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는 노재명 저서 [명창의 증언과 자료를 통해본 판소리 참모습](서울:나라음악큰잔치 추진위원회, 2006년) 13~18쪽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 상기 음반: 조선 소리의 곡조를 거의 이루다시피 했다는 충청도의 김성옥-김정근-김창룡-김세준-김차돈 가문의 김창룡과 그 손녀 김차돈의 음반.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CD음반 관리번호 MICD-1763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2) 판소리 명창 김창룡, 그 손녀 김차돈(고수:한성준)' 음반
(명인기획/엘지미디어 LGM-AK002, 1CD, 1931/1934년 녹음, 1995년 제작, 노재명 기획/고증/해설/사설 채록)
판소리 발생 초기 모습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지금은 판소리 하면 굉장히 어렵고 전문가들만 알 수 있는 특수한 것으로 대개 인식되어 있지만 실상은 판소리 발생 초기로 갈수록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대중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판소리에 예술성을 좀 더 가미하게 되고 음악 기교가 점차 복잡해지고 사설을 품위있게 정립하고 이론과 철학까지 많이 더해지면서, 왕을 비롯한 상류 계층이 향유하게 되면서 대중과 다소 멀어진 경향이 있다.
아주 초기의 판소리는 재미난 이야기를 익살스럽고 다소 통속적으로 대중성있게 전달하는 기능이 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수관 명창의 아니리를 그의 특기로 주목하여 기록한 [게우사], 김도선 명창은 아니리가 선수였다 하고 신학조 명창은 단가와 판소리를 진진한 좌담 비슷하게 했다고 한 [조선창극사] 등의 기록이 바로 그러한 이야기 전개 호소의 역할이 중요했던 초기 판소리의 흔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인간문화재 박록주 등 명창들이 판소리는 결국 ‘성음 놀음’이나 ‘목 자랑’이라고 늘 강조했던 것처럼, 신만엽 명창의 ‘목 재주’라고 [게우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옛 판소리일수록 다양한 소리 묘기, 음파 초능력 쇼였을 것으로 보인다.
각종 문헌과 음반의 기록, 명창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초기 명창들이 선보인 판소리는 대단히 웃기고 구슬픈 재담, 상상을 초월하는 초능력적인 거대한 성량, 귀신이나 짐승 소리를 실감나게 묘사해내는 재주, 극도로 아름다운 성음, 인간의 음성 같지 않은 희한한 소리, 무척 특색있는 음색과 재능을 지닌 광대들의 묘기 발표가 바로 초기 판소리의 모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인들이 깜짝 놀랠 정도로 초능력에 가까운 특장 하나는 반드시 있어야 돋보일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고 그래서 재미있고 오래도록 판소리가 발전하고 전승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판소리가 발생한 초기에도 음악 자체가 한국에 전혀 없던 완전한 창작이거나 한국인의 기존 음성이 아닌 전혀 다른 타국적인 성음으로 불렸다기보다는 어느 정도는 전통 성악에 기반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전통 성악, 음률에 대한 지혜가 광대들에게 오랫동안 누적된 것이 있었기에 그것에서 다소 색다른, 변이 성악이 돌출된 것이 바로 판소리였고 오랜 전통의 힘에다가 당대의 창의성과 노력이 가미되어 대중적인 호소가 가능했다고 본다.
이를 테면 판소리 발생 초기에 나온 덜렁제, 추천목 같은 소리가 결국은 당시 명창들이 뿌리깊은 전통음악들을 응용하여 당대의 취향에 맞게 편곡, 창법 재개발을 통해 유행시킨 결과물인 것이다.
2006년 여름 스물두살의 대학생 임정현이 인터넷의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 올린 기타 연주가 국내외에서 화제가 되었다.
대만 기타리스트 제리 창(Jerry Chang)이 록 버전으로 편곡한 파헬벨(Pachelbel, Johann)의 <카논>(Canon)을 임정현이 전기기타로 연주한 것인데 [뉴욕 타임즈]가 극찬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매일 65000편의 동영상이 새로 업로드되고 총 1억 여건에 이르는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세계적인 사이트에서 임정현의 기타 연주 동영상은 조회수 1000만건을 돌파, 종합 선두권에 올랐고 수만 개의 다양한 댓글도 달렸다.
단 5분 20초짜리 자작 동영상 한 편으로 전세계인들의 찬사를 받은 임정현의 기타 연주는 국내 자동차 광고 배경음악으로도 쓰이고 있고 국내외에서 초청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판소리 발생 초기 광대들은 어떻게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호소하였을까. 동영상이 남아있지 않으니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허나 여러 관계 자료와 정황으로 보아 짐작컨대 앞서 언급한 임정현의 기타 연주 동영상 파란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예나 지금이나 무명 음악인이 자력으로 실력을 인정받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음악계에 데뷔하는 이들마다 내공은 기본이고 무언가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기발한 시도와 노력이 있어 왔다.
음반 제작비보다 많은 돈을 투입해 뮤직비디오를 영화처럼 만들어 관심을 유도한다든지, 거짓으로 납치당했다고 기자 회견을 하여 인기를 얻고자 한다든지, 자신있는 음악 내공을 직접 보여주기 위해 전국을 돌며 소규모 무대의 생음악으로 승부를 건다든지 하는 등의 노력이 바로 그것이다.
평소 전기기타 실력을 쌓은 임정현은 전세계인이 지켜보는 인터넷 상의 인기 매체를 통해서 자신의 음악을 알린 것이다. 기존의 음반, 방송 매체로는 절차가 쉽지 않고 설령 데뷔 음반을 낸다 하더라도 자신의 진가를 성공적으로 드러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임정현은 그러한 길을 잘 택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인터넷이 없던 그 옛날 정보의 바다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터, 활터 같은 곳이었다. 초기 판소리 명창들은 각고의 노력 끝에 쌓은 내공, 자신의 진가를 사람들이 많이 북적거리는 시장이나 줄타기 같은 연희가 열리는 곳, 굿판, 활터 등 인터넷처럼 열린 공간에서 파격적이고 도전적으로 드러냄으로서 오로지 기량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자신의 판소리가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양반들의 귓가에까지 소문이 나고 서서히 식자층에 의해 활자나 그림에 기록도 되고 그리하여 이름을 얻어 부자집에 초청되어 가고 결국 왕의 부름과 벼슬까지 받게 되면서 판소리가 급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서울:조선일보사, 1940년)를 보면 사람들이 많이 운집해 있는 열린 공간에서 초기 명창들이 어떻게 자신의 기량을 드러내고 명성을 쌓아갔는가 하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보인다. 다가정이라는 활터에서 벌어진 초기 명창 모흥갑과 주덕기에 관한 것이다.
“(모흥갑이) 만년에 전주군 귀동에 살 적에 어던(어떤) 날 매물의 필요가 있어 전주부 시장에 들어가서 요건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다가정에 수천의 군중이 환도함을 보고 웬일인가 하고 훼치고(헤치고) 들아가 본즉 당시 명창으로 성명이 쟁쟁한 주덕기가 소리를 하는데 청중의 지수 ‘얼시고 절시고 좋다’는 소리 사방에서 이러난다(일어난다). 모씨 메였든 굴억(구럭)을 깔고 삿갓으로 차면하고 은신하고 앉아서 흥미있게 듣는데 가창을 마치자 만좌는 ‘송흥록, 모흥갑의게 내리지 아니할 명창이라고’ 책책칭도 하였다. 주(주덕기) 은근히 쾌감을 이기지 못하여 ‘모흥갑은 부족괘론이요, 송흥록도 유부족앙시라고’ 자존자찬적 언사를 감발하였다. 따라서 만좌는 모다 그 당연함을 긍허하였다.
모씨 듣기에 심히 불쾌하여 그 괘씸함을 힐책하기 위하여 디디여(드디어) 좌석에 들어섰다. 구지들에게 배례한 즉 만좌는 그 의외임을 놀래 환영하였다. 모씨 말하기를 “자기는 부족론이로되 송흥록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가이요 가왕의 칭호까지 받은 공전절후의 명창이어늘 주(주덕기)의 소위 무례막심하다” 하고 전기 이별가 1곡을 전치가 몰락한 순음으로 장쾌하게 부른 후에 주씨다려 한번 방창하여 그 승점을 표시하라 하매 주(주덕기) 원래 송,모(송흥록 모흥갑) 양인의 고수로 다년 수행하던 사람이라 복복사죄하고 감히 그 앞에서 개구치 못하였다.“
판소리 발생 초기에 명창들이 추구한 것은 기존의 음악 판도와는 다른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소리였다 할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판소리 역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서 1960년대까지도 명창 개개인마다 독창적인 판소리를 구축하는 노력과 결실로 이어졌다.
초기 명창들의 주된 관객 대상이 중요한데 위에 언급한 모흥갑과 주덕기가 소리 대결을 한 다가정은 중소년층의 활터였다. 무언가 역동적이고 새로운 예술을 갈망하던 당시 중소년 계층에게 신기하고 재미난 이야기 전개, 새롭고 독특한 노래로 짜여진 판소리는 갈채를 받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부채 하나, 관중의 추임새, 단촐한 북반주 형태는 바로 그러한 판소리 발생 초기의 분위기에 알맞게 형성이 되었다 할 것이다. 이동하기 편하고 지나가다 야외 어디든 즉석으로 판을 쉽게 벌일 수 있고 우연히 걸어가던 구경꾼도 감탄사 한마디 던질 수 있게끔 공연 형태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제 아무리 내공을 접신의 경지까지 쌓았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마이크, 스피커도 없고 실내도 아니고 제 각각 관심사가 다른 대중들이 혼합되어 있는 활터, 장터 같은 열린 공간에서 이목을 끌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초기 광대들은 누구나 귀를 솔깃하게 할 수 있는 <새타령> 같은 노래로서 새소리를 그대로 묘사해내는 신비함을 선보였고 특색있는 계층의 여러 가지 우스꽝스러운 행동들을 발림으로 흉내내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다.
신만엽, 박유전, 이석순, 이날치, 한송학, 이창운 등의 장기였던 <새타령>, 염계달과 한송학 등의 특장이었던 장끼타령이 그러한 맥락에서 인기를 끌었다 할 것이다.
또 <이별가>와 같이 슬픈 노래를 눈물 아니 흘릴 수 없을 만큼 기가 막히게 부르거나 소름이 오싹끼칠 정도로 무서움을 유발시키는 귀곡성으로서 극도의 자극을 주고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최고음을 선보임으로서 대중을 운집시켰다 할 것이다.
일종의 초능력에 가까운 소리 묘기, 생존을 건 초인적인 노력,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광대 개개인의 독보적인 특기로 관중을 모이게 하는 방식이었다 하겠다.
여러 재주를 두루 갖출 수도 있겠지만 지난 수 백년 동안 판소리 명창마다 대개는 대표적인 특장이 거의 하나씩이었다.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단 하나의 특색을 보유한다는 것도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생존 방식과 전통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이어져 20세기 전반기 이동백은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내기 어려운 새소리 묘사로, 송만갑은 누구도 뒤따를 수 없는 아주 높은 고음에서 자유롭게 비행하는 창법으로, 임방울은 수없이 반복 연마해서 어느 누구도 더 깊은 맛을 낼 수 없을 만큼 막강한 호소력을 지닌 춘향가 중 <쑥대머리>로 중무장하여 줄타기, 작두타기보다 더 살벌한 소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하겠다.
소리판이 어수선하고 관중이 소리에 몰입을 잘 못하고 분위기가 영 살아나지 않는다 싶을 때 단번에 판을 확 살려줄 수 있는 비상약 역시 이동백은 <새타령>, 송만갑은 벌 날아다니는 것 같은 고공 비행 창법, 임방울은 <쑥대머리>였다. 판소리 발생 초기 모습도 이와 비슷했으리라 여겨진다.
이름이 전해지는 판소리 명창 가운데 우춘대, 하은담(혹은 하흔담 하한담 하언담), 최선달이 가장 오래전 사람들이다.
이들은 영조, 정조 때인 18세기 후반에 활동했는데 그 중에서 우춘대는 송만재의 [관우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장안에서 모두들 우춘대를 말하지만
오늘날 누가 능히 그 소리를 이어갈까
한 곡조 끝나면 술동이 앞에 천 필의 비단이 쌓이는데
권삼득과 모흥갑이 소년으로 이름 있구나.”
우춘대와 비슷한 연대에 활동한 하은담과 최선달은 충청도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또 [게우사] 기록에 의하면 우춘대, 하은담과 그들의 뒷세대인 김성옥, 고수관 사이에 서덕염, 최석황, 권오성, 손등명, 방덕희, 김한득 같은 이름이 있는 것으로 봐서 서덕염∼김한득도 우춘대와 동년배 내지는 약간 후배쯤의 명창이 아닌가 한다.
우춘대, 하은담, 최선달 이전에도 물론 판소리를 한 명창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춘대가 판소리 활동을 하기 이전이라 할 수 있는 1754년에 충청도 선비 유진한이 판소리 춘향가를 보고 일명 [만화본 춘향가]로 불리는 한시집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진한의 아들이 전한 말에 따르면 유진한의 그 한시를 보고 당시 선비들이 “어찌 상민들이나 보는 판소리에 대해 읊었느냐고 비판하였다” 한다.
따라서 서민 대상으로 출발한 판소리가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판소리가 양반들의 관심을 끌고 문헌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50년 이상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 2007년 7~12월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국악자료 인터넷 DB구축 정보화(전통예술 아카이브 구축사업 선정) 국고보조금 지원: 문화관광부.
|
| 2007-08-06 |
|
){kind=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