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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막사발, 장승, 솟대를 닮은 판소리의 멋과 참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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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노재명 저서 [명창의 증언과 자료를 통해본 판소리 참모습](서울:나라음악큰잔치 추진위원회, 2006년) 300~311쪽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 상기 음반: 이동백 명창의 판소리 춘향가 중 <박석티> 유성기음반(1930년대 후반 녹음)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유성기음반 관리번호 MISP-0585
Shochiku S18-A 春香傳 박석태(上) 李東伯 鼓·丁元燮
Shochiku S18-B 春香傳 박석태(下) 李東伯 鼓·丁元燮
조선 막사발, 장승, 솟대를 닮은 판소리의 멋과 참맛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판소리는 어느 하나의 스타일로만 불리지 않고 정가(正歌) 풍으로 불리기도 하고 민화(民畵)처럼 어떤 형식에 구속됨 없이 소박하고 자유분방하게 불리기도 하고 지역, 시대, 명창에 따라 창법이나 곡조가 굉장히 다양했다.
모두 각양각색의 특징과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필자는 그 중에서도 호걸제, 중고제, 고형의 동편제를 비롯한 옛 판소리, 특히 민화 같이 고박하면서도 한국 특유의 개성이 강하고 사계절의 다양한 날씨처럼 변화무쌍하게, 명창들마다 각기 호탕하면서도 자유분방하게 구사한 옛 판소리에 한국 음악의 진수가 잘 담겨있다고 본다.
이런 점이 바로 한국 음악이 위대할 수 있고 세계적일 수 있는 특색이고 자랑스러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면모를 지닌 명창 가운데 현재 녹음이 가장 풍족하게 남아있는 이동백을 중심으로 해서 그런 판소리의 멋과 참맛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이동백 이상 소리를 잘했던 그 이전 세대의 명창들도 물론 있었지만 현재 실증자료로서 실제 기량을 확인해 볼 수 있는 판소리 중에는 이동백이 최고 수준의 실력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를 집중 주목하는 것이다.
이동백은 이규석, 최상중, 김정근, 김세종 등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이동백은 녹음이 남아있는 5명창 가운데 가장 즉흥성이 강하고 가장 독창성이 있는 판소리를 했다. 그는 판소리를 주로 독공으로 터득했는데 자기다운 모습을 찾기 위한 나름대로의 수련을 통해서 김정근의 중고제나 김세종의 동편제에 얽매이지 않고 이동백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제를 구축했다.
그는 단가 하나를 가지고도 소리판의 분위기에 따라 즉흥적인 편곡을 통해서 다양한 선율과 여러 성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는 고운 목을 지닌데다 통성을 바탕으로 한 호령조 성음을 위주로 판소리를 하기 때문에 시원한 느낌을 준다. 미리 정해 놓은 각본 없이 청중의 분위기를 파악하여 즉흥적으로 판소리를 엮어 나간다. 하늘 찌르듯 질러대는 고음과 땅 꺼지듯 내는 저음을 자유롭게 오르내리며 숨가쁘게 몰아가는 창법은 그의 특기이다. 태권도, 유도처럼 단수로 말하자면 임방울은 3단, 이동백은 9단 정도라고 할까.
판소리에서는 옛부터 그 수준에 따라 국창, 명창, 어전광대, 대광, 또랑광대, 화초광대, 아니리광대 등으로 구별하여 차등을 두었는데 이동백은 당대 최고 상위 급수에 해당되는 어전 국창이었다.
이동백은 암새와 숫새의 미세한 음색까지도 구별해서 소리할 정도의 명창이었다. 그는 성량이 크고 새소리를 그대로 똑같이 낼 정도로 노래를 잘했는데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지만 그가 서울 부민관에서 <새타령>을 부르면 어디선가 비둘기떼가 날아 와서 공연장 유리창이 깨질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의 옛 장승, 솟대, 그리고 조선 막사발(혹은 찻사발)인 일명 ‘이도다완’에서 볼 수 있는 한국만의 멋을 이동백의 소리에서도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장승, 솟대, 조선 막사발 ‘이도다완’과 같은 것이 너무 흔했고 그걸 고귀한 것으로 보지 않고 천박하게 여겼다. 장승과 솟대는 이웃집 할아버지들 누구라도 쓱삭쓱삭 몇 번만 깎으면 만들 수 있었고 이도다완은 얼른 만들어서 내다 팔기 위해 듬성듬성 만들어낸 흔한 것이었다. 우리에겐 이런 것이 너무나 흔해서 누구도 소중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다 버렸다. 거의 같은 색깔을 지닌 국창 이동백의 소리 조차 이따금 그런 취급을 당했다.
남의 사과가 크게 보이는 것일까. 장승, 솟대, 조선 막사발에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정감, 좌우 동서남북 균형은 안맞는 것 같은데 무어라 흠 잡을 수 없고 대충 만든 것 같은데 거기에 깊은 혼이 서려있는 점, 일본은 자신들이 지니지 못한 그런 점을 부러워했다. 자로 잰 듯이 섬세하게 조각하고 빚어낸 일본 공예품, 어디 한 군데 빈틈없이 공들여 꾸민 일본 정원 등 인간의 한계선까지 인위적으로 갈고 닦은 예술보다는 무위로 만든, ‘자연’스러운, 자연을 닮은 우리의 예술을 우린 대다수 백성이 지닌 심성이었고 너무 흔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일본은 높게 평가하였다.
언제 만들어도, 언제 노래해도 일정한 틀과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는 일본의 대다수 전통예술과 달리 각 작품마다 다 다르고 한도 끝도 없이 자유분방하기 그지 없는 조선 막사발은 그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무한한 해방감과 따뜻한 인간미, 부러움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를 나름대로 ‘이도다완’이라 명명하며 세계 최고의 보물로 여기고 있다. 한국에는 이 조선 막사발이 거의 남아있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막사발은 200점 이상된다. 그중에서 일급 보물이 3점이고 이름까지 붙어 일본의 각지로 전해진 내력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전해지는 것이 70여점이다. 그리고 그 70여점 중에서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등록된 것이 20여점이다.
비록 우리의 조선 막사발은 안타깝게도 한국 내에 거의 없지만 그와 같은 무위자연의 아름다움은 우리네 음악 곳곳에서 풍족하게 발견된다. 옛 명창 이동백의 판소리 유성기음반에서도, 현재 강원도 정선 산골에 마치 수도승처럼 큰 욕심 없이 살고 있는 배귀연 할머니의 <정선아라리>에서도, 그리고 김수악·조순애 명인 같은 국악 원로들이 들려주는 구음 소리에서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멋과 흥이다.
우리는 이러한 무위자연의 미가 도처에 너무도 흔했기에 조선 막사발을 보물로 모실 생각은 안했다 할 것이다. 일본은 그러한 면모를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기에 환장을 하고 조선 막사발만 수 백점을 모으는 극도의 집요한 수집 욕구를 가지게 됐다 할 것이다.
이제 일본인들이 조선 막사발을 넘어서 그와 유사한 멋을 풍기는 우리네 음악에도 깊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조선 막사발의 경우처럼 먼훗날 우리보다 그들이 더 우리 국악에 깊이 빠져들지도 모를 일이다.
일본의 음악애호가들이 오늘날 한국의 거문고 악기에 열광하는 까닭 또한 주로 가볍고 날리는 음색이 대부분인 일본 전통악기에 익숙한 그들에게 들뜨지 않고 저음으로 차분하게 가라앉는 뭉직한 성음의 거문고는 자신들이 지니지 못한 대륙 기질의 부러움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자연과 동떨어진 채 도시 생활에 젖어있다 보니 이제 우리도 우리만이 지녔던 장점, 일본과 다른 ‘자연’을 닮은 무위의 예술이 점차 희귀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동백이 더욱 그립다.
이동백의 소리는 처음 탁 들으면 흠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이 엉성한 듯 보인다. 마치 택견 고수가 술에 취한 듯 좌우로 흐느적거리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상 흠을 잡으려 하면 어느 한군데 잡을 수가 없다. 이동백은 실수인 듯 보이는 소리 조차 정감이 있고 그 나름대로 멋이 있다. 이것이 바로 이동백 소리의 매력이다. 조선 막사발에 돌출되어 있는 불순물 자국 조차 아름다워 보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이동백은 빈틈없이 꽉 채워서 소리를 하지 않는다. 잘 됐든 못 됐든 일단 입을 떠난 소리는 미련을 두지 않는다. 이동백의 판소리 진행 속도는 요즘 소리들보다 훨씬 빠르고 거뜬거뜬 경쾌하게 넘어가는 느낌을 준다. 이동백뿐 아니라 일제 때 활동한 거의 모든 명인들의 판소리, 산조가 요즘에 비해서 훨씬 빠르다.
이는 한 장단, 한 마디 안에서 많은 걸 담지 않고 많은 기교를 부리지 않고 큰 욕심을 부리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일 좀 더 욕심을 내서 더 많은 걸 보여 주려고 하고 더 화려하게 장식을 하려고 한다면 속도는 당연히 느려질 수밖에 없다. 그 속도는 화장하는 데 걸리는 시간인 것이다.
화장이 많은 음악, 과도하게 박수와 추임새를 이끌어 내려고 애쓰는 음악은 듣는 사람에게 부담감을 주고 싫증나게 하기 쉽다. 허나 조미료가 가미되지 않은 담백한 음악, 관중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음악인 본인 스스로가 몰입되어 가슴으로 노래하는 음악은 은은한 감동을 주고 많이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옛 문헌 기록에 의하면 이동백이 젊어서 몇몇 명창들의 가르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국악학자 이혜구가 일제 때 경성방송국에 출연한 이동백한테 직접 들은 말에 의하면 이동백은 판소리를 거의 자득했다고 한다.
이동백이 아마 몇몇 명창들에게 배우려고 한 적은 있으나 예전 대부분의 명창들은 웬만해선 잘 안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학습이 쉽지가 않았을 것이고 그런 까닭에 이동백은 아마도 독공에 많은 힘을 쏟았을 것이다.
좌(左) 동백, 우(右) 만갑이라 할 만큼 이동백과 일제 때 쌍벽을 이룬 명창 송만갑이 유서깊은 동편제 가문에서 태어나 조부와 부친한테 많은 가르침, 엄청난 소리 유산을 물려받은 것에 비하면 이동백은 물려받은 유산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동백은 잘 타고난 목 하나만 믿고 맨주먹으로 출발하였고 법통있는 소리 재산을 왕창 물려받은 갑부 송만갑, 김창룡 같은 명창들과 겨루어야 했기에 종종 비교가 되어 비판도 받았다. 목은 좋으나 소리에 격조가 떨어진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1940년 판소리 사전으로 일컬어지는 [조선창극사]를 남긴 정노식은 이동백의 소리를 극찬하면서도 조격이 고아하지 못하여 야비한 데 흐르는 흠이 없지 않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또 이에 앞서 1938년 5월 정노식이 ‘魚島同室主人’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다음과 같은 글에도 이동백의 장점과 함께 그러한 취약점을 언급해 놓았다.
“李東白은 그 體格부터 堂堂한 偉丈夫이다. 對하면 一種 不可侵할 威信이 있는 듯하다. 忠淸道의 胎生으로 聲音이 美麗하거니와 그 각지각색의 목소리난 들을 때마다 이 点으로난 現代 누구든지 믿지 못하리라. 各色 唱劇調에 精通하고 새타령이 長技이나 非東非西非羽非界에 범벅이라. 그러나 現代에 있어서 亦一大家임에난 틀임 없으리라 아모리 생각하여 보아도.”(정노식, “朝鮮 광대의 史的 發達과 및 그 價値, 現代 名唱-李東白” [朝光 昭和十三年 五月號] 京城:朝鮮日報社 出版部, 323쪽)
국악학자 이혜구의 증언에 따르면 판소리를 좋아한 귀명창이자 작곡가겸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채동선, 그리고 가야금산조 인간문화재 김죽파 명인도 이동백이 목은 잘 타고 났는데 제는 그렇게 좋다 할 수 없다고 평했다 한다.
판소리 인간문화재 박동진 명창의 증언에 의하면 이동백과 김석창 두 명창이 충청도 해미읍성에 들어가서 소리를 했는데 사례금으로 김석창은 100냥, 이동백은 15냥을 받게 되어 이동백이 화가 나서 그릇을 깨고 돈을 받지 않았다 한다.
당시 일부 귀명창들의 평가와 사례금 구분은 이동백을 낮게 보기도 했고 이동백은 가끔 이런 점에 분개했다.
그러나 어쩌면 이동백은 송만갑이나 김창룡 만큼 소리 재산을 많이 물려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었던 명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깊이와 높이, 넓이를 알 수 없는 큰 판소리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송만갑과 김창룡도 매우 뛰어난 명창이었으나 이들은 가문의 유서깊은 소리 재산을 지키기에도 사실 벅찼다. 김창룡의 경우는 죽을 때까지 가문의 중고제 판소리를 충실히 지키는 쪽으로 자신의 길을 설정하였다.(김창룡도 물론 말년에 소리가 약간 통속화된 경향은 있음)
송만갑은 처음엔 가문의 소리를 따르다가 나중엔 이를 떨쳐 버리고 부친의 뜻을 거역하면서까지, 집에서 쫓겨나면서까지 그 소리 갑부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조선 제일의 소리 재산을 물려받은 송만갑의 중압감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아마도 그 어깨가 무거운 자리에서는 도저히 부친을 능가하는 소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재산을 다 버려야만 자신만의 소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송만갑은 결국 그 무수한 소리 재산을 거의 다 버리고 밑바닥부터 한, 두푼 모아 결국 나중엔 자기 스스로 거부가 되었다.
이동백이 비록 선배 명창들의 가르침과 도움을 많이 받지 못하여, 물려받은 소리 재산이 별로 없이 춥고 배고프게 소리를 터득하다 보니 이따금 소리에 천박스러운 점이 약간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이동백의 판소리 춘향가 중 <이별가>(Victor 49028)에서 춘향과 춘향모의 과장된 몸짓 표현 방식, 그리고 그의 수궁가 중 <용왕 탄식>∼<물고기들이 토끼를 구해 오겠다는 데>(Victor 49029) 유성기음반 등에서 그런 경우가 있다.
허나 그가 독공을 통해 결국 이루어낸 그 큰 판소리 금자탑에 비하면 그런 흠집은 오히려 눈물이 날 정도로 사실 애정이 가는 부분이다. 그 작은 흠집 때문에 이동백을 비하한다면 그건 너무 잔인하고 냉정한 처사다. 아니 그건 아마도 한강물에 담배불 하나 떨어졌다고 소방서에 걸려온 상식밖의 신고 전화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동백의 성장과정을 보면 그의 판소리에 흠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작은 흠으로 인하여 나머지 큰 부분이 더욱 빛난다.
송만갑(宋萬甲, 1865∼1939)은 아버지 송우룡 등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송만갑은 이동백과 당대에 어깨를 겨룬 명창으로서 이들은 가히 근대 판소리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송만갑은 선천적으로 잘 타고난 좋은 목, 가문에서 대대로 물려받은 막대한 소리 유산, 오랜 독공으로 연마한 치밀한 공력으로 인해 음악적 완성도가 경이로울 만큼 완벽에 가깝다. 그래서 송만갑은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에 비유된다.
반면 이동백의 소리는 즉흥성이 강하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기백 넘치는 고음과 망망대해를 펼쳐 놓은 듯 아주 든든하고 진중하게 내려 놓는 저음이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기세등등한 일품이기에 이백(李白)의 호탕하고 자유자재한 시정(詩情)에 비견된다.
사진을 보면 생기기도 매섭고 단단하게 생긴 송만갑은 마치 쇠망치로 내려치듯 맺고 끊음이 확실 분명하지만 이동백은 소리 매듭이 정확치 않을 때가 있고 끝나는 듯하다가 어영부영 다음 부분으로 이어 가기도 하고 이어질 듯하는 분위기를 풍기다가 싱겁게 끝내 버리기도 한다. 이동백은 아니리 말인 듯 노래인 듯 주섬주섬 섬기며 흐느끼기도 한다.
이는 이동백의 출신지인 충청도 사투리와 같은 느낌이라 할 것이다. 뚝뚝 끊지 않고 흐지부지 말꼬리를 흐리기도 하고 부드럽게 다음 말로 이어지기도 하는 충청도 사투리의 구수함과 같은 것이다. 말과 음악이 전혀 다른 별개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영향 관계는 분명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충청도 중고제 판소리의 한 특징이기도 한데 이 지역 출신인 방진관도 그런 식으로 소리를 했었다. 그리고 근대에까지 그러한 흐름이 이어져서 옛 명창 이날치의 손자이자 현재 판소리 활동을 하고 있는 이일주의 부친인 이기중 명창은 충청도에서 살았는데 말인 듯 아니리인 듯 노래인 듯 그렇게 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었고 웬만한 고수는 이를 반주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한다.(박홍남 증언)
어딘가 좀 모자란 듯 꽉 채우지 않은 상태, 조금 더 조금 더를 기대하게 만드는 소리가 이동백의 판소리이다. 건물 이곳저곳을 다 꾸미고 단청까지 화려하게 장식한, 어디 한군데 더 이상 손볼 곳이 없는 그런 소리가 아니라 커다란 기둥과 서까래만 박아가며 나아가는 형국이다. 비우므로 해서 오히려 다음을 더 기대하게 하고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 소리, 그래서 마셔도 마셔도 질리지 않는 신선한 샘물 같은 소리가 바로 이동백의 판소리이다.
송만갑은 완벽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어느 정도 수치까지의 완성도가 있고 어느 정도 감지가 되는 화려한 기교를 많이 구사하기 때문에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어느 선까지는 사실 모방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동백은 매우 즉흥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기분에 따라서 소리가 아주 잘 될 수도 있고 기대 이하일 때도 있고 실수가 약간씩 있어 완벽하다고는 볼 수가 없으나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즉흥성이 매우 강하고 기량을 가늠하기가 사실 어렵다.
즉흥성이 강했던 충청도 가야금산조 명인 심상건의 경우 1926년 제비표조선레코드회사에서 남긴 가야금산조 유성기음반의 연주가 기가 막히게 잘 되어 어떤 음악애호가가 듣고 크게 감동받아 심상건의 연주를 직접 들어보고 싶어서 심상건을 찾아갔다. 그런데 심상건이 그 날은 연주가 싱겁게 됐고 찾아간 이가 실망을 하고 되돌아간 일화가 있다. 이동백의 즉흥성도 바로 그런 측면이 있다.
즉흥 연주를 추구한 옛 국악 대가들은 자신이 방금 연주한 것에 얽매이거나 연연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전에 연주한 것도 다시 해보라면 기억을 잘 못하고 또 다르게 연주했다. 이는 습관적인 것이고 체질과 토양 자체가 틀에 박힌 정서보다는 자유분방함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러했다 할 것이다.
이동백은 많은 기교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만큼 소리를 높이 확 질렀다가 갑자기 비행기 추락하듯이 뚝 떨어뜨린다든가, 엇박자나 붙임새를 약간 쓴다든가 하는 아주 단순하다 할 정도로 몇가지 기교 뿐이다. 그렇지만 굉장히 감정 조절이 좋아서 소리에 감정이 잘 실린다. 또 미세한 음색의 변화와 조절에는 많은 신경을 쏟는다. 그렇기 때문에 기교로 달려들면 속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황당할 정도로 도저히 비슷하게라도 되지가 않는다. 아주 쉬울 것 같은데 모방해 보면 잘 안되는 정체를 알기가 어려운, 그 깊이와 높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송만갑은 비교적 제자가 많았다. 반면에 이동백은 제자가 별반 없었는데 성격이 괴팍하여 제자들이 그 밑에서 버텨내질 못한 게 아니라 추앙하는 사람도 많고 배우려 하는 이도 많았고 이동백 또한 열심히 제자를 가르치려고 노력했으나 어느 누구도 도저히 그 그림자 조차 따르지 못하여 변변한 제자를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그 독특한 소리는 결국 맥이 끊기고 말았다. 물론 공식 제자는 몇 명 있고 이동백 소리제를 하기는 했으나 대체로 이동백과 유사하게 하지는 못했다.
약간의 실수는 타인에게 호감을 준다는 심리학자의 말에 필자는 전적으로 공감을 한다. 완벽하리 만큼 빈틈없는 명창 송만갑이 사실 무섭고 얄밉기까지 할 때가 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는가 싶다. 접신의 경지에서 날아다니는 송만갑이 물론 경이롭지만 그래도 약간은 엉성한 이동백 쪽에 더 애정이 갈 때가 있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소리 재산을 죽을 때까지 애지중지 고수했던 판소리 거부 김창룡은 자식도 많았다. 허나 법통있는 소리를 제대로 물려받지 못한 자수성가한 명창 이동백은 자식이 거의 없었다. 판소리 인간문화재 한승호 명창의 증언에 의하면 이동백은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박록주의 말에 따르면 이동백에게 원채옥이라는 양딸이 있었는데 박록주와 무척 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체격 좋은 이동백이 외소한 김창룡과 말다툼이라도 나면 김창룡의 아들 여럿이 빙 둘러 서서 김창룡을 보호했고 이때마다 이동백은 서글픈 눈물만 흘려야 했다.
이동백은 성격이 호탕하고 쾌활했다. 일류 광대의 요건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외모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풍채와 얼굴 생김새 등을 출중하게 잘 타고난 사람이다.
이런 이동백의 성격과 외모에 대해서는 이동백의 제자와 주변 인물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이동백을 직접 만나 보고 묘사한 당대 언론사 기자들과 평론가들의 문헌 기록 역시 그러하다.
이러한 면모, 이동백의 호탕한 성품과 늠름한 풍채는 그의 판소리에서도 그대로 느껴진다. ‘생긴대로 행한다’는 말이 어느 경우에나 들어 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이 이동백의 경우엔 딱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그 말도 때론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이 많다 보니 말도 많은 국악계에서 이동백이 여러 국악인들 단체의 대표를 맡았다는 점은 그의 인품이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또 당대 함께 활동한 동료들이 잘못된 행실로 신문지상에 이름이 자주 거론된 것에 비하면 이동백은 그런 그롯된 언행에 대한 기록이나 이야기가 전혀 전해지지 않고 아주 깨끗한 편이다.
그의 주변 인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동백은 남을 헐뜯지 않고 점잖았으며 인격을 제대로 갖춘 사람이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동백 역시 혈기가 왕성했던 젊은 시절엔 욱하는 성격도 있었다는 일화들이 여러 문헌에 전한다.
이동백이 말년에 고수 한성준과 대담을 나누다가, 사람은 늙으면 그저 소인 물러갑니다 해야 한다고 이동백이 말한 바 있고 이동백의 단가 <백발가>에 나타나 있는 가사 등으로 봐서 이동백은 꽉 막힌 성격이거나 독선적이거나 고집이 아주 센 사람 같진 않고 이해심 많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통사회에서 대중을 상대로 한 판소리 광대라는 예술가는 소리 내공, 내면의 예술성이 가치 판단의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됐겠지만 그 외면, 멋스러운 장식, 포장에 해당되는 부분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중대한 가치 판단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외모를 일류 광대의 중요한 한 요건으로 꼽았던 것이고 성음 좋고 공력 단단하고 거기에다 멋진 인물까지 갖춘 이동백이 그러한 이유에서 당대 명창 중에서도 진정 왕명창으로 꼽혔던 것이라 하겠다.
그가 무대에 서면 우선 그 당당한 풍채와 빛이 나는 얼굴과 자신만만한 눈빛에서 관중의 시선을 모았다. 이와 같이 군중의 집중력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이동백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소리에 관중을 몰입시킬 수 있었고 청중을 보다 자유롭게 웃기고 울리고 감동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남녀노소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던 이유, 그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 잘난 풍채, 인물인 셈이다. 일단 소리는 둘째고 광채가 나는 그 빛나는 인물로서 관중의 관심을 끌고 나서 소리는 어떨까 궁금해 하는 관중을 향해 괴력에 가까운 엄청난 성량과 누구도 흠 잡지 못하게 만드는 공력으로서 재차 관중의 넋을 빠지게 하고 결국 자신의 포로로 만들어 버리는 게 이동백이다.
즉, 이동백은 내용물에서부터 겉꾸밈 포장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흠 잡기 어려울 만큼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다 하겠다.
이동백도 완벽한 이는 아니어서 외모에 단점이 있었다고 하는데 팔이 체격에 비례해 좀 짧았다고 한다. 허나 이는 보기에 어색하거나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왕과 사대부들한테 불려 다니기도 바빴던 어전 광대 이동백이 신분 사회 붕괴 후 판소리에 귀가 제대로 트이지 않은 대중들 앞에 섰을 때 그의 독특한 창법과 엄청난 공력보다도 사실 그의 출중한 성량과 보기 드문 외모 면에서 더 환호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내공, 내면의 예술성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거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대다수 사람들이 이동백의 소리를 들어볼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동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연 입장료, 라디오, 유성기음반을 구입한다는 게 대다수 사람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일제시대 대중적으로 누린 인기는 대부분 호기심에 인기 연예인 얼굴 한번 보기 위해 몰려든, 귀명창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스타 이름 석자를 향한 환호와 박수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대 이동백 관련 문헌 기록을 보면 이동백도 그런 정황을 느끼고 허무함을 많이 느낀 듯하다.
그가 타계한지 불과 반세기도 되지 않아 그 이름 석자가 세인들의 뇌리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진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생각된다.
오늘날 혜성과 같이 나타나 신문과 방송을 떠들썩하게 하다 어느날 이름 조차 잊혀지는 스타들을 무수히 목격한다.
이동백! 그도 20세기 전반기 대중들에게는 어쩌면 한때 유행하다 사라지는 연예인 정도로 밖에 비추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그의 전무후무한 어마어마하게 귀중한 소리 또한 너무나 허무하게 전승이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의 무수히 많은 유성기음반들? 이 또한 너무 가볍게 길거리에 내버려졌다.
음주, 아편, 여자를 멀리하고 오직 판소리에 몰입했던 이동백은 이 세상에 자신이 안고 태어난 소임, 명창으로서 행할 수 있는 역할을 최대치까지 다하고 간 사람이다.
영친왕 등이 이동백 같은 명창의 유성기음반이 우리의 문화재라고 말했듯이(1970년 7월 29일자 [중앙일보] 등) 이동백이 남긴 녹음은 이 나라 고유의 문화가 진정 자랑스러울 수 있는 깊고 진하고 강한 멋과 힘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가장 멋진 대장부 목소리, 세계적으로도 가장 멋있는 남자 성음이라 할 수 있고 땅을 진동시키는 그의 저음 통성 등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대한민국의 자부심이다. 천하를 호령하는 우렁찬 기백, 그리고 민화 같이 고박하면서도 변화무쌍하고 자유분방하게 구사한 그의 판소리는 단연 한국 음악의 진수라 할 수 있다.
* 2007년 7~12월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국악자료 인터넷 DB구축 정보화(전통예술 아카이브 구축사업 선정) 국고보조금 지원: 문화관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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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8-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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