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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 음반 100년사 -유성기음반과 장시간음반 시대를 중심으로(1)-
20세기 한국 음반 100년사 -유성기음반과 장시간음반 시대를 중심으로(1)- 2000년 5월 2일


음반(音盤)은 음(音)의 기록물로서 소리를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재생해서 들을 수 있는 편리한 발명품이다.

음반은 1877년 에디슨에 의해 처음 발명되었다. 음반이 처음 발명될 당시에는 원통형 음반이었고 나팔통이 달린 유성기로 재생했다. 그후 원통형 음반은 평판으로 발전했다. 평판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는 레코드 프레스 기술이 부족하여 한쪽 면에만 소릿골을 새기고 뒷면은 소릿골을 내지 못한 일명 쪽판이 생산되었다.
초기 음반 취입 방식은 나팔통에 대고 녹음하는 기계식이었고 그후 마이크가 발달하면서 전기식 녹음으로, 모노에서 스테레오와 디지털로 발전을 거듭했다. 그리고 음반 매체도 유성기음반에서 장시간음반과 콤팩트디스크로 점차 발달되어 왔고 오디오 또한 빠른 속도로 개발되었다.

오늘날 음반은 소리뿐 아니라 영상과 활자까지도 저장할 수 있는 기록물로 발전했다. 음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달되자 이제 음반은 책이나 다른 어떤 기록 매체보다도 다양한 정보를 생생하게 담을 수 있는 기록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래서 음반은 이제 음악 외에도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기록 매체로서 대접받고 있다.

얼마전까지 국내에서는 음반에 관한 연구가 학계의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다행히 10여년전부터 이보형이 주축이 된 한국고음반연구회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이 방면의 연구를 주도해 왔고 그에 따라 고음반의 중요성이 많이 부각되고 있다.

한국의 음반 산업은 서양 문화를 일시에 소화할 수 밖에 없었던 개화기와 일제시대에 시작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음반산업은 출발부터 우리 나름대로의 고유한 음반 문화를 가꾸어 나가지 못했고 외국인의 손에 의해서 좌우되었다.

한국인이 남긴 음반 가운데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전 녹음은 1896년 미국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취입한 에디슨 원통형 음반이다. 이는 1998년 4월 25일 미국에서 내한한 학자 로버트 프로바인(Dr. Robert.C.Provine)이 “미국에 보존된 19세기 말의 한국음악”이란 글과 함께 공개한 자료이다.(노재명, “정가 음반사” 『제9회 한국음반 전시회 학술대회-안내인쇄물』 서울:한국고음반연구회, 1998.9.29, 6쪽) 이 진귀한 음반들 속에는 <아리랑>, <매화타령>, <자장가>, <달아 달아>, <애국가> 등이 수록되어 있다.(국악음반박물관 노재명 소장 국악 녹음테입 관리번호 MIMC-0972/복사본)

한국인 녹음이 담겨있는 최초의 음반 상품은 1907년 미국 콜럼비아음반회사에서 발매된 쪽판이다. 이때 발매된 한국 음반은 모두 국악으로서 경기 명창 한인오(韓寅五)와 관기(官妓) 최홍매(崔紅梅)의 민요, 가사, 시조 등 수십장이다. 당시에는 음반이 거의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서 팔렸기 때문에 그때 취입된 음악은 주로 서울에서 인기있었던 경기민요이다.

1908∼1910년에는 미국 빅타음반회사에서 여러 국악 음반을 냈다.
1900년대 후반에 미국 콜럼비아와 빅타에서 유성기음반을 취입한 국악인은 거의 대부분 원각사에서 활동한 민속악 명인들인 것으로 보인다.

190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진출한 미국 음반회사들은 일본에서 녹음하고 미국에서 음반을 생산하여 한국에 수출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소수의 한국음악 음반만을 제작하다가 얼마 못가서 한국 음반 제작에서 손을 뗐다.

당시 미국 음반회사들이 입은 일시적인 적자는 길게 봤을 때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 음반회사들이 이처럼 세계 곳곳에 뿌려놓은 음반 문화의 씨앗은 훗날 미국 팝송 음반이 전세계를 장악하는 데 큰 뿌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라를 빼앗긴 1910년 직후 일본 음반회사인 일본축음기상회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이 일본 회사는 미국 음반회사보다 거리상으로 우리나라와 가까웠을 뿐만아니라 한일강제합병으로 여러가지 조건이 유리했다. 일본축음기상회는 이런 여건을 충분히 살렸고 한국을 점차 황금의 음반시장으로 바꿔 나갔다.

일제 때 우리나라 문화예술인의 음반을 제작한 회사는 거의 대부분 일본 음반회사였다. 그 대표적인 음반회사로는 일본축음기상회(독수리표 로얄레코드 NIPPONOPHONE 쪽판 양면판, 남대문표 닙보노홍 닛뽀노홍, 일축조선소리반 와시표 적반, 콜럼비아(정규반 고급 청반 리갈)를 비롯해서 일동축음기주식회사(제비표조선레코드 NITTO), 합동축음기주식회사(비행기표조선소리판), 빅타(정규반 주니어 대중반 특별반), 폴리도르, 오케이, 시에론, 태평레코드(다이헤이 기린 킹레코드), 밀리온(고라이)과 같은 회사들이 있었다.

이밖에도 돔보조선레코드(잠자리표), 쇼지쿠레코드, 코리아레코드, 뉴코리아레코드, 리베라레코드, 시스터레코드, 케이아이레코드, 디어레코드, 금조인특허레코드와 같은 회사들이 1930년대부터 광복 때까지 약간의 한국문화예술 음반을 제작했다.(노재명, “한국음반사” 『핫뮤직 1992.11 통권 25호』 서울:마인기획, 76∼82쪽)
일본축음기상회는 1911년부터 광복 때까지 레이블을 여러번 바꿔가며 한국 관계 음반을 냈다. 1911년에 독수리표 로얄레코드(NIPPONOPHONE) 쪽판, 1913년에 독수리표 양면판, 1920년대 초반에 남대문표 닙보노홍과 닛뽀노홍(독수리표의 재판), 1925년에 일축조선소리반 와시표, 1928년 미국 콜럼비아와 합작한 후에는 콜럼비아(정규반 흑반)로, 1929년에 일축조선소리반 적반(이글레코드 대중반), 1933년에 콜럼비아 고급반(청반), 1934년에 리갈(대중반)로 레이블을 변경하며 한국 음반을 발매했다. 그리고 일본축음기상회(이하 ‘일축’)는 일본음악 음반번호체계로도 한국 관련 음반을 발매했다. 이 회사는 1911∼1927년에 기계식, 1928∼1945년에는 전기식으로 음반을 취입했다.

1911년 일축에서 제작된 음반(독수리표 로얄레코드 NIPPONOPHONE)에는 판소리와 가야금의 명인 심정순, 경서도 명창 박춘재, 문영수, 김홍도, 피리 명인 유명갑 등의 녹음이 담겨있다. 모두 국악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1913년 일축에서 취입된 음반(독수리표 NIPPONOPHONE)에는 판소리 명창 송만갑과 그의 아들 송기덕, 경서도 명창 박춘재, 문영수, 이정화, 정가 명창 조모란, 김연옥, 태평소 명인 한응태, 그리고 기독교청년회, 성대묘사 명인 구승현의 녹음 등이 수록되어 있다. 모두 중요한 녹음으로 평가된다.

1915년에는 미국 빅타음반회사에서 판소리 명창 김창환, 이동백 등의 음반이 제작되었다.

1920년대 초반에는 경서도 명창 김일순, 김연연, 박채선, 이류색, 유운선, 조국향, 한부용, 남도 명창 강남중, 신옥란, 신진옥, 신연옥 등이 일축(닙보노홍)에서 음반을 취입했다. 이 시기 음반은 대부분 민요를 장기로 하는 기생들이 녹음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계속>

2000년5월2일


200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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