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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월간지 [샘이 깊은 물] 2000년 9월호(서울:뿌리깊은나무) 116-123쪽에 실린 것으로서 여기에 이 글의 초고를 그대로 올렸다.
* 이 글은 2000년 9월 6일 15:00-17:00 국립민속박물관 1층 강당에서 열린 판소리 특별강좌(춘향가 중 <사랑가> 실기 강의:성우향, 이론 강의:노재명)의 교재로 사용되었고 이 강의 실황 녹음은 2000년 9월 10일 15:05-16:00 불교라디오방송(FM 101.9MHz)에서 추석 특집으로 방송되었다.
판소리 명창들의 산공부<1>
글/노재명(국악기록보존연구소 소장)
이번 여름에도 판소리 명창들은 산으로, 바다로 공부를 하러 갔다.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소리 공부는 끝이 없고 죽음도 무대에서 맞이한다면 그 얼마나 행복하겠냐고 명창들은 말한다. 날씨는 무덥고 공연 등의 활동도 뜸한 이 시기가 그들에겐 여름방학이라고나 할까.
방학이라고 해서 학문을 그냥 놔버리고 노는 것이 아니라 복습, 사색, 휴식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듯이 명창들의 여름도 마찬가지이다. 몸 자체가 악기인 명창들은 더위에 몸이 상하지 않도록 자연 속으로 피신하고 그곳에서 그간 익힌 여러 소리들을 복습하거나 새로운 소리를 배우기도 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하는 시간을 갖는다 홀로 또는 스승, 제자, 선후배와 함께.
어떤 음악이든 연주자들은 모두 자신을 연마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판소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판소리 명창들에겐 여러차례의 백일공부, 길게는 수년 동안 ‘독공’(獨工)의 시간이 필요한데 그 장소는 대체로 산에서 하게 된다. 특히 마음먹고 공부를 하게 될 경우 명창들은 거의 대부분 산을 찾는다.
그렇다면 판소리에서 특히 독공이 강조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판소리에도 근대 신작곡 음악이 일부 존재하기는 하나 옛부터 전승되어 오는 음악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국악인들이 창작력이나 창작욕구가 매우 저조한 것 아니냐, 왜 어제도 오늘도 같은 노래만 되풀이 하느냐고 의아해 하기도 한다. 그러나 판소리 명창들이 창작력을 발휘하는 방식은 서구 음악인들이 오선 악보에 새로운 곡을 지어내는 것과 다르다. 즉 판소리 명창들은 같은 곡을 가지고 부를 때마다 조금씩, 혹은 파격적으로 다르게 부르는 데 창작욕구를 발산한다. 미리 계산된 각본없이 즉흥적으로 말이다. 심지어 공연, 음반 취입 때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소리를 가르쳐 줄 때도 그러하다.
느린 중모리 장단으로 부르던 것을 소리판의 분위기에 따라, 기분에 따라 느닷없이 빠른 중모리, 또는 중중모리 장단으로 부르기도 하고 곡조를 완전히 다르게 부르기도 하고 전혀 다른 사설로 말을 바꾸어 부르기도 한다. 춘향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창하는 과정에서도 본래 춘향가에는 없는 <새타령>을 중간에 즉흥적으로 삽입시켜 부르기도 한다. 그런 즉흥 작편곡 능력이 있는가, 그리고 그런 의외의 즉흥 음악들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명창인가 아닌가 하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며 그래서 판소리인들에게는 같은 곡을 수없이 반복하는 독공의 과정이 특별히 강조되는 것이다.
물론 서양음악에도 다소의 즉흥성과 조금씩 다른 맛으로 연주하는 것이 있으나 그 원곡과 즉흥 편곡의 간격은 아주 폭넓지는 않으며 특히 판소리에 비해서는 추구하는 즉흥적인 편곡과 작곡의 범위가 극히 제한적이라 하겠다. 이런 차이는 관중의 감동 표현 방법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서양음악에서는 대체로 공연 시작과 끝에 미리 누가 말 안하더라도 굳게 맹세하고 약속한 듯 동시에 손뼉을 치는 박수가 거의 유일하게 관중이 자신의 감동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조금 더 음악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하면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치는 것, 괴성과 휘파람 소리를 내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허나 판소리에서는 관중이 감동의 표현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딱히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며 표현 방식도 단순하지 않고 퍽 다양하다.
즉 판소리에서는 추임새로서 감동받은 즉시 그때그때 자신의 솟구치는 감동의 마음을 전할 수 있고 추임새 또한 ‘얼씨구’, ‘얼쑤’, ‘좋다’, ‘좋지’, ‘으이’, ‘아문’, ‘그렇지’, ‘잘한다’ 등 아주 다양하게 할 수 있는데 이 또한 매우 즉흥성이 강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중의 즉흥적인 추임새에 의해 판소리 명창들은 더욱 힘을 얻고 추임새가 별반 시원찮으면 잘 못하다가도 오기가 발동, 분발하여 제 실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신이 나고 흥이 나면 명창들은 자신도 놀랄 정도의 초능력이 발휘된다고 할까, 자신도 상상 못했던 기가 막힌 소리를 즉흥적으로 쏟아내기도 한다.
관중과 고수(鼓手)의 추임새가 단지 소리판의 소음이나 감탄사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 추임새도 당당히 명창의 소리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하나의 음악이 되고 판소리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이 추임새를 적절하게 하는 관중도 명창이나 고수 만큼 소리판에서는 중요한 음악가인 셈이고 그래서 관중 가운데 소리를 제대로 들을 줄 알고 멋있는 추임새로서 소리를 잘 살려주는 이들을 가리켜 옛부터 ‘귀명창’이라 하였다. 그러하기 때문에 명창 만큼 귀명창도 수련이 필요하다. 소리의 맥을 짚을 줄 알아야 하고 좋은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를 잘 가려 적재적소에 추임새를 해야 한다. 추임새가 음악 흐름에 해를 끼치면 안되고 판소리에 꼭 필요한 존재로서의 추임새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귀명창들은 명창들처럼 산에 올라 독공은 아니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상응하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전통사회에서는 명창과 귀명창의 관계가 그리 먼 사이가 아니었다. 명창들의 예술적 동반자이자, 후원자이자, 매니저겸 이론 스승이자 명고수이기도 했던 존재가 바로 귀명창들이었다. 귀명창없는 명창의 탄생은 매우 힘든 일이며 그 존재 의미 또한 찾을 수 없다. 명창에게만 백일공부와 같은 고행의 길을 강요해서는 아니되고 귀명창들 또한 그 곁에서 늘 함께 그 이상의 힘을 쏟아야 한다.
그래서 전통사회에서는 유명한 명창들이나 미래 가능성이 엿보이는 유능한 소리꾼들이 산공부를 가게 되면 그 후원금은 귀명창들의 주머니에서 지출되는 것이 당연시 될 정도였다. 그리고 귀명창들은 명창들의 산공부를 지켜보며 명창들이 하산한 후 후원에 대한 보답으로 들려주는 소리를 감상하며 귀의 수준을 높여갈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명창이 탄생하기까지 그 어려움과 정성도 대단하지만 귀명창들이 판소리를 이해하기 위해, 멋있게 향유하기 위해 기울인 정성과 노력도 굉장했었다.
옛 귀명창들의 면모를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한 삽화를 소개하면 전통사회에서는 임금에게서 벼슬을 받은 명창, 즉 어전광대와 같이 최고 수준의 명창들이 하는 소리를 듣기가 너무나 감격적이고 황송하여 귀명창들은 감상에 앞서 정성을 다해 귀를 깨끗이 닦았고 몸과 마음을 청결이 한 후 소리를 경청하였다 한다.
그런 점에서 요즘 명창들은 참으로 고독하다. 예전처럼 주위에 의지가 되는 명창들도 그리 많지가 않고 소리를 좋아하고 흥겹게 들어주는 관중 또한 극히 적다. 지금 명창들은 소리 공부 후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마치 뽐내기라도 하듯 보여줄 수 있는 귀명창의 존재가 많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가장 허전함을 느낀다.
오늘날 판소리계 왕중왕 대명창이, 혹은 장래가 촉망되는 아무개 소리꾼이 산공부를 간다 한들 흥분과 기대를 갖거나 격려금을 내는 귀명창은 거의 없다. 호기심에서라도 명창들의 엄숙한 소리 순례의 길을 따라가 관람하는 이 조차 드물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관심을 거의 보이지 않는 근래의 이 썰렁한 산공부는 그야말로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부류 사람들의 별난 행위, 또는 교주와 신도 몇 사람이 떠난 희한한 종교집단의 광적인 집회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전 70대 노명창이 벽 보고 소리하는 기분 아느냐고 그 황당함을 토로한 바 있다. 그리고 허전한 소리판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20대 소리꾼들의 축 쳐진 어깨도 종종 목격된다. 아무리 좋은 문화를 지니고 있어도 향유하지 않는다면 내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도 가장 좋은 나전칠기를 만들 수 있다는 우리 민족, 그러나 지금 우리의 나전칠기를 향유하는 것은 일본이라는 것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명창들은 그간 배운 소리를 스스로 깨우치기 위해, 자신에게 맞는 소리로 다듬기 위해 산이란 곳을 택해 들어가지만 소리공부라 하지 않고 ‘산공부’라고 이른다. ‘산공부’라는 말은 무척 철학적이라 하겠다.
우리가 단지 지식이나 기술을 익히기 위해 학교를 가는 것이 아니듯이 단지 목성음 연마와 창법만을 터득하기 위해 명창들이 산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산이라는 대자연에 파묻혀 우주의 진리가 농축되어 있다는 판소리의 섭리를 깨우치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곁에서는 자동차 경적소리, 스피커소리, 각종 기계소리 등이 들려온다. 불과 몇 십년 전만하더라도 명창들은 굳이 마음먹고 산을 찾지 않더라도 이런 인위적인 소음들보다는 자연의 소리에 젖어 살 수 있었고 그야말로 무위자연으로, 자연과 하나되어 음악을 할 수 있었다. 옛날 이날치 명창이 <새타령>을 부르면 새가 날아들었다는 말은 결코 거짓 전설이 아닐 듯 싶다.
특히 판소리 발생 초기에는 명창들이 거의 전부 광대라 하여 천대를 받았기 때문에 마을밖, 혹은 깊은 산속에 집단 거주를 했던 폐쇄적인 신분이었다. 이처럼 도시에서 동떨어진 자연 환경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판소리와 같은 대자연의 소리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이크도 없고 신식 공연장은 더구나 아닌 하늘을 지붕 삼은 곳에서 생음악으로 멀리까지 들리게 해야 했던 것이 초기 판소리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당시 명창들은 될 수 있으면 소리를 우렁차고 세차게 내지르는 것에 중점을 두고 독공을 많이 하였다. 그리고 판소리 발생 초기에는 <새타령>과 같이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묘사해 내는 것이 명창의 중요한 구실이었기 때문에 이런 능력 배양에도 무척 힘썼다.
산에서 흡수할 수 있는 것이 그 얼마나 많은가. 산에서 들을 수 있는 물소리, 바람소리, 벌레소리, 새소리 등 온갖 자연의 소리가 명창들에겐 스승이다. 또한 대대로 이땅에서는 풍수지리를 중시했고 산을 신성시 했기 때문에 산에는 정기가 있고 사람은 그 영향을 크게 받는 것으로 인식해 왔다. 춘향가 가운데 <경상도 산세는> 대목에서도 명창들은 산의 모양이 사람의 인성에 큰 영향을 준다고 노래하고 있다.
그런 만큼 정말로 산에 정기가 있어 그 영향이 인간에게까지 미치든, 아니면 그냥 입산한 사람들의 자기 암시이든 우리네 정서가 오랫동안 그러했기 때문에 명창들이 산에 들어가서 정신적으로 받는 영향은 분명 있다 할 것이다. 암튼 명창들은 스님, 심마니와 마찬가지로 산을 신성시하고 그 영적 존재가 자신들이 명창이 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믿는다.
산에서 터득한 소리, 그 속에는 자연을 허물지 않고 그 안에서 나무 한그루처럼 일부분으로 순응하며 살았던 우리네 심성과 산을 닮은 멋스러움이 그대로 담겨있다. 자기자신을 보다 강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온갖 기교를 부리고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깊은 멋이 있고 극히 자연스러울 수 있는 것, 그것은 자연과 함께 살았던 과거 우리 선조들이 별로 어렵지 않게 흔히 빚어낼 수 있었던 이도다완 도자기, 솟대, 장승, 하회탈, 민화의 멋과 다르지 않다.(계속)
2000년9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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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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