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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권재은 경서도 소리전' 공연(2002년 11월 9일 오후 7시 충청북도 충주시문화회관) 안내 인쇄물 2~3쪽에 실린 축사 "권재은 명창의 경서도소리" 글의 초고입니다.
* 상기 사진 설명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2009년 3월 26일 충청북도 충주 모 음식점에서. 권재은 명창. 촬영:노재명.
- '권재은 경서도 소리전' 공연 안내 인쇄물 2~3쪽에 실린 축사 "권재은 명창의 경서도소리" 글.
경서도소리 명창 권재은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어느날 권재은 명창의 변강쇠타령, 전장가, 노래가락을 비롯한 경서도소리 여러 곡을 들은 바 있다. 십여년 전에 어느 텔레비젼 방송에서, 그리고 기록용으로 녹음된 테입자료 등으로 접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매우 색다른 느낌이었다.
오늘날 흔히 민요라고 하면 아주 판에 박힌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천하 장사 씨름대회 막간에 볼 수 있는 경기민요 메들리 공연 장면, 국악 방송이나 공연장에서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경서도민요는 이제 거의 모두 통일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개개인의 개성은 많이 줄어들고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일정한 틀에 대부분 고개를 숙이고 순응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뚝배기처럼 거칠고 투박하지만 정감어린, 땅과 땀 냄새가 나는 소리는 점차 찾기가 어려워지고 백화점에서 포장된 듯한 깔끔하고 반듯하고 가지런한, 다소 현대 도시적인 느낌의 세련된 소리가 주를 이루고 있다.
판소리의 경우에도 불과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중고제, 동편제, 서편제 등 무척 다양한 소리가 공존하였지만 오늘날 이 또한 획일화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비단 국악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고 지구 문화 전체가 겪고 있는 문제이다. 언어, 음식, 의상 등 사라지고 있는 종족의 문화가 셀 수 없이 많고 하나로 획일화되어 가고 있다. 금세기 안에 지구상의 언어는 손에 꼽을 정도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학자들은 예측하고 있을 정도이다. 언어가 그렇다면 그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음악 또한 거의 같은 결과일 것이다.
판에 박힌 창법, 표정, 화장법, 옷차림. 개개인의 개성은 찾아볼 수 없게 된 음악. 이것이 오늘날 무대나 방송에서 접할 수 있는 경서도민요의 현주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무대나 방송이 아닌 시골 노동 현장에서는 아직도 어렵지 않게 아주 자유분방하고도 즉흥성이 많고 개성있는, 흙 냄새나고 소박한, 매우 다양한 노인들의 소리를 발견할 수 있지만 말이다.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음색이 다를진대 어찌 같은 창법으로 똑같은 소리를 낼 수 있는가. 이는 지극히 인위적이고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 심성과 맞지가 않는다. 옛날 솟대와 장승의 변화무쌍한,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라. 만드는 사람에 따라서 원재료의 모양에 따라서 결과는 얼마든지 다르게 조각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름대로 제 각각 아름다움이 잘 발휘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권재은 명창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분의 소리가 피라미드 구조의 민요판에서 가장 꼭대기에 서있는, 가장 완성도 높은, 꼭 이루어야 할 목표점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소리 판도를 봤을 때 현재 주종을 이루는 대세와 다른 방향으로, 다른 색깔로 나아가는 이와 같은 분의 특이한 존재가 문화의 다양성 측면에서 절실하다는 말이다.
이분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고 많은 날들을 고민에 휩싸였다. 쓰려다가 자신이 없어 붓을 여러번 꺾기도 했거니와 이번 글처럼 심적 부담감을 많이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이 짧은 글을 거의 두달간 고민하다가 오늘 비로소 붓을 들고 마무리 짓게 되었다.
권재은 명창은 겸허하게 악평을 요구하였지만 난 지금까지 누구에게든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말이나 글을 몸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자 했기에 설령 흠이 좀 있다 하더라도 그 단점을 굳이 크게 확대해서 드러내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어설프게 써서 오랫동안 노력 중인 한 소리꾼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노래는 성음 놀음이라고 하였는데 이분의 성음에 들어있는 걸걸하고 쉰 듯한 음색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정통 경서도소리에는 맞지 않는다고 흠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이를 이분만의 독특한 개성으로 보고 싶다.
권재은 명창이 자신의 소리를 사정없이 악평해 달라, 단점을 알고 싶다 하였지만 그러기에 앞서 필자는 이분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측은한 마음이랄까, 안쓰럽기도 하고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 든다.
국악이 예전보다는 대접받고 많이 활성화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국악을 업으로 삼는다는 게 쉽지 않고 척박한 문화 환경 속에서 오늘날 이분과 같이 소리에 미쳐서, 도취돼서 살고 있는 소리꾼이 몇이나 될까를 생각해 보면 이 권재은 명창의 모습이 그저 안쓰럽고 신기하게 여겨진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국악을 하여 교수, 인간문화재 등의 간판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많은 요즘의 풍토에서 특이하게도 권재은 명창은 오로지 소리를 잘 연마하여 기필코 소리꾼이고자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분의 소리에 이런 정신이 배어 있다. 필자는 이런 기백이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골방 분위기의 다소 음침한 음색이 끼어 있다든지, 농촌 노인의 민요와 전문 직업 소리꾼 사이에서 갈등하는 다소 어정쩡하다고 할까 좀 어색함이 있는 창법이라든지, 이런 단점들이 필자는 거슬린다고 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권재은 명창의 소리를 들어보면 이분은 소리에 진정 환장한 분이구나, 머리속에 온통 이 소리 생각밖에 없는 분이구나 하는 걸 느꼈다고, 필자는 이점이 아름다워 보였다고 말하고 싶다. 이 권재은 명창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 수많은 날들을 얼마나 고뇌하였을까가 느껴진다.
옛 선조들이 자연 속에서 살며 땅 일구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새소리와 풀벌레소리 들으며 인위가 아닌 무위로 자연스레 익힌 소리, 누구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자 익힌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이었고 일부러 배우려고 한 게 아니라 일하다가 문득 욕심없이 터득하게 된 소리이기에 언뜻 들으면 참으로 단순하고 안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아 우습게 보이지만 모방하려면 좀처럼 잘 안되는 은근한 멋이 있는 옛 토속민요들. 어쩌면 앞으론 재현이 어려울지 모르는 이런 소리에 현대인이 도전장을 냈으니 어찌 그 용기가 놀랍지 않으리오.
그저 소리에 미쳐서 어쩌면 무모한 환상일 수도 있는 득음(得音)을 향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는 이분의 땀방울을 바라보며 그저 고맙고 찬사를 보내고 싶을 따름이다.
허나 필자는 이런 노력이 헛된 꿈만은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열번 찍어 안넘어 가는 나무 없다고 하였던가? 일제 때 판소리의 정정렬 명창이 그랬듯이 권재은 명창도 경서도소리의 득음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 다 안될 것이라고 포기했고 자기 자신도 비관하여 여러번 자살까지 시도했으나 수 십년간의 독공을 통해 성악가로서는 최악의 목구성이었지만 결국 자신의 단점을 모두 극복하고 접신의 경지, 득도-득음의 경지에 이른 인간 정정렬 명창이 있지 않은가?
21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권재은 명창과 같은 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꿈만 같다. 이 시대 누구도 좀처럼 꿈꾸지 않는 길을 향해 묵묵히 걷고 있는 권재은 명창에게 감격의 추임새를 보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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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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