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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 사진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2012년 6월 25일 서울시 강남구 세곡동, 판소리 명창·가야금병창 인간문화재 안숙선 명인 자택에서. 국악방송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프로그램(방송 진행:노재명) 안숙선 명창 녹음 장면.
안숙선 명창 시조창 <태산이 높다 하되>, 설장고 가락(김병섭제), 판소리 적벽가 중 <고당상>, 가야금산조(강태홍류), 살풀이 구음 모습.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프로그램에 출연한 안숙선 명창(왼쪽)과 방송 진행자 노재명 대담 녹음 장면.
* 2012.6.25.09:00~15:00.서울시 강남구 세곡동 안숙선 명창 자택에서 노재명이 안숙선 명창을 인터뷰하고 2012.7.15.18:00~19:30.국악FM방송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진행:노재명)에 방송된 내용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2015년 4월 1일 정리/국악음반박물관 인터넷 홈페이지 http://hearkorea.com 명인실에 발표)
판소리 명창 안숙선 증언 내용
대담ㆍ채록/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안녕하십니까. 노재명입니다. ‘판소리’는 다양한 성음의 표현, 오랫동안 공들인 공력, 다채로운 가락과 장단, 그리고 시대를 앞서 간 1인 다역의 공연 양식 등의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구요,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이자 세계무형문화유산 걸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판소리가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예술성과 가치를 인정받기까지 인생을 바친 명창들의 혼신을 다한 노력이 가장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모실 분은 국내외에서 국악계의 위상을 높이고 판소리를 널리 알리는 데 큰 공로를 세우신 명창이십니다. 국악계의 간판 스타, 이 시대 최고의 명창으로 불리는 안숙선 명창 방송 편을 마련했습니다. 오늘 방송을 위해서 서울시 강남구 세곡동에 있는 안숙선 명창 자택에 국악방송 중계차가 와있습니다. 안숙선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안숙선: 안녕하세요.
노재명: 예, 반갑습니다. 예전에 선생님 신사동에 사실 때 자택에 제가 와보고 여기 세곡동에 처음 왔습니다.
안숙선: 예.
노재명: 와보니까 경치가 아주 아름답습니다.
안숙선: 제가 이 집을 질 때 보시다시피 이 마루를 굉장히 넓게 했잖아요. 또 1층도 마루를 굉장히 넓게 하고 지하에는 한 70평 제 연습실겸 인제 발표장 같은 공간이 또 있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늘 만나서 이 마루에서 소리 공부하고 또 밑에 지하에서도 공부겸 그리구 거기서는 사랑방 음악회 같은 걸 염두에 두고 이 집을 진 거에요. 그러니까 1층은 저희 식구, 시어머님, 그리구 식구들이 살구 인제 여기 2층은 제 남편하고 저하고 또 제 음악 공간이기두 하구요. 상당히 제가 이 무대라는 것이, 무대 생활이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해도 그 안에 들어가 보면은 그 공연장, 공간이나 이런 데가 이 좀, 먼지도 많고 그런 게 많아요. 그래서 제가 늘상 기관지가 안좋아서 소리 하는 데 지장이 있다. 그러니 빨리 좀 숲이 있는 데로 나가서 좀 좋아져야 되지 않겠나. 환경이 좀 문제다. 그래서 졸랐더니 제 남편이 여기다 자리를 잡았어요.
노재명: 예, 요즘 건강은 어떠신가요?
안숙선: 요즘 건강은요, 이제 나이 들어가니까. 사실 이제 그 동안 많이 썼잖아요. 그래서 이제 몸들이 자꾸만 아픈 곳이 많이 생겨나요. 인제 제일 소리를 많이 해서. “인제 많이 그 썼든 곳들을 이제 좀 아껴서 쓰세요.”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시구요. 음악이 좋으니까, 처치해 주셔서 조금 많이 지금은 좋아진 느낌이에요.
노재명: 예, 다행입니다 선생님. 많은 신문, 잡지, 방송에서 선생님의 여러 가지 인생살이 이야기가 많이 공개가 됐습니다. 고향이 전라북도 남원으로 이렇게 알려져 있는데요.
안숙선: 남원군 산동면 대상리 598번지에요.
노재명: 웃점마을로 알려진 곳이죠.
안숙선: 예, 거기가 웃점마을이지요.
노재명: 예, 그 곳에서 태어나셨구요. 외가 분들이라든지 많은 분들이 이 선생님 가문의 국악 명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분들이 유명한 국악인으로 계셨는지 소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안숙선: 예, 제가 남원에서 인제 어릴 적에 늘 뵈었던 분이 강도근 선생님, 강백천 선생님, 그리고 저희 친이모님은 항상 저하고 늘 가까이 살았던 기간이 있었으니까요 강순영.
노재명: 예, 그러면 언급해 주신 강백천 선생님은 대금산조의 인간문화재셨구요.
안숙선: 예.
노재명: 또 강도근 명창께서는 판소리 무형문화재 보유자셨구요.
안숙선: 네.
노재명: 그 다음에 강순영 선생님, 이모님 되시는데 그 선생님께서는 현재 진주에 사시는 가야금산조의 인간문화재시구요.
안숙선: 예.
노재명: 그리고 또 강석춘 씨가 계셨구요 가야금 명인.
안숙선: 그, 네. 강정렬의 그 아버지가 인제 저 바루 친외삼촌이니까요. 또 강산홍, 이런 분들 다 인제 친척들이 되죠.
노재명: 강산홍 씨가 판소리 명창이셨는데 사촌 되시구요.
안숙선: 네.
노재명: 그리고 강옥련, 강초운 씨도 또 명창이신데 사촌 되시구요.
안숙선: 그러니까 강백천 삼촌의 그 따님들이니까 사실 멀지가 않지요.
노재명: 예, 그리고 언급해 강정렬 씨, 가야금 연주자신데 그 분께서도 사촌지간 되시구요.
안숙선: 그 분은 아주 가까운, 외삼촌의 아들이니까.
노재명: 예, 그리고 친동생 되시는 가야금 연주자 안옥선 씨 국악계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부모님께서는 이 예술 활동을 하시는 분들은 아니시구요.
안숙선: 예, 저희 아버님은 전혀 예술 활동한 것을 본 적이 없었구요. 저희 어머니도 그냥 살림만 하셨지 이제 소리를 하거나 소리판에 나가거나 그런 적이 없으신데 저희 아버님은 좀 한량이 아니셨나, 제 기억으로는. 왜냐하면 춘향가 중에서 그 <방자가 춘향이한테 네 그른 내력을 들어를 보아라> 그거를 한 것을 제가 본 적이 있어요. 어떤 그 회갑 잔치에 저의 손목을 잡고 가셨는데 자랑하시고 싶어서 아마 데리고 가셨나 봐요. 그래 가지고 아버님이 먼저 “네 그른 내력을 들어” 이렇게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깜짝 놀랐어요. 그렇게 하시고, “우리 딸인데 우리 딸 소리를 좀 들어봐라.” 그래서 저는 부끄러워서 제가 안하겠다고 안하겠다 하니까 아, 막 자랑스럽게 하라고. 그 때는 “아 그런 거 막 하면 안된다.” 학교, 국민학교 댕길 때도 “아이 그런 거 하지 마라” 친구들이. “너 왜 그런 거 하느냐. 응? 그런 거 하면 나중에 나쁜 길로 풀린다.” 그럴 때였기 때문에 아버지가 제 손을 잡고 거기 가서 그렇게 할 줄은 몰랐지요.
노재명: 예.
안숙선: 그리구 인제 제가 남원 국악원에 나가서 소리 공부해 가지고 오면은 그거를 인제, “한문으로 이게 이렇게 됐는데 이게 지금 오자가 많다. 응? 그러니 이렇게 해라.” 막 그렇게 말씀도 해주시고 그랬든 거 같애요.
노재명: 그러면 어떤 계기로 해서 이 국악에 안숙선 선생님께서 입문을 하게 되셨나요?
안숙선: 그러니까 국민학교 가기 전에는 인제 그 남원 가까운 인제 새마을, 지금 같으면 새말, 새마을, 인제 그 때는 새몰 이렇게 얘기를 하시드라구요. 거기서 인제 어머니는 남원 읍내에 계셨고 저는 그 새몰이라는 데서 외할머니하구 인제 같이 어머니는 인제 그 남원에서 이렇게 장사를 하셨든 거 같애요.
노재명: 예.
안숙선: 인제 학교 들어가면서 남원 읍내로 인제 내려왔지요. 내려왔는데 집이 좁고 그러니까 이모 집에서 제가 많이 있었든 거 같애요.
노재명: 예, 강순영 선생님 댁에요.
안숙선: 예, 예. 이모 집에서 인제 자고 거기서 학교도 가고 하여튼 인제 제가 가야금을 먼저 배웠어요 이모님한테. 이모님이 “풍류 48장이다” 그렇게 얘기하셨든 거 같애요. 풍류 48장에서 인제 상령산부터 이렇게 배워 나갔지요. 인제 그 뒤에 굿거리까지 인제 그렇게 하면서 제가 인제 국악에 들어오게 되구.
노재명: 예.
안숙선: 강도근 선생님의 여동생 되지요 강산홍, 그 분이 인제 저 쪽 남원 그 시장 들어가는 입구에 집이 이렇게 크게 있었어요. 거기에 주광덕 선생님이 거기서 소리 선생으로 계셨어요. 거기 제가 이제 소리 배우러 이모가 이제 얘기해 주셨겠죠. “거기서 소리 배워라.” 그래서 거기서 소리 배우고 그 때 남원국악원은 또 어디 있었냐면은 지금은 광한루가 많이 확장이 돼서 그 형체가 이제 사라졌는데 저희 집에서 이렇게 쭉 광한루 쪽으로 나가자면은 광한루 담이 있어요. 거기가 남원국악원이 있었어요 담 옆에. 그래서 그 국악원에 나가게 된 거지요 제가. 남원국악원에 나가면서 인제 농악 선생님들 모셔다가 농악도 배우고 무용도 배우고 민요도 배우고 소리도 배우고 인제 나가면은. 거기서는 인제 강도근 선생님이 거기 앉으셔 가지고 소리 선생을 하셨구요. 강도근 선생님은 저기 어디 진주네, 이리에 가셨네, 어디 가셨네. 그러니까 주광덕 선생님께 제가 첫 소리를 배웠든 거 같애요.
노재명: 네.
안숙선: 거기서 하다가 남원 동충리 쪽으로 국악원을 옮겼지요. 제가 동충리 국악원까지 다니다가 인제 서울로 올라온 거 같애요. 그러니깐 제 그 음악의 기초를 그 남원국악원에서 거의 다진 셈이지요.
노재명: 예, 그러면 이모님 되시는 강순영 선생님한테 가야금풍류 48장.
안숙선: 그리고 인제 산조를 또 배우고.
노재명: 그리고 가야금산조, 병창 배우셨구요.
안숙선: 산조도 배우고 병창은 그 때는 그렇게 곡목이 많지가 않았어요. 많지가 않아서 한 몇가지, <객래문아 흥망사>니 그런 거 조금 배우고. 그 때는 곡목이 많지가 않으니까 공연할 때는 그냥 판소리 배운 것을 즉흥으로 무대에서 그냥 제가 얹어 가지고 하기도 하고 그랬든 거 같애요.
노재명: 아, 재능이 있으셔 가지고 판소리를 바로 그냥 병창으로 이렇게 변형하셔 가지고.
안숙선: 그렇죠. 공연 때 하긴 해야 되겠고 하하 그러니까 뭐 <사랑가>니 이런 거 조금씩 민요도 더러 올려서 하기도 하고 그랬든 거 같애요.
노재명: 그리고 그 이모님한테 또 무용도 배우셨구요.
안숙선: 그 때 인제 <진주 검무>, <승무>, 또 <살풀이>, 그리고 시조, 이런 것들을 배웠죠. 소리, 판소리도 배우고.
노재명: 예. 그러면 그 남원국악원에서 국악을 알려주신 분들, 누구 누구 그 때 사범으로 계셨나요?
안숙선: 아, 그 때 최용호, 그 원장님께서 남원국악원 원장님을 하셨어요 그 때. 그 바로 국악원 옆이 전북일보 남원지국 그 사무손데 그리로 데리고 가서 김소희 선생님 판을 틀어 주시드라구요. 엘피(LP) 판이죠 그러니까. 그래서 <범피중류>, 그런 대목을 들려 주시면서, “소리가 참 아정하고 절제의 미가 있고 소리를 귀하게 하신다. 이 분 소리를 잘 들어봐라.” 이렇게 하하, 그 들려 주시고는 또 그 때 용돈 주시면서 “열심히 해라.” 그리구 이제 꼭 시조 선생님 오셔서 시조를 인제 남창 지름, 여창 지름, 평시조, 뭐 그 때 다 배운 거죠.
노재명: 예.
안숙선: 가면은 인제 뭐 실용적인 한문을 가르쳐 주셨어요. 그런 거 보면 그 굉장히 애정을 가지고 우리 그 학원생들을 길러냈지 않나. 근데 그 학원생은 많지가 않았고 제 동생 옥선이하고 인제 학교 갔다 오면은 거기서 매회 소리하고 밤 한 9시, 이렇게 달이 둥실 떠있는데 너무 너무 무서워 가지고 막 소리를 하고 갔던 기억이 나거든요, 남원 한번씩 가면.
노재명: 네, 그렇게 원장님 한문도 알려 주시고 용돈도 주시고 용기를 주셨던 그런 분들이 오늘날의 안숙선 선생님이 이렇게 크게 될 수 있는 아마 원천이 됐다 하는 생각이 들구요.
안숙선: 예, “이렇게 김소희 선생님처럼, 이화중선 씨처럼 그렇게 돼야 된다.” 그 원장님께서 정말 많이 이렇게 이끌어 주셨든 거 같애요.
노재명: 예, 평생에 아주 은인이신 걸로.
안숙선: 예, 제가 지금 생각하니까 저 잊어서는 안될 어른인 거 같애요.
노재명: 그러면 그 농악은 어느 분께서 가르쳐 주셨나요?
안숙선: 농악은 이제 그 남원국악원에서 처음으로 남원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음, 여성들의 인제 경연대회, 민속경연대회, 타이틀이 그런 것 같앴어요. 그런 데 올라올려고 우리 남원국악원에서도 팀을 하나 만들자 했든 거 같애요.
노재명: 예.
안숙선: 그런데 이 다 소리꾼들이 했으니까. 소리꾼들이 하고 무용 하는 사람들이 다 했기 때문에. 짚신 있잖아요. 예쁜 짚신, 거기에다가 빨강 파랑 노랑으로 인제 색을 놔서 아주 상당히 고급스런 옷들을 또 입구요. 이제 기능적이 아닌 어떤 예술적인 남원의 멋을 나타내는 그런. 그래 가지구 뭐 거기서 이제 농악을 배웠는데 그 때에 “여성 농악은 남원이 시초다.” 그렇게 제가 어릴 때 하하.
노재명: 예.
안숙선: 저는 인제 끝장고를 쳤는데 오갑순 언니, 오경자, 오갑순 언니 동생, 그 언니들이 앞장고를 하고 제가 맨마지막 장고를 했어요. 근데 강백천, 그 삼촌이 저한테, “상모 돌려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거를 얼마나 연습을 해 가지고 저는 인제 상모를 돌리면서 장고를 치고 갑순 언니하고 경자 언니는 “아, 난 이 상모 돌리는 건 정말 멋대구리 없고 남자들 같고 싯다 구성 없다.” 하하하하하하. 그래 가지구 저는 이거 돌리고. 이게 얼마나, 얼마나 이 발랜스가 안맞느냐구요 서로. 근데 기필코 강백천 그 어른은 하라는 거에요. 그래 가지고 제가 이렇게 돌리다가 그 언니들 이쁘게 화장한 델 확 친다거나 그러면, 흐하하하하하하하. 그러고 막 돌리면은 “잘한다” 하잖아요. 그러면은 인제 “아이, 제발 너 그것 좀 쓰지 마라 응?” 인제 흐하하하하. “숙선아 제발 쓰지 말라고.” 막 그러는데 한쪽에서는 쓰라 하고 한쪽에선 쓰지 말라 하고 아이고 나도. 어른이 쓰라 하면 그 때는 써야 되죠. 아무튼 그렇게 됐어요. 갑순 언니가 스타였잖아요.
노재명: 예, 오갑순 씨요.
안숙선: 오갑순 언니.
노재명: 여성 농악하고 병창으로 아주 유명하셨던 그런 명인이십니다.
안숙선: 네. 으, 동충리로 갔을 때 전사종.
노재명: 전사종, 전사섭 그 형제분들.
안숙선: 그렇지요. 전사종, 그리고 정오동, 이런 분들이 와 가지고 우리를 인제 팔채니 뭐 칠채니 뭐 그런 거 호호굿이니 뭐니, 거기서 인제 열두발도 막 가르쳤고 남원국악원에서 우리가 다 배운 거죠.
노재명: 예, 그 때가 여성 농악이 한참 유행한 그 1950년대, 60년대.
안숙선: 그렇지요.
노재명: 그 시절이구요. 그러구 시조 아까 배우신 말씀해 주셨는데 그 시조가 선생님의 성악에 아주 중요한 기초가 됐다고 생각이 되는데.
안숙선: 네.
노재명: 혹시 기억이 나시면, 저희가 선생님 평소에 판소리라든지 병창 많이 접했지만 선생님의 시조창은 어떨까 궁금합니다. 그래서 평시조 한수라도 좀 부탁을 드릴 수가 있을까요?
안숙선: 하하하하. 근데 잊어 버렸어요. 다 잊어 버렸는데 지금 이 시조 하면은 우리는 정가, 그것이 시조로 모두 알고 있잖아요. 근데 우리 시조 배울 때는 그렇게 이쁜 소리 내는 거보다는 그냥 원래 성음으로 투박하게 내요. “태산~” 이렇게 내요.
2012.6.25.09:00~15:00.서울시 강남구 세곡동 안숙선 명창 자택. 안숙선 시조창 <태산이 높다 하되> 녹음.
안숙선: 이것이 평시조 흐하하.
노재명: 아, 대단히 감사합니다 선생님. 오늘 안숙선 선생님의 시조창 <태산이 높다 하되> 저희가 오늘 처음 접해 본 거 같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시조창이 결국에는 판소리 춘향가 가운데 시창, 그런 거 할 때 많이 도움이 되셨을 거 같습니다.
안숙선: 그렇지요, 네.
노재명: 그러면 요즘도 시조창이나 그런 설장고를 가끔 이렇게 해보시는 때가 있으신가요?
안숙선: 그래서 제가 설장고를 한번 쳐 보고 싶어 가지고 제 제자한테 장고를 좀 자그마한 거를 하나 사오너라. 한번 메고 지하에서 한번 쳐 볼려고. 서울에 맨처음에 올라올 때만 해도 제가 장고 치는 실력을 아시는 분들이 인제 계셨어요. 어른들 따라다닐 때는 ‘천재 소녀 안숙선’ 그랬거든요. 하하하하, 장고 잘 친다고.
노재명: 예, 그러면은 지금 그 지하에 제자분이 갖다 주신 장고는 있으시구요?
안숙선: 장고 있어요. 장고도 있구 제가 <승무>두 한번 쳐 볼라구 북 갖다 놨는데 그것도 안치면 이게 돌아가지가 않드라구요.
노재명: 예.
안숙선: 한번 쳐 봐야겠어요.
노재명: 예, 저희가 한 15년 전쯤에 안숙선 선생님 특별 공연 때 김덕수 씨께서 장고 쳐 주시고 안숙선 선생님께서 소고춤 그렇게 하시는 공연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혹시 가능하시면 오늘 그 설장고 가락을 앉어서 잠깐 시범을 어떻게 안될까요?
안숙선: 아, 그게 안나올텐데 흐하하하하하. 글쎄 나올라나 모르겠네요.
노재명: 앉아서 이렇게 잠깐만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안숙선: 예.
2012.6.25.09:00~15:00.서울시 강남구 세곡동 안숙선 명창 자택. 안숙선 설장고 가락(김병섭제) 연주 녹음.
노재명: 예, 대단히 감사합니다. 예전에 10대 때 해 보시고 오늘 해 보시는 게 몇 십년만에 아마 하신 거 같습니다.
안숙선: 이거 할 시간이 없드라구요. 근데 인제 국제관광공사 워커힐, 거기서 인제 제가 계속 아르바이트겸 거기를 꽤 오래 나갔거든요. 서울 생활 할랴니까, 하하. 월급 받는 곳이 좀 있어야 하니까. 그 때 이제 제가 무대에서 좀 했든 거 같애요. 그 뒤로는 한 적이 없었죠. 창극 할 때는 제가 꼭 단골로 장고 메고 창극 속에 뭐 인제 뭐 남사당이라든가, 사물놀이 하는 부분을 많이 담당했었죠. 근데 아까 강백천 선생님은 대금 문화재라고 알고 계시잖아요. 근데 소리도 잘하세요.
노재명: 아, 그러세요?
안숙선: 그쪽으로 제가 공부를 좀 댕겼었어요.
노재명: 강백천 선생님한테요?
안숙선: 예, 그래서 인제 심청가를 좀 배웠든 거 같애요. 그래서 심봉사가 목욕하고 나와서 인제 옷 잊어 버리고, “추월~” 이런 데, 근데 그 어른하고 함께 공연을 많이 댕겼는데 근데 대금 소리가 그냥 “띠리리 루디~” 이런 게 아니라 “띠히리~” 이렇게 이, 이 울림이 끝없이 “띠히리 뚜리 띠 리히리 띠리~” 이렇게 대금을 부세요. 그래서 소리 성음도 “적선지가으 필유여경이라 허였으니 태수장 덕택으 살려주~” 이렇게 소리가 막 살아서 움직이듯이, 제가 이 대목을 배웠었어요. 그러면서 “아, 소리하는 사람 많지만 내 소리만한 또 소리가 없네.” 흐하하하하하. 이렇게 하시면서.
노재명: 하하하하하.
안숙선: 이런 멋있는 그렇게 인제 많이 배우고 아, 참 대단한 예인이셨던 거 같애요, 지금 생각하면. 줄 타는 것두 저도 줄 위에 좀 올라가 봤거든요. 흐하하. 좀 해 보긴 했는데 저는 줄타기는 못했구요. 줄도 그 할아버지가 다 가르치더라구요.
노재명: 강백천 선생님이요?
안숙선: 네, 다 가르쳐 가지구 줄 태웠고 저는 인제 줄 타는 데 제가 음악을 하고 항상 그랬거든요. 그런 것 보면은 종합적인 참 대단한 멋쟁이셨다. 그래서 어디 공연 다니실 때도요 아무 옷이나 입고 다니는 게 아니라 하얀 모시로 이렇게 아래 우, 여기 위에다 마고자, 이렇게 입고 다니시고 어디 갈 땐 거의 하얀 모시 두루마기를 그걸 집에서 다 푸세를 해 주셔요. 그러니깐은 우리 어머니랑 뒤에서 소곤소곤 해쌌는 말을 들어보면, “천하의 멋쟁이는 강백천이다. 강백천을 할래, 군수를 할래 그러면은 강백천을 한다구” 흐하하하하하.
노재명: 하하하하하.
안숙선: 옛날에 다들 그런다구. 어찌나 호사도 잘하시고 이 멋을 아니까. 하하하하. 모자 쓰고 길을 걸어갈 때도 팔자 걸음으로 뭐 뛰거나 그런 것도 없으시고요.
노재명: 예, 그 강백천 선생님께서는 안숙선 선생님의 집안 어르신데요 그 분께서 줄타기도 가르쳐 주시고 소리도 가르쳐 주시고, 그리고 외삼촌 되시는 강도근 선생님한테 또 판소리를 배우셨는데요. 몇 살 때부터 그 선생님한테 배우셨나요?
안숙선: 네, 강도근 선생님한테는 한 열 두서너살 먹어서부터 주광덕 선생님 돌아가시고 그 때부터 배웠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그 선생님에게는 인제 주로 수궁가나 적벽가, 그리고 흥보가. 흥보가는 인제 거의 제가 다 배웠구요. 대목 위주로, 재밌고 애들이 좋아할 수 있는 대목.
노재명: 눈대목 위주로 알려 주셨구요.
안숙선: 예, 그렇게 인제 하고 제가 어릴 적에 흥보가는 다 배웠는데 86~7년도로 아마 제가 기억이 되는데 남원에 가서 강도근 선생님에게 다시 한번 흥보가를 한번 쭉 깨꼈구요.
노재명: 그리고 이제 궁금한 것이 강도근 선생님의 여러 소리가 수궁가, 흥보가, 이렇게 음반도 나오고 공연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그 단가 중에서 “젊어 청춘 좋은 그 때~” 하는 그 <백발가>요, 그게 그 기록이 잘 안되어 있는데요. 혹시 그 때 그 단가도 배우셨나요?
안숙선: 인제 선생님께서 저하고 같이 공연을 다니면은 제가 꼭 북을 쳐드려야 됐어요. 북 칠 만한 사람이 마땅히 없으니까. 그래서 제가 늘상, 선생님이 하실라면 “젊어 청춘~”
2012.6.25.09:00~15:00.서울시 강남구 세곡동 안숙선 명창 자택. 안숙선 단가 <백발가>(젊어 청춘, 강도근제, 무반주) 녹음.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판소리 명창이자 가야금병창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인 안숙선 명창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남원에서 여러 선생님들한테 국악의 기초를 확실하게 다 배우신 다음에 이제 서울로 올라오셨는데요, 몇 살 때쯤이신가요?
안숙선: 김소희 선생님께서 제게 전화를 한번 하셨는데 그거는 이제 아마 선생님께서 삼천리가무단을 만들어서 유럽, 이렇게 순회 공연을 하겠다 그렇게 해서 제가 올라와서 선생님을 뵈었던 걸로 기억이 되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마 20대 초반이나 19세 때 후반이나 올라와서 저는 단성사 뒤에다가 방을 하나 얻어 놓고, 거기서 보길동으로 쭉 걸어 올라가면 만정 선생님 연구소에요. 그 길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우리 선생님께 소리하구 선생님 따라서 공연두 하구 그랬던 것이 바로 그 종로 봉익동이라는 데고 저는 단성사 뒤에 살았구요.
노재명: 예, 그렇게 만정 김소희 선생님한테 약 한 스무살 무렵서부터 판소리를 배우셨구요. 만정 선생님한테 그러면 심청가, 흥보가, 그리고 춘향가도 배우셨죠?
안숙선: 처음에는 흥보가를 배웠구요, 단가 하구요. 인제 제가 춘향가를 배웠구요. 심청가를 인제 앞부분부터 배웠구요, 끝까지 다 떼지를 못했어요. 그 대신에 뭐 민요라거나 이런 것들 선생님께 많이 배운 것두 이제 많죠. 제가 만정 선생님에게 소리를 배우면서 느낀 거는 “소리꾼이기보다 사람이 먼저 돼라.”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에, 만정 선생님이 평생을 소리하는 사람으로서의 막중한 책임을 느끼구 사셨던 거 같애요.
노재명: 예.
안숙선: 그래서 주의 사항이 참 많으셨어요, 가서 앉어있는 그 자세에서부터. 어떨 때는 좀 피곤하고 그러면 아이고 다리가 아파 죽겠다, 다리 펴고 그러면은 “음, 그렇게 선생님 앞에서 다리를 펴는 게 아니다. 니가 선생님 앞에서 이렇게 앉을 때 남 앞에 어떻게 앉겠느냐. 시간 똑바로 잘 지켜라. 소리하는 사람은 남 앞에서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이렇게 해야 됩니다라고 하면서 니 스스로가 그렇게 도달하지 않으면은 그거는 안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선생님 앞에 가면 늘 좀 어렵고 주눅이 들고 몸이 좀 하하하하, 자유스럽지 못하고 그랬든 거 같은데 참 인정이 있으셨든 것이 어려운 일을 보시면 참지 못하시고, 꼭 가면은 뭐 과일이라도 이렇게 싸서 “시어머님 갖다 드려라” 한다거나 또 제가 몸이 아프면 “나랑 같이 한약방에 가자.” 뭐 물론 다른 제자분들에게도 다 그러셨겠지만은, 종로5가에 거기 데려 가셔서 약을 짓고 제가 또 바빠서 안가면 “그럼 내가 거기 가서 약을 지어다 놓을께 와서 가져 가거라.” 잊어 먹고 인제 안가면은 인자 정말 대노하세요. 화를 내세요. “이렇게 남의 세정을 그렇게 한마디로 그냥 꺾어 버리듯이 모른 체 하면 그게 어디 인간인가.”
노재명: 예.
안숙선: 하하. 그래서 아주 유명한 어록이 계세요. 제가 바빠서 막 선생님한테 못가 뵙고 전화만 그냥 드리자면 너무 죄송하고 가서 뵈면서 잘못했습니다 해야 되는데 그러다 보면 자꾸 시간이 흘러가서 인제 못가고 있었는데 전화를 하셨어요. “여보세요” 하니까 “나 김소희다.” 흐하하하하. 그래요. 흐하하하.
노재명: 하하하하하.
안숙선: “그 동안 기체 평안하셨습니까?”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아우 너무 죄송해 가지구 다른 일 제백사하고 달려갔던 적이 있는데요. 망나니처럼 뛰놀다가도 선생님 앞에만 가면은 이렇게 순한 양처럼 음, 이렇게 되어지는 것도 선생님의 가지고 계신 선생님의 깊은 생각을 제가 어렴풋이나마 짐작을 허고 그랬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구요. 인제 가신 뒤에 저 혼자 이렇게 음악도 하고 사회 생활도 할라고 하니까 정말 선생님들 말씀 맞다나 굽이굽이, 때때로 선생님 생각이 너무 많이 나구 참 어깨가 무거워지지요.
노재명: 예, 그렇게 만정 김소희 선생님께서 따뜻한 사랑도 많이 베풀어 주시고 그 일거수일투족을 잘 이렇게 지도를 해주셨던 거 같습니다. 그렇게 은사님, 김소희 선생님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안숙선 선생님을 큰 인물이 되기까지 많이 도와 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잠깐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임권택 선생님 인터뷰 말씀을 듣고 또 다음 순서 이어갈까 합니다.
임권택: 예, 안녕하세요. 임권택 감독입니다. 판소리에 대한 매력을 얘기 허라면은 들어서 무조건 좋은 거에요. 이 땅에서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한테는 이 땅에서 불리고 있는 우리 판소리라는 그 소리 자체가 나와 떨어질 수 없는 그런 관계에 있는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좋은 거에요, 판소리는. 1986년도 어, ‘씨받이’라는 영환데 <구음>이 필요했다고. <구음> 그거를 인제 안숙선 선생의 그 <구음>을 썼는데 안숙선 선생의 그 <구음>에 내가 아주 홀딱 빠졌다고 할까. 내가 좋아하는 음색이 있는 거에요, 음색. 또 인제 아주 결정적으로 큰 도움을 받게 된 거는 ‘서편제’, 안숙선 선생의 소리를 마지막 음악으로 삼은 거에요. 소리꾼으로 살아간다는 점에서 정말 무섭게 열심히 살아내고 평소의 삶이 그 판소리를 연마하는 데 평생을 그런 노력으로 일관해서 사신 분. 뵈면서 지금까지 명창으로 불리면서도 조금도 게으름이 없이 그 가냘픈 몸으로 지금도 그런 수준을 유지허고 계시는 것을 늘 신기해 허고 소리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안 선생님을 사랑허고. 앞으로도 모쪼록 건강도 주의허시고 행복헌 소리꾼으로서 백살 넘어서, 뭐 이백살까지도 우리 소리를 우리 민족에게 잘 전해 주시는 그런 행복헌 생을 살아내시길 기원헙니다.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서울시 강남구 세곡동에 있는 안숙선 명창 자택에서 판소리 명창이자 가야금병창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인 안숙선 명창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만정 김소희 선생님하고 또 많이 아껴 주셨던 분이 가야금병창 가르쳐 주신 박귀희 선생님 생각이 또 납니다. 박귀희 선생님은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안숙선: 어, 워커힐이라는 거기를 좀 다니면서 제 체력이 좀 한계가 있어서 굉장히 몸이 좀 아플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의사 선생님께서, "조금 나아지면 하면 어떻겠느냐." 그래서 가만히 아무 것도 안하고, 공부를 안하고 있기에는 불안하고 그래서 아, 병창을 좀 레파토리를 좀 많이 가서 배워 봐야겠다. 그러구 인제 그 향사 선생님 찾아갔는데 좀 잘하면은 좋은 병창을 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러시더니 그 때는 무형문화재제도가 전수생을 두 명을 둘 수 있었어요. 그 전수생으로 저를 등록을 시키셨어요.
노재명: 네.
안숙선: 그리고 많은 학습을 시키셨어요. 늘 제 손목을 이렇게 잡고 댕기셨었잖아요. 어디를 가시더라도 제 손목을 잡고 충무로에서부터 을지로, 청계천, 그리고 운당여관까지 가서, 가면은 며느리가 계시거든요. "아가! 숙선이가 왔으니까 빨리 겸상 차려라." 해서 인제 이런 그 시간들이 참 많았어요, 선생님하고 같이 댕기는.
노재명: 예.
안숙선: 선생님이 저에게 걸었던 기대를 다 한마디로 말씀 드릴 수는 없을 거 같애요. 근데 선생님께서 오랜 시간 지나고 나서 돌아가시기 2~3년 전에 좀 건강에 이상이 있으시지 않나 생각이 들 때에, 제가 그 때는 한참 판소리 오바탕을 다 배우고 창극 주역으로 활약을 막 할 때였는데요. 선생님께 늘 곁에 있어야 되는데 다른 쪽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는 이것을 선생님이 얼마나 힘들어 하셨을까를 이제 제가 돌아가신 뒤에야 생각을 하게 되요. 에, 그래서 선생님께서 전화 하셔 가지구 "안바쁘면 빨리 좀 오세요"라든가, "아니 내가 죽어도 모르겠어요." 흐하하하하. 이렇게 하신다거나. 하하하. "아니 어디가 편찮으세요?" "좀 오세요." 그래서 하하하, 가서 뵈면은 그렇게 많이 아프신 거보다는 자꾸 저를 오게 할려고.
노재명: 보고 싶으셔서 이제.
안숙선: 또 하나, 제가 선생님 곁을 자꾸 제가 떠나서 창극 활동하고 판소리 완창하고 이런 데 거의 시간을 다 보냈으니까 선생님께서는, "오세요. 오세요. 그리고 무슨 공연이 있는데 빨리 연습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도 너무 그 부분이 흐하하하, 제가 가슴이 너무 미어지듯이 아프구요. 그걸 생각해서 제가 아, 돌아가셨지만 선생님 곁을 떠나면 안되겠다. 판소리의 길을 가면서도 제가 병창을 열심히 해서 좀 기쁘게 그렇게 해드려야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노재명: 예, 그래서 본래 판소리 명창이신데 지금 말씀해 주신대로 박귀희 선생님께서 워낙 아끼시고 애정을 가지셨기 때문에 그 박귀희 명인이 보유하셨던 가야금병창 분야의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활동을 하고 계시구요. 그래서 만정 김소희 선생님하고 향사 박귀희 선생님, 두 분의 사랑을 각별히 받으셨는데요. 중간에 끼셔 가지고 어떻게 보면 좀 힘든 부분도 많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안숙선: 네, 제가 사실 하나만 하기에도 전 일생을 다 걸어도 모자란데 어떻게 해서 제 운명이 그런 것을 어, 잠 안자고 더 열심히 해야 되지 않나 그렇게 생각을 하구요. 두 분이 참 친하게 지내셨는데 역시 제자들이나 이런 것이 끼면은 감정들이 또 나오시는 모양이에요. 향사 선생님에게 가면은 만정 형님은 다 좋은데 이런 게 나쁘다 하고 흐하하하, 인제 흉을 보세요. 그럼 인제 제가 그 흉을 갖다가 그대로 전해 드리면 두 분의 아주 오랜 지기 같은, 그리고 국악계의 두 분이 뭉쳐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을 하고 계신 두 분에게 깨어지는 이런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기 때문에 제가 항상 들어도 못들은 척. 삭 들어가서는 아, 선생님께서 선생님 건강을 염려하신다고 그러면 "그러지?" 이렇게 인제. 또 저쪽에 가서는 또 좋은 얘기만 인제 해드려요.
노재명: 네.
안숙선: 해드리는데 제가 언젠가 한번 향사 선생님께서 아주 정말 인제 건강이 많이 점점점점점점점 나빠지실 때 그래서 "선생님 좀 멀리 좋은 산천경개 좋은 곳에 가셔서 좀 쉬시지요." 그랬더니 "아이고 가고 싶지도 않고 니가 어디 데려간다면 내가 가꾸마." 그러세요. 그래서 제가 아무리 바빠도 선생님 모시고 가야 되겠다. 그래서 "그러면 저 포천인가를 너무 너무 물이 맑고 공해에 시달림이 없이 너무 깨끗한 데가 있는데 거기 한번 가보시겠어요?" 그러니까 "니가 가자고 하면 가지." 그래 가지고 인제 근데 인제 만정한테 제가 간 거에요. 공부하러 가서 "향사 선생님하고 이렇게 가기로 했는데요." 했더니 "아 그런 데 가면 좋겠다." 그러시는 거에요. 그래서 "아, 그러면 선생님 두 분이 가시면 좋잖아요." 제가 그랬지요. 그랬더니 "그러자." 그러셨거든요. 향사 선생님께 와 가지고 "선생님! 만정 선생님도 모시고 갔으면 어때요?" 그랬더니 "마, 선생은 나중에 가고 우리끼리 가자." 그러시는 거에요. 하하하.
노재명: 하하하하.
안숙선: 그래서 만정 선생님께 "선생님! 선생님 나중에 가시죠, 선생님." 그랬더니 "그래라. 향사하고 잘 놀다 오너라." 그러시는 거에요. 아이구 근데 제가 아이 뭐, 얘기를 하자면 참 긴데요. 그래 인제 나중에 만정 선생님을 인제 화가 나셨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한번 모셨어요, 제가. 중국집이 있는데 토종닭 선생님하고 같이 이렇게 맛있게 먹고 있는데 저 문이 다 보여요, 이렇게. 중국집에 가면 덜렁덜렁 이렇게 구슬 같은 거 내려온 거 있죠? 먹다가 딱 이렇게 보니깐 아, 향사 선생님이 딱 들어오시는 거에요. 그래서 선생님이 이 또 충격받으실까 봐서 제가 고개를 푹 숙여 버렸거든요. 고개를 숙였어요.
노재명: 하하하하하하.
안숙선: 만정 선생님이 "왜 그러냐구?" 그래서 "향사 선생님이 들어오세요." 그랬드니.
노재명: 흐하하하하하.
안숙선: 하하하하하, 선생님도 고개를. 하하하하. 너무 너무 마음이 무겁게 온 거에요. 향사 선생님한테 제가 살짝 가봤어요. 그랬더니 "마, 니가 손님하고 밥을 먹고 있데." 이러시는 거에요.
노재명: 하하하하하.
안숙선: 그런데 또 만정하고는 전화를 해가지고 또 뭐라고 했냐면은 "형님! 형님만 숙선이하고 둘이 밥을 먹고 있는 걸 내가 봤습니다." 푸하하하하.
노재명: 하하하하하.
안숙선: 하하하, 아이 그래서 인제 만정 선생님이 "아, 동생 그러면 아, 같이 자리를 오지 그랬나, 응?"
노재명: 하하하하하.
안숙선: 그랬다니까. "형님하고 뭐 긴한 얘기가 있는가 싶어서 그랬습니다." 근데 그러구 정말 얼마 안지나서 돌아가셨거든요.
노재명: 아이고.
안숙선: 그래서 그게 너무 너무 너무 가슴이 아퍼 가지고 그냥 모른 척하고 "선생님!" 가서 이렇게 모시고 왔드라면 좋았을 것을. 저는 인제 선생님이 충격을 받으실까 봐서 선생님이 아주 그 질투가 많으세요. 하하하하하. 암튼 뭐, 이야기를 하자면 여러 가지 일들이 참 많았지요. 지금 생각하니까 그게 새록새록 생각이 나면서 제가 좀 살갑게 평소에도 "선생님!" 하고 가서 이렇게 해드리면 좋은데. "숙선아! 니는 마, 그렇게 무뚝뚝하나?" 인제 그렇게.
노재명: 그래서 보통 예전에 그런 대가 선생님들 모시기가 힘들어서 중도에 작파한 분들도 많으시고. 그래서 그렇게 여러 선생님들을 모시고 지혜롭게 아마 안숙선 선생님처럼 그렇게 배운 분이 드물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숙선: 그런데 정광수 선생님에게도 가서 수궁가도 배웠죠. 박봉술 선생에게도 배웠죠. 또 무슨 좋은 선생님만 계시면 다 가서 막 배운다고 난리를 치고 했기 때문에 제가 선생님들께는 정말 죄송스러워요. 제 욕심만 너무 부려서요.
노재명: 예, 그리고 가야금산조를 또 함동정월 선생님, 원옥화 선생님, 또 김죽파 선생님, 그렇게 가야금산조, 아까 강순영 선생님한테도 또 산조를 배우셨구요.
안숙선: 네, 네.
노재명: 음반에 보면은 선생님이 강태홍류 가야금산조 이렇게 녹음하신 음반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강태홍류는 원옥화 선생님한테 배우신 건가요?
안숙선: 강태홍류는 제가 먼저 김일구 선생님에게 강태홍류를 다 배우고 원옥화 선생님께 이제 제가 다시 강태홍류를 다시 깎인 거죠.
노재명: 예, 그러면 여기서 잠깐 그 강태홍류 가야금산조를 이 현장에서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2012.6.25.09:00~15:00.서울시 강남구 세곡동 안숙선 명창 자택. 안숙선 가야금산조(강태홍류, 무반주) 녹음.
안숙선: 잘 안되네요. 하하. 이 강태홍류 산조가 묵직하고 탈수록 좋은 거 같애요.
노재명: 예, 굉장히 남성적이고 변화무쌍한 그런 산조로.
안숙선: 약간은 정악적인 맛도 나면서 좋은 거 같애요.
노재명: 안숙선 선생님께서 많은 선생님들한테 가무악을 두루 섭렵을 하셨는데요. 적벽가 같은 경우는 정광수 선생님한테 <삼고초려>라든지 일부분을 배우셨구요.
안숙선: 네.
노재명: 나머지는 박봉술 선생님한테 배우셨지요?
안숙선: 강도근 선생님께 활 쏘고 불 지르는 대목 제가 다 배웠지요.
노재명: 아, 강도근 선생님한테도 배우시구요.
안숙선: 예, <새타령> 이런 거 다 배웠지요. 그리고 인제 박봉술 선생님에게 다시 전바탕을 배운 거지요. 참 공부하는 데 운이 따랐던 거 같애요.
노재명: 그래서 제 기억으로는 안숙선 선생님께서 1986년, 1992년, 2000년도, 그리고 2005년도, 이렇게 적벽가를 완창을 많이 발표를 하셨습니다.
안숙선: 네.
노재명: 특히 1980년대, 1990년대 공연하실 때 그 당시에 박봉술 선생님 말씀이 조카님한테 그런 말씀 하셨어요. “안숙선 씨가 참 소리를 잘한다. 야무지다.” 아, 그래서 조카한테도 “자네 꼭 가서 그 공연을 보라”고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안숙선: 네.
노재명: 그래서 저는 안숙선 선생님의 오바탕 판소리 중에서도 적벽가가 가장 듣기가 좋고 이 현장에서도 부탁드리고 싶은 판소리가 그 적벽가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안숙선: 흐하하하하하.
노재명: 그래서 혹시 가능하시면 적벽가 <새타령>이라든지 좀 한 대목 부탁을 드려봅니다.
안숙선: 네.
2012.6.25.09:00~15:00.서울시 강남구 세곡동 안숙선 명창 자택. 안숙선(소리·북) 판소리 적벽가 중 <고당상> 녹음.
안숙선: 목이 안풀려서 잘 안되네.
노재명: 네, 대단히 감사합니다. 판소리 적벽가 가운데 <고당상>이라고 하는 군사가 그 부모를 생각하는 그런 대목이었는데요. 안숙선 명창의 소리와 북 장단으로 감상을 해봤습니다. 안숙선 선생님께서는 판소리가 세계무형문화유산 걸작으로 지정이 되던 2003년도에 완창을 1년에 1번 하기도 힘들다고 하는 건데 무려 3번을 그 당시에 완창을 하셨습니다.
안숙선: 흐하하하, 네.
노재명: 아, 그리고 국립국악원 원장을 지내셨던 한명희 선생님께서 유럽에서 안숙선 선생님의 판소리 공연을 기획하셨을 때 막 매진 사태가 벌어지고 반응이 엄청났는데요. 외국에서 이 판소리 했을 때 반응이 어땠는지 그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안숙선: 네, 프랑스 가면 한명희 선생님께서 그 때 기획을 하셨던 기메박물관에서 했던 그 기메박물관장님이 판소리 하는 내내 눈물을 닦으셨답니다. 많이 우셨대요. 근데 그 판소리가 다 아시겠지만은 우리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삶의 소리잖아요. 즐겁고 기쁘고 슬프고 또 분노하고 이런 거를 하기 땜에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나가 다 판소리의 소리 색깔로 다 알아 듣는다는 거지요. 그래서 아마 언어가 필요하겠지만 그냥 소리만 듣고도 우리는 알 수 있다라고 늘 기억이 나죠.
노재명: 예, 그렇게 해서 프랑스에서는 훈장도 받으신 바가 있으시구요.
안숙선: 네.
노재명: 아마도 안숙선 선생님의 풍부한 성음, 아주 단단한 학습, 쉬지 않고 노력하시는 그 공력, 그리고 아주 고운 자태의 인물, 그리고 아주 뛰어난 연기력이 그러한 훌륭한 호소력을 발휘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잠깐 예전에 박귀희 선생님한테 동문 수학 같이 하셨던 김성녀 명인 인터뷰를 듣고 다음 말씀 이어갈까 합니다.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인 김성녀 씨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김성녀: 안녕하세요. 국립창극단의 예술감독으로 있는 김성녀입니다. 안숙선 선생은 제가 그 가야금병창 박귀희 선생님 제자로 입문할 때, 그 때 선배님으로 처음 만났죠. 자기 일을 굉장히 그 완벽하게 하는 사람이에요. 재능두 있구 뛰어난 감각두 있으시지만 안주하지 않구 열심히 연습으로서 말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자나 깨나 불조심이 아니라, 자나 깨나 연습하시는 선배로 기억이 납니다. 뭐 제가 어디 가서 놀고 있으면, “성녀야 와서 연습해!” 뭐 이렇게 흐하하하. 그런 존경할 수 있는 선배라고 생각이 됩니다. 평상시두 늘 소리가 자기의 생명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제가 보면 조금 멋두 부리구 좀 가꾸구 소리 외에 다른 일두 좀 즐길 줄 알구 이렇게 삶을 좀 크게 봤으면 좋겠는데, 이런 장인들의 그 차이는 하나에 푹 빠져서 그것밖에 모른다는 거. 그게 장점이자 또 단점이 될 수도 있다구 생각이 들어요. 이제 많이 늙었어요, 서루. 흐하하하하하. 서로 많이 늙었기 때문에 끝까지 소리 욕심으로 완성을 위해서 쭉 가는 모습이 존경스럽기두 하지만, 건강을 잃으문 끝나는 거니까 건강을 좀 많이 챙기고 옛날에는 제일 그 흉, 허물 없이 마음을 터놓구 그런 선후배였는데 이젠 각자 자기의 길이 있고 오래 살다 보니깐 좀 소원해지는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예전과 같이 마음의 흉, 허물을 다 터놓구 그런 으, 노년을 함께 오래 오래, 예쁘게, 길게 만났으면 좋겠어요.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서울시 강남구 세곡동에 있는 안숙선 명창 자택에서 판소리 명창이자 가야금병창 무형문화재 안숙선 명인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안숙선 선생님께서는 특히 제가 방송이나 이렇게 자택에서 뵐 때도 가정에도 굉장히 충실한 그런 면모를 볼 수가 있는데요. 지금 현재 여기 같이 사시는 분이 아까 말씀해 주신 시어머님, 낭군님, 그 다음에 이제 자녀분들 이렇게 화목하게 사시는데요. 혼인은 언제 하셨나요?
안숙선: 혼인은 제가 70년대 서울에 올라와 가지고 한참 고생하다가 했어요. 이 사람을 만나기는 꽤 오래전에 만났구요. 근데 저는 어렸을 적에 무슨 그렇게 한가하게 뭐 연애하고 뭐 이렇게 할 개제가 못됐든 게, 저의 친정어머니가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어렵게 우리 오남매를 길러냈기 때문에 저는 보탬이 좀 됐으면. 우리 오빠도 공부해야 되고 동생들도 키워야 되고 그렇게 절실한 때였기 때문에 친구를 만나고 돌아댕긴다거나 그런 시절을 보내질 못했어요. 근데 인제 제가 남편도 진주 개천예술제 때 공연을 갔는데 이 사람이 저를 우연히 보구 편지를. 그것도 저한테 바로 준 게 아니라 강백천 삼촌이 이렇게 공연을 끝나고 키가 뻔적이, 대금 들구 가니까 인제 “그 어디로 편지 하면은 되냐.”
노재명: 예.
안숙선: 그러니까 그 삼촌이, 삼촌한테 편지 할라는 줄 알고, 하하. 그래서 그리 편지가 와서 하하. 보니까 아, 좀 편지라도 주고 받고 싶다. 그 편지가 계기가 돼 가지구 기다리고 있겠다고 성공할 때까지.
노재명: 하하하하하.
안숙선: 하하하하하. 그래 가지고 자기 뭐 그 때 한참 고등고시를 보겠다고 검사가 될라는 게 꿈이었나 봐요. 검사만 되면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그 말에 꼬심을 받아 가지고.
노재명: 하하하하.
안숙선: 흐하하하하.
노재명: 그러면 처음 그 낭군님 뵈었을 때가 몇 살 때셨나요?
안숙선: 으, 그 때가 제가 한 열 다섯이나 여섯 살 먹었을 거에요.
노재명: 그러면 이 50년 동안 다툼이나 뭐 싸워 보신 적은 혹시 없으세요?
안숙선: 싸움이 잘 되지가 않아요. 인제 싸움은 제가 걸지요, 인제. 이것이 마음에 안맞고 저게 마음에 안맞고 검사가 됐느냐. 검사가 돼서 나를 행복하게 해 줬느냐, 지금. 흐하하하하하, 이렇게. 그러니까 그게 싸움이 안되는 거지요.
노재명: 그리고 현재 자녀분들은 몇 남, 몇 녀신가요?
안숙선: 2남 1녀구요.
노재명: 그 중에서 따님 최영훈 씨요. 현재 거문고 연주자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국악을 지금 이 따님 외에는 안하고 계시구요?
안숙선: 네, 안하고 있어요. 원래 좀 다 가르쳐 볼려구 시켜 봤어요. 근데 애들은 악 소리를 내고 안해요. 흐하하하하.
노재명: 하하하.
안숙선: 그런데 우연치 않게 우리 딸이 중학교 때 선생님이 “너는 국악을 해라. 어머니가 하시니까.” 아빠는 굉장히 환영을 했구요.
노재명: 그러면 오늘날에 이제 따님이 거문고를 하고 국악 활동을 같이 하시니까 훨씬 든든하고 좋으실 거 같습니다.
안숙선: 그렇지요. 아무래도 같이 현장에서 있지 않으면은 저의 고충이나 여러운 일들을 집에서는 몰라요. 그냥 어렵겠지, 이렇게 생각을 하지요. 근데 딸은 그거를 알고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상대가 인제 딸이 된 거죠. 그래서 이제는 그런 일에 관해서는 딸하고 의논을 다하고 이제 제게는 제 같은 길을 가는 반려자로서 우리 딸하고 같이 하길 잘했다. 그렇게 생각이 들어요.
노재명: 그래서 잠깐 따님 되시는 최영훈 씨 현재 국립창극단의 기악부 단원으로 활동하고 계신데요, 인터뷰를 듣고 다음 말씀 이어갈까 합니다. 최영훈 씨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최영훈: 안녕하세요. 저는 국립창극단 기악부 소속 거문고 연주자 최영훈입니다. 어려서부터 소리를 듣고 자랐기 때문에 소리를 하는 것이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요, 근데 어머니께서는 너무 힘든 일을 하시다 보니까 저한테는 시키고 싶지 않으셨나 봐요. “악기로 하는 게 어떻겠냐. 소리는 니가 마음을 먹으면 언제든지 배울 수 있지만 악기는 이런 기회가 아니면 배울 수 없으니까.” 그렇게 해서 시작하게 된 것이 이제 거문고죠. 바깥에서는 이제 국악계 큰 어른으로서 무게감 있고 그러신 분이지만 집에선 여느 엄마랑 똑같으세요. 잔소리도 하시고 흐하하하하하. 먹을 것도 이렇게 만들어 주시고, “맛있냐?” 그래서 “맛있어요.” 그러면 기뻐하시구. 저희 딸들이 가서 할머니한테 막 “할머니! 할머니!” 하고 막 안기고 그러면 굉장히 따른 할머니들하고 똑같애요. 저는 이제 엄마랑 서는 거니까 어릴 때는 멋 모르고 막 했는데 돌이켜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아, 국악계의 대가 인제 안숙선이라는 분하고 같이 한 무대에서 슨다라는 게 굉장히 큰 것이구나, 큰 기회고. 항상 공연 준비를 하면은 어머니가 “한번 타봐라.” 이래서 처음부터 자근자근이 다 잡아 주시고 공연할 때마다 참 공부가 많이 되는 거 같애요. 엄마 저 영훈인데요. 아, 요즘에 스케줄두 많으시구 많이 힘들어 하시는데, 입맛 떨어지지 않게 항상 건강 관리 잘하시고 우리 아이들도 잘 봐주시고, 호호하하하. 저랑 같이 오래 오래, 같이 한 무대에서 좋은 노래, 좋은 곡 많이 보여드리고 서로 음악 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게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건강하세요.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서울시 강남구 세곡동에 있는 안숙선 명창 자택에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제자분들이 많으신데요, 안숙선 선생님의 대표적인 제자분들 누구 누구 계신지 소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안숙선: 제 제자들은 선생님들이 작고하신 뒤에 선생님께 공부를 했든 우리 후배들을 제가 좀 돌봐 주고 있구요. 그리고 또 제게 배우겠다고 온 제자들도 있고 그런데요. 유수정 씨라든가, 김차경, 또 정미정, 또 이영태 씨도 인제 제가 덜 배운 부분들을 좀 가르쳐 주었구요. 또 그러구 제 제자는 이선희, 뭐 박자희. 병창 쪽으로는 전수조교 정예진이 있구 또 양정희, 이수자 김지연, 또 배성남, 또 그 외에도 또, 또 여럿이 있는데.
노재명: 네, 일일이 다 이렇게 소개하기가 힘들 정도로 그 동안 수 십년 동안 많이 제자를 양성하셨습니다. 제자분들한테 특별히 강조하시는 점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안숙선: 그건 제가 지도받을 때 선생님께서 제게 늘 말씀하셨던 부분들을 제가 또다시 제자들에게 할 수밖에 없는 거 같애요. 으, “소리를 거짓으로 하지 마라. 진실로 또박또박 다 채워 나갈라고 해야지, 관객의 비후를 맞출려고 한다든가, 거짓말로 하면은 들통이 나니까.” 그러고 “정신, 그럼 자기가 왜 이 소리를 하고 있는지, 또 소리를 사랑하고 있냐. 너 우리 음악 사랑하고 있니?” 그게 제가 물어보는 거에요. 하하하하. 자기가 사랑하고 좋아서 해야지 억지로 끌려서 하는 것은 진실성이 좀 없지 않나 싶어서 인제 하는 말인데. 선생님께서 늘 강조하셨던 그런 말씀을 제가 또 하고 있는 셈이지요.
노재명: 그러면 여기서 잠깐 안숙선 명인의 제자 되시는 유수정 씨 현재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계시는데요. 안숙선 명인에 대한 인터뷰 내용 듣고 다음 말씀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유수정: 안녕하세요. 국립창극단에 있는 유수정입니다. 굉장히 차분하시면서 무섭게 공부를 가르치시는 편이에요. 막 뭐라고 해서 무서운 게 아니라 굉장히 또박또박 아주 정확하게 범접할 수 없을 만큼의 긴장감이 들게 공부를 가르치세요. 창극단에 퇴직하시기 전에는 날마다 저희하고 같이 연습을 하고 하셨거든요. 근데 끊임없이 그 연구와 연습과 이런 부분이 있는데 특히 저희들이 이렇게 가끔 선생님 댁에 레슨을 하러 가면 정말 아우, “목을 안풀어서 연습을 안해서 노래가 잘 안돼.” 그래서 “아니 선생님! 아, 선생님 위치에서 무슨 연습을 한다고 그러세요? 저희들이나 연습하지.” 하니까 선생님 말씀이 “무슨 소리야. 그래두 끊임없이 연습을 하구 끊임없이 자기 발전을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되는 거야.” “아니 선생님은 지금 최고의 명창이신데 무슨 연습을 하신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거 아니야. 최고의 명창이 아무나 되는 줄 아니? 끊임없이 자기 연마를 해야 된단다.” 그런 말씀을 하셔서 제가 “아, 대단하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적으로 저기 했었을 적에는 굉장히 편안하게 해주세요. 그리구 저희들은 인제 왈가닥스러운 끼가 있어 가지고 무슨 얘기할 때 “저기요!” 막 이렇게 큰 소리로 내는데 항상 그 조용한 조간조간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런 부분이 있고 또 농담도 되게 잘하세요, 레슨 안할 때는. 그래 갖고 저희들이 막 웃고 되게 재밌어요. 하하하. 선생님! 저 수정이에요. 선생님 항상 이제는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 셋째도 건강이거든요. 이제 일을 조금 줄이시고 건강 많이 챙기시고 그리구 가장 중요헌 거 일을 조금만 줄이시고 들 바쁘셔서 저희 레슨 좀 해주세요. 흐하하하하. 하여튼 공부하러 가겠습니다. 그리고 안 선생님! 사랑합니다.
노재명: 안숙선 명창의 제자 되시는 유수정 씨, 현재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계시는데요. 인터뷰 말씀 들어봤습니다. 안숙선 선생님께서 많은 선생님들한테 가무악을 두루 다 섭렵하셨는데요, 모든 부분에서 다 성공한 분이 아니신가.
안숙선: 흐하하하하.
노재명: 가정도 이렇게 화목하시고 또 사회적으로도 국제적으로 이렇게 큰 명성, 본인이 하고 싶으신 일을 다 이루셨구요. 다 그러한 과정이 끊임없이 자기를 다듬는 그런 노력 끝에 이루어지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안숙선: 네, 그 말씀 끝에 제 그 소회를 말씀을 드리자면은 사실 사람이 한이라는 게 있잖아요, 한. 근데 다른 분들이 보실 때는 가족도 있고 명예도 있고 또 제가 이렇게 보기에 어느 정도 돈도 있게 보이는 모양이지요. 그런데 항상 뭐라고 할까요. 공허한 느낌을 가집니다. 그러니깐 제가 타고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이 우리 음악, 소리였고 어릴 적에는 뭔지 모르고 따라 했고 뭔가 인제 “아, 이게 이런 큰 힘이 있었나.” 그렇게 하면서 소리에 매달리게 됐고. 그런데 더더욱 제가 더 많은 공부를 하고 많은 것들을 갖고 있었드라면 소리가 더 빛났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한이 제게 있어요, 사실은. 남이 보면 다 갖췄다고 할라나 모르겠지만은 내가 원하는 이런 것들이 더 있었더라면 내가 좀 더 더, 할 수가 있었을텐데 큰 한으로 남지요. 그래서 그 길을 가기 위해서 제가 뭔가 자꾸만 이걸 또 배워 봐야 되고 저것도 좀 배워 볼까. 으, 저는 다 이루었다고 볼 수가 없어요. 욕심이 많아서인지 이게 다 이룬 것은 아니구요. 제가 더 이루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은 이제 지도자로서의 어떤 모습으로 남을 것인가. 그리고 지도자로서 어떻게 내가 뒤 인생을 잘 마무리해야 될 것인가. 아직은 그림이 안나오거든요. 하하하. 그래서 그마만큼 많은 선생님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이런 모든 분들의 사랑을 내가 어떻게 뒤에 잘 마무리해야 될 것인가. 누가 좀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어요.
노재명: 그러면 좀 궁금해지는 것이요, 저희가 봤을 때는 참 완벽해 보이시는데 본인께서 이렇게 겸손하게 부족한 점이 많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혹시 그 동안 아무한테도 얘기 못한 자신에 대한 아쉬움, 좀 단점이라고 그럴까 좀 부족한 어떤 콤플렉스 같은 거 공개를 해주신다면 어떤 점이 가장 안타까우십니까?
안숙선: 흐하하. 제가 좀 과감하질 못해요. 열심히는 하는데 과감하게 도전하는 그 힘이 좀 약하다고 할까요. 그리고 몸이 약하고 실제루요. 그리고 또 더 많은 지식과 상식을 내가 더 알았으면. 이게 사람이 살아가는 길은 다 똑같잖아요. 자꾸만 깨달아가면서 사람이 사는 건데 그런 공부를 게을리한 점들, 그런 걸 다 놓쳤다. 음, 그런 것들이 가슴에 남는 거죠.
노재명: 예, 그 과감하지 않다, 몸이 약하다 이렇게 말씀을 해주셨는데 근데 어쩌면 김소희 선생님이나 박귀희 선생님이 그런 진중한 모습이 아마 제자를 사랑하게 된 원천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됩니다.
안숙선: 열정은 제가 많거든요. 딱 잡으면은 제가 절대 놓치를 않고 했는데 그런 과감함이 좀 있었드라면 더 이렇게 할 수 있는데 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어요.
노재명: 예, 평상시에 이 국악 안하실 때 어떤 취미 생활 보내시나요?
안숙선: 제가 원래 글 읽기를 좋아해요. 근데 요 근래에는 인제 우리나라 역사를 좀 이렇게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책들을 보는데 어떻게 우리 음악을 표출했을까 하는 궁금증도 많구요. 그래요.
노재명: 그리고 말씀 내내 은사님들 회고해 주시면서 눈물도 글썽이시고 눈물을 닦으시면서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선생님 본인의 인생살이 그것도 회고록 단행본 출판을 하고 싶다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런 계획 말씀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안숙선: 네, 제가 뭐 개인적인 제 일상을 이야기한다는 거보다는 이러 이런 선생님들 만나서 저의 음악에 대한 확신을 가졌구 신념을 가졌구. 또 사명감 내지는 제가 오늘날까지 쭉 걸어 나오고 있는 이 길이 그냥 제가 혼자 힘으로 걸어 나온 게 아니라 그런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자연적으로 이끌려서 왔기 때문에 선생님들의 위대한 삶, 이걸 제 이야기를 통해서 남겨두고 싶어요. 그런 선생님들의 일상을 제가 봐 왔으니까. 지금 분들이 보고 아, 왜 이랬을까를 아는 그런 책을 내고 싶거든요.
노재명: 예, 아주 좋은 기록이 될 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판소리 오바탕, 병창, 산조, 또 남도민요, 이렇게 두루 시디 음반도 만드셨구요. 일본에서는 디브이디 음반도 만들어지고 국내에서도 또 영상물 활발하게 제작된 바가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자료가 많이 발행이 됐으면 합니다. 아쉽게도 마칠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요. 현재 64세이시고 55년 동안 판소리에 전념을 하셨습니다. 돌이켜서 생각해 보시면 인생이란 무엇인지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안숙선: 네, 뭐 제가 요즘에 와서 가볍게 좀 느낀 건데 사람이 사는 거는 나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더불어 살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남에게 어떠한 그런 것들을 주었나. 이게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그냥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다 가는 것이 아니지 않나. 그럼 나는 내 소리로 모든 이들에게 어떤 걸 드렸으며 그것과 또 내가 세상에 태어났다가 뭔가 하나를 바라보고 그 길을 갈 수 있다라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 아닌가. 또 그런 것을 저에게 또 이렇게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셨고 그거를 또 가도록 끈을 앞에서 끌어 주셨던 분들이 계셨다는, 나로서는 선택되어진 그런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구 또 제가 여지껏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거는 그저 열심히 정말 촌음을 아껴서 쓰자라는 그런 말은 그냥, 그냥 말이 아니구 시간을 어떻게 하면은 아껴 써서 공부할 시간을 빼고 또 사람 노릇도 하면서 살아야 되잖아요. 이걸 어떻게 해야만이 잘 살 것인가. 그런 생각을 늘 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우선 내가 먼저라도 솔선해서 가정에 와서는 수돗물도 좀 아끼고 하하하, 전기도 아끼고 하하. 뭐든지 이렇게 또 노력하면서 살아야 되지 않나. 그러구 아무리, 저도 어려운 순간들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어릴 적부터서. 그런데 그렇게 어려울 때 저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뭐 철조망이 있어서 저길 건너가기 힘들다, 또 무슨 실이 타래처럼 꼬여서 이거 풀기 어렵다 그러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그거를 한올 한올 풀다 보면은 이건 풀어질 수 있다. 그런 희망을 가져야지 희망이 없이는 세상 살아가기가 힘들지 않나. 나는 할 수 있다. 소리두 힘들지요. 그러나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다라고 제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거죠.
노재명: 예, 그렇게 일생을 국악을 향해서 이렇게 전념하셨기 때문에 그런 순수함을 지금 간직하고 계신 거 같습니다. 언제 내가 60대 나이가 됐나 싶으실 거 같애요.
안숙선: 아, 그래요. 곧 칠십이잖아요. 칠십이라고 하면은 이제 모두들 아프고 인제 힘 없구. 하하하하. 그런 할머닐 연상하는데 아, 그게 내게도 이렇게 오는구나 하고 요즘 느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에서 소리할 수 있었으면 행복하겠다 하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스트레스 안받고 열심히 살면 될까. 제 지금 가장 큰 과제에요.
노재명: 이대로 방송을 마칠려니까 너무 아쉽습니다. 그래서 안숙선 선생님의 특기인 저희가 <살풀이 구음>을 청해서 들어보고 싶은데요.
안숙선: 네.
노재명: 가능하시면 자장단으로 <살풀이 구음> 어떻게 가능하실까요?
안숙선: 흐하하하하하. 하유 참.
노재명: 네,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2012.6.25.09:00~15:00.서울시 강남구 세곡동 안숙선 명창 자택. 안숙선(소리·장고) <살풀이 구음> 녹음.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판소리 명창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예능보유자인 안숙선 명인과 함께 했습니다.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국악 명가문에 태어나서 끊임없는 노력으로 최고 명창의 반열에 오르셨구요, 안숙선 선생님 같은 큰 명창이 계셔서 판소리가 앞으로도 더 많은 분들에게 뜨거운 사랑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안숙선 선생님 오늘 장시간, 귀한 말씀과 음악 대단히 감사합니다.
안숙선: 이 국악방송을 들으시는 모든 우리 국악 애호가님들 우리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우리 음악, 우리 것이라고 다 생각하시죠? 옛날 박동진 선생님 말씀처럼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또 우리 사람이 살아가는데 상당히 이로운 음악입니다. 항상 우리 국악을 애호해 주시구요. 또 우리 소리를 듣는 귀명창이 되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노재명: 네,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서울시 강남구 세곡동에 있는 안숙선 명창 자택에서 보내드린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지금까지 진행에 노재명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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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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