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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뷰, 무용가 강선영(판소리 명고수 강경수 손녀) 1967년 방송 내용
  MIBOOK1321kangsunyung.jpg (사이즈:87.7KByte)
MIBOOK1321kangsunyung.jpg
* 상기 사진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이동백 수행고수였던 강경수의 손녀 강선영(전통춤 인간문화재) 증언 모습.
2003년 3월 17일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리시온빌딩 707호 태평무 사무실에서 노재명 촬영.
* 이는 국악음반박물관 편 [판소리 명창 제4호 - 명창, 소리에 힘을 싣다] 서적(서울:도서출판 채륜, 2014년) 156~163쪽에 실린 글의 초고.

나의 데뷰, 무용가 강선영(판소리 명고수 강경수 손녀) 편 1967년 방송 내용
채록 정리·주석/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동아방송 1967년 3월 23일 라디오 방송 - 나의 데뷰, 무용가 강선영(전통춤 명인 1923년 출생) 편 방송, (주)동아닷컴 자료실 소장 녹음]
우제근: 코티 벌꿀비누 분포, 동산유지 제공 ‘나의 데뷰’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예로부터 이런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만 누구나 화려하고 대성한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가슴 설레이며 등장하던 첫 무대가 있습니다. 예술, 문화, 연예, 스포츠 등 각계 각층의 저명 인사들을 초빙해서 그 분들의 데뷰 시절의 얘기를 국내외 가요와 함께 들어보는 시간, 오늘은 과연 어떤 분을 모셨을까요.
김상희: 안녕하십니까. ‘나의 데뷰’ 오늘은 꼭 열 다섯번째 시간이 됩니다. 오늘은 여자 분으로 무용가 한 분을 모셨습니다.
강선영: 안녕하세요?
김상희: 네. 누구신지 모르실 거에요.
강선영: 강선영입니다.
김상희: 네, 아주 무용으로 단련이 된 아름다운 몸매를 보여 드리지 못하는 것이 유감입니다. 음성도 아주 아름다우신데요. 오래되신 관록이 몸에 붙었다 뭐 이런 말들 하잖아요? 뭐 각 부문에서요. 근데 어떻게 그런 말을 쓸 수 있을런지. 얼마 오래 되셨어요?
강선영: 네, 무용 생활은 오래됐어요. 시작한 지는 뭐 25년이 넘었다고 해도 되겠지요.
김상희: 네, 그러면은 거의 뭐 국민학교 때부터 이제 소질이 보인다든가 뭐 이런 말 많이 들으셨겠네요.
강선영: 네, 제가 무용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결국 국민학교 학예회 때 그 선생님한테 인정이 돼가지고 선생님이 무용을 했으면 좋겠다 하는 데서 여학교 들어가 가지구 시작했죠.
김상희: 네, 국민학교 때부터 거의 한 셈이 되겠죠?
강선영: 그렇죠.
김상희: 네, 그 때는 뭐 과외로 돈을 내고 배운다든가 그런 게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강선영: 그건 없었어요. 학교에서는 뭐 그대로 지금 같이 뭐 무용과가 있다던지 이런 것두 없구. 그러니깐 학교에 들어가서 무용 연구소를 다녔죠.
김상희: 아 무용 연구소를 다니고. 그럼 학교에서도 인제 여러가지 활동 그 때에두 여고시절에는 활동을 할 일이 많으셨겠죠? 학교에서.
강선영: 근데 그 뭐 그 때는 그 학예회라든지 그 무슨 행사라던지 그런데 별로 뭐 한국 무용이 많이 저기 되진 않았어요. 또 제가 그 때 다닐 때만 해두 뭐 그렇게 무용이 한국 무용을 가정에서 뭐 환영해서 가르치고 할 때도 아니니까.
김상희: 네, 그 얘기 들으니까 생각이 나는데 정말 무용뿐이 아니라 뭐 그 때는 여자들이 하여튼 나선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제재를 받았을 거 같은데요. 참 애로가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강선영: 네, 제가 무용소에 들어가고 한성준씨 무용 연구소에 입소 하구 나서 저희 어머니가 그 때 혼저 계실 땐데 할아버지께서 노하셔 가지구요 어머니를 그 시골집에서 서울로 쫒아 보내신 일도 있어요.
김상희: 네.
강선영: 그래도 이렇게 뭐 어머니하고 나하고 전대 나가서 이렇게 지금 무용을 하고 있습니다.
김상희: 네, 어머님 지금 계세요?
강선영: 네.
김상희: 네, 그러면은 그 때 얼마나 잘했었는가 지금도 가끔 옛 얘기처럼 하시겠네요.
강선영: 뭐 잘했다는 거 보덤두요. 뭐 선생님한테 딴 사람 보덤은 조금 귀여움을 받았다구 해둘까요? 하하하하.
김상희: 네, 어떻게 해서 무용을 하시게 됐나 얘기를 들어 봤는데 그 때 인제 어떤 작품에 어떻게 출연을 하셨는지 고거 음악 하나 지금 준비가 됐는데요. 들어보구 또 얘기 들어보죠.
강선영: 네.
김상희: 이씨스터즈가 불러주는 <서울의 아가씨>입니다.
이씨스터즈 노래 <서울의 아가씨> 녹음 방송.
김상희: 그러니까 인제 이 국민학교 때 학예회 때부터 뭐 그 무용에 재질이 보이긴 했지만은 이제 여러가지 그 난점을 물리치고, 소위 아주 본격적인 그런 데뷰가 있었을텐데 그 때가 인제 언제 쯤이었을까요.
강선영: 그 때가 그러니까 열 다섯 적엔가 봐요.
김상희: 네, 그러니깐 무용을 해야 되겠다 이걸 결심한 훨씬 후가 되겠죠? 그렇게 되면은.
강선영: 그, 그 때가 아마 저, 연구소 입소할 때가 무용을 하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일 거에요.
김상희: 네, 열 다섯이면은 굉장히 어린 나이 아니에요? 여고
강선영: 네, 그렇죠. 2학년.
김상희: 네, 그 때 중학교.
강선영: 네.
김상희: 그럴 때에 무대라면은 인제 아주 그
강선영: 무대는 제가 슨 것이 그러니깐 한 연구소에 입소해 가지구 한 3년만에 부민관에 섰는데 선생님 인제 그 발표회 작품 발표회? 지금으로는 신작 발표회 때 인제 제가 그 연구생으로 섰었죠.
김상희: 네, 그것이 인제 열 다섯 그 전
강선영: 그 후죠.
김상희: 그 후요.
강선영: 네, 한 3년 후 입소해 가지구 연구소 입소해 가지구 한 3년 후죠.
김상희: 네, 그 때에 출연하셨던 작품을 아마 기억을 하고 누구든지 기억할 거에요. 처음에 자기가
강선영: 네, 제가 춘 춤이 그 때 <학춤>, 그 <학춤>이 있어요. 한 선생님의 유명한 <학춤>이 있는데 거기에 새끼 학을 했어요. 그래서 그 전체 털이거든요. 근데 여름이니까 그 털을 입구 나가니까 안추다가 처음 해보니깐요 객석을 보니까 막 캄캄한데 순서를 다 잊어 버렸어요. 더웁긴 하고.
김상희: 네.
강선영: 근데 눈 하고 이 숨 쉬는 입만 내 놓고 구부리니까 말이죠. 객석도 안보이고 무대도 안보이고 아무것도 안보여요.
김상희: 원래는 보이게 돼 있는 거죠.
강선영: 그렇죠. 물론 보이게 돼 있는 거죠. 근데 순서를 다 잊어 버려 가지고 그대루 그냥 그 큰 학, 말하자문 아버지 학이죠.
김상희: 네.
강선영: 엄마 학하구 아버지 학이 있는데 그 학만 따라댕기다 나와 가지구 선생님한테 걱정을 들은 적이 있어요. 하하하.
김상희: 하하하하. 그 무대 위에 스셨던 그 시간이 얼마나 됐었든가요?
강선영: 그게 그러니까 5분 동안이죠. 5분 동안인데 처음서부텀 끝까지 생각이 하나두 안나요. 그게 연습은 한 3개월 해가지구 나갔는데요.
김상희: 네.
강선영: 그 처음 무대라는 게 좋다고두 하지만은 참 제일 어려운 게 첫 무대에요.
김상희: 네, 아마 그게 정상적인 걸, 건지, 거지도 모르죠. 하하하하하.
강선영: 글쎄요. 하하하하.
김상희: 선생님이 그 제자들을 가르치고 보람을 느꼈다 그런 말을 고 때는 하실 수가 없었겠네요. 훗날, 하하하.
강선영: 그렇죠. 네, 하하하. 지금두 가끔 가다 제자들한테 그런 얘길 해요. 첫 무대 나가는 사람한테는 무대를 무서워하지 말라는 애기를. 겁에 질려서 그랬죠. 그 때는.
김상희: 그게 인제 나중에 또 큰 교훈이 되기도 하겠지요. 노래 또 하나 들어 봅니다. 박형준씨가 불러 주는 <나 홀로 있어도>
박형준 노래 <나 홀로 있어도> 녹음 방송.
김상희: 작년이든가요, 재작년이든가요? 그 서울시 문화상까지 타신 강 선생님을 그 때 그 당시에 그 아버지 학을 아주 우둔하게 따라다니든 그 소녀라구는 아마 기억을 하는 분이 별로 없을 거에요. 근데 그 연극 하시는 분들두 그렇구 그 관객이 잘 눈치를 못채도록 그 당시, 그 당시 넘어가야 되는데 아마 그 때 관객들은 잘 몰랐겠죠?
강선영: 몰랐을 테지요.
김상희: 선생님 자신이 그렇게 생각을 하시는 거죠.
강선영: 네. 그, 그래두 선생님한테 인제 들어가서 걱정 듣구 나서 제가 생각할 때는 역시 무대는 그렇게 무서워서는 안되나 부다 하는 그런 그 제, 제 자신두 그렇게 생각했구, 선생님두 또 그걸 강조하시구 그래서 지금까지두 무대 나가면 아무두 없다는 걸 먼저 인식하느라구 애써요.
김상희: 네, 저희두 마이크 앞에 스되, 스기 전에는 긴장하구 무서워하지만 일단 스면은 자신있게 해야 된다 뭐 그런 얘기 선배님들이 하시는데 아마 비슷할 거 같애요. 뭐 강 선생님 아주 바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하구 또 일본하구 뭐 거의 반반 말수를 트셔야 되겠네요.
강선영: 네.
김상희: 일본에 연구소 가지구 계시다구요?
강선영: 네, 동경하구 대판에 가지구 있는데요. 뭐 그래두 한국에 더 주로 있어요.
김상희: 주로 있으시, 하하하하. 그러면은 인제 일본 같은 데 나가시구 또 외국에도 오가시구 하시게 되면은 그 훨씬 전에 외국 무대에 데뷰를 하신 일이 있으실 텐데요. 그 때가.
강선영: 네, 제가 그러, 네, 그러니까 그 때가 해방 아마 3~4년 되겠죠? 3, 3~4년 전 되겠죠? 소화, 그 때 십 몇년이라구 기억하는데요. 그 때 히비야 공예단이라구 거기서 그 때 인저 제가 첨 데뷰라구 해두 과언이 아니겠죠?
김상희: 네.
강선영: 그 때 공연을 할 적에 이런 일이 하나 있었어요. 제가 무용을 하는데 그 마이크 이렇게 나오구 들어가구 그러는 저기가 있잖아요? 무대 안에. 그것이 아마 잘못해서 거기 열렸던가 봐요. 그, 그 문이 조그만한 게. 다리가 거기 빠졌었어요.
김상희: 네.
강선영: 뛰문서. 농악인가 무슨 춤을 하다 뛰다가 다리가 하나 그리 빠졌는데 그대루 뛰느라구 그냥 확 잡아 뺐어요 다리를. 그러니 다리가 다 벳겨졌을 거 아니에요?
김상희: 네, 옷은 의상은 어떤 거였었는데요?
강선영: 의상이 아마 바지였던가 봐요.
김상희: 네.
강선영: 그러니깐 다 이게 살이 벳겨져 가지구요. 그래두 그걸 다 끝마쳤어요. 무대는 그대루. 그러구 화장실을 들어가 보니까 막 분장실을 들어가 보니까 다리가 막 다 벳겨졌어요. 그래 가지구 한 보름을 무대를 못섰죠. 다리가 부어서. 그래서 동경의 처음 데뷰는 그런 에피소드가 있어서 아주 기억에 남습니다. 하하.
김상희: 하하. 긴장하셨기 때문에 아마 아픈 것두 몰르셨든 거 같애요.
강선영: 네.
김상희: 외국 무대에 스셨을 때는 이제 훨씬 그 무용가로서의 그 연륜두 많이 지니신 후였겠는데 그래두 다르겠죠 또.
강선영: 그러문요. 그런데 인제 그거 보덤두 그 무대 그 때는 저, 자기 책임감이겠죠. 저, 그 자기가 거기서 쉰다던지 하면은 그 작품이 안되겠다 하는 데서 그저 자기 책임감에서 그대루 추었을 거에요 끝까지. 다친 걸 알면서두. 하하하하.
김상희: 오늘 끝으루 준비한 노래는 <왜 그런지> 성재희씨가 불러 주는 곡이 되겠습니다.
성재희 노래 <왜 그런지> 녹음 방송.
김상희: 선생님이 처음 데뷰하실 때는 그 으른 되시는 분들의 반대두 있었구 그런 말씀이셨지만은 지금 와서는 연구소 그 열의 굉장하죠? 그 때 하구.
강선영: 예, 지금은 뭐 학교에도 각 대학에 다 무용과가 있는 현장 이니깐요.
김상희: 네, 아주 바라보시기가 기쁘시겠습니다.
강선영: 네.
김상희: 일본에 은제 또 가세요?
강선영: 새 달 중순 경에 갈 거 같애요.
김상희: 네, 한 달 후에는 그럼 못뵙게 되겠네요.
강선영: 잠깐 갔다 올 걸이요 뭐.
김상희: 네, 고맙습니다 오늘.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강선영: 감사합니다.
김상희: 네. 코티 벌꿀비누 분포, 동산유지 제공 ‘나의 데뷰’ 오늘은 그 열 다섯번째 시간으로 무용가 강선영 인사를 모시고 얘기와 음악을 들어봤습니다.

2015-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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