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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인간문화재 홍정택 명창 증언 내용
  hongjungtaekh20120131.jpg(사이즈:62.8KByte)
* 상기 사진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2012년 1월 31일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1가 신일아파트 판소리 인간문화재 홍정택 명창 자택 모습.
국악방송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프로그램(방송 진행:노재명) 판소리 인간문화재 홍정택 명창 편 현장취재 장면.
홍정택 명창 자택 내외부 모습.
홍정택 명창 판소리 열사가 <안중근전> 장면.
홍정택 명창(우측)과 손녀 김세미 대화 모습.
홍정택 명창(우측)과 국악음반박물관장 노재명 대담 방송 장면.
* 2012.1.31.08:30~12:30.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1가 신일아파트 판소리 인간문화재 홍정택 명창 자택에서 노재명이 홍정택 명창을 인터뷰하고 2012.2.12.18:00~19:30.국악FM방송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진행:노재명)에 방송된 내용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들려주신 홍정택 명창께 깊이 감사드립니다.(2013.8.30 정리/국악음반박물관 인터넷 홈페이지 명인실에 발표)
* 홍정택 명창: 2012년 11월 25일(양력) 오전 0시 30분에 숙환으로 별세.

판소리 인간문화재 홍정택 명창 증언 내용
대담ㆍ채록/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안녕하십니까. 노재명입니다. 한국의 대중음악이었던 국악, 그 중에서도 전승이 가장 잘 됐고 인기가 많았던 판소리가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비롯한 20세기 파란만장한 격동기를 겪으면서 상당히 쇠퇴하였습니다. 특히 절명의 위기에 놓였던 1970년대 전주의 판소리를 몇몇 명창들이 초인적인 노력으로 지탱하면서 오늘날까지 맥을 기적적으로 이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전주의 명창들 중에서 오늘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인 홍정택 명창 방송 편을 마련했습니다. 홍정택 선생님을 만나 뵙기 위해서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에 있는 홍정택 명창의 자택에 국악방송 중계차가 와있습니다. 홍정택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홍정택: 안녕허십니까. 제 이름은 홍정택이올시다.
노재명: 선생님 건강은 어떠신가요?
홍정택: 예, 건강은 그저 계우 지냅니다, 그저. 그러나 좀 기운이 괜찮았다 좋아졌다 낳아졌다 이럴 때가 많습니다.
노재명: 선생님께서 음력으로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시나요?
홍정택: 아흔 두 살입니다. 이십 일년 십이월 십칠일 생입니다.
노재명: 예, 올해 구십 이세이신데요 아주 정정하시고 미소가 아주 소년 같으십니다. 홍정택(洪正澤) 선생님 본명은 어떻게 되시나요?
홍정택: 호적 이름은 홍웅표(洪雄杓)올시다.
노재명: 예, 그래서 예명으로 이제 판소리 명창으로 활동하시기는 홍 ‘정’자 ‘택’자 쓰시구요 아호는 추담(湫潭) 선생님이십니다. 가족 관계가 궁금한데요 말씀 듣기로는 예전에 동학혁명에서 어르신들께서 큰 활약을 하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설명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홍정택: 선고 부친께서는 ‘순’자 ‘열’잡니다. 순열씨라구 그랬습니다. 저 선대 할아버지께서 일본 사람허고 싸우시다 왕산 칠봉에서 일본놈한테 총얼 맞고 인제 부친이 부상당하싱개 업고 내려올라 그러는데 “너는 살아서 뒷일을 잘 살피고 나라를 위해서 충신 노릇을 해라” 허고 산에서 돌아가시고 그랬습니다. 그것얼 아는 분덜은 다 알고 역사에 대한, 다 나오고 그러지만은. 동학난리 때 그래서 우리 3대 할아버지께서 중대장, 또 전녹두씨께서는 대장 그렇게 이제 거 말이 있지 않애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청포장수 울고 간다.” 이 거시기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 말하고 나서는 후생들이 눈물 나오고.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함)
노재명: 네.
홍정택: 그것을 지금 그런 말을 해야 잘 못알아 듣는 정도가 많고 뭔 말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노재명: 예, 지금은 이제 전봉준 장군에 대한 그런 말씀을 해주셨구요 바로 홍정택 명창 선대가 동학혁명 때 중대장을 지내셨습니다. 홍정택 명창은 7남 2녀 중에 넷째로 태어나셨고 형님 되시는 홍두환씨께서 판소리 명고수셨구요 바로 그 부인께서 김옥진 여사님인데 판소리 명창이셨습니다. 그리고 홍두환 명고수의 따님이 바로 홍성덕씬데요 현재 한국국악협회 최근에 이사장님으로 선출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사촌 형님 홍용호씨가 또 판소리 명고수이십니다. 그리고 현재 손녀 김세미씨, 김선미씨가 판소리 명창으로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어떻게 보내셨나요?
홍정택: 내가 원 고향이 출생지가 부안 신흥리라는 디를 거기서 태어나 가지구 내가 자라났습니다. 그 때 내가 고종 황제 때 우리 집이 마루가 높은디 우리 아버지하고 나하고 세 살 때, 네 살 때 점심을 먹다가 그냥 우리 아버님께서 마루 밑으로 수저를 집고 잡숫던 밥얼 수저를 집고 내려 가시더니 마당에다가 짚을 깔고 물을 한 동을 실어다가 놓고 동향 사배를 절을 동서남북에 절을 인사럴 하고 그 전에넌 곡얼 허고 그랬습니다. 그래 지금은 모다 높은 양반덜이 죽으문 세상을 떴네, 돌아가셨네 그러지만은 그 때는 임금님이 돌아가시문 승하하셨다고 승하. 돌아가셨다는 말얼 승하힜다고 그렇게 말얼 합니다. 그래 우리 부친께서 그래서 부안읍얼 가서 댓잎얼 사서 쓰고 흰옷얼 입고 서울얼 가서 다녀오고 모다 그랬든 것이 네 살, 세 살 먹었일 때 그것이 지금 생각이 납니다. 그러니 지금 허는 일언 깜박깜박하고 다 잊어 버리고 정신이 없고 그러지만은 그 전에 모다 지내 나왔든 일언 자꾸 생각이 많이 나고.
노재명: 예, 국악, 판소리를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 결심을 하시게 된 어떤 동기가 있으셨나요?
홍정택: 처음에 부안에서 전일도씨, 조몽실씨, 다, 임방울씨, 전명옥씨, 박초선씨, 다 이런 명창분덜이 와 가지고 협률사럴 허는디 무대 밑이서 내가 그 때 열 네 살, 이렇게 열 세 살 먹었을 땐데 듣고 무신 정신이 그렇게 좋았던지 거 허넌 분덜의 소리럴 바로 듣고 바로 비양을 냈습니다. 그래 모다 조 선생님이랑, 전일도 선생님이랑, 임방울씨랑 “하이고 저런 인재가 없다”는 것이요. 서로 제자럴 삼을려고 경장도 안했어. “내 제자다, 내 제자다” 모다 이렇게 되고 바로 기냥 얼마 안되아서 무대에 올라가서 “임자 없는 녹수청산 일모황혼 저문 날으 월출동정으 잠을 깨어~” 이 무대를 그리서 목얼 써서 어려서 목얼 어떻게 좋았던지 그냥 멀리도 가고 아조 구경꾼덜이 그냥 박수가 자갈자갈, 무대에 올라와 가지구 나를 업고 나를 보듬고 그냥 이뻐서 이런 정도럴 한 두 번이 아니구 많이 갈 때마다 어디든지 가문 그랬습니다. 그래서 부안 군내를 전부 다 면면 촌에 다 순회를 허고 이후에 그 명창분덜이 나럴 데리고 대니면서 방방곡곡 한국언 거진 다 다녔습니다.
노재명: 예, 그 박초선씨 언급해 주셨는데요 판소리 명창 박초월씨 언니 되시는 분이고 아, 비양을 잘 내셨다 하셨는데 전라도 사투리죠 흉내를 잘 내셨다, 명창들 흉내를 잘 내셔서 일찍이 무대에서 주목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홍방울’이라는 호칭을 받으셨는데요 그 홍방울이라는 명칭은 어떻게 받게 되셨는지 회고담 부탁드리겠습니다.
홍정택: 무대에서 소리럴 허면은 그 때 “임방울! 임방울!” 명예가 말할 수 없는 양반인디 나는 “홍방울이다! 홍방울이다!” 이렇게 되았어요. 그 찬성 받은 그 때 말로야 누가 지금 듣는다 할지라도 곧이 안들을 테지만 어마어마했었습니다.
노재명: 예, 그렇게 홍정택 선생님께서는 열 네 살 때 부안에 들렸던 협률사를 따라서 나선 것이 판소리 수업의 발단이 되었구요 그 협률사에 임방울, 전일도, 조몽실, 박초선, 이런 명창이 계셨는데 전일도 명창은 일제시대 때 유성기음반을 낸 분이구요 많은 소리꾼들이 기억을 잘 못하고 계시는데 홍정택 명창께서 이 전일도 명창을 기억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전일도 명창에 대해서 궁금한데요 어떤 분인지 전일도 명창에 대해서 회고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홍정택: 전일도씨는 그 때 나이가 오십이 넘어서 육십이 넘은 그 땝니다, 난 어렸지만은. 그 냥반이 무대 가서 올라가서 소리 한다고 봐서는 이빨이 빠져 가지고 말이 헛나가는 수가 있어요. 흥보전얼 허는디 “시리렁 실근 당그여라 톱질이야~” 여그를 허는디 이빨 빠져서 말이 헛나가니까 “여으여어루 톱질이로오~”(진양조 창 시범) 지금 나 같이로, 늙어서 나 같이로 그 말이 헛나가고 모다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걸 생각하문 지금두 생각이 나는디 무대 밑이서 듣구서 웃기두 허고 그걸 비양얼 바로 내고 그랬습니다. 하하하.
노재명: 네, 그리고 이기권 명창한테 판소리를 또 배우셨죠?
홍정택: 이기권씨넌 대가죠. 그 분이 오바탕 소리럴 다 하고 아조 멋이 있고 속멋이 있어서 오바탕 소리뿐만 아니라 대금도 비양얼 내고 거문고도 아조 잘했습니다. 그러구 월명사 절에서 공부를 헐 적으 처음에는 내가 사춘기라 놔서 목이 안좋아서 그냥 그랬넌디 한달, 두달 지내닝깨 그 때 일곱이, 윤만준이 누구 누구 누구 누구 누구 해서 강종철이, 죽은 강종철이까지 같이 공부럴 했었어요. 그런데 그 중에서 내가 제일 빠졌어. 모도 목이 기냥 괄아 가지구서 성대가 나뿐개. 처음엔 선생님이 미움을 줬는디 한 두달, 한달 이렇게 딱 되니깨 목이 쉬어서 쉰 목에서 공력과 모든 것이 딱 성음이 나오넌디 기가 맥혔던 모냥이여. 그래 월명사 절 우그서는 선생님이 낮잠을 주무시고 밑이서는 내가 공부럴 허고 있는디 우그서 선생님이 듣다가 나를 부르시며 “정택아!” 갑자기 “너 잘하겄다 명창이다, 아이 소리 어서 히봐라.” 한 소리럴 바로 또 돌아서 딱 하는데 내 손을 꽉 잡더니만 “하이구 내 제자야! 음 인자 내가 옳은 제자럴 두었다.” 인제 일곱 사람 제자덜이 샘이 나가지고 나를 기냥 미워서 말헐 수가 없고 수군수군수군수군수군수군. 말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공부럴 마치고 선생님이 나럴 데리고 서울이네, 이리 그 때 그 한성관이라는 데가 있는디 재벌가 분덜얼, 분덜 집얼 다 대니면서 이리로 초대럴 해가지고 기냥 나럴 소리럴 시키고 그러는디 거 여자덜 분덜이 그 때 소리럴 듣고 목이 어찌 이쁘고 좋던지 반해 번졌어. 하하하하하하하하. 반해 번졌어. 그래 연애편지가 모다 자꾸 오고 이루 말할 수가 없고 목걸이에다 천금, 시계, 금반지, 금팔찌, 이런 것이 공석에 모다 들어오고. 아 우리 선생님 덕분에 내가 이렇게 훌륭케 되았으니 나는 우리 선생님으 공을 갚아야겠다 허고, 우리 선생님밲에 없다는 것이로 말할 수가 없고.
노재명: 예, 홍정택 선생님께서 스무살 무렵에 이기권 명창 모시고 부안 월명사 절에 가서 공부하신 얘기를 지금 들려주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이제 사춘기 때 목을 버려서 이기권 선생님께서 못마땅해 하시다가 나중에 이제 목이 좋아지니까 스승으로서 아주 예뻐하셨던, 그리고 자랑하고 다니셨던 그런 회고담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 이기권 명창한테 단가가 여럿 있으신데 그 중에서 그 <적벽부> 배우셨던 <임술지>라고도 하는 단가인데요 그 회고담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홍정택: 처음에 내가 이기권 선생님한티 공부럴 헐 때 단가럴 “임술지 추칠월~” 그 단가럴 내가 배와 가지고 시방 그 단가 하넌 분덜이 몇몇 사람이 있을 테지만은 죽은 안향련이가 그 단가럴 잘했고 또 내가 그 단가는 많이 했었습니다. 내가 가르친 사람도 더러 있고.
노재명: 예, 그러면 소리를 한 곡 듣고 다음 순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홍정택 명창의 특기인 단가 <적벽부>인데요 2003년도에 홍정택 명창 자택에서 녹음했던 자료입니다. 홍정택 명창의 소리와 이종달씨의 북 반주로 단가 <적벽부> 감상해 보시겠습니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6mm 비디오테입(DVC) 관리번호 MI6V-0385
2003.3.28.15:30~17:30.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4가 홍정택 자택 방안. 홍정택(소리) 이종달(북) 단가 <적벽부>(정정렬-이기권제) 현장 녹음. 대담·녹음·촬영:노재명.
노재명: 예, 홍정택 명창의 단가 <적벽부>, <임술지>라고도 하는 단가인데요 정정렬 명창을 거쳐서 이기권 명창한테 이어졌고 홍정택 명창께서 이기권 선생님한테 배우셨던 단가였습니다. 2003년도 홍정택 명창 자택에서 녹음되었던 자료였습니다. 홍정택 명창께서는 부안 월명사 절에서 이기권 선생님 모시고 단가, 수궁가, 심청가, 춘향가 배우시고 나서 나중에 어떤 재실에서 또 이기권 명창한테 적벽가, 흥보가, 숙영낭자전을 또 배우셨습니다. 그래서 이기권 명창한테 배우신 수궁가로서 1984년에 홍정택 선생님께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1호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홍정택 선생님께서 이기권 명창한테 소리를 배우고 나서 다시 또 목이 좋아졌다가 국악 단체 활동하시면서 목이 안좋아졌다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단체에 계셨는지 회고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홍정택: 우리창극단은, 우리 성님이 고수 북을 잘 쳤습니다. 이름이 홍두환씨요. 그런데 김옥진씨와 살게 됐습니다. 김옥진씨라고 화중선, 김옥진, 조홍도, 조홍련, 그 전에는 다 국창덜 아닙니까 그 때는 참. 그 분덜하고 모다 같이 우리 성님이, 큰 성님이 대니다가 단체 협률사라고 그 때도 우리 성님이 협률사럴 가지고 각 처를 다니는데 거 고려창극단이라고 있지요?
노재명: 예, 김칠성씨가 단장으로 있었던 고려창극단이요.
홍정택: 고려창극단. 나하고 죽은 우리 형아 있었습니다. 시방 그 단체 우리 형님으 역시 그 전 명창들하고 다 순회를 했넌디 또 역시 그 우리 형님 단체 고려창극단에서 방방곡곡에 대니면서 협률사를 갖고 다녔었습니다. 창극얼 가지고 많이 다녔었고 찬성도 많이 받고 대접도 많이 받고.
노재명: 예, 30대 때 김칠성씨가 이끄셨던 고려창극단, 또 김연수 명창이 이끌었던 우리국악단에서 활동하신 그 회고 말씀이었습니다. 단체 생활로 목이 나빠져서 집에서 좀 쉬시다가 또 판소리 사범으로 나가셔서 활동을 하셨죠?
홍정택: 대구 가서 내가 판소리 가르쳤지 또. 대구가 국악원을 만들어서 그 때는 잘 만들었습니다. 또 대전 가서도 내가 가르쳤고 정읍 가서도 가르쳤고 군산 가서도 가르쳤고 여러 군데 다니면서 가르치고 전주서는 그 전라북도에 사는 송영주, 전경석, 세 분이 군산 선생으로 있는디 와서 밥 먹자고 하고 데리고 와서는 전주다가 선생으로 딱 앉혀 놓구는 못간다고 전라북도서 국악원 선생으루 있이라구래서 전동 학원, 처음 거기 전동 학원서 선생 노릇얼 해가지고 지금까지 히나옵넌디 그 제자분덜언 다 말할 수 없이 많지만은 그 지금 현시 내 직접 전수자 대통령상 탄 숫자만 지금 다섯인가, 여섯인가 됩니다. 장관상 탄 사람 제자는 많이 있고.
노재명: 예, 그렇게 해서 대구, 대전, 정읍, 군산에서 소리 사범으로 활동을 하시다가 전주에서 모셔서 전주에서 또 지금까지 판소리 사범으로 크게 활약을 하셨습니다.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판소리 인간문화재 홍정택 명창 방송 편을 듣고 계십니다. 홍정택 명창의 소리를 한 곡 또 듣고 다음 말씀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홍정택 선생님께서 무형문화재로 보유하고 계신 판소리 수궁가 가운데 <고고천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북 장단은 아드님 되시는 홍성기씨께서 맡아 주시겠습니다.
2012.1.31.08:30~12:30.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1가 신일아파트 홍정택 명창 자택. 홍정택(소리) 홍성기(북) 판소리 수궁가 중 <고고천변> 현장 녹음.
노재명: 홍정택 명창의 판소리 수궁가 중에서 <고고천변>. 홍정택 명창의 아드님 되시는 홍성기씨의 북 반주로 이 곳 전주의 홍정택 명창 자택에서 들려 주셨습니다. 홍정택 선생님께서 젊어서 이기권 명창한테 사사한 귀중한 판소리였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스승인 이기권 선생님께서 판소리를 가르쳐 주시면서 특별히 강조한 점은 무엇입니까?
홍정택: 우리 선생님 그 전에는 나뿐만 아니라 그 전 책을 놓고 수궁가문 수궁가럴 가르칠 적으 “자 너 적어라!” 가사럴 딱 적었습니다. 적으문 한 장단, 한 장단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소리럴 혀 혼자, 선생님 혼자. 2분이구 1분이구 싹 허구넌 그렇게 히라. 들었으문 그렇게 히라 허구 누워뻔져. 누워서 너 히라 허구. 지금 같이로 가르치덜 않구 어마어마힜다구. 그러문 그 때 듣고 그 책얼 보고 가사 하고 갖고 가서 애를 쓰고 곡얼 어떻게 했던가, 발성법얼 어떻게 했던가 연구럴 허면서 공부럴 했지 지금 같이로 하나하나 똑똑 이렇게 일러 주지럴 않했습니다. 말로 다 형언할 수가 없고 고생 고생이라는 것언 말헐 수가 없고.
노재명: 예, 예전 그 판소리 명창 중에는 간혹 아편을 하신 분들이 일제시대에 좀 더러 있어서 젊은 소리꾼들이 판소리 학습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 이런 회고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스승 중에서 혹시 아편을 하시는 분들이 있었는지, 그로 인해서 어려움은 없으셨는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홍정택: 그 전에 분덜언 멋있넌 분덜언 아편을 조끔씩 다 한번씩 히봤어. 그런데 기권 선생님언 아편 중독자가 아니라 어쩌다 한번썩 가끔 손 댔넌디 중독자넌 아니었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노재명: 네.
홍정택: 그리고 그 전 분덜언 거진 다 그런 아편얼 손 댔다고 하지만 임방울씨넌 아편을 순전 대덜 않했습니다. 내가 아닝개 내가 징인인개. 동초도 아편얼 안했습니다.
노재명: 예, 김연수씨요. 네.
홍정택: 박초월씨도 않고 김소희씨도 않고 여자분으로 전부 다, 다 안했어요. 그 중으로는 아편 안했어요. 허지럴 안했어요 예능계덜이 지금.
노재명: 예.
홍정택: 그 전에 인자 국창 분덜언 더러 댔넌디 내가 아는 바는 국창 중에서도 송만갑씨네, 이동박씨네(이동백), 정정렬씨네 다 아편 안댔습니다.
노재명: 예. 동초 김연수 명창한테도 판소리를 익히셨죠?
홍정택: 이리 소라단에, 이리 거시기 그 재실이 있어요. 거기서 소라단, 소라단. 재실이 있어. 그런디 거기서 오정숙, 죽은 김동준이라고 북도 잘 치고 소리도 잘했습니다.
노재명: 예,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시죠.
홍정택: 거기서 동초 선생한티 소리를 좀 배우다가 동준이하고 나하고는 쪼끔 인자 거기서 쪼끔만 인자 힜고 오정숙은 거기서 오바탕 소리럴 동초 선생한티 다 했습니다. 그래서 여자로서서 오정숙이가 아조 소리럴 잘했습니다.
노재명: 예, 그렇게 홍정택 선생님께서 50대 때 두 달간에 걸쳐서 이리 소라단 재실에서 오정숙씨, 김동준씨와 함께 동초 김연수 명창한테 수궁가를 배우셨는데요 이기권 명창의 수궁가와 동초 김연수 명창의 수궁가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홍정택: 조끔 달부다구, 곡도 달부고 멋도 달부고 달버 달버요. 동초 선생은 그 전 그 저, 고창 신재효씨 그 냥반한티 책자럴 연수씨가 만들어서 그 이면, 경우럴 많이 가려서 히서 거 명창입니다. 명창이고 긍개 목이 좀 성대가 조금 좋지 못해요. 그래서 그렇지 이면, 경우가 아조 훌륭헌 명창입니다. 국창입니다. 아 이기권 선생은 속멋에서 우러나 가지고 맘에서 멋에서 우러나 가지고 소리럴 오바탕얼 다 잘힜고.
노재명: 예, 홍정택 선생님께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장시간 이렇게 얘기를 들려주고 계시는데요 92세신데 허리도 안굽으시고 아주 지금 꼿꼿한 자세로 말씀을 해주고 계십니다. 2009년 10월 28일에 안타깝게 사모님 되시는 판소리 인간문화재였던 김유앵 명창께서 별세하셨습니다. 평생을 같이 부부 명창으로서 활동을 하셨는데요 김유앵 명창과는 언제 처음 알게 되셨는지 회고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홍정택: 김유앵, 우리 처는 단체에서 어려서 인자 그 순회를 다니다가 단체에서 처음으 만날 때 어떻게 재주가 있던지 내가 생각헐 때넌 저런 재주가 있을 수가 없다 이런 생각으루 예쁘게 봐서 서로 만나게 되았습니다. 만났는데 그 때 창극을 허는디 김유앵, 우리 처는 춘향도 되았다가 향단이도 되았다가 방자도 되았다가 이것이나 저것이나 맽기문 다르르르르르르니 다 숭을 내고 그랬습니다.
노재명: 예, 국악계의 김유앵 명창 두 분이 계십니다. 일제시대의 김유앵씨가 계시고, 홍정택 선생님의 사모님 되는 김유앵 명창 최근의 국악인이 계신데 홍정택 선생님께서 10대 중반에 김유앵 명창을 처음 만나서 두 분이 함께 일평생 국악 활동을 하셨구요. 2009년에 김유앵 여사님은 80세로 별세를 하셨습니다. 두 분이 젊으셔서 이기권 명창한테 같이 판소리를 사사하신 바가 있습니다. 홍정택 명창께서는 1975년 9월 22일에 첫 번째 전주 대사습놀이 판소리대회 명창부에 참가하신 바가 있습니다. 당시 본선 경연 녹음을 준비했습니다. 홍정택 명창의 젊은 시절 녹음을 들을 수 있는 귀한 자료입니다. 이기권 명창한테 배우신 판소리 적벽가 가운데 <적벽대전에 패한 조조 군사들이 좁은 길로 도망 다니는 처참한 대목> 그 실황 녹음입니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카세트테입(MC) 관리번호 MIMC-1393(2003년 3월 28일 김유앵→국악음반박물관 증정)
1975년 9월 22일 제1회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대회 명창부 본선 경연 실황 녹음. 홍정택(소리) 김동준(고수) 정정렬-이기권제 판소리 적벽가 가운데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조조 군사들이 좁은 길로 도망 다니는 처참한 장면> 감상.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컴팩트디스크(CD) 관리번호 MICD-4728~4731
동초 김연수 창 판소리 다섯바탕 - 수궁가(소리:김연수, 북:김득수)
동아일보 음원 제공, 신나라 제작 NSC-187(4CD 박스물), 1967년 동아방송 녹음, 2007년 제작.
[CD 1] 5.토끼화상(5:08)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판소리 인간문화재 홍정택 명창 방송 편을 듣고 계십니다. 예, 일평생 판소리를 거의 90년 가까이 이렇게 하셨는데요 판소리가 그렇게 좋은 점, 판소리가 지닌 매력은 무엇인지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홍정택: 판소리가 중허고 좋다는 것얼 어찌 아느냐. 오바탕 중에 삼강오륜(三綱五倫)이 들어있습니다. 삼강오륜이라는 것언 잘 아시다시피 첫째는 나라를 위하는 일이요.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이게 삼강 아닙니까. 또 오륜이라는 것언 장유유서(長幼有序), 형제화목(兄弟和睦) 동기간 우애, 또 수상서화럴 알아본다는 거. 그래 삼강오륜이라 그래서 판소리를 지중허게 거기 그 법이 아니면은, 전부 삼강얼 지키지 못허문 좀 미안헌 말이나 동물이나 똑같지요.(삼강:군위신강·부위자강·부위부강, 오륜:부자유친·군신유의·부부유별·장유유서·붕우유신)
노재명: 네.
홍정택: 사람의 짓을 헐라구 봐서는 임금, 대통령얼 알아야 하고 이후에 좋은 분덜 모범얼 히나가야 허고 좋은 것얼 자꾸 선택해 나가야 허는 것이 삼강오륜이라. 그 법이 아니면 사람이라구 인정헐 수가 없다.
노재명: 예, 홍정택 선생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까 꾀꼬리 같은 그 목소리, 그런 성음보다도 판소리가 가지고 있는 정신, 삼강오륜이라든지 그러한 부분을 가장 중요시 하는 판소리 명창으로서의 판소리 철학을 느낄 수 있는 아주 감명 깊은 그런 말씀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홍정택 명창이 평소에 애정을 가지고 연마하신 특장이라고 할 수 있는 소리를 한 곡 청해 보고 싶습니다.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판소리 열사가 중에서 안중근전인데요 청취자 여러분들을 위한 선물로 부탁을 드릴까 합니다. 여기서 북 장단은 아드님 되시는 홍성기씨께서 맡아 주시겠습니다.
2012.1.31.08:30~12:30.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1가 신일아파트 홍정택 명창 자택. 홍정택(소리) 홍성기(북) 판소리 열사가 중에서 안중근전 현장 녹음.
노재명: 홍정택 명창의 판소리 열사가 중에서 안중근전이었습니다. 오늘 특별히 청취자 여러분들을 위한 선물로 즉석에서 불러 주셨는데요 대단히 감사하고 감명 깊은 소리였습니다. 이 곳 현장이 홍정택 명창의 자택 아파트인데요 이 주민 여러분들이 전주분들이 판소리를 좋아하셔서 그런지 이렇게 북 치고 소리를 크게 해도 “대한 독립 만세!” 이렇게 해도 양해를 해주시고 과연 국악의 고장이구나, 판소리 마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열사가는 어느 분한테 배우신 판소리인가요?
홍정택: 그것도 이기권 선생, 동초 김연수 선생 하는 걸 듣고 이준 선생 비양하고 윤봉길 선생 비양도 내고 그 안중근전 선생도 허고 세 분의 소리를 다 했었습니다. 했는데 지금은 가사가 맥히고 눈은 어두워서 책은 못보고 그랬으나 안중근 사거를 제일 많이 했기 따문에 비양이라도 낸다고 내는디 마음대로 허덜 못헙니다.
노재명: 네, 아드님 되시는 홍성기씨께서 지금 북 장단도 치시고 홍정택 선생님의 사모님 되시는 김유앵 명창께서 또 판소리 활동도 하셨고 형님, 또 사촌형님이 판소리 명고수셨고 또 조카 되시는 분께서 국악계에서 큰 활약을 하시는 홍성덕씨구요. 또 손녀 되시는 분들이 현재 판소리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요 김세미씨, 김선미씨가 현재 판소리 중견으로서 크게 활약을 하는 젊은 소리꾼입니다. 그래서 그 중에서 김세미씨 인터뷰 말씀을 듣고 또 다음 순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김세미: 안녕하세요. 저는 홍정택 선생님 손녀딸이자 전라북도립창극단 지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세미라고 합니다. 가족들에게는 굉장히 엄한 분이세요. 그리고 본인 주장이 굉장히 강하시고 또 집안의 어른으로서 지금도 챙기셔야 할 일들이나 가족들의 대소사 꼼꼼히 다 모두 본인이 체크하시고 또 가족들에게는 한치의 실수나 게으름 이런 거를 쪼끔도 용서를 하지 않으시는 분이세요. 그리고 또 선생님으로서는 지금도 아직도 소리에 대한 열정이나 국악 발전에 엄청난 애정이 많으시고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세요. 아침에 지금도 일어나시면 한 시간쯤은 누워서 자장단에 그 소리를 연습을 하시고 건강에 맞춰서 본인이 개발하신 운동이 있으세요. 그거를 한 시간쯤 한번도 게으르지 않고 평생을 암튼 노력하시면서 사시는 그런 분이신 것 같애요. 기쁜 일이 있을 때 좋은 일이 있을 때 두 배의 기쁨이라는 게 장점인데 속상하고 안타까운 일이 있을 때 또 두 배의 슬픔과 두 배의 시선을 받아야 된다는 거. 제가 어렸을 때는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열심히 대회도 나가고 막 그럴 때 남한테 나는 정말 열심히 해서 인정을 받는데 그 외부의 시선은 누구의 손녀딸이니까, 누구 선생님 애제자니까 이렇게 따가운 시선을 받을 때 고통 아닌 고통스럽더라구. 마음이 괴롭더라구요. 제가 2001년도에 남원 춘향제 때 제가 대통령상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 해에 사월 초파일에 절에 간 일이 있어요. 절이 높고 그러니까 잘 안가시는데 그 해에는 저 보고 절에 가자고 먼저 막 서두르시더라구. 그래서 같이 모시고 절에를 갔는데 절은 잘 안하시거든. 그냥 묵념 정도 이렇게 하시지 절을 안하시는데 그 날은 엎드려서 절을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인제 본인이 절을 하신 다음에 나 보고 또 절을 하라고 그러시더라구요. 그러면서 할아버지 오늘은 왜 절을 하셨느냐구 제가 여쭤 봤더니 본인도 그러시지만 니 대회를 앞두고 내가 부처님한테 모든 걸 감사하고 사죄하고 그런 마음에서 내가 오늘 절을 했으니까 올해 대회 나가서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노래만 열심히 해라. 그런 말씀을 하시드라구요. 그래서 지금도 간혹 제가 마음에 어려운 일이 닥쳤거나 상처를 입거나 그랬을 때는 그 날 그 생각을 제가 가끔 해요. 주말마다 모시고 다니면서 제가 인제 어디 저희 할아버지가 복탕을 특별하게 좋아하시거든요. 여기 주변의 맛있는 복탕은 다 사드릴려고 그래요. 그리고 인제 앞으로 인제 그 노래를 얼마나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건강이 허락하시는 한 저희 할아버지가 오래된 단가를 많이 알고 계시는 게 있거든요. 그래서 단가 모음집을 한번 내보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같이만, 딱 지금 같이만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제가 할아버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라고 짤막하게 단가 한마디 선물 해드릴께요.
2012.1.31.08:30~12:30.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1가 신일아파트 홍정택 명창 자택. 김세미(소리) 홍성기(북) 단가 <사철가> 현장 녹음.
노재명: 네, 말씀 감사합니다. 일평생 홍정택, 김유앵 명창과 손녀 김세미 명창이 함께 국악, 판소리에 흠뻑 취하셔서 국악에 헌신하고 계신 삶, 힘드신 부분도 많으시겠지만 아주 부러운 그런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는 이 곳이 이제 판소리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전주구요 예로부터 그 명창들이 즐겨 불렀던 이 곳 호남 지역의 단간데요 단가 <호남가>를 홍정택 선생님의 소리와 아드님 되시는 홍성기씨의 북 장단으로 이 현장에서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2012.1.31.08:30~12:30.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1가 신일아파트 홍정택 명창 자택. 홍정택(소리) 홍성기(북) 단가 <호남가> 현장 녹음.
노재명: 네, 홍정택 명창의 소리와 아드님 되시는 홍성기씨의 북 장단으로 단가 <호남가> 이 현장에서 직접 청해 봤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아까 송만갑, 이동백 명창 말씀도 잠깐 언급을 해주셨는데요 송감찰이라고도 하고 이통정이라고도 하는 그 벼슬 직함을 받으셨던 예전 그 명창들에 대해서 회고 말씀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홍정택: 송만갑씨는 국창으로서서 이 소리를 떡 내려쳐서 떡 치듯기 고제럴 하는 분입니다. 아주 고제입니다. 이동백씨는 풍신이 좋고 기운이 아조 좋고 내가 어려서 이동백씨나 송만갑씨나 다, 다 알고 이동백씨가 목포 공연을 가는디 기차에서 풍신이 좋고 하도 훌륭허게 생긴개 젊은 사램이 “저게 이동백씬가?” 허구 먼 디서 그랬다 그 말이요.
노재명: 네.
홍정택: 그런개 그 말을 이동백씨가 알어 듣고 “얘 이놈! 네가 이놈 니 애비도 없고 니 할애비도 없냐? 이놈! 때려 죽일 놈 이놈, 저 것이 이동백이냐구? 너 이놈!” 허고 가슴을 딱 두 손으로 잡아 갖고 꼭 올려 놓고 “네 이놈!” 아조 장사라 놔서. 그러고 목포 공연을 가셔서 그 소리를 헐 때 어떻게 기운이 좋고 그러는디, 뭐라고 허시는고 허니 그 쑥국새가 우는 그것이 있는디 “저 쑥국새가 울음 운다.” 동백씨 말로, 이통정 말로. 다른 사람은 쑥국새 소리가 입이서 ‘쑥국! 쑥국!’ 허지만은 이통정은 저 기통 속에서 나오던 것이었다. 그러고 ‘쑥국! 쑥국!’ 했어요.
노재명: 예, 방금 홍정택 선생님께서 회고 말씀도 해주셨는데 그럼 방금 홍정택 선생님께서 언급해 주신 그 이동백 명창의 소리가 어떤지 실제로 한번 들어보고 또 다음 순서를 이어갈까 합니다. 전설적인 판소리 대가 이동백 명창이 1928년에 녹음한 잡가 <새타령> 유성기음반 음원입니다.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유성기음반(SP) 관리번호 MISP-1102, MISP-1708, MISP-1865, MISP-1866, MISP-2239
Victor 49033-A 南道雜歌 各鳥打令새타령 獨唱李東伯 長鼓池東根
이동백 잡가 <새타령>(3:17, 1928년 6월 6일 녹음, 장고:지동근)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판소리 인간문화재 홍정택 명창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방금 들으신 음악은 홍정택 명창께서 젊어서 목격한 이동백 명창의 절창 <새타령> 1928년 음원이었습니다. 이 소리는 방송 애청자 김덕영씨께서 신청해 주신 곡이기도 합니다. 일평생 판소리 활동을 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어떨 때 가장 기뻤다, 어떤 순간일까요?
홍정택: 어려서 소리럴 무대에서 허면은 박수럴 치고 그러면은 그것이 제일 좋았고 가식으로 박수가 아니라 진짜로 나오는 그 때 아조 기분이 좋았고 또 전라북도에서 일로서서 수고를 많이 했다고 문화재를 만들아 준, 주신 것얼 생각허면 감사하다고 생각허고 있습니다.
노재명: 예, 홍정택 명창께서 인간문화재로 인정받으셨고 또 그 판소리 예술을 부흥시키기 위해서 학교를 비롯해서 각지에 강의를 많이 다니셨는데요 홍정택 선생님의 뒤를 잇는 제자로 어떤 분들이 있는지 소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홍정택: 어, 최승희씨는 어려서 전동 학원에서 기초만, 또 조소녀씨도 처음으 공부럴 헐 때에 그 박자키만 일러 주었지 명창 되는 정도는 조소녀씨는 다른 선생님한티 사사럴 받고 동초 선생한테 사사받고 다 히서 명창 말을 듣고 문화재가 다 되았습니다. 제일 처음이 수제자 된 것이 김세미, 김선미가 있어요 선미. 저 이종달, 이선규, 강영란, 강현미.
노재명: 예, 홍정택 선생님께서 일찍이 여러 제자분들을 많이 양성을 하셨는데요 이 전주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판소리 인간문화재 최승희 명창을 비롯해서 조소녀씨, 전정민씨, 조영자씨, 윤소인씨도 판소리 기초를 또 홍정택 명창께 익히신 바가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홍정택 명창의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제자인 강영란씨의 인터뷰를 통해서 홍정택 명창이 어떤 분인지 이야기 듣고 다음 순서 또 이어가겠습니다.
강영란: 안녕하세요. 저는 홍정택 선생님의 제자 강영란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첫째 인물치레라고 이렇게 항시 말씀하시고 소리 할 때도 목 같은 거 막 승질대로 하지 말고 마음을 가다듬고 긍개 음정부터 천천히 그런 거 말씀하시고 항시 공부를 암튼 쉬지 말고 끝까지 하라는 말씀. 아랫 사람한테도 항시 존대로 항시 그런 걸 항시 해오시거든요. 아랫 사람한테 절대 뭐 가라 야, 뭐 지금도 그러시거든요. 긍개 저도 그렇게 보고 듣다 보니까 저도 그렇게 할 때가 많드라구요. 그래서 아 참 어떤 다른 선생님들은 그렇게 안하세요. 그런데 우리 선생님은 참 진짜 그런 것이 좀 있으신 것 같애요. 저희 선생님 항시 건강하시고 더 오래오래 사시라고 제가 저희 선생님께 배운 수궁가 중에서 초앞 쪼끔만 제가 들려드리겠습니다.
2012.1.31.08:30~12:30.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1가 신일아파트 홍정택 명창 자택. 강영란(소리) 홍성기(북) 판소리 수궁가 초입 현장 녹음.
노재명: 예, 판소리 인간문화재 홍정택 명창의 제자인 강영란씨의 인터뷰였습니다. 홍정택 명창께서는 1980년에 전라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셨습니다. 그리고 1986년부터 5년간 전라북도 도립국악원 판소리부 교수로 활동을 하셨구요 1991년에는 전주 시내에서 판소리 연구소를 내시고 다년간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쓰셨습니다. 수궁가 완창 음반을 발표하신 바가 있구요 최근 2011년 여름에는 홍정택 명창을 기리는 책이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홍정택 명창의 고향인 부안에서는 매년 선생님의 호를 이름으로 한 ‘추담 전국국악경연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 동안 많은 활약을 하셨는데요 국악계에서 앞으로 좀 필요하겠다 인제 그런 말씀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홍정택: 이 국악계의 발전이 되고 세계의 발전이 되고 각 나라에서도 한국의 국악을 기가 맥히게 알고 어렵다는 것얼 다 깨치고 그럴 것이고 그란디 더욱이 더 그럴 수록에 빛나게 허고 모다 고생 없이 앞으로 잘 살아 나가기럴 바래고 바라는 바입니다. 우리나라 국악, 판소리는 아까 말과 같이 삼강오륜이 있기 따문에 대대로 대대로 끊지지 않고 나아갈 것입니다.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오늘은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에 있는 홍정택 명창의 자택에서 인간문화재 홍정택 명창과 함께 인터뷰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92세이시구요 국악계 원로로서 인생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은지 조언 말씀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홍정택: 인생이라고 하면 사람의 짓얼 허는 것이 인생. 부모에게 효 하는 것이 인생. 사람 짓 하는 게 인생이지. 인생이 별 말은 없고.
노재명: 예, 아쉽게도 인제 마칠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요 앞으로 소원, 포부, 계획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홍정택: 앞으로 허고 싶은 것이 아 내가 수궁가로 문화재가 되었으니 수궁가럴 주로 허고 싶고 아 춘향전이네 심청전이네 흥보전이네 다 지금 내가 머리, 마음 속에 다 있기는 있다고. 허덜 못허니깨 그러제 기운이 없어서.
노재명: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어느덧 마칠 시간이 다 됐습니다. 오늘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 홍정택 명창과 함께 했습니다. 숙명처럼 일찍이 판소리 분야에서 외길 인생을 걸어 오셨고 100세를 바라보시는 연세까지 평생 국악에 헌신한 인간문화재 명창의 말씀을 통해서 판소리의 소중함, 진수를 깊이있게 알 수 있었습니다. 1970년대 꺼져 가던 판소리를 살리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시고 결국엔 그 맥을 후배들에게 잘 전달해서 판소리를 널리 부흥시키고 현재도 열심히 전승하고 계신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늘 홍정택 명창, 그리고 가족, 제자 여러분들 모두 긴 시간, 감동적인 음악, 귀한 말씀 대단히 감사합니다. 선생님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홍정택: 수고덜 했습니다. 여러분덜 욕 보시고 아,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가십시요.
노재명: 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방송과 무대, 음반으로 여러분들과 아주 자주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0세 넘도록 아주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당대 국악계 최고 실력가 예인들과 함께 하는 시간 ‘소리의 힘, 명인명창 100’ 지금까지 진행에 노재명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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