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는 노재명 저서 [판소리 명창 성우향](경기 고양:지구레코드, 성우향 흥보가 CD음반 부록 서적, 지구레코드 JCDS-0697~0698, 2CD 1책 박스물, 1998년 12월 제작) 21~24쪽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1970년대 판소리와 당시 성우향의 활동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임방울은 타고난 자기 재주로 판소리를 구사했고 그 자유분방한 감성파 소리는 그의 타계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 선배 이동백이 그랬던 것처럼.
1961년 임방울이 타계하자 이땅의 대한국인들은 모두 번개를 맞은 듯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임방울을 교주로 떠받들던 광신도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주 오랜시간 동안 지천에 널린 게 판소리였고 그렇기에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임방울 시대 역시 으레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막상 그가 떠난 빈자리를 보니 그 허전함은 너무나 컸고 판소리가 어느덧 다 사라져 버리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1962년 서둘러 문화재보호법을 재정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던 것일까. 문화재로 지정하려던 당대 판소리계의 참스승 정응민 마저 그 다음해인 1963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964년 12월이 돼서야 비로소 첫 판소리 인간문화재가 선정되었고 그때부터 1980년대까지 박록주, 김여란, 김연수, 정광수, 김소희, 박초월, 박봉술, 한승호, 강도근, 박동진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기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가히 우주 핵전쟁을 방불케 했던 5명창 시대의 판소리, 은둔한 정응민의 후학 양성과 임방울 열풍으로 대표되는 광복-전후 혼란기의 판소리, 그리고 그후 또 한차례의 판소리 황금기가 있었으니 그 시기는 바로 1970년대라 할 것이다. 1970년대를 그리워하고 그때를 근래 판소리사에서 가장 절정기로 보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1970년대 판소리가 있기까지는 우선 정응민의 노력이 컸다고 하겠다. 임방울이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무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귀명창들의 추임새를 독점했다면 정응민은 방안에 들어앉아 제자 육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는 1970년대 판소리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1970년대 판소리를 주도했던 김연수, 정광수, 정권진, 김소희, 성우향, 조상현, 안향련, 성창순과 같은 정응민의 제자들이 펼친 눈부신 활약상이 그런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1970년대 판소리가 있기까지 박동진이 공헌한 바 또한 크다 하겠는데 그의 공은 다름아닌 완창 판소리 붐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그는 1968년 무명의 소리꾼으로서 신인아닌 신인으로서 완창 발표회를 열었고 그것이 화제가 되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리고 연이어 완창, 판소리계의 특종을 계속 터뜨리며 출세가도를 달렸고 1973년에는 창작판소리 이순신전을 발표하여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의 눈에 띄는 행운도 잡을 수 있었으며 결국 같은해 그는 인간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었다. 하여간 그 결과 완창은 명창이 되기 위한 등용문, 성공의 지름길,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자리잡게 되었고 1970년대 판소리 문화를 완창으로 물들여 놓았다.
한편 1960년대에 조성된 문화재보호법의 제도적 뒷바침도 1970년대 완창 판소리 부흥에 원동력이 되었다. 거기에다 당시 귀명창들의 숨은 노력 또한 완창 붐 조성에 한몫 크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1970년대에는 원로 대가들과 재능있는 중견급 소리꾼들이 풍부하게 존재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암튼 그와 같이 여러 충분조건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시기가 1970년대였고 그런 환상적인 분위기로 인해 토막소리만 학습하던 풍조가 사라지고 너도나도 바탕소리를 익혀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가 뿌리내릴 수 있었다. 이리하여 원로 인간문화재들도 후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자연히 분발하여 대외적인 활동이나 제자 육성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70년대는 바로 그런 흐름 속에서 20세기 판소리의 마지막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고 그 시절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말하자면 완창 판소리의 치열한 각축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병을 달고 살면서도 노쇠한 몸을 이끌고 나와 여전히 꿋꿋한 호령조 소리를 들려준 박록주, 귀신 요술같은 붙임새로 유명 고수들을 황당하게 한 김여란, 진귀한 고제소리를 무대에 들고 나온 순박한 웃음의 박봉술, 뱃심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쇠허리띠를 배에 단단히 묶고 전주대사습에 나가서 배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소리를 질러 장원을 차지한 성우향, 원로 귀명창들 앞에서 밤새워 코피 터지게 소리 싸움을 했다는 안향련과 최승희, 신토불이 통성으로 외국산 고가 스피커를 보기 좋게 망가뜨려 버린 조상현,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소리를 하여 이목을 집중시킨 박동진. 이 모두가 1970년대 일어난 사건이었고 그 만큼 당시 판소리는 특종과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오로지 실력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였고 그래서 악착같이들 소리에 매달렸다. 배가 나올 틈이 없었고 무대에선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 여유가 없었고 우스게 재담으로 적당히 떼울 수도 없었다. 1970년대는 진정한 귀명창한테라면 한사람 앞에서도 자존심을 걸고 있는 힘껏 소리를 했고 짜장면 한그릇을 대접받고도 최선을 다해서 불렀다. 다들 그렇게 순박하게, 신명나게 살았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 사람들은 인간문화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던 순진한 시절이었고 그래서 지금처럼 문화재 제도권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소리에 미쳐서 살았고 그리하여 신명난 소리를 할 수 있었다.
1970년대 판소리에 살벌함과 신선함을 제공한 주역은 젊은 안향련이었다. 그 천재가 있었기에 1970년대는 활력이 넘쳤고 그로 인해 지금도 그 시절을 잊지 못한다. 당시 안향련의 나이 30세 전후였고 세상 물정 모르는 나이에 떼묻지 않은 감성으로 무엇엔가 홀린 듯한 천부적인 끼로서 귀명창들을 녹였다. 그가 지금 살았다면 하고 아쉬울 때가 있지만 하늘이 내려보낸 천재는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타락하기 직전에 데려가는 듯싶어 그냥 지금 기억대로 그의 불같은 정열과 순진함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안향련을 돌이켜 보면 그의 천재성을 더욱 빛나게 한 것은 당시 그 주변을 호위하던 수많은 귀명창들의 숨은 노력이었다. 그리고 그가 자살하게 된 것도 바로 귀명창 때문이었다. 그땐 그렇게 사연이 많았다.
옛 귀명창들은 실력이 대등한 명창을 여럿 불러서 소리 싸움을 시키곤 했는데 밤새워 소리를 해도 목이 쉬지 않는 안향련과 대적해야 하는 부담감은 엄청난 것이어서 안향련 때문에 소리를 그만두고 싶다는 가슴앓이도 많이들 하였고 그 반대로 안향련의 판소리에 반해서 소리꾼의 길로 들어선 이도 많았다. 그리고 안향련과 밤새워 소리 싸움을 하면서 판소리의 참맛과 희열을 많이 느꼈노라고 말하는 명창들도 있다. 성우향, 조상현, 최승희, 한농선이 바로 그런 명창들인데 이들이야말로 안향련과 가장 잘 대적했던 맞수였다. 이들은 당시 소리판을 주름잡던 중견급 라이벌 명창들로서 각자 일장일단이 있어 다소 부담스럽게 서로 자웅을 겨뤘고 어느덧 원로가 된 지금은 다들 그 시절의 팽팽한 긴장감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목이 좋고 학습이 충실했던 성우향은 이미 1950년대부터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1970년대에는 완창 공연을 몇차례 가지면서 당대 중견 판소리 명창의 주인공으로 떠올랐으며 이후 목이 상한 후에도 고제소리를 제대로 보유한 최고의 스승으로 두루 인정받아 수많은 후학들이 그를 찾았고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제자를 배출해 냈다.
그리고 조상현과 안향련은 수려한 외모와 타고난 연기력 덕분에 판소리뿐 아니라 창극무대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보여 1970년대 창극의 명콤비로 명성을 떨쳤고 최승희는 방안소리 춘향가(김여란제)로, 한농선은 박록주제 흥보가로 자신의 특색을 과시했다.
안향련은 임방울에 버금가는 많은 광신도와 유일무이한 제자 유미리만 남긴 채 1981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그 후 성우향, 조상현, 최승희, 한농선의 활동도 차츰 뜸해졌고 1970년대 판소리의 긴장감과 재미도 점차 사라져 갔다. 이제는 모두 유능한 소리 선생으로 변신한 성우향, 조상현, 최승희, 한농선은 현재 제자 양성에 주력하고 있으며 다들 1970년대의 긴장감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고 다만 그때를 달콤하게 회고하고 있을 뿐이다. 안숙선을 배출한 1980~90년대에도 완창 판소리 붐은 계속됐으나 이 시기의 판소리는 1970년대의 분위기나 기량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1980년대 들어서 판소리가 기운이 빠진 것은 물론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초기 인간문화재들이 잇달아 타계하고 덩달아 옛 법도와 멋을 지녔던 골수 귀명창들 마저 차츰 작고하여 판소리 지탱기반이 매우 약해진 데도 그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1978년 10월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감상회’가 중단된 점, 그리고 1979년 명고수 김명환이 담석증 재발로 재수술을 받은 후에 건강이 나빠져서 전처럼 왕성한 활동을 못하게 된 점 또한 1970년대 판소리 황금기의 종말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이제 정회석, 채수정, 유미리와 같은 젊은 명창들이 이끌어갈 21세기 전반기의 판소리를 전망해 본다. 재질은 이미 충분히 인정받은 이들에게 과연 1970년대 만한 주변여건은 제공되어 있는가.
우선 명창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이제 좋아졌다고 하겠다. 허나 예전보다 급격히 줄어든 귀명창들의 빈자리가 문제다. 그리고 우열 다툼이 치열했던 예전보다 지금은 경쟁자가 극히 줄어들었다는 점 또한 이들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수많은 소리꾼들의 선의의 경쟁과 그 속에서 우뚝 서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발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어쩌면 1970년대와 같은 판소리는 또다시 우리 앞에 오기 어려울지 모른다.
21세기에 1970년대와 같은 판소리 황금기를 다시 맞이하려면 우선 무엇보다도 명창들의 예술적 동반자이자, 후원자이자, 매니저겸 이론 스승이자 명고수이기도 했던 귀명창의 문화를 부활시켜야 한다. 귀명창없는 명창의 탄생은 매우 힘든 일이며 그 존재 의미 또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명창에게만 백일공부와 같은 고행의 길을 강요해서는 안되고 귀명창들 또한 그 곁에서 늘 함께 그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1970년대 성우향이 잇따라 펼친 완창 공연의 실황녹음은 바로 그런 말들을 하고 있다.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창, 아니리, 북소리, 추임새, 웃음소리, 헛기침소리. 어느것 하나 놓칠 수 없는 감상거리요 교과서가 되고 있다. 성우향 판소리 실황 음반이 들려주는 공연장 안에 감도는 전율을 녹음이 아닌 현장에서 한번 느껴보고 싶다. 다같이 성우향의 공연 실황 음반을 감상하며 그 긴장감이 감돌던 1970년대 판소리의 부활을 기원해 보자.
1998년 5월 16일 왕년의 스타 성우향 명창이 다시 무대에 섰다. 공식 공연에 몇 시간 동안 길게 소리를 하기는 실로 오랜만이었고 그런 만큼 일찍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경기가 안좋은 때인데다 비 내리는 주말 오후였는데도 좌석을 가득 메웠다.
공연 직전까지 다소 긴장된 모습을 보이던 성우향은 무대에 오르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그가 언젠가 한 말이 떠올랐다. “난 평상시에는 너그럽게 두리뭉실 살지만 무대만 서면 최고가 돼야 한다는 오기가 발동한다”고 한 적이 있는데 그날 무대에서 그런 모습이었다.
짧은 인사 후 곧바로 공연에 들어간 성우향은 박록주제 단가 <백발가>로 목을 가다듬은 후 정응민제 춘향가 중 초입부터 <춘향이 옥에 갇히는 데>까지 들려주었다. 이 춘향가 전반부는 성우향의 모든 판소리를 통틀어서 가장 돋보이는 대목이다.
오랜만에 무대에 섰는데도 몸짓은 대단히 자연스러워 보였고 아니리에 군더더기가 없어서 좋았다. 1970년대 정신자세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허튼구석을 조금도 보일 수 없었던 당시 소리판에서 얼마나 살벌하게 소리를 많이 해봤으면 실로 모처럼 무대에 선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다.
관중의 추임새 또한 근래에 보기 드문 예술이었다. 북반주는 김성권과 김청만이 맡았는데 특별히 전남 광주에서 초빙해온 김성권(72)은 연로한 탓에 기운이 많이 쇠약해진 모습을 보여 안타까웠다.
성우향은 가정생활이 안정된 후 최근 몇 년간 목이 차츰 좋아져서 잃었던 예전 목성음을 많이 되찾은 모습이었고 노병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역시 성우향이구나. 이래서 예전에 판소리를 했구나. 얼씨구!” 하고 다시금 감탄케 했다. 중성과 하성 부분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원숙해진 면이 있어 반가웠고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성은 그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아 소리를 끌고 나가는 방법이 인상적이었다.
서울 국립국악원에서 3시간 30분 가량 치루어진 이 공연의 절정은 무엇보다 춘향가 중 <십장가>였다. <이별가> 이후 목이 한층 풀리기 시작하여 <십장가>에 이르러서는 요즘 남성 판소리에서도 보기 드문 뭉직한 동편제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가 매를 맞는 이 대목에서는 관중도 함께 따라 불렀는데 최근 유행하는 되바라진 신식소리에 대한 거부와 경고의 매질과 같이 느껴졌고 복고풍을 갈망하는 소리로 들려왔다.
이 공연은 가히 원로가 일으킨 5.16 판소리 혁명이었다. 잠자고 있던 호랑이의 포효와 같이 보성소리의 원형을 다시 세상에 던져 놓았다. 이 혁명이 의미있는 파문을 가져오게 될지, 아니면 그냥 낯선 소리로서 스쳐 지나가게 될지 여부는 판소리에 몸담고 있는 후학과 귀명창들에게 달려있다. 197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명창들 가운데 이제 성우향은 몇 남지 않은 판소리 왕중왕이다. 이제 21세기의 판소리는 그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에게 매달리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연장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십장가>의 매질소리가 부디 공허한 메아리가 아닌 정통 고제 소리의 부흥에 자극제가 되기를 기원한다.
|
| 2007-05-19 |
|
){kind=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