칠 시간이 다 됐습니다. 오늘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 정순임 명창과 함께 했는데요. 숙명처럼 일찍이 판소리 분야에서 외길 인생을 걸어 오셨고 칠십 평생 국악에 헌신한 인간문화재 명창의 말씀을 통해서 아름다운 세상 만들어 보려고 명창들이 수련을 오랫동안 거쳐서 효도, 진실한 사랑 등의 뜻을 전한 판소리의 소중함, 멋스러움을 깊이 있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멋들어진 판소리를 널리 부흥시키고 현재도 왕성하게 전승하고 계신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늘 정순임 명창, 그리고 가족 여러분들, 제자분들, 모두 긴 시간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선생님.
정순임: 네,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우리 국악을 많이 사랑해 주십시오. 우리 국악은 우리가 사랑해야 남이 사랑해 줍니다. 그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재명: 네, 항상 건강하시구요. 무대에서, 방송에서, 음반으로 자주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대 국악계 최고 실력가 예인들과 함께 하는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지금까지 진행에 노재명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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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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