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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명창 이동백
글/노재명(국악음반박물관 관장)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자료 MICD-2481~2485
판소리 명창 이동백
국립국악원 제작, (주)서울음반 제조 SBCD-5103(1CD), 2003년 3월 비매품 한정판 제조 배포. 유성기음반 복각 녹음 제공 및 해설서 원고 집필, 사설 채록:국악음반박물관 노재명. 최초의 이동백 복각 CD 독집 음반(이동백 전시회 기념 음반). 제작 총진행:주재근.
[이동백 독창]
잡 가 1.새타령(1)(1928년 녹음)
2.새타령(2)(1935년 녹음)
단 가 3.백발가(1928년 녹음)
4.천리강산(1935년 녹음)
판소리 5.춘향가 중 이별가(왈칵 뛰어 달려든다)(1928년 녹음)
6.심청가 중 심봉사 어린 딸 안고 자탄하는 데(1928년 녹음)
7.심청가 중 심청이 부친과 이별하는 데(1928년 녹음)
8.심청가 중 심봉사 황성 올라가는 데(1928년 녹음)
9.심청가 중 심봉사 맹인연에서 애소하는 데(1928년 녹음)
10.심청가 중 심봉사 눈 뜨는 데(부녀 상봉)(1928년 녹음)
11.적벽가 중 동남풍 비는 데(1928년 녹음)
[이동백 일행 분창]
창 극 12.춘향전 중 어사 분발～남원행(이동백)(1926년 녹음)
13.심청전 중 심청 구걸(이동백·김창룡·정정렬·임소향·문련향)(1935년 녹음)
14.적벽가 중 군사 설움타령(부모 생각)(이동백)(1935년 녹음)
15.적벽가 중 장승타령(이동백)(1935년 녹음)
* 음반 해설서 6~12쪽 기록: 판소리 명창 이동백(글/노재명)
이동백(李東伯, 1866-1949)은 국악 가문 출신이긴 했으나 송만갑이나 김창룡처럼 판소리를 전문으로 한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그런 까닭과 전통사회의 판소리 전승 폐쇄성 때문에 송만갑과 김창룡 만큼 스승들한테 충분하게 소리를 배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동백! 그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활약한 명창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 할 만큼 최고봉 자리에 섰다. 이는 판소리 역사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이다.
그 만큼 그는 아주 뛰어난 목과 예술성을 타고 났고 독창적이었으며 어느 누구보다도 노력도 많이 하였다 할 것이다.
구한말부터 일제 때까지 활동한 판소리 명창 가운데 명성을 날린 명창으로 박기홍, 김채만, 이동백, 송만갑,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 전도성, 유공렬, 이선유, 유성준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기량이 가장 뛰어난 다섯 명을 가리켜 ‘판소리 5명창’이라 이른다. 사람의 취향에 따라 각기 달리 5명창을 선정하는데 오늘날에는 대체로 녹음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이동백, 송만갑,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을 판소리 5명창으로 꼽는다.
이동백은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13세 무렵부터 이규석, 최상중, 김정근, 김세종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이동백은 1891년 무렵부터 공연 활동을 했다. 처음에 경기도로 상경했다가 진주, 창원 등 주로 경상도 지역을 주요 무대로 삼아 약 10년간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후 그의 나이 1902년 무렵에 서울로 상경하여 원각사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이때 그의 소리에 탄복한 고종이 그에게 통정대부(正三品)의 직함을 주었고 순종은 그가 원각사에서 소리할 때면 전화통을 귀에 대고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동백의 판소리는 남녀노소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고 5명창 가운데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입은 명창이었다.
이동백은 녹음이 남아있는 5명창 가운데 가장 즉흥성이 강하고 가장 독창성이 있는 판소리를 했다. 그는 판소리를 주로 독공으로 터득했는데 자기다운 모습을 찾기 위한 나름대로의 수련을 통해서 김정근의 중고제나 김세종의 동편제에 얽매이지 않고 이동백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제를 구축했다.
그는 단가 하나를 가지고도 소리판의 분위기에 따라 즉흥적인 편곡을 통해서 다양한 선율과 여러 성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는 고운 목을 지닌데다 통성을 바탕으로 한 호령조 성음을 위주로 판소리를 하기 때문에 시원한 느낌을 준다.
미리 정해 놓은 각본 없이 청중의 분위기를 파악하여 즉흥적으로 판소리를 엮어 나간다. 하늘 찌르듯 질러대는 고음과 땅 꺼지듯 내는 저음을 자유롭게 오르내리며 숨가쁘게 몰아가는 창법은 그의 특기이다. 그래서 큰 성량을 바탕으로 고음과 저음을 곡예하듯 극과 극으로 자유롭게 오르내리는 그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번지점프라도 탄 듯 통쾌한 기분이 든다.
태권도, 유도처럼 단수로 말하자면 임방울은 3단, 이동백은 9단 정도라고 할까. 이동백은 암새와 숫새의 미세한 음색까지도 구별해서 소리할 정도의 명창이었다.
이동백의 소리는 처음 탁 들으면 흠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이 엉성한 듯 보인다. 마치 택견 고수가 술에 취한 듯 좌우로 흐느적거리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상 흠을 잡으려 하면 어느 한군데 잡을 수가 없다. 이동백은 실수인 듯 보이는 소리 조차 정감이 있고 그 나름대로 멋이 있다. 이것이 바로 이동백 소리의 매력이다. ‘이도다완’에 돌출되어 있는 불순물 자국 조차 아름다워 보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이동백은 빈틈없이 꽉 채워서 소리를 하지 않는다. 잘 됐든 못 됐든 일단 입을 떠난 소리는 미련을 두지 않는다. 이동백의 판소리 진행 속도는 요즘 소리들보다 훨씬 빠르고 거뜬거뜬 경쾌하게 넘어가는 느낌을 준다. 이동백뿐 아니라 일제 때 활동한 거의 모든 명인들의 판소리, 산조가 요즘에 비해서 훨씬 빠르다.
이는 한 장단, 한 마디 안에서 많은 걸 담지 않고 많은 기교를 부리지 않고 큰 욕심을 부리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일 좀 더 욕심을 내서 더 많은 걸 보여 주려고 하고 더 화려하게 장식을 하려고 한다면 속도는 당연히 느려질 수밖에 없다.
화장이 많은 음악, 과도하게 박수와 추임새를 이끌어 내려고 애쓰는 음악은 듣는 사람에게 부담감을 주고 싫증나게 하기 쉽다. 허나 조미료가 가미되지 않은 담백한 음악, 관중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음악인 본인 스스로가 몰입되어 가슴으로 노래하는 음악은 은은한 감동을 주고 많이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옛 문헌 기록에 의하면 이동백이 젊어서 몇몇 명창들의 가르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국악학자 이혜구 박사가 일제 때 경성방송국에 출연한 이동백한테 직접 들은 말에 의하면 이동백은 판소리를 거의 자득했다고 한다.
이동백이 아마 몇몇 명창들에게 배우려고 한 적은 있으나 예전 대부분의 명창들은 웬만해선 잘 안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학습이 쉽지가 않았을 것이고 그런 까닭에 이동백은 아마도 독공에 많은 힘을 쏟았을 것이다.
좌(左) 동백, 우(右) 만갑이라 할 만큼 이동백과 일제 때 쌍벽을 이룬 명창 송만갑이 유서깊은 동편제 가문에서 태어나 조부와 부친한테 많은 가르침, 엄청난 소리 유산을 물려받은 것에 비하면 이동백은 물려받은 유산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동백은 잘 타고난 목 하나만 믿고 맨주먹으로 출발하였고 법통있는 소리 재산을 왕창 물려받은 갑부 송만갑, 김창룡과 같은 명창들과 겨루어야 했기에 종종 비교가 되어 비판도 받았다. 목은 좋으나 소리에 격조가 떨어진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1940년 판소리 사전으로 일컬어지는 [조선창극사]를 남긴 정노식은 이동백의 소리를 극찬하면서도 조격이 고아하지 못하여 야비한 데 흐르는 흠이 없지 않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판소리 인간문화재 박동진 명창이 이동백한테 들은 바에 의하면 이동백과 김석창 두 명창이 충청도 해미읍성에 들어가서 소리를 했는데 사례금으로 김석창은 100냥, 이동백은 15냥을 받게 되어 이동백이 화가 나서 그릇을 깨고 돈을 받지 않았다 한다.
성경린도 이와 동일한 일화를 증언한 바 있다. 암튼 이 사건을 계기로 이동백은 한층 분발하여 소리 수련에 힘을 쏟았고 그리하여 진정 이동백다운 이동백이 될 수 있었다 하겠다.
당시 일부 귀명창들의 평가와 사례금 구분은 이동백을 낮게 보기도 했고 이동백은 가끔 이런 점에 분개했다. 그러나 어쩌면 이동백은 송만갑이나 김창룡 만큼 소리 재산을 많이 물려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었던 명창이라고 난 보고 싶다. 그래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깊이와 높이, 넓이를 알 수 없는 큰 판소리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송만갑과 김창룡도 매우 뛰어난 명창이었으나 이들은 가문의 유서깊은 소리 재산을 지키기에도 사실 벅찼다. 김창룡의 경우는 죽을 때까지 가문의 중고제 판소리를 충실히 지키는 쪽으로 자신의 길을 설정하였다.(김창룡도 물론 말년에 소리가 약간 통속화된 경향은 있음) 송만갑은 처음엔 가문의 소리를 따르다가 나중엔 이를 떨쳐 버리고 부친과 등을 돌려 버리면서까지, 집에서 쫓겨 나면서까지 그 소리 갑부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조선 제일의 소리 재산을 물려받은 송만갑의 중압감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아마도 그 어깨가 무거운 자리에서는 도저히 부친을 능가하는 소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재산을 다 버려야만 자신만의 소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송만갑은 결국 그 무수한 소리 재산을 거의 다 버리고 밑바닥부터 한, 두푼 모아 결국 나중엔 자기 스스로 거부가 되었다. 송만갑은 그 쾌감을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물려받은 재산에 의한 왕자가 아닌 밑바닥부터 시작하여 왕자 자리에 오르는 기분을 느끼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부모로부터 재산을 너무 많이 물려받은 자식들이 그 재물 지키느라 앞가림 제대로 못하고 그 재산 관리하다가 자기 볼 일은 정작 못보는 경우와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이동백이 비록 선배 명창들의 가르침과 도움을 많이 받지 못하여, 물려받은 소리 재산이 별로 없이 춥고 배고프게 소리를 터득하다 보니 이따금 소리에 천박스러운 점이 약간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이동백의 판소리 춘향가 중 <이별가>(Victor 49028)에서 춘향과 춘향모의 과장된 몸짓 표현 방식, 그리고 그의 수궁가 중 <용왕 탄식>~<물고기들이 토끼를 구해 오겠다는 데>(Victor 49029) 유성기음반 등에서 그런 경우가 있다.
허나 그가 독공을 통해 결국 이루어낸 그 큰 판소리 금자탑에 비하면 그런 흠집은 오히려 눈물이 날 정도로 사실 애정이 가는 부분이다. 그 작은 흠집 때문에 이동백을 비하한다면 그건 너무 잔인하고 냉정한 처사다. 아니 그건 아마도 한강물에 담배불 하나 떨어졌다고 소방서에 걸려온 상식밖의 신고 전화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동백의 성장과정을 보면 그의 판소리에 흠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작은 흠으로 인하여 나머지 큰 부분이 더욱 빛난다.
송만갑(宋萬甲, 1865～1939)은 아버지 송우룡 등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송만갑은 이동백과 당대에 어깨를 겨룬 명창으로서 이들은 가히 근대 판소리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송만갑은 선천적으로 잘 타고난 좋은 목, 가문에서 대대로 물려받은 막대한 소리 유산, 오랜 독공으로 연마한 치밀한 공력으로 인해 음악적 완성도가 경이로울 만큼 완벽에 가깝다. 그래서 송만갑은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에 비유된다.
반면 이동백의 소리는 즉흥성이 강하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기백 넘치는 고음과 망망대해를 펼쳐 놓은 듯 아주 든든하고 진중하게 내려 놓는 저음이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기세등등한 일품이기에 이백(李白)의 호탕하고 자유자재한 시정(詩情)에 비견된다.
사진을 보면 생기기도 매섭고 단단하게 생긴 송만갑은 마치 쇠망치로 내려치듯 맺고 끊음이 확실 분명하지만 이동백은 소리 매듭이 정확치 않을 때가 있고 끝나는 듯하다가 어영부영 다음 부분으로 이어 가기도 하고 이어질 듯하는 분위기를 풍기다가 싱겁게 끝내 버리기도 한다. 이동백은 아니리 말인 듯 노래인 듯 주섬주섬 섬기며 흐느끼기도 한다.
이는 이동백의 출신지인 충청도 사투리와 같은 느낌이라 할 것이다. 뚝뚝 끊지 않고 흐지부지 말꼬리를 흐리기도 하고 부드럽게 다음 말로 이어지기도 하는 충청도 사투리의 구수함과 같은 것이다. 말과 음악이 전혀 다른 별개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영향 관계는 분명 있다고 하겠다.
어딘가 좀 모자란 듯 꽉 채우지 않은 상태, 조금 더 조금 더를 기대하게 만드는 소리가 이동백의 판소리이다. 건물 이곳저곳을 다 꾸미고 단청까지 화려하게 장식한, 어디 한군데 더 이상 손볼 곳이 없는 그런 소리가 아니라 커다란 기둥과 서까래만 박아가며 나아가는 형국이다. 비우므로 해서 오히려 다음을 더 기대하게 하고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 소리, 그래서 마셔도 마셔도 질리지 않는 신선한 샘물 같은 소리가 바로 이동백의 판소리이다.
송만갑은 완벽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어느 정도 수치까지의 완성도가 있고 어느 정도 감지가 되는 화려한 기교를 많이 구사하기 때문에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어느 선까지는 사실 모방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동백은 매우 즉흥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기분에 따라서 소리가 아주 잘 될 수도 있고 기대 이하일 때도 있고 실수가 약간씩 있어 완벽하다고는 볼 수가 없으나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즉흥성이 매우 강하고 기량을 가늠하기가 사실 어렵다.
또 많은 기교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만큼 소리를 높이 확 질렀다가 갑자기 비행기 추락하듯이 뚝 떨어뜨린다든가, 엇박자나 붙임새를 약간 쓴다든가 하는 아주 단순하다 할 정도로 몇가지 기교 뿐이다.
그렇지만 굉장히 감정 조절이 좋아서 소리에 감정이 잘 실린다. 또 미세한 음색의 변화와 조절에는 많은 신경을 쏟는다. 그렇기 때문에 기교로 달려들면 속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황당할 정도로 도저히 비슷하게라도 되지가 않는다. 아주 쉬울 것 같은데 모방해 보면 잘 안되는 정체를 알기가 어려운, 그 깊이와 높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송만갑은 비교적 제자가 많았지만 반면에 이동백은 성격이 괴팍하여 제자들이 그 밑에서 버텨내질 못한 게 아니라 추앙하는 사람도 많고 배우려 하는 이도 많았고 이동백 또한 열심히 제자를 가르치려고 노력했으나 어느 누구도 도저히 그 그림자 조차 따르지 못하여 변변한 제자를 남기지 못했고 그 독특한 소리는 결국 맥이 끊기고 말았다. 물론 공식 제자는 몇 명 있고 이동백 소리제를 하기는 했으나 대체로 이동백과 유사하게 하지는 않았다.
약간의 실수는 타인에게 호감을 준다는 심리학자의 말에 필자는 전적으로 공감을 한다. 완벽하리 만큼 빈틈없는 명창 송만갑이 난 사실 무섭고 얄밉기까지 할 때가 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는가 싶다. 접신의 경지에서 날라 다니는 송만갑이 물론 경이롭지만 그래도 약간은 엉성한 이동백 쪽에 더 애정이 갈 때가 있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소리 재산을 죽을 때까지 애지중지 고수했던 판소리 거부 김창룡은 자식도 많았다. 허나 법통있는 소리를 제대로 물려받지 못한 자수성가한 명창 이동백은 자식이 거의 없었다. 판소리 인간문화재 한승호 명창의 증언에 의하면 이동백은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다고 한다.
이동백은 이런 상반된 상황 까닭에 김창룡과 이따금 다툼이 있었다. 체격 좋은 이동백이 외소한 김창룡과 말다툼이라도 나면 김창룡의 아들 여럿이 빙 둘러 서서 김창룡을 보호했고 이때마다 이동백은 서글픈 눈물만 흘려야 했다.
1913년에 송만갑 등이 일본축음기상회(NIPPONOPHONE)에서 판소리를 녹음하였고 그후 1915년 이동백, 김창환 등이 미국 빅타음반회사에서 판소리를 취입했다.
미국 빅타음반회사에서 1915년 한국 음악을 취입한 김창환, 이동백, 김봉이, 박팔괘, 엄계월 등은 거의 모두 같은 시기 조선구파배우조합 소속의 국악인들인데 김창환, 이동백은 각각 조선구파배우조합의 서열 1,2순위였다.
그리고 이 단체와는 거의 별개로 독립적인 성격으로 활동한 송만갑은 1913년 음반 취입 당시 자신의 이름을 단 협률사 생활을 했기에 아들 송기덕과 함께 단체 섭외가 아닌 스타 초빙 형태로 발탁되어 일축 녹음에 참여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5명창으로 꼽히는 김창환, 이동백, 송만갑이 당시 유성기음반을 녹음한 계기는 바로 이와 같이 소속 단체와 당시 활동 분위기의 영향이 컸던 것이라고 하겠다.
아주 오래전 명창들에 대한 평가 기준은 대체로 아주 멀리까지 소리가 들렸다든가, 매우 크고 매서운 호랑이 성음을 냈다든가, 우렁찬 소리 진동으로 인해 방안의 문고리가 흔들렸다든가, 폭포수 소리를 뚫고 힘차게 질렀다든가 하는 부분에 초점이 많이 맞추어졌다.
마이크나 스피커 같은 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소리를 멀리까지 힘차게 내질러야 했기 때문에 잔기교는 부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옛날 호걸제나 덜렁제와 같이 힘차게 질러대는 소리가 나왔을 것이고 그런 소리제가 야외 소리판에서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따라서 옛 명창들은 붙임새나 장단 공부보다는 소리를 우렁차게 내지를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하는 데 가장 주력했을 것이다. “권오성의 원담소리, 방덕희의 우레목통, 조관국의 한거성”이라고 한 [게우사]의 기록과 “모흥갑의 덜미소리는 십리 밖까지 들렸다”는 [조선창극사]의 기록이 그런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근대 명창들까지 구사, 존재했던 통성이라는 것이 결국 그러한 점과 맥을 같이 한다.
김명환이 증언한 이날치 소리가 어디까지 들렸다, 송만갑이 소리하고 나면 천장에서 먼지가 다 떨어졌다, 장판개가 소리를 하면 방안의 문고리가 흔들렸다는 것도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동백의 장기인 호령조 성음도 바로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할 것이다. 김명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바 있다.
“장판개 것은 바닥은 감찰(송만갑)하고 같은 바닥인디 맛이 달체. 가다가다 반드름 하나쓱 넣어 갖고 소리가 싱금한 듯싶어도 끝 조직이 창창 안한가? ···(중략)··· 말씨럴 또록또록 안놓고 건너뜀서 한디, 그것보고 반드름 소리라고 한다. 옛 더늠이시. 착 늘여갖고 끄트머리에 가서 탁 털어 뿐 놈 이것이 반드름이시. 배에다 탁 실어서 탁 떨어뿐 그놈 밑으로 내가 들어갔네. 이걸 반드름 실음이라고 하지. 장단은 맞지만 치기가 안서툰가.”
한승호는 반드름 소리가 중고제라 하였다. 결국 한승호와 김명환의 증언을 종합하면 중고제가 오래 전의 판소리라는 얘기고 이런 점들로 보아 장판개는 송만갑보다 고형의 동편제, 즉 중고제에 가까운 동편제를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장판개가 송만갑(신동편제)보다는 이동백(중고제+동편제)을, 그리고 정응민(고제에 가까운 동편제)의 소리를 높게 인정했다는 김명환의 증언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김명환의 증언에 의하면 정응민의 첫 스승은 이동백이고 그런 만큼 정응민제에 이동백 더늠이 많이 들어있다고 한다. 따라서 다른 명창의 소리를 별로 칭찬하는 일이 드물었다는 장판개의 취향은 거의 이동백만을 향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하겠다.
요즘은 판소리 아니리는 반드시 전라도 사투리로 해야만 맛이 난다고 하는 통념이 있다.(1998년 1월 국악인 신영희, 김혜란 방송 인터뷰 등 참조)
하지만 일제 때까지만 하더라도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어감의 판소리가 주류를 이루었다. 서울을 중앙무대로 하였고 지금처럼 아니리를 진한 전라도 사투리로 일관하는 것도 아니었고 경제 아니리가 큰 줄기를 차지하고 있었다. 5명창이 그랬고 그 후배들도 대다수는 그랬다.
어전광대가 판소리의 본맛을 위해선 그 전라도 말투가 필수기에 왕 앞에서 요즘처럼 심하게 전라도 아니리를 했다고 하는 건 설득력이 없다. 더욱이 요즘처럼 쌍스러운 욕이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고 하겠다.
왕이 아니더라도 사대부 혹은 전라도가 아닌 다른 지방 서민들 앞에서도 타지역 사람에겐 간혹 의미 전달까지 잘 되지 않는 전라도 사투리를 일부러 꼭 썼다고 하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또한 과거에 전라도 판소리만 있었던 건 아니고 경기, 충청, 경상도 지역에도 각기 그 지역의 언어를 기반으로 한 판소리가 분명 있었으니 더욱 그러하다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창 또한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전라도 음악어법에 의한 판소리만 있는 게 아니었고 그것이 지금처럼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도 않았다. 불과 몇 십년 사이의 일인데도 말이다. 이러한 판소리 아니리, 노래의 변화 모습이 음반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원로 국악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동백, 송만갑 등은 생전에 아니리를 별로 하지도 않았고 간혹 하더라도 극히 절제되고 점잖은 몇 마디 꼭 해야 할 말만 하였다 한다. 이들의 녹음에도 그렇게 담겨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5명창들과 마찬가지로 이동백, 송만갑 역시 사투리로 아니리를 하지 않고 서울 말씨로 했음을 녹음으로서 확인할 수 있다.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확실한 건 송만갑과 정정렬이 신식 개량 소리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긴 호흡을 가지고 소리하고 감상했던 전통적인 분위기는 많이 사라진 게 사실이다. 이는 한면에 3분 정도밖에 담아내지 못하는 유성기음반과 고작해야 최대 몇 십분 정도 소리할 수 있었던 일제시대 방송의 시간 제약 때문이기도 하다.
전통음악에 대해 차츰 관심이 사라지고 있던 일제시대 단 몇 분 안에 자신의 역량을 극대화시켜서 보여줘야 했던 명창들의 생존 몸부림 결과가 그러했던 것이다.
이를 두고 국악학자 이혜구 박사는 이동백이 오래하면서 신명을 내는 데 비해 송만갑은 아리아같이 짧은 소리를 잘했다고 평가하였다. 박기홍 명창은 그런 송만갑에 대해 장타령 아니면 염불을 한다며 명문 자손으로 전래 법통을 붕괴한 패려자손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긴 호흡으로 장시간에 걸쳐 판소리를 끌고 나가면서 세밀한 표현보다는 굵은 기교만 가지고 소리를 해나가는 전통사회의 고박한 판소리 분위기는 동편제의 거장, 가선으로 불린 박기홍에 대한 [조선창극사]의 기록에서 잘 엿볼 수 있다.
김명환은 송만갑의 소리가 동편제인데 바닥은 계면조 위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송만갑이 시대에 순응하는 소리를 했다는 것, 극도로 자극적이고 통속화의 길로 흘렀다는 것, 장타령 아니면 염불을 한다며 혹평받은 것, 이 모든 판단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 것은 바로 그 계면조 위주로 소리를 했다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이동백의 경우는 우조 위주로 했지만 송만갑은 대중의 기호에 맞춰 지나치게 계면조의 비중을 늘렸고 이런 송만갑의 소리가 당대 기호에는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는데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비판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명환은 그런 송만갑의 소리를 가리켜 ‘계면이 주인’이라고 말하였다.
송만갑을 비롯한 5명창의 수제자들-앞세대의 절륜한 기예를 가장 제대로 물려받은 장판개, 박봉래, 김정문, 김록주 등이 요절, 월북 등으로 스승 만큼 장수하지 못하고 소리판에서 너무 일찍 사라지는 바람에 전통의 맥이 많이 단절되었다. 결국 20세기 전반과 중반 격동기를 거치고 후반기까지 극적으로 살아남은 몇몇 명창 가운데 온전하게 판소리 다섯바탕을 할 줄 아는 이 조차 아주 극히 적은 숫자가 됐다.
이동백의 수제자 강장원 역시 장수하지 못하고 1962년 53세로 작고하고 말았다. 참고로 이동백은 강장원을 비롯해서 정응민, 정광수, 정남희, 김석구, 백점봉, 김차돈, 임유앵, 조영학 등에게 소리를 가르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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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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