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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노재명 저서 [명창의 증언과 자료를 통해본 판소리 참모습](서울:나라음악큰잔치 추진위원회, 2006년) 106~112쪽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정악, 민속악 음률 전반에 달통한 명창들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조선 소리의 곡조를 거의 이루다시피 했다는 충청도의 김성옥-김정근-김창룡 가문의 김정근은 시조와 음률에 한숙(嫺熟)했다고 한다.
충청도 양반 광대 정춘풍 명창은 가조와 음률에 정통하여 일대가를 이루었다고 한다.(정노식 저서 [조선창극사])
20세기 전반기 판소리계의 왕이었던 박기홍은 판소리뿐 아니라 정가, 거문고, 가야금, 피리, 대금, 해금 등 국악 전반에 두루 명인이었는데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는 그의 그러한 출중한 면모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박씨(박기홍) 창극조에만 탁발할 뿐 안니라(아니라) 문식이 우여하여 사율 일편을 능히 얼거서(얽어서) 당장 축돌님의 색책을 하고 시조, 가사, 현금, 가야금 내지 피리, 저, 해적 할 것 없이 무불정통으로 각각 일가를 완성하였고 현금, 가야금은 타인에게 많이 교수하였다 한다.
통틀어 말하자면 조선 음악에 있어서는 절륜한 천재와 위대한 포부를 갖었든(가졌던) 것이다. 조선 성악과 음률에 견식이 있는 사람으로 박과 종유한 이는 여출일구로 무불탄복이다.”
옛 중고제 명창 심정순 역시 판소리뿐만 아니라 가야금, 양금, 단소 등 여러 음악에 달통한 사람이다. 그의 딸 심매향은 가야금산조, 병창, 판소리, 잡가, 전통춤 등의 명인이었다.
심정순의 딸로서 현재 충남 서산에서 살고 있는 94세의 심화영 명인 역시 전통춤, 판소리, 민요, 정가, 악기 등을 두루 학습했고 지금도 여러 예능에 능하다.
명창 이동백도 판소리 외에 염불, 관악기를 학습했고 옛 명인 강경수, 이정업은 줄타기, 판소리 명고수였으며 한성준 명인은 판소리 명고수, 전통춤, 피리, 줄타기, 땅재주 등에 능했다.
옛 서편제 판소리 대가 이날치(李捺致)는 본래 줄타기 명수였는데 나중에 판소리에 뛰어들어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본명은 이경숙(李敬淑)으로서 줄타기를 하면 줄에서 날렵하게 난다고 하여 '날치'라는 별호를 얻은 것이다.
일제 때 활약한 강춘섭은 판소리, 풀피리산조 등의 명인이었고 오비취는 판소리, 가야금 등을 잘했다.
현대 명창 박봉술도 당대 판소리의 왕자였지만 가야금 등 여타 예능에도 능했고 인접 예술에 대해 폭넓은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작고한 판소리 인간문화재 김소희 명창도 판소리, 남도민요, 가야금, 전통춤 등에 능통한 팔방미인이었다.
작고한 거문고산조 인간문화재 신쾌동 역시 거문고뿐 아니라 판소리, 양금, 가야금 등 여러 음악을 잘했다. 가야금병창 인간문화재였던 박귀희도 판소리, 가야금 등 여러 가지 예능을 많이 학습한 명인이다.
작고한 가야금산조 명인 강태홍, 심상건, 한성기, 김종기, 정남희, 함동정월, 김죽파, 성금연, 원옥화 등도 판소리, 가야금, 정악을 비롯해서 여러 음악을 섭렵했다.
타계한 전통춤 인간문화재 김숙자와 그의 부친 김덕순은 판소리, 전통춤, 무속 명인이었다. 지난 2001년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이말량 명인 또한 가야금, 판소리, 전통춤 등 여러 분야에 출중한 기예를 지니고 있었다.
2002년에 92세로 별세한 김연수(송만갑의 여자 제자) 명인은 판소리, 가야금 등을 학습했다. 1973년에 아깝게 요절한 한일섭 명인(1929년 출생)은 아쟁, 판소리 고법, 작곡, 태평소 등 여러 음악을 뛰어나게 잘했다.
현재 판소리 인간문화재인 박송희 명창도 판소리뿐 아니라 여러 악기와 정가, 전통춤, 창극 연기, 남도민요 등 여러 예능에 두루 능하다.
현재 일본에서 살고 있는 원로 국악인 김차돈은 어려서 판소리, 가야금, 전통춤 등을 배웠고 지금도 여러 예능에 능숙하다.
현존 가야금산조 대가 강순영 명인도 가야금산조와 병창, 판소리, 정악 등에 능하고 지금 전남 함평에 은거하고 있는 원로 국악인 김여막 명창도 판소리, 기악, 전통춤 등을 학습했다.
현재 경남 진주에 거주하고 있는 김수악 명인은 전통춤, 판소리, 가야금, 양금 등을 배웠고 전북 군산에 은거하고 있는 장금도 명인은 전통춤, 판소리 등을 학습했고 지금도 능숙하게 한다.
요절한 명창 안향련 역시 판소리, 가야금, 아쟁, 철현금, 전통춤에 능했고 현재 판소리 인간문화재인 성창순 명창도 판소리, 철현금 등 여러 학습을 하였다.
지금 맹활약 중인 안숙선 명창이 판소리, 가야금산조와 병창, 풍물굿(농악춤) 등에 두루 능통한 것도 바로 그러한 전통의 흐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밖에도 무수히 많은 전통음악 명인들이 여러 예능을 학습했고 이것이 그들의 생존 비결이자 전통사회 연희예술계의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지금이야 소리꾼들이 대개 판소리면 판소리, 춘향가면 춘향가, 춘향가도 자신의 스승 것만 학습하고 이렇게 점차 전문 분야가 세분화되고 집중하는 소리 외에는 대체로 잘 모르고 큰 관심이 없고 여타 분야에 대한 학습 욕구나 기회도 많지 않다.
전통사회에서는 여러 예능을 학습하는 것이 당연했고 전통음악 현장의 분위기 자체가 그러했고 전통음악 세습 가족과 스승들이 권장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국악을 배우려 하는 이가 드물다 보니까 몇 되지 않는 제자들을 놓치거나 빼앗기지 않을까 하여 한 스승이 제자 발목을 묶어 놓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판소리 그 한 종목 자체도 여러 스승에게서 다양하게 배우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판소리 인간문화재 1세대인 박록주 연대의 명창들만 하더라도 좋은 사범이 있으면 제자를 그리 보내어 소리 기량을 더욱 충실히 쌓을 수 있게 안내를 해주고 용기를 주고 하였는데 말이다.
옛 명창들은 성장 배경도 그렇고 전문가로서 활동하는 주변 환경도 자연스레 여타 분야의 음악, 춤 등을 습득하게끔 되어 있었다. 전통사회에서 판소리 명창 대부분이 무속 출신이었는데 당시 이들의 가정 환경과 성장 과정 자체가 굿에 사용되는 대금, 피리, 해금, 춤, 그림 등을 자라면서 자연히 알고 익히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출신들이 줄타기, 땅재주 등 광대놀이에도 관여한 바 창우집단의 여러 가지 곡예와 노래, 기악 등을 두루 배울 수 있는 환경이었다. 또한 태어난 고향의 풍물굿, 민요는 동네에서 뛰어 놀며 말 배우듯이 자연스럽게 배운 전래동요처럼 당연히 익히는 가락이었다.
그런 풍요로운 예능 환경이었기에 전통예술이 총집약된 판소리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고 김정근, 박기홍, 심정순 같이 정악, 민속악 음률 전반에 달통한 명창들이 배출된 것이다.
가야금병창, 거문고병창 또한 그렇게 각종 음악을 두루 섭렵한 명인들에 의해 악기와 창 양쪽을 알고 있고 두루 다 충분히 농익은 상태에서 가야금 연주와 창을, 거문고 연주와 창을 접목시켜 이루어낸 결실이라 하겠다.
판소리 명창들이 민속 성악만 알고 노래한 것이 아니고 정가도 충분히 익히고 소리한 흔적이 많다. 산조 명인들의 경우도 민속악만 알고 산조를 연주했던 것이 아니라 산조를 배우기에 앞서 정악을 기본으로 먼저 익혔고 산조 대가가 되어서도 정악을 산조 이상으로 좋아하고 더 즐겨 연주했었다.
현대에 와서 한때는 정악 연주자들이 민속음악인들을 무시하고 학교에서 정악을 전공하는 학생이 <아리랑>이라도 연주하면 선배들한테 호되게 혼나기 일쑤였고 정악 연주자와 민속음악인들이 남북한 대립하듯 하던 시절도 잠깐 있었다.
그러나 일제 때까지만 해도 김계선 같은 정악 대금의 대가가 민속음악인들과 아무런 경계나 허물 없이 합주를 하였고 민요 <창부타령> 같은 민속음악을 즐겨 연주한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다.
학문이 세분되고 국악의 장르도 자꾸 분리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각 장르가 서로 굉장히 다른 세계이고 전혀 상관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전통사회에서는 민속악과 정악 간에도 활발한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산조 전공자는 대체로 산조만, 전공 악기 하나만 주로 익히지만 전통사회에서는 산조 외에도 정악, 판소리, 가야금병창, 전통춤 등을 다양하게 배웠고 악기도 주전공 악기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여러 악기를 다채롭게 학습했다.
그렇게 다양한 예능을 학습하고 여러가지 활동을 병행한 것은 다름아닌 전통사회 전통음악인들의 처절한 생존의 방편이었다.
이러한 옛 판소리 명창들, 국악 명인들의 학습, 성장과정, 그 삶의 내력과 전통사회 환경은 다음과 같은 명고수 김명환의 증언에도 잘 나타나 있다.
“무속 집안에서는 처음에는 판소리럴 헐라고 달라들어 갖고는 허다가 안되먼 피리, 젓대 배우고 가야금도 배우고, 그것도 허다 못허먼 재주, 땅재주. 그것도 안되먼 성냥깐(대장간)에서 칼, 낫, 호맹이도 치고, 글 안허먼 포수. 또 침 논 거 배와 갖고 의원질 허고 그렇습니다.”(김명환 구술, [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 70쪽)
무속인, 광대들, 대장쟁이, 한의사가 전통사회에서는 이렇듯 관계가 깊었다.
고대사회로 거슬러 올라가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굿에 쓰이는 방울, 칼 같은 철제 무구들을 무당이 제작에 관여했고 그런 전통이 철을 다루는 대장쟁이와의 혈연 관계로 이어진 것이다. 그래서 20세기까지도 그러한 혈연 흔적은 종종 볼 수 있었다. 이같은 한국 대장간과 무속의 깊은 연관성은 이두현 등의 선행 조사, 연구가 이미 있었다.
전통사회에서는 무당이 병을 고치는 구실을 했으므로 옛 한의사와의 상관 관계도 있었던 것이고 또 황해도 악사 김영택 같은 명인이 사냥에 능했던 것도 김명환의 증언에 보이는 이 예술 집단이 포수로도 많이 활약했다는 말과 상관이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유년기에는 명창이 될지, 어떤 예능 종목으로 장래가 풀릴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이 특수 집단 출신들은 일찍부터 가무악 등 활동 가능한 예능 종목을 두루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이보형 견해 참고)
그래서 여러 예능에 두루 능한 명인 명창들이 탄생한 것이고 이들에 의해 매우 다양하고 뛰어난 판소리가 계속 출현하고 발전할 수 있었고 이들은 때와 장소, 생계에 따라서는 판소리 명창이지만 여타 분야에도 바로 투입되고 능숙하게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일제시대 권번, 조선구파배우조합, 조선성악연구회 같은 단체 생활에도 이어져서 이런 국악인 결속체 및 학습장에서도 판소리, 산조, 정악, 전통춤, 줄타기 등 각종 예능을 두루 체험하고 익힐 수 있는 환경이었다.
오늘날 대학교에 국악과가 많이 생기고 국악원이 전국에 늘어나고 있지만 전통사회의 풍요로운 학습 분위기는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실전에서 체험할 수 있는 배움 환경, 여러 가무악을 두루 자연스레 익힐 수 있는 여건과 토양이 너무 척박해졌다 할 것이다.
이런 점들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국악 전반의 질적 동반 상승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은 국악 방송의 활성화, 다채로운 공연 육성, 연구 및 관계 출판물 보급 등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국악 애호가가 많이 늘어나야 되고 그 기초 공사로서 국악 조기 교육이 장기적인 목표 아래 왕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각 장르가 서로 유기적으로 영향 관계를 주고 받지 못하고 각기 개별적으로 무대화되기 때문에 서로의 장르에 대한 학습 환경이 협소해지고 음악 자체도 그릇이 작아진다고 할 수 있다.
국악이 지금처럼 감상자의 기호나 요구와는 무관하게 발표를 위한 겉치레적인 발표, 연주자의 경력을 위한 발표, 국가의 형식적인 지원에 의한 상투적인 발표 공연으로는 현재 같은 모습을 벗어나기 어렵다.
오래 걸리더라도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어린 학생들에게, 가능한 일찍부터 국악을 가르치고 국악의 맛을 일깨워 향유하는 인구를 점차 늘려야 한다.
성급하게 국악 인구 증가시키려고 전통음악보다는 퓨전국악 일색으로 대중에게 다가가서는 일시적으론 늘어나는 것 같아도 그래서는 결국 국악의 진수를 제대로 느끼는 골수 국악팬은 단 한명도 탄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우선은 오랜 지혜와 깊은 맛이 농축되어 있는 전통음악을 잘 살리고 그 제 맛을 일단 알게 해주어야 한다. 한명, 두명씩이라도 진수가 무엇인지를 아는 애호가가 늘어나는 것이 소중한 것이고 서두르지 말고 조기 교육 등 기초 문화 형성을 차근차근 해가며 공들여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국악을 참으로 좋아하는 애호가가 하나, 둘 증가하여 전통사회처럼 실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이 국악을 좋아하고 즐기고 특수 공연장뿐 아니라 혼인, 회갑 등 생활 현장에서 전통예술이 다양하고 자연스레 연희되어야 한다.
그러면 여러 다양한 장르의 전통예술이 유기적인 관계가 형성이 되고 예술인들간에 서로 교류가 왕성해지고 서로의 장르에 대해 배움이 많아지고 결국 전통예술의 질이 전반적으로 좋아지고 이 시대와 미래, 우리에게 맞는 음악도 자연스레 탄생되고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전통연희 역사에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지혜는 바로 예술가들 나름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향유층의 의지와 넉넉한 문화 환경이 그 이상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이고 풍성한 문화 여건을 되찾기 위해 긴 호흡을 가지고 노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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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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