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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1984년 5월 7일 오후 7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제3회 국악 대공연' 안내 인쇄물 40~41쪽에 실린 글입니다.
컴퓨터 입력/교정/편집: 2011년 12월 24일 국악음반박물관(http://www.hearkorea.com)
* 1984년 5월 7일 오후 7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제3회 국악 대공연'에서 정권진 명창은 김명환 명고수의 북반주에 맞춰 판소리 심청가 중 <심청이가 시비 따라 건너간다> 대목을 공연함.
* 상기 사진: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1984년 무렵 판소리 명창 정권진 모습.
* 정권진 명창: 1986년 2월 6일 별세.
소리 법도 지키는 정권진 - 마디 마디 마다 밀고 푸는 성음의 변화에 기품이...
글/이보형(국악음반박물관 판소리연구회 고문, 한국고음반연구회 회장)
지금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영천리에는 송계 정응민(松溪 鄭應珉) 명창의 기념비가 서있다. 이 비(碑)가 서있는 곳은 본디 송계 선생이 젊은 제자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던 초당이 있던 자리이다.
정응민 명창은 유시(幼時)에 고향 보성을 떠나 서울에 올라와 협률사(協律社)의 지방 순회 공연에 참가한 적이 있으나 뜻한 바 있어 고향으로 내려와 오로지 제자만을 가르치며 묻혀 살았다. 나라가 망하고 어수선한 판에 전국을 두루 다니며 소리 한다는 것이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할 도리가 아닐 듯 싶어서 고향에 널찍하게 농토를 마련하고 농사를 지으며 각처에서 모여드는 제자들에게 소리를 가르쳤다.
원각사(圓覺社) 이래 많은 명창들이 창극에 열중한 나머지 판소리(古制)의 전승이 어려웠던 것을 두고 보면 송계(松溪) 선생이 향곡(鄕谷)에 묻혀 옛 판소리를 간직하고 제자들에게 교육하므로 해서 오늘날 고제 판소리가 그대로 전승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판소리계를 주름잡는 많은 명창들이 송계 선생 문하에서 나온 것을 생각하면 판소리 전승을 위해서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송계 선생은 오직 독자(獨子)로 아들을 하나 두었으니 정권진(鄭權鎭)이다. 송계 선생은 좀 늦게 얻은 금지옥엽(金枝玉葉)과 같은 아들이 집에 머물러 농사 짓기를 바랐고, 행여 소리를 배워 가객(歌客)으로 행세하며 천하를 두루 떠도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당초부터 소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부친의 성품을 이어 받아 온화하고 강직한 정권진은 부친의 뜻을 저버릴 수가 없어 소리를 직접 배우지는 않았으나 부친이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소리를 밤낮으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놓으니 소리속을 훤히 꿰고 있었고 이것을 매일 학교에 오가며 스스로 흥에 겨워 불러본 것이 어느덧 구성이 오르고 소리의 깊은 속과 진맛을 깨닫게 되자 소리 공부에 대한 소망이 간절하였다. 부친에게 은근히 소리 하고자 하는 뜻을 비치었으나 송계 선생은 단호히 거절하고 말았다. 답답한 정권진은 먼저 송계 선생의 수제자에게 은밀히 초벌 공부를 마치었다. 급기야 정권진의 뛰어난 재질과 굳은 결심을 알게 된 송계 선생은 비로소 북머리에 앉히고 정성껏 가르쳤다.
어느 예술의 학습이나 마찬가지이지만 판소리의 학습에도 초벌·두벌·세벌 소리가 있다. 처음 소리 배우는 이나 기량이 시원치 않은 이에게는 어려운 부침새라든가 정교한 시김새나 까다로운 목구성을 평이하게 고쳐서 초벌로 가르치되, 한 마당을 뗀 뒤에 약간 기량이 향상되면 두벌을 가르친다. 좀 어려운 부침새와 시김새 따위를 넣어 소리를 다시 짜서 가르치는 것인데, 이것이 끝나고 어느 정도 높은 경지에 오르면 마지막으로 세벌을 닦이게 되어 완역에 이르는 것이다.
혹자는 겨우 초벌 소리를 배우고 나서 목이 좋다고 청중에게 갈채를 받고 되발아져서 다시 재벌에 들어가지 않고 그 소리로 풀어 먹으며 명창 행세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이는 평생을 초벌 소리밖에 못하고 마니 소리에 변화가 없이 외목으로 일관하여 들을 맛이 없는 것이다.
정응민 문하에서도 초벌 소리만 배우고 나가서 명창으로 행세하는 이가 있으나, 그런 소리에서는 소리의 진맛을 느낄 수가 없다. 정권진은 부친 송계 정응민 선생에게서 소리 학습의 궁극이라 할 수 있는 소리 닦임을 받았으니, 초벌 소리나 두벌 소리로 행세하는 명창의 소리와 차원이 다르다. 대명창의 소리에는 소리 마디마다 밀고 푸는 성음의 변화가 있다. 소리의 굴곡에 따라서 엄성으로 밀고 화성으로 푸는 변화는 이러한 예도를 수련하지 않는 가객으로는 흉내도 못내는 것이다.
오늘날 판소리 명창 가운데 소리에 조목조목 이러한 성음의 변화를 구사하는 명창이 극히 드물다. 정권진이 이러한 성음의 변화를 구사하는 고도의 기량을 터득한 것은 정응민의 마지막 닦임을 받고 완역에 이른 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정권진은 1927년 전남 보성군 회천면 영천리에서 태어났고, 학교를 졸업하고 뒤늦게 부친 정응민 선생에게서 판소리를 배운 뒤에 절에 들어가 홀로 수련을 하다가 1960년대 초에 상경하였고, 62년부터 국악예술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써왔다. 1970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기능보유자로 인정된 이래 많은 전수생을 길러 왔다. 국립창극단에 출연하거나 편곡하는 일이 있었으나 방송과 창극에는 출연을 삼가고 오직 근신하며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정응민 선생이 초야에 묻혀 일생을 두고 갈고 닦은 좋은 소리 바디를 정권진은 지니고 있다. 정응민은 정재근(鄭在根)을 통하여 박유전(朴裕全) 소리를 이어 받았고 김찬업(金贊業)을 통하여 김세종(金世宗)의 소리를 이어 받았다. 박유전의 소리가 복잡한 부침새와 정교한 시김새를 구사하는 음악이라 한다면, 김세종의 소리는 정대(正大)하고 기품있는 음악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두 소리제가 정응민에 이르러 고도의 기교를 구사하면서도 정대하고 품위있는 소리로 승화되었던 것이며 이 정응민 소리제의 진수를 정권진이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느 한시도 부친 정응민 선생의 판소리 이념을 잊지 않고 있다. 판소리 사설은 비속에 흐르지 않고 품위를 지녀야 한다든가, 소리는 엄한 정음(正音)이어야 하고 노랑목을 쓰지 않는 일이라든가, 발림은 단정하고 정대해야 하며 경박하지 않아야 한다든가, 아니리는 진중해야 하며 천박하지 않아야 한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소리의 법도를 지키는데 항상 힘을 기울여 그의 소리는 기품이 있는 것이다. 1983년부터 전남대학에 전임으로 출강하게 된 것도 모두 그의 진지한 예도를 높이 평가한 때문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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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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