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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국창 김창환 선생님(판소리 명창 정광수 증언자료)
  jungkwangsu.jpg(사이즈:98.7KByte)
나의 스승, 국창 김창환 선생님
증언/정광수, 대담 및 정리/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자료 MICD-0212~0213, MICD-0214~0215
콜럼비아 유성기 원반(10) 서편제 판소리(소리:김창환·정정렬, 고수:한성준 외)
명인기획/엘지미디어(LG소프트) LGM-AK010(2CD), 1996년 제작. 녹음:김창환(1930년) 정정렬(1930·1932·1933년), 증언:정광수·최정희, 녹음 고증·음반 기획·해설·사설 채록:노재명, 디지털 매스터링:김도연, 녹음 제공:NIPPON COLUMBIA CO., LTD. Pressed by Jigu Inc. Artwork by 이주엽. 뒷표지에 김창환 사진 수록. 총 53쪽짜리 해설서 내장.
[CD 1] 김창환 1.단가 고고천변(2:51) 2.춘향가 중 이별가(3:18) 3.흥보가 중 중타령(2:40) 4.중이 집터 잡아주는 데(3:11)
김창환·박록주·하농주 5.남도민요 성주풀이(3:06) 6.남도민요 농부가(3:01)
정정렬 7.단가 적벽부(5:57) 8.단가 불수빈(6:07) 9.춘향가 중 천자뒤풀이(2:48) 10.춘향가 중 이별가(6:37) 11.춘향가 중 기생점고(3:09)
[CD 2] 정정렬 1.춘향가 중 몽중가(3:40) 2.춘향가 중 기생 난향이 춘향의 훼절을 강권(5:52) 3.춘향가 중 어사 남원행(3:22) 4.춘향가 중 박석티(3:08) 5.춘향가 중 어사와 장모(3:14) 6.심청가 중 모녀 상봉(6:52) 7.숙영낭자전 중 모자 영이별하는 데(3:07) 8.숙영낭자전 중 약 구하러 가는 데(7:00) 9.옥루몽 중 강남홍을 만나다(6:47)
* 음반 해설서 5~9쪽 기록 발췌: 나의 스승, 국창 김창환 선생님(증언/정광수, 대담 및 정리/노재명)
증언 일시 및 장소 - 1991.2.12.19:00~19:20(전화 통화), 1993.8.6.15:30~15:40(전화 통화), 1995.9.14.20:00~22:30(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176-49 4층 정광수 판소리 전수소), 1995.12.13.18:20~18:40(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164-1 두레빌딩 지하 서울두레극장)
  나 정광수(丁珖秀)는 1909년 7월 28일(己酉生) 전남 나주군 공산면 복용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용훈(榕薰)이고 아호는 영암이다. 본적은 광주시 서구 사동 136번지이다. 현재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176번지 49호 4층 판소리 전수소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살고 있다.
  서편제의 대가 정창업(丁昌業) 명창은 나의 조부이다. 정창업 명창은 슬하에 3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나의 부친은 둘째 아들이다. 나의 부친은 국악을 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성함을 밝히고 싶지 않다. 나는 3형제 가운데 막내 아들이다.
  정창업 명창은 고종 때 오위장 벼슬을 하셨다. 나의 큰아버지인 정학진(丁學鎭)씨 아들이 정창업 명창의 광무(光武, 1897~1909) 때 교지 5장을 현재 보관하고 있다. 정창업 명창은 김창환(金昌煥), 정정렬(丁貞烈)과 같은 명창들을 길러내셨다.
  나는 조부 되시는 정창업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지 못했다. 내 나이 10세 무렵에 조부께서 작고하셨기 때문이다. 조부 정창업 명창은 70대 초반에 작고하셨다.
  나는 9세부터 13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고 17세부터 22세까지 전남 나주군 삼도면 양화리 김창환 선생님 댁에서 판소리를 공부했다.
  당시 김창환 선생님은 너무 연로하셔서 선생님에게는 많이 배우지 못했고 그 분 아들인 김봉학 명창 문하에서 주로 배웠다. 사설을 먼저 외우고 나서 수업을 받았다. 선생님이 북으로 장단을 치며 가르쳐 주시면 따라 부르는 식으로 학습이 이루어졌다.
  김봉학 명창은 그 부친 김창환 선생님 밑에서 판소리를 배워 명창이 되었고 부친을 따라 서울로 가서 원각사, 단성사 등에서 공연을 했으며 나라에서 주사 벼슬을 하사 받았다. 김봉학 명창은 나보다 26세 연상(甲申生)이다. 김봉학 명창의 부인은 남편과 동갑이라 사이좋게 산다며 자랑하곤 했다.
  나는 김봉학 명창 문하에서 춘향가는 2년 동안 초입부터 <어사 출도>까지, 흥보가는 1년 동안 전바탕을 배웠고 심청가는 1년 좀 못되는 기간 동안 초입부터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데>까지 배웠다. 학습 도중에 김봉학 명창이 타계했기 때문에 그 이상은 배우지 못했다. 김봉학 명창도 그 부친 되는 김창환 선생님에게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배우지는 못했다.
  내가 김봉학 명창 문하에 처음 들어갔을 때 오수암(吳壽岩)씨, 성원목(成元睦)씨가 이미 김봉학 명창 밑에서 판소리를 배우고 있었다.
  오수암씨는 사람들이 흔히 ‘오수바우’라 했으며 나보다 한 살 위였고(1908년 출생) 나주 반남면에서 태어났다. 오수암씨는 미남이었고 소리를 잘 했다. 큰 목은 아니었지만 구성지고 고운 소리로 관중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30대에 그만 요절하고 말았다. 최막동씨가 한때 오수암씨 문하에서 소리를 배운 바 있다.
  성창순씨의 부친 성원목씨는 전남 화순 동북 태생이며 나보다 7~8년 가량 선배이며 나보다 몇 달 먼저 김봉학 명창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다. 성원목씨는 성음이 좋았고 춘향가를 잘했으나 나중에 목이 상해서 대성하지 못했다. 목이 나빠진 후에는 광주권번에서 소리 선생을 했고 창극단에서도 활동했다.
  당시 강남중(姜南中)씨는 김창환 선생님 문하에서 흥보가를 배웠는데 <중타령>에서 ‘호호’ 하는 성음을 제대로 못내서 김창환 선생님으로부터 “저리 가버려” 하고 꾸중을 들은 바 있다.
  내가 김봉학 명창 문하에서 배우기 전에 이미 박지홍(朴枝洪)씨, 임옥돌(林玉乭)씨는 김창환 선생님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다. 박지홍씨는 붓글씨를 잘 했는데 김봉학의 필체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했다.
  임옥돌씨는 장성 사람으로서 김봉학 명창 문하에서 잠깐 토막소리를 배웠다. 당시 임기창이라는 20세 가량 된 젊은 사람은 내가 김봉학 명창 문하에 처음 들어갔을 때 이미 춘향가를 다 배운 상태였으나 그후 아깝게 요절했다.
  김창환 선생님은 슬하에 4남 1~2녀를 두었다. 아들 이름은 차례로 봉이(鳳伊), 봉학(鳳鶴), 봉식(鳳植), 봉도(鳳道)이며 딸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들 4명 모두 각복(各腹)이다.
  장남 봉이씨의 소리는 사람 소리가 아니라 귀신 소리다. 성음에 힘이 있고 소리를 기가 막히게 했으나 그 부친 김창환 선생님은 봉이씨가 서자라 하여 “배에 붙일 소리 등에 붙인다” 하면서 구박했고 봉학씨는 차남이지만 적자라고 무척 아꼈다. 봉이씨는 그 부친인 김창환 선생님 문하에서 공부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소리를 배웠다.
  봉식씨, 봉도씨는 국악을 하지 않았다. 봉학씨는 약 50세에 아편으로 세상을 떠났다. 봉이씨는 봉학씨가 작고한 후 얼마 안돼서 뒤따라 타계했다. 봉이씨, 봉학씨 모두 그 부친 김창환 선생님보다 앞서 작고했다. 김창환 선생님은 두 아들이 죽은 지 약 6년 후에 타계했다.
  김봉학 명창은 명필이었다. 그 분이 춘향가 사설을 구식 궁체로 깨알같이 적어서 나에게 주었다. 나중에 임방울(林芳蔚)씨가 나에게서 그 소리책을 빌려 본 적이 있다. 얼마 뒤 그 소리책을 되돌려 받아 보관하던 중 나의 안사람이 모르고 그 책으로 도배하여 소실되었다.
  임방울씨는 박영감이라 불리는 박재현(朴在賢)씨 문하에서 소리를 배웠다. 박재현씨는 북을 잘 쳤는데 어디서 전문적으로 소리를 배운 것은 아니고 명창들의 소리를 많이 들어서 자작으로 불렀다.
  임방울씨는 나에게서 빌려 간 춘향가 창본에서 <쑥대머리> 사설을 따서 작곡하여 불렀다. 임방울씨는 유성기음반에 <쑥대머리>를 취입하여 유명해진 후 유성준(劉成俊) 선생님 문하에 들어가서 판소리를 배웠다.
  유성준 선생님과 비슷한 연배인 이선유(李善有) 명창은 본 적이 없다. 일제 때 『오가전집』이라는 소리책을 냈다는 얘기만 들었다. 그 분은 제자가 거의 없었다. 이선유 명창의 수궁가에는 <새타령>이 있다고 하는데 유성준 선생님의 수궁가에는 그런 대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명창이 수궁가에서 <새타령>을 부르는 것 또한 본 적이 없다.
  나는 22세 때 김봉학 명창의 문하에서 나와 목포권번에서 약 2년 동안 소리 선생을 했다. 목포권번은 본래 목포여기조합이었다. 여기조합 시절에 그 곳에 전군옥 명창이 소리 선생으로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고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소리를 잘했다.
  나는 목포권번에서 막 나왔을 때 당시 장흥 유지였던 김명식 참사가 장흥군 부동면 보림사 위에 삼성암을 지었는데 내게 방 하나를 내주어 그 곳에서 2년 동안 독공을 했다. 독공 후에는 순천권번에서 약 2년 동안 소리 선생을 했다. 그 때 유성준 선생님이 순천군수 관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김연수(金演洙)씨가 소리를 배우면서 장단이 틀리다고 따지자 유성준 선생님이 화가 나서 그 곳을 떠났고 그래서 나는 그 분께 배울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 이듬해 정월 나는 진주권번에 소리 선생으로 초빙된 유성준 선생님 문하에 들어가서 전세방을 얻어 살면서 약 1년 동안 동편제 수궁가와 적벽가를 배웠다. 유성준 선생님 문하에서 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가 유지 서채호씨의 후원으로 전남 벌교 부용사에서 약 6개월 동안 독공을 했다. 그 뒤에 나는 정응민 명창 문하에 들어가서 심청가를 배웠다. 정응민 선생은 나보다 11살 연상이다.
  나는 20대에 빅타 음반회사에서 나의 첫 음반을 취입했다. 나는 당시 장흥에 있는 삼성암에서 판소리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빅타 회사로부터 음반 취입 제의를 받고 서울로 갔다. 서울로 가는 길에 충청도에 있는 현암사에서 김연수씨를 만나 함께 음반을 취입하러 빅타 회사로 갔다.
  빅타 회사에서는 나, 김연수씨, 김옥련씨에게 8장의 유성기음반에 입체창으로 수궁가를 취입해 달라고 하였다. 김연수씨는 8장에 수궁가를 담아내기가 힘들다며 거절하였고 그래서 입체창 수궁가 취입은 무산되었다. 빅타 회사에서는 내게 서울까지 오느라 고생했으니 독집 음반이라도 취입하고 가라 하여 유성기음반 한 장을 취입했다. 김옥련씨는 김연수 명창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운 사람이다.
  내가 빅타에서 취입한 것은 적벽가 중 <새타령>과 <오림 자룡 출현>이다.(Victor KJ-1351-A·B 赤壁歌 烏林에子龍나오는데上·下 丁珖秀 鼓韓成俊) 북반주는 한성준 선생님이 맡았다.
  녹음한 곳은 서울에 있던 빅타 음반회사의 녹음실이었다. 난생 처음 음반을 취입하다 보니 긴장하여 <새타령> 끝부분을 부르다가 사설을 더듬어서 <새타령>을 다시 취입하였다. 한성준 선생님은 처음 취입된 <새타령>이 좋았는데 아깝게 됐다고 하였다.
  빅타 회사에서 취입한 나의 첫 독집 음반은 소리가 설익어서 세상에 내놓기가 부끄러웠다. 내가 빅타 회사에서 음반을 취입할 당시 빅타 문예부장의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유 부장’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내가 빅타 회사에서 취입한 적벽가는 유성준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다. 나는 빅타 회사에서 음반을 취입하고 다시 장흥으로 가서 판소리 공부에 주력했다. 내가 빅타 회사에서 음반을 취입하긴 했지만 음반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못보았다.
  동편제 적벽가에는 <삼고초려>가 없다. 그래서 나는 30세 무렵에 강장원(姜章沅)씨와 함께 경기도 포천에 있는 장대감의 재각에서 여름 한 철 동안 이동백(李東伯) 선생님을 모시고 <삼고초려> 등을 배웠다. 강장원씨는 나와 동갑이라 친하게 지냈으며 목이 좋았고 소리를 잘했다.
  나는 30대 초반에 라디오에 출연하여 유성준 선생님 문하에서 배운 수궁가와 이동백 선생님 문하에서 배운 <삼고초려>를 방송한 바 있다. 그리고 나는 30대 초반에 동일창극단에서 활동하였다. 그 창극단에는 임방울, 강남중, 조상선, 김준섭, 박초월, 한애순, 강남월, 임준옥씨 등이 있었다. 나는 광복 때까지 이 단체에서 활동했다.
  일제 때 활동한 국악인 가운데 김종기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두 명이 있는데 한 사람은 1910년 무렵에 출생하여 보통학교를 졸업한 가야금산조, 병창 명인이고 또 한 사람은 김수악의 숙부로서 전북에서 태어난 거문고산조, 가야금산조 명인이다.
  광복 후 나는 광주로 가서 판소리 학원을 내서 제자들을 가르쳤고 국악 동인 30여명과 함께 광주국악원을 만들어 그 곳에서 판소리를 가르쳤다. 그 후에는 민속예술학원, 삼남국악원을 차려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1964년에 나는 인간문화재로 인정받았다. 처음에는 춘향가로, 현재는 수궁가로 지정되어 있다. 1986년에 나는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여 책으로 출간한 바 있다.
  내가 가르친 제자로는 안숙선, 김영자, 윤충일, 정순임, 정춘실, 정옥향, 김성권, 방성춘, 신영자, 박홍출, 송갑철, 김종만, 임향림, 안은정, 조진경, 최해윤, 박정자, 정미옥, 한송희 등이 있다. 나의 둘째딸 의진이는 예전에 나와 박록주씨에게서 판소리를 배웠으나 지금은 평범한 가정 주부로 지내고 있다. 나는 선생님들로부터 물려받은 소리를 되도록 고치지 않고 원형 그대로 부르려고 노력한다. 제자들에게도 그 점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
  나는 수궁가 전바탕을 두 차례 녹음하여 음반으로 낸 일이 있고(문화재관리국, 뿌리깊은나무) 적벽가는 빅타 유성기음반에 취입한 <새타령>과 <오림 자룡 출현> 외에도 릴 테입에 전바탕을 녹음한 바 있으며(1978년 11월, 문예진흥원 AT-0874) 심청가와 흥보가는 거의 녹음한 바 없다. 앞으로 나는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흥보가를 음반에 남기고 싶다. 특히 김창환 선생님 제인 춘향가와 흥보가를 음반에 넣어 보존하고 싶다.
  노재명(盧載明)씨가 나의 이런 사정에 대해 쓴 글을 읽은 바 있다.(“판소리 5명창과 다섯 바탕 눈대목”『월간 클래식피플 1995년 12월호』 116~123쪽)
  내가 보유한 김창환 선생님 제 춘향가와 흥보가가 전승이 끊어질 위기에 처해 있을 뿐만 아니라 흔적 조차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글을 읽고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앞으로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유성준 선생님 제 수궁가뿐 아니라 김창환 선생님 제 춘향가와 흥보가도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녹음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런 생각 때문에 1995년 12월 13일 서울두레극장에서 한승호, 한애순, 박동진씨와 함께 공연할 때도 나는 김창환 선생님 제 흥보가를 부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김창환 선생님의 소리는 법도가 엄중하고 통이 큰 데가 있다. 특히 우조, 엄성에 그 분의 엄격하고 무서운 면이 있다. 김창환 선생님의 춘향가에서 <긴 사랑가>는 ‘만첩청산’으로 시작되는데 ‘어헝’ 하는 호랑이 성음이 매우 특이하고 좋다. <이별가>에서는 경드름이 약간 쓰인다. 김창환 선생님의 춘향가에는 <돈타령>이 없다. <과거장>은 자진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짜여져 있다. <박석티>는 진양조 장단에 반드시 우조로 불러야 한다. ‘흑운 박차고’ 하는 흥보 <제비 노정기>를 혹 중중모리로 부르는 사람이 있으나 김창환 선생님은 반드시 자진모리로 불렀다. <박타령>에서는 흥보 마누라가 좋아하는 발림이 재미있으면서도 멋이 있다. 예전에 그 대목에서 김창환 선생님의 발림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는 일제 때 무대에서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를 부르는데 ‘만리 조선국을 나가는데’라고 했다가 경찰서에 끌려 가서 죽다 살아났다. 나는 그런 시절 속에서도 선생님들로부터 물려받은 소리를 버리지 않고 간직하려 노력했다. 어렵게 공부하고 힘겹게 소리를 지켜 나갔던 그 때를 회상하며 나는 이런 글을 지었다.
  “찬 눈 속에 한고를 견디고 이기어 지나온 매화 향기는 절개가 특이하다.”(雪後梅花節特長, 1976년 정광수 명창이 지은 한시 중에서)
* 상기 사진 설명: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사진자료 관리번호 MIPHOTO-00325
1995년 9월 14일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에서 정광수 명창의 모습. 노재명 촬영.

200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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